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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7장 1절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말은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6장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6:9)고 하시면서 기도의 내용을 가르치신 바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공관복음서 어디에서 나와 있지 않습니다. 반면 오늘부터 보게 되는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셨는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시작된 유월절 전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부터 시작된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13장부터 16장까지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17장은 말씀하신 바가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구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장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말씀 안에도 보면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4장 13절과 14절에 보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도 말씀하시는데,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6장에서는 23절과 24절입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종합적으로 이해하자면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라는 것이고, 구하기만 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있으면 된다는 게 아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 자로서 내 이름으로 구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참된 신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것인데,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응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무엇인가? 일단 예수님은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이후로는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계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으로서는 기도를 받으시는 분으로 계시지만, 사람으로서는 기도를 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주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6:9)라고 부를 때 성부만을 부르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이때 아버지는 피조물의 근원으로서의 아버지입니다.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 성령,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이사야 9장 6절에서 분명하게 언급하는데, 거기 보면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성자가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다면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도, 성령도 피조물의 근원인 아버지로서 기도를 받으시는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셨기에 사람으로서는 기도를 하시는 분으로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중보자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보자 없는 인간은 늘 죄인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게는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보자가 필요한 것은 결국 죄인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이 아닙니다. 죄가 없으십니다. 점과 흠도 없으십니다. 부족한 것이 전혀 없으십니다. 당연히 중보자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럼 죄인도 아니고, 점과 흠도 전혀 없는, 부족한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부께 모든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서도 예수님은 성부가 주체임을 늘 나타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인성으로서 기도하신다고 할 때는 어떠하겠습니까? 당연히 그가 주체이심을 드러내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다는 것은 결국 아버지의 영광을 그런 방식으로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기도의 본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에게 죄가 있거나 점과 흠이 있거나 부족한 것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시고, 그 뜻을 따라 한 치의 오차 없이 나아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기도를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분이시지만 기도하십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친히 기도의 본을 보이심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늘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사역을 하시고 난 뒤 시간이 될 때 늘 기도하기 위하여 따라 한적한 곳을 찾으셨는데, 그런 본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이상 무엇 하나 우리 스스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에서부터 왔습니다. 또한 우리는 흙(티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선하게 만드셨지만 타락했습니다. 그런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한 것을 주시지 않는 이상 어떤 선도 내놓을 수 없습니다. 신자일지라도 그렇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기도하여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기도를 가르치시고, 기도의 내용을 직접 알려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5절까지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6절에서 19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셔서 따르게 하셨던 그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20절부터 26절까지는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예수님 자신을 위해 기도했다고 해서 우리와는 상관없고,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제자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해서 그들만을 위한 기도의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기도의 내용은 우리가 교훈 받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이지만 기도의 내용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칼빈은 요한복음 17장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이것으로 그 가르침 자체가 확인될 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서명(seal)과 같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히 한 개인이 기도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겁니다. 앞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 그 가르침과 다르지 않는 내용을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다시금 가르치시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1절 상반부를 보시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뒤 기도하셨다는 것인데, ‘이 말씀’은 13장에서부터 16장까지의 말씀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내용들인데, 소위 고별강화라고도 합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발을 씻기시는 것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발을 씻기신 모두가 끝까지 사랑하시는 대상은 아니라는 것도 알리셨습니다. 사도로 택하여 세우셨지만 그 가운데는 택자만 있는 게 아니라 유기자도 있다는 것을 알리셨던 겁니다. 그리고 발 씻기신 본을 가지고 너희도 서로 이렇게 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떠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떠난다고 해서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은 떠나지만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 너희로 하여금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열매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있을 박해를 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고 난 뒤 제자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하신다고 해서 말씀만으로 그들이 설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 저들을 붙드시고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저들이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되도록 만들겠다는 말씀도 반복해서 하셨던 것입니다. 더불어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도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전하신 이후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에 들어가기 앞서 예수님의 기도 모습을 묘사하는데,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칼빈은 이것을 ‘비상한 열정에 대한 표시’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 있다는 표요, 지상적인 차원에서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상적인 차원에서 기도하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표라는 것입니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면 하나님만을 바라본다, 하나님만 소망한다는 의미에서 하늘을 우러러 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충만히 계시지만 자신의 영광과 위엄, 또한 자신의 권능을 나타내실 때 하늘에 계시다는 것으로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주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할 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단지 장소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과 위엄과 권능이 그만큼 높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만을 바라본다,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항상 이런 모습으로만 기도하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마26:39).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죽음을 앞두시고 기도하실 때 이렇게 기도하셨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세리의 기도도 나오는데, 그의 기도 모습은 이렇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눅18:13a)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어서, 그만큼 자신이 부족하고 점과 흠이 많아서, 한 마디로 죄인이라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확증되는데, 세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b)
