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 3막18장 (5부)
"포니"
국내 최초로 개발한 자동차 모델이다.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자동차 생산국가 가 된것이다.
내가 1979년1월29일 보통1종 면허증을 획득하고 가장 먼저 만난 놈이기도 하다.
추후 포니2,엑셀,스텔라,소나타,그랜저, 아반테,소나타2,싼타페,제네시스등 수많은 현대차 모델이 후속타로 개발되고 시판되었다.
포니는 국민차가 되였고, 전국민들에게 자부심과 희망을 안겨준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국내 택시업계도 국민차 탄생에 힘입어 더한층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포니는 수동식4단 차이며 요새 운행되는 모든것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
유리창문도 수동으로 열어야 하였고, 에어콘을 장착할시는 실내 조수석 밑에 오픈형으로 설치하여
조수석 앉기가 무척 비좁았다.
그리고 파워핸들이 아니어서 핸들 돌리기가 힘들었고, 타이어도 쥬브가 들어간 일반 타이어를 사용하였다.
그래도 그당시에는 자동차 구매가 넉넉치 않았다.
내가 포니를 잊지 못하는 것에는 파란색상에 부활된 " 서울 ○○ 7887"차량이 생각나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신차를 구입하지 않고 박주임 정비공을 시켜 폐차장에서 본체를 조달하고 부품가게서 부품을 구입하여 포니차를 조립해 차량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요사이 말하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울산 현대자동차도 아니고 일개 정비공이 폐차장에서 부품을 조달하여 차를 완성하리라곤 상상도 못할일이었다.
그랬다.
그당시 차량은 초보적인 부품으로 완성된 차량이었다.
요사이 차량처럼 전자식이나,반도체가 들어가 있지 않은 가장 미약한 결정체 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폐차장에서 부품을 조달하여 만든 7887호 차량은
우리가족의 보물1호가 되였다.
경춘가도를 달리기도 하고 워커힐도 달렸고 북악스카이웨이도 달렸다.
1990년도까지 포니는 30만대 .포니2의 36만대 판매를 시판하고 스텔라한테 바턴을 넘겨준다.
추후 내가 낙성대입구에서 한국타이어 대리점을 할시는 "포니픽업"의 내이름으로 등록된 자동차가 생겨 마이카의 꿈을 이루어 전국을 누비고 다니기도 하였다.
포니는 정비지식이 전무한 내가 카부레다를 조정하여 수리할 정도였다.
한번은 강화도에서 차량이 멈추어 난감해 할때 무심코 본넷트를 열고 퓨즈하나 갈아줘도 차량은 움직였다.
그랬다.
포니는 최소한 필요한 부속으로 만들었고 누구나 슆게 탈수 있는 자동차였던 것이다.
온 국민에게 사랑을 받은 포니.
포니는 나의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적토마였고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충견이 되였다.
그렇게 포니는
우리와 한가족이 되여 살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