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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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22 14:05
물빛 31집에 실을 원고입니디 이재영
돌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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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엔들 잊으리)
눈 감으면 보입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이
맑은 강에는 은어 떼 놀고
하얀 백사장엔 물새알, 조약돌
들메 선산엔 소나무 숲, 금잔디 동산
대문 앞에 기다리는 어머니의 얼굴이
꿈엔들 잊으리, 그 속에 함께 놀던 친구들
살구꽃 피는 마을 진달래꽃 꺾어들고
버들피리 불면서 산과 들 강변으로
뛰어놀던 옛동산
그 때 그 벗들
지금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부모 형제도 먼 길 떠나고
피리 만든 그 버들, 옛 피던 살구꽃도
사라지고 없건만
지금도 고향 가면 다정다감 하구나
어릴 때 그 벗들 모두 함께 모여
맑은 강 푸른 물에 몸과 마음 씻으면서
지나온 희비의 삶 이야기 풀어놓고
밝은 달밤 지새우며 옛날 같이 살고 파라
( 누가 보낸 선물)
추석 선물로 보내온 그는
첫 알 낳기 직전 씨암탉 자태
따가운 햇볕 받아먹고
둥근 가시 집 속에 속살 채우고
청청한 치마 둘러 감춘 집
이젠 황록색 금빛으로 갈아입고
문 빨쪽이 열고 미소 짓는다
익은 석류 알보다도 더 영롱한 그
천하일색 뽐내며
수줍어수줍어 교태부리는
얼굴 빨갛게 익는다
그놈 뚝 따서 속 알 파내면
터질 듯 풍만한 육체
옷 홀랑 벗기면 노란 속살,
통째 삼키고 싶다
아쉽게도 그는 먹을 수 없는 그림의 떡
책상 앞에 걸어놓고 두고두고 아름다움
눈요기로 빈 가슴 채우리라
( 강 )
강이 흐릅니다
마음속에 흐르는 그리움의 강
가슴에서 출발, 콩팥 창자 심장으로
돌고 돌며 얼마나 흘러가야 멎을까
세월의 강은 흘러
가는 길 종착역으로 달려가고 있건만
그대 향한 기다림의 강은 언제가야
흐름이 끝이 날까
그대와 나 전생에 무슨 빚 그리도 쌓여
이승에서도 다 갚지 못해 그 빛 청산 위해
기약도 없는 이 한밤에도 기다린다
한 때나마 뜨겁게 불태운 우리의 정이
불장난이 안이었건만
제 자리로 돌아간 후 어떻게 지내는지
세월의 강은 흘러
가는 길 서산에 노을 지는데
마음속에 흐르는 강은 언제 가야 멎을까
(사자평에서)
산들바람에 춤추는
억새꽃밭은
파도치는 망망한 바다
그 위로 날며
빙글빙글 멤을 돌다가
나래 사뿐 접고 앉아
꿈을 꾸는 물새가 된다
노을빛 내려 타는 저녁바다
잔잔한 물결 속에
안기면 아늑한 둥지
흔들리는 요람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꿈을 꾸는 물새가 된다
( 고독(孤獨) )
섬마을 외딴 농막 옆
주변이 숲으로 싸인 호숫가
초원에 사슴 한 마리
눈은 호수
뿔은 높은 이상
사랑의 사자(使者)인 양
나의 전신을 울린다
빠질 듯 늘린 목
높이 세운 채
제 족속 그리는 고독 씹으며
향내 진동하는 벅찬 향수 삼킨다
그놈 물속 제 그림자 보자
눈빛 빛나며 다가가다가
이내 눈 돌리면서 먼 곳 하늘을 본다
*수필 두 편
(글씨는 얼굴이다.)
돌샘 이재영
예로부터 글씨는 마음의 표현이요 얼굴이라 했다. 팬 글씨보다는 모필(毛筆)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붓은 잡는 순간부터 마음이 흔들리면 글씨를 쓸 수 없다. 점하나, 획 하나를 긋는데도 정신을 하나로 집중시키고 온 힘을 붓끝에 모아 점을 찍고, 획을 그어야 점과 획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옛 명필들이 써 놓은 글씨를 보면 살아서 생동하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삼십 대 초에 봉강(鳳剛)서실에서 대구의 서예 대가인 소헌(素軒) 김 만호(金萬湖) 선생 문하생이 되어 글씨 공부를 한 적이 있다. 그분의 말씀이 누가 갑자기 붓을 힘껏 잡아당겨도 빼앗기지 않을 정도로 붓을 꽉 잡고, 정신은 붓끝에 집중시키고 글씨를 써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명필의 글씨는 칼로 베면 피가 뚝뚝 흐른다고 하셨다. 글씨에는 그 사람의 정기(精氣)와 혼이 살아있기 때문이라 한다.