결국 기도의 자세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런 외적 모습이 내적 마음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모양의 기도 모습을 받으신다고 할 때 거기에는 단지 외적 모습만이 아니라 그런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내적 마음이 함께 동반될 때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16:7b)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모릅니다. 그래서 외모를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까지도 살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때 중심을 보신다고 해서 외적 모습은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 이상의 것이 의식에 표현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마음과 함께 외적인 것도 경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중 더 중요한 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외적 자세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마음과 함께 외적 모습도 중요하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날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그분의 권능을 바라보고 소망한다는 의미에서 반드시 하늘을 우러러 봐야 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우리 자신을 고백할 때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고 머리를 숙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칼빈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 마음에 있는 것 이상의 것이 의식에 표현될 수 없다’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경외하는 자라면 단순히 “마음만 있으면 됐지!”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주의를 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12장 1절은 이렇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몸은 전인을 말합니다. 몸과 함께 마음까지라는 의미입니다. 그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을, 우리의 전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기도하시되, 가장 먼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1절 하반부입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간단히 말하면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때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본체의 영광, 즉 피조물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원래부터 영광 가운데 계시며, 그 자신이 영광스러우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같은 피조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더라도 영광스러우신 분이십니다. 그 영광에 무엇을 더해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요, 무한하시며, 변치 않는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기 35장 6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욥35:6-8) 우리가 범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악행이 가득하다고 해서 하나님께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늘 본래 계셨던 그대로 계실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의롭다고 해서 하나님께 보탬이 되거나 유익이 되거나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존재 방식 상 많아지거나, 작아지거나, 커지거나, 적어지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불변하다는 것은 우리가 의롭다고 해서 그에게 뭔가를 보내거나 유익하게 하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른 성경 구절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과의 관계를 따라 하시는 말씀이요, 성경이 말하는 두 번째 영광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대부분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영광을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그 본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가감도 없지만, 지금 읽은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의미, 즉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의 기도는 두 번째 의미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가 피조물은 아니지만,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 달라는 순서로 되어 있어서 자신의 영광을 먼저 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아버지의 영광은 허울 좋은 말 뿐이요, 목적은 자신의 영광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예수님의 행보에 따라 생각하자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내용과는 대조적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번 시험 잘 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올해 수능 잘 보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좋은 대학 가게 해 주시고, 좋은 직정 가게 해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적으로만 보자면 지금 예수님의 기도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돌아보셔야 합니다. 만약 자신이 잘 되는 것, 그래서 자신의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지금 예수님의 기도와는 대조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기도는 이런 기도가 아닙니다. 자신을 영화롭게 해 달라는 것 때문에 뒤에 나오는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희석되거나 오해되기 쉽지만, 지금 예수님의 기도의 목적은 아버지의 영광에 있습니다. 철저히 아들인 자신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위해 아들인 자신도 아버지처럼 영광스럽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신 자신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광이라는 말 때문에 잘 되는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신자인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되는 쪽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이런 쪽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는 거기에는 전제가 붙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그리고 때가 이르렀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가 이르렀는데,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마태복음 5장을 언급했지만 마태복음 5장의 경우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면, 지금 요한복음 17장은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자신이 죽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할 때는 그의 죽음과 함께 부활과 승천, 심판주로 오실 것까지를 다 담고 있습니다. 비하의 신분만이 아니라 승귀의 신분까지가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때가 이르렀다는 것은 죽임이 임박했다는 것이고, 그런 죽음이 반드시 있어야지만 부활도, 승천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해 달라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잘 되는 방향으로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요, 죽음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 그렇게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이 없다면 자기 백성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자들의 구속과 하나님 자신과의 화목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셔야 하는데, 그것이 지금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 보시면 죽음을 앞두고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데, 구체적인 기도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는 것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하는 것이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께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통만이 아니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실제로 받는 것은 아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보여주기 식으로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쇼’를 하고 계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받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곧바로 어떻게 기도합니까?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입니다. 