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태조 입북(入北)
태조 차자 정종(定宗)에게 전위하시고 상왕(上王)으로 계시더니 방원으로 인하여 아들 삼형제 방간 방석 방번이 다 방원의 칼에 죽었으니 태조의 마음이 자연 원망이 없을 수 없다. 아들 삼인이 다 비명에 죽음은 실로 원통한 일이다. 태조의 방원에 대한 악감은 씻을 수 없는 일이다.
정종 원년에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그 후에 또 동북면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시니 태종에 도승지 박석명(朴錫命)을 보내어 그 안부를 물으니 태조 때에 안변부에 계신지라. 박석명이 돌아와 아뢰되 태조 그 곳에 오랫동안 유하실 뜻이 계시다 품 함에 태종이 다시 상왕이 신임하시는 창녕(昌寧) 부원군(府院君) 성석린(成石璘을 보내어 속히 모셔 오시도록 아뢰니 상왕이 아직도 마음에 분이 풀어지지 않으셨다고 돌아와 아뢰었다.
그 이듬해 11월에 상왕이 밤에 가만히 왕궁을 나아가 소요산(逍遙山)에 오셔서 산 밑에 별전을 지으시고 계시다가 다시 또 동북으로 들어가셔서 철영을 넘어 함흥에 가서 계시니 그때 동북면 조사의(趙思義) 난(亂)이 있어 상왕의 신변이 위태할까하여 다시 상왕이 가장 신임하시는 무학선사를 보내어 속히 돌아오시도록 아뢰니 전한 말에 들으면 무학이 상왕의 마음을 아는지라. 새끼가 젖을 뗀 암소를 타고 가서 문밖에 매고 들어가 상왕을 뵈이니 그때 암소우는 소리가 가장 처량한지라.
상왕이 무학에게 물으시니 소가 새끼를 생각하고 운다 아뢰니 상왕이 측은히 깨달으시고 돌아오시기로 정하시고 상경하시는 도중에 들에 장막을 치고 상왕을 영접하는데 하륜이 왕께 말하되 상왕의 노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니 장막차일 한가운데 큰 나무를 세워 만일을 피하소서.
왕이 차일한 가운데 대목(大木) 고주(高柱)를 세웠더니 태조 과연 멀리 태종을 보고 동궁(彤弓) 백우전(白羽翦)으로 쏘거늘 태종이 기둥에 의지하여 화를 면하니 태조 웃으시며 화살을 거두시고 이것이 천의라 하시고 국새(國璽)를 던지며 하시는 말이 네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니 가지라 하시니 태종이 눈물을 흘리며 세 번 사양한 후 국새를 거두었다.
태조 함흥에 계시는 동안 문안사를 보내었으나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는 이가 없었고 오직 무학선사의 정성으로 모시고 오게 되었다. 소요산으로 오실 줄 알고 지금의 정부에 정부를 설립하고 기다리었으나 황해도 평산 방면으로 거쳐서 풍덕으로 오시었다. 지금의 정부의 이름이 그때부터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