나 같은 필부야 감히 흉낸들 낼 수도 없지만, 정신만은 본받고 싶다. 글씨를 쓸 때는 모든 것을 다 잊고, 정신은 온통 붓끝에 모은다. 그래서 더위도, 추위도, 슬픔도, 기쁨도 느끼지 못한다.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정성을 다 하여 글씨를 담아내야 한다. 그 속에 작가의 정신과, 인품이 담기고 그 사람의 얼굴이 담기게 된다. 모든 것이 그 속에 녹아 있기 때문에 글씨를 보면, 사람을 안 보아도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다. 그만큼 글씨 속에는 작가의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인품과 품위, 마음까지도 담겨있는 거울이라 하리라.
모든 일이 다 기초가 잘 닦아져야 하지만 글씨도 그렇다. 글씨는 획이 기본이다. 글자는 획의 집합체이다. 획이 잘 되면 글자 모양은 그 획을 맞추면 되니 저절로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획을 바르게 긋지 못하면서 글자를 잘 꾸미고 미화하려고 애쓴다. 나도 처음에는 글자를 꾸미려고 애썼다. 참 어리석은 짓이었다. 획이 마음대로 안 되는데 글자모양이 바로잡힐 리 없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의 글씨와 명필의 글씨는 획에서 차이가 난다. 그 획이 살아있고 죽은 것 그 차이다. 나도 공모전에 참가한 후 그것을 알았다.
나는 공모전 작품을 만들 때 체 본을 받지 않는다. 책이 가장 좋은 스승이요 체 본이기 때문에 책을 보고 나 스스로 만든다. 뜻이 좋고 마음에 드는 글씨로 선택한다. 글씨체 본을 잘 만들었다 해서 글씨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글씨 속에 혼을 불어넣어야 생동한다. 그렇게 만드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몸과 정신을 가다듬고 온 힘을 붓끝에 모아, 빠르고 느리게, 힘을 더하고 빼면서, 굵었다가 가늘면서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글씨가 생동한다. 또 물 흐르듯 춤을 추기도하면서 붓을 멈추어 힘을 모우기도하면서 중단 없는 일필로 마쳐야 살아 움직이는 글씨를 쓸 수 있다.
글씨 속에는 작가의 의지와 혼이 담기고, 작가의 얼굴과 인품까지 담아야 좋은 글씨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글씨는 마음의 거울이요 그 사람의 얼굴이라고 한다. 잘 된 글씨는 좋은 산수경치를 보는 듯 볼수록 아름답다. 잘 못된 글씨는 쓴 본인도 곧 싫증이 난다. 내가 쓴 글도 잘 된 것은 언제 읽어도 항상 새롭다. 마찬가지로 내가 써놓고 내가 감동하지 못하는 글은 남이 감동할 리 없다. 내가 쓴 글씨를 내가 만족하지 못할 때 남이 칭찬할 리 없는 것과 같다.
작품글씨는 써놓고 적어도 이 글씨는 그냥 두기에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들도록 표현했을 때 큰 상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그럴 때 그 글씨는 마음의 거울이요, 그 사람의 얼굴로 영원히 살아있으리라. 이런 글씨 는 그 사람의 정기와 혼이 살아 숨 쉬니 칼로 베 면 피가 흐르지 않으리.
( 지리산 제 1경)
돌샘 이재영
초, 중등학교 교사와 대학교수, 교육청장학관 등으로 구성된 지리산 식물 탐사대가 탄생했다. 5년째 휴식을 하는 심원계곡에 식물을 채집하여 생태계가 어떻게 살아나고 있는지 조사하기 위해서다.
탐사대는 관광버스 일곱 대에 나누어 타고 07시에 교육청을 출발하여 지리산 심원계곡으로 향했다. 잔뜩 찌푸린 날씨는 염려했던 것처럼 도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곰취 나물이 비를 맞아 물기가 뚝뚝 흐르며 반짝이면서 오늘 점심 입맛을 당긴다.
여관에 들러 여장을 풀고 카메라와 중요장비는 배낭에 두고 헌 옷 갈아입은 후 우의를 걸쳤다. 전지가위와 비닐 부대를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심원계곡은 5년째 휴식상태로 있는 계곡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여 깨끗하다. 소나기가 쏟아져서 멈추기를 기다렸지만, 비는 그치지 않아 빗줄기 속에 일행들은 출발했다.