나는 싫지만 십자가가 아버지의 뜻이고, 십자가를 통해 자기 백성이 유익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우리더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각, 쉽게 말해 세상적인 면에서 잘되는 것, 남부럽지 않게 되는 것 등의 내용이 아니라, 철저히 나의 원대로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되는 거기에 영광의 내용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착한 행실, 달리 말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것을 마땅히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멸시를 받고, 때로는 버림받기도 하며, 어떤 때는 목숨까지 내놓아야만 하는, 세상이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일 수 있다는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길을 가도록 하심으로 하나님 자신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시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길을 가셨습니다. 자신이 죽음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그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뿐입니까? 성경의 많은 제자들도 이러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1장을 보십시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11:36-37) 물론 이 말씀 앞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11:33-34)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부분입니다.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는 등 뭔가 있어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만, 이와 반대로 있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으로 조롱을 받고 채찍질 당하고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을 받는 것, 이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걸어가고자 하시는 길이 이 길입니다. 이 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 4절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란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다시 말해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모든 일을 결정하고 모든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만을 했다는 겁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 5장에서 말한 내용도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그러나 고난과 죽음도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고난 당하는 것,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것, 이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성수 때문에 세상적인 시각에서 더 좋은 회사를 거절하고 덜한 쪽으로 선택하는 것, 세상은 어리석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장사를 하는데 술과 담배를 팔지 않으면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 때문에 그것을 거절하고 많이 남지도 않는 장사를 하는 것, 세상은 어리석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간혹 연예인들을 보면 예수 믿는데도 배역으로 들어왔다는 것 때문에 악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무당 역할을 하는 것도 보게 되는데, 성경은 어떻게 가르칩니까?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직업으로서 배우 일을 하지만 배우를 하면서도 지켜야 할 규범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규범을 지키면 잘 나가는 배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역할, 저런 역할을 다 합니다. 그리고는 연말에 상을 받으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까?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잘 나가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잘 나가지 못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19절부터 보시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5:19-21) 여기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니 나도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버지께서 아니 하시면 나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통해 드러내고 계신 것은 바로 이런 정신입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 이하도 보시면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요5:30-32) 동일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모든 내용으로 펼쳐 보이고 계시다는 겁니다.
이런 정신이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나고 있고, 마태복음의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만을 구한다는 것이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까지 지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다 내 쪽에서 결정하고 결정한 바를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자기 부인이 없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십자가 정신이 없습니다. 순종이 없고, 믿음이 없습니다. 어떤 결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원한다면 과정 또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자기를 부인함으로, 십자가를 짊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정신 아래 오로지 세상적인 성공, 세상적인 높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착각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으면 하나님도 나를 인정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지 않으면, 그리고 말씀 때문에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쳐 복종시키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앞서 주일성수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주님만이 우리를 다스릴 수 있도록 하루를 온종일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내 미래를 위해 이 시험만큼은 봐야 하는데, 그 시험을 치는 날이 주일입니다. 그러면 많은 부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번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합격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한 번도 앞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이유로 과정은 무시해도 좋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사고방식을 거스르지 못합니다. 아니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꿈을 말하고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성경은 그것을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내 실력, 내 노력도 궁극적인 원인이 되지 못합니다. 노력하지 말라,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요,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해서 내 실력, 내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만 맡기고 그 결과로 가는 과정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잠시 광야를 지나가게 하시면 광야에서의 삶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 인생의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자신이 영광을 받을 때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는 줄로만 압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예수님께서 그 기도의 자세를 통해 보여주신 것처럼 인생의 목적이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동일한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만 거하는 것, 그분이 주시는 말씀이라는 양식만을 먹고 마시는 사는 삶,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을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제1문.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 문답 속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박국 3장 마지막에 나오는 구절로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조금 더 넓게 보자면 2문으로 답할 수 있습니다. 제2문.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지도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규범(規範)을 주셨습니까? 답.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지도하기 위한 유일한 규범은 신구약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은 영광을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충분히 영광스러우신 분이십니다. 실체에 대해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영광을 우리 기준에서, 세상 기준에서 이렇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높이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전혀 우리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영광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노예로 팔려오게 되었을 때도, 또한 그가 억울하게 죄인이 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단지 함께 하신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분으로 계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잘 되는 쪽이 아니라 그럿지 못한 경우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두시고, 철저히 하나님의 뜻만이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과 다른 뜻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늘의 뜻은 계시 된 말씀으로 분명히 나타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7장 1절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말은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6장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6:9)고 하시면서 기도의 내용을 가르치신 바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공관복음서 어디에서 나와 있지 않습니다. 반면 오늘부터 보게 되는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셨는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시작된 유월절 전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부터 시작된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13장부터 16장까지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17장은 말씀하신 바가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구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장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말씀 안에도 보면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4장 13절과 14절에 보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도 말씀하시는데,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6장에서는 23절과 24절입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종합적으로 이해하자면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라는 것이고, 구하기만 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있으면 된다는 게 아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 자로서 내 이름으로 구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참된 신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것인데,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응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무엇인가? 일단 예수님은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이후로는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계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으로서는 기도를 받으시는 분으로 계시지만, 사람으로서는 기도를 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주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6:9)라고 부를 때 성부만을 부르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이때 아버지는 피조물의 근원으로서의 아버지입니다.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 성령,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이사야 9장 6절에서 분명하게 언급하는데, 거기 보면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성자가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다면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도, 성령도 피조물의 근원인 아버지로서 기도를 받으시는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셨기에 사람으로서는 기도를 하시는 분으로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중보자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보자 없는 인간은 늘 죄인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게는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보자가 필요한 것은 결국 죄인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이 아닙니다. 죄가 없으십니다. 점과 흠도 없으십니다. 부족한 것이 전혀 없으십니다. 당연히 중보자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럼 죄인도 아니고, 점과 흠도 전혀 없는, 부족한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부께 모든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서도 예수님은 성부가 주체임을 늘 나타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인성으로서 기도하신다고 할 때는 어떠하겠습니까? 당연히 그가 주체이심을 드러내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다는 것은 결국 아버지의 영광을 그런 방식으로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기도의 본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에게 죄가 있거나 점과 흠이 있거나 부족한 것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시고, 그 뜻을 따라 한 치의 오차 없이 나아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기도를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분이시지만 기도하십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친히 기도의 본을 보이심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늘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사역을 하시고 난 뒤 시간이 될 때 늘 기도하기 위하여 따라 한적한 곳을 찾으셨는데, 그런 본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이상 무엇 하나 우리 스스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에서부터 왔습니다. 또한 우리는 흙(티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선하게 만드셨지만 타락했습니다. 그런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한 것을 주시지 않는 이상 어떤 선도 내놓을 수 없습니다. 신자일지라도 그렇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기도하여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기도를 가르치시고, 기도의 내용을 직접 알려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5절까지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6절에서 19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셔서 따르게 하셨던 그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20절부터 26절까지는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예수님 자신을 위해 기도했다고 해서 우리와는 상관없고,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제자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해서 그들만을 위한 기도의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기도의 내용은 우리가 교훈 받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이지만 기도의 내용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칼빈은 요한복음 17장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이것으로 그 가르침 자체가 확인될 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서명(seal)과 같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히 한 개인이 기도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겁니다. 앞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 그 가르침과 다르지 않는 내용을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다시금 가르치시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1절 상반부를 보시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뒤 기도하셨다는 것인데, ‘이 말씀’은 13장에서부터 16장까지의 말씀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내용들인데, 소위 고별강화라고도 합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발을 씻기시는 것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발을 씻기신 모두가 끝까지 사랑하시는 대상은 아니라는 것도 알리셨습니다. 사도로 택하여 세우셨지만 그 가운데는 택자만 있는 게 아니라 유기자도 있다는 것을 알리셨던 겁니다. 그리고 발 씻기신 본을 가지고 너희도 서로 이렇게 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떠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떠난다고 해서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은 떠나지만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 너희로 하여금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열매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있을 박해를 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고 난 뒤 제자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하신다고 해서 말씀만으로 그들이 설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 저들을 붙드시고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저들이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되도록 만들겠다는 말씀도 반복해서 하셨던 것입니다. 더불어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도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전하신 이후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에 들어가기 앞서 예수님의 기도 모습을 묘사하는데,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칼빈은 이것을 ‘비상한 열정에 대한 표시’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 있다는 표요, 지상적인 차원에서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상적인 차원에서 기도하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표라는 것입니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면 하나님만을 바라본다, 하나님만 소망한다는 의미에서 하늘을 우러러 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충만히 계시지만 자신의 영광과 위엄, 또한 자신의 권능을 나타내실 때 하늘에 계시다는 것으로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주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할 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단지 장소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과 위엄과 권능이 그만큼 높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만을 바라본다,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항상 이런 모습으로만 기도하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마26:39).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죽음을 앞두시고 기도하실 때 이렇게 기도하셨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세리의 기도도 나오는데, 그의 기도 모습은 이렇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눅18:13a)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어서, 그만큼 자신이 부족하고 점과 흠이 많아서, 한 마디로 죄인이라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확증되는데, 세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b)