A팀은 산행에 익숙한 10여 명이 계곡을 따라 노고단에 오르면서 채집을 하러 먼저 출발했다. 나도 그쪽에 매력이 있었으나 장맛비가 심하게 내려 계곡을 피하고 노고단 능선 따라 안전하게 오르면서 채집하는 B팀을 따라나섰다. 많은 사람이 비 내리는 속에서 채집하니 덥지 않고 시원하여 오히려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나 앞이 캄캄해지며 번갯불이 옆에 튄다. 벼락 치는 듯 우르르 쾅쾅쾅 지축을 뒤흔드는 천둥소리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진다. 물 천지가 되며 앞이 보이 않는데 회오리바람이 또 세차게 몰아친다. 불안하여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숨을 죽인 채 자세를 낮추고 기다렸다. 조용해지면 조금씩 움직여 채집을 하며 비와 사투를 벌였다. 희귀종 식물이 나타나면 끝까지 쫒아 가서 채집한다. 나는 내년 퇴직기념으로 이번에 스스로 참가신청을 했기에 더 열심이었다. 많은 종류의 식물을 채집하여 그 이름과 생태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비바람과 사투를 벌리면서 두 시간이 지나서야 노고단에 당도했다. 주차장에는 우리를 태울 버스가 이미 와서 기다렸다.
채집한 부대를 차 안에 두고 밖으로 나가니 일렬종대로 줄을 선다. 짙은 안개로 캄캄하여 앞사람만 따라 노고단으로 향했다. 소나기는 그쳤지만,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안개로 앞사람의 형태만 보일 뿐 얼굴은 알 수가 없다. 완경사 평탄한 길을 앞만 보고 조심조심 한 시간을 올라가니 노고단 정상에 도착했다. 갑자기 안개가 활짝 걷히며 내리던 비가 여우비로 바뀐다.
솜과 같이 하얀 구름 사이로 파란 호수처럼 맑은 하늘이 얼굴에 물방을 뚝뚝 흘리면서 열리더니 해맑은 해가 생글 미소 짓는다.
내려다보니 골마다 운무가 바다를 이루고 거기서 솜과 같은 구름을 조각조각 토한다. 그것이 산 위로 날면서 꽃으로 피는가 싶더니 수만 마리의 학이 되어 수십 행렬을 이루고 물이 뚝뚝 흐르는 청산 위를 수놓으면서 반야봉 위로 날아오른다. 그 뒤로는 이산과 저 산을 잇는 거대한 무지개가 활짝 솟는다. 모두 함성을 지르면서 일시에 손뼉을 자르르 친다. 순간에 일어나는 환상적인 광경에 “여기가 바로 천국이구나!” 하고 감탄을 쏟아놓는다. 나는 저처럼 웅장하고 큰 무지개와 아름다운 학의 행렬을 본 적이 없다. 독일의 유명한 어느 시인은 “무지개를 보고 가슴 설레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한 말이 실감이 난다. 저 비경을 나는 신의 예술이라 부르고 싶다. 이것이 지리산의 십 경(十 景) 중 제 일경, “노고단의 운해.”란 것을 직감했다
지리산을 평생 오른 등산가도 저 신의 예술을 본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나 나는 오늘 단 한 번에 노고단의 운해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요, 이 번 행사에 값진 보람이라 하리라. 새신부가 아름다운 한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생사를 건 진통을 참고 견뎌야 한다. 오늘 나와 우리 동료들이 노고단의 신비경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뇌우 속에 비바람과 사투를 벌였기 때문이리라. 무엇이던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은 없으며 한 가지 성공은 또 다른 성공을 낳는다는 것을 오늘 깨닫고 실감했다.
밤에는 교수님들의 식물에 대한 연구 발표와 표본제작 강의를 듣고, 실물환등기를 통해 낮에 채집한 식물을 보며 이름을 조사했다. 일반 환등기로는 산새의 생김새를 보고, 녹음한 울음소리와 연계하여 새의 종류를 구별했다. 과학교사들이 채집연수를 기피하나 나는 지원했다. 현장 연수 없이 책으로 동식물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식물채집연수를 통해 많은 식물을 알게 되었고 아름다운 산과 신비경을 구경한 것은 큰 소득이다.
인간이 크고 작은 일을 성취하려면 그만한 노력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교훈을 깊이 깨닫는다. 오늘 나의 우중체험과 겪은 고통이 인생행로의 역경을 타개하는 길잡이가 되리라. 또 완성한 식물채집은 학교에 남아 후세들 교육에 길이길이 이바지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