결국 기도의 자세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런 외적 모습이 내적 마음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모양의 기도 모습을 받으신다고 할 때 거기에는 단지 외적 모습만이 아니라 그런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내적 마음이 함께 동반될 때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16:7b)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모릅니다. 그래서 외모를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까지도 살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때 중심을 보신다고 해서 외적 모습은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 이상의 것이 의식에 표현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마음과 함께 외적인 것도 경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중 더 중요한 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외적 자세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마음과 함께 외적 모습도 중요하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날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그분의 권능을 바라보고 소망한다는 의미에서 반드시 하늘을 우러러 봐야 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우리 자신을 고백할 때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고 머리를 숙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칼빈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 마음에 있는 것 이상의 것이 의식에 표현될 수 없다’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경외하는 자라면 단순히 “마음만 있으면 됐지!”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주의를 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12장 1절은 이렇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몸은 전인을 말합니다. 몸과 함께 마음까지라는 의미입니다. 그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을, 우리의 전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기도하시되, 가장 먼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1절 하반부입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간단히 말하면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때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본체의 영광, 즉 피조물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원래부터 영광 가운데 계시며, 그 자신이 영광스러우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같은 피조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더라도 영광스러우신 분이십니다. 그 영광에 무엇을 더해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요, 무한하시며, 변치 않는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기 35장 6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욥35:6-8) 우리가 범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악행이 가득하다고 해서 하나님께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늘 본래 계셨던 그대로 계실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의롭다고 해서 하나님께 보탬이 되거나 유익이 되거나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존재 방식 상 많아지거나, 작아지거나, 커지거나, 적어지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불변하다는 것은 우리가 의롭다고 해서 그에게 뭔가를 보내거나 유익하게 하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른 성경 구절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과의 관계를 따라 하시는 말씀이요, 성경이 말하는 두 번째 영광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대부분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영광을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그 본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가감도 없지만, 지금 읽은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의미, 즉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의 기도는 두 번째 의미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가 피조물은 아니지만,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 달라는 순서로 되어 있어서 자신의 영광을 먼저 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아버지의 영광은 허울 좋은 말 뿐이요, 목적은 자신의 영광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예수님의 행보에 따라 생각하자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내용과는 대조적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번 시험 잘 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올해 수능 잘 보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좋은 대학 가게 해 주시고, 좋은 직정 가게 해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적으로만 보자면 지금 예수님의 기도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돌아보셔야 합니다. 만약 자신이 잘 되는 것, 그래서 자신의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지금 예수님의 기도와는 대조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기도는 이런 기도가 아닙니다. 자신을 영화롭게 해 달라는 것 때문에 뒤에 나오는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희석되거나 오해되기 쉽지만, 지금 예수님의 기도의 목적은 아버지의 영광에 있습니다. 철저히 아들인 자신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위해 아들인 자신도 아버지처럼 영광스럽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신 자신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광이라는 말 때문에 잘 되는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신자인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되는 쪽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이런 쪽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는 거기에는 전제가 붙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그리고 때가 이르렀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가 이르렀는데,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마태복음 5장을 언급했지만 마태복음 5장의 경우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면, 지금 요한복음 17장은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자신이 죽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할 때는 그의 죽음과 함께 부활과 승천, 심판주로 오실 것까지를 다 담고 있습니다. 비하의 신분만이 아니라 승귀의 신분까지가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때가 이르렀다는 것은 죽임이 임박했다는 것이고, 그런 죽음이 반드시 있어야지만 부활도, 승천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해 달라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잘 되는 방향으로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요, 죽음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 그렇게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이 없다면 자기 백성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자들의 구속과 하나님 자신과의 화목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셔야 하는데, 그것이 지금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 보시면 죽음을 앞두고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데, 구체적인 기도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는 것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하는 것이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께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통만이 아니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실제로 받는 것은 아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보여주기 식으로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쇼’를 하고 계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받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곧바로 어떻게 기도합니까?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입니다. 나는 싫지만 십자가가 아버지의 뜻이고, 십자가를 통해 자기 백성이 유익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우리더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각, 쉽게 말해 세상적인 면에서 잘되는 것, 남부럽지 않게 되는 것 등의 내용이 아니라, 철저히 나의 원대로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되는 거기에 영광의 내용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착한 행실, 달리 말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것을 마땅히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멸시를 받고, 때로는 버림받기도 하며, 어떤 때는 목숨까지 내놓아야만 하는, 세상이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일 수 있다는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길을 가도록 하심으로 하나님 자신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시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길을 가셨습니다. 자신이 죽음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그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뿐입니까? 성경의 많은 제자들도 이러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1장을 보십시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11:36-37) 물론 이 말씀 앞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11:33-34)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부분입니다.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는 등 뭔가 있어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만, 이와 반대로 있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으로 조롱을 받고 채찍질 당하고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을 받는 것, 이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걸어가고자 하시는 길이 이 길입니다. 이 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 4절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란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다시 말해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모든 일을 결정하고 모든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만을 했다는 겁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 5장에서 말한 내용도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그러나 고난과 죽음도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고난 당하는 것,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것, 이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성수 때문에 세상적인 시각에서 더 좋은 회사를 거절하고 덜한 쪽으로 선택하는 것, 세상은 어리석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장사를 하는데 술과 담배를 팔지 않으면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 때문에 그것을 거절하고 많이 남지도 않는 장사를 하는 것, 세상은 어리석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간혹 연예인들을 보면 예수 믿는데도 배역으로 들어왔다는 것 때문에 악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무당 역할을 하는 것도 보게 되는데, 성경은 어떻게 가르칩니까?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직업으로서 배우 일을 하지만 배우를 하면서도 지켜야 할 규범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규범을 지키면 잘 나가는 배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역할, 저런 역할을 다 합니다. 그리고는 연말에 상을 받으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까?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잘 나가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잘 나가지 못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19절부터 보시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5:19-21) 여기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니 나도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버지께서 아니 하시면 나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통해 드러내고 계신 것은 바로 이런 정신입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 이하도 보시면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요5:30-32) 동일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모든 내용으로 펼쳐 보이고 계시다는 겁니다.
이런 정신이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나고 있고, 마태복음의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만을 구한다는 것이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까지 지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다 내 쪽에서 결정하고 결정한 바를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자기 부인이 없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십자가 정신이 없습니다. 순종이 없고, 믿음이 없습니다. 어떤 결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원한다면 과정 또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자기를 부인함으로, 십자가를 짊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정신 아래 오로지 세상적인 성공, 세상적인 높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착각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으면 하나님도 나를 인정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지 않으면, 그리고 말씀 때문에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쳐 복종시키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앞서 주일성수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주님만이 우리를 다스릴 수 있도록 하루를 온종일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내 미래를 위해 이 시험만큼은 봐야 하는데, 그 시험을 치는 날이 주일입니다. 그러면 많은 부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번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합격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한 번도 앞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이유로 과정은 무시해도 좋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사고방식을 거스르지 못합니다. 아니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꿈을 말하고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성경은 그것을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내 실력, 내 노력도 궁극적인 원인이 되지 못합니다. 노력하지 말라,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요,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해서 내 실력, 내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만 맡기고 그 결과로 가는 과정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잠시 광야를 지나가게 하시면 광야에서의 삶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 인생의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자신이 영광을 받을 때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는 줄로만 압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예수님께서 그 기도의 자세를 통해 보여주신 것처럼 인생의 목적이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동일한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만 거하는 것, 그분이 주시는 말씀이라는 양식만을 먹고 마시는 사는 삶,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을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제1문.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 문답 속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박국 3장 마지막에 나오는 구절로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조금 더 넓게 보자면 2문으로 답할 수 있습니다. 제2문.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지도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규범(規範)을 주셨습니까? 답.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지도하기 위한 유일한 규범은 신구약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은 영광을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충분히 영광스러우신 분이십니다. 실체에 대해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영광을 우리 기준에서, 세상 기준에서 이렇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높이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전혀 우리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영광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노예로 팔려오게 되었을 때도, 또한 그가 억울하게 죄인이 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단지 함께 하신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분으로 계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잘 되는 쪽이 아니라 그럿지 못한 경우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두시고, 철저히 하나님의 뜻만이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과 다른 뜻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늘의 뜻은 계시 된 말씀으로 분명히 나타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