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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철학, 역설의 미학
김종희의 수필세계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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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철학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수필가 김종희를 철학과 연관시키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작품 속에서 종횡무진 다루는 제재가 거의 철학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변을 다루고 일상의 이야기를 화소로 한 수필 어느 하나도 철학적인 물음을 놓지 않는 게 없다. 그만큼 작가는 명실 공히 대학원에서 한국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미술사학자이면서도, 예술철학에 일가견을 가진 작가다. 이는 김종희의 사이미학이 단순히 특정한 작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고대 철학자들의 ‘철학’에 대한 신념처럼, 그녀는 철학을 인간의 삶과 문화 등, 우리의 일상과 수필에 접목시켰다. 인문학적인 사유로 수필을 쓰는 수필가로서, 그녀의 수필은 한마디로 철학수필에 가깝다. 수필가로서의 사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존재의 사유고, 다른 하나는 되기의 사유다. 이 ‘되기’의 사유야말로 다움의 세계요, 실재의 세계다. 김종희 수필가의 의식과 관련하여 철학을 접맥할 수 있는 가능성은 ‘빈빈문화원장’이라는 작가의 이력이 말해준다. 수필을 쓰는 사람 중에서 문학생산자로서 ‘소수자-되기’의 수필가가 있다면 바로 김종희가 아닐까.
들뢰즈는 문학을 ‘차이를 가치화하는 저항담론’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기존의 사회적 통념, 일반적 상식, 미학적 감흥에 저항하며 한 시대를 소수자로서 무의식적으로 사는 사람만을 작가라 불러야 할 것 같다. 서양미술사학을 전공한 김종희는 신춘문예를 통해서 수필문단에 나왔고, <나는 날마다 신화를 꿈꾼다>라는 첫 수필집을 내고 난 후, 오랜 시간을 자신의 의식을 갈고 닦아, 관찰과 고찰, 통찰과 성찰 즉 사찰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사상에 뜸을 들인 후 두 번째 수필집을 낸다. 수필집 제목도 근사하다. <돌탑에 이끼가 살아있다>다. ‘돌탑’은 무슨 의미며, 또 ‘이끼’는 무슨 상징인가, 독자들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은 사고의 방향타로서 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첫수필집과 두 번째 수필집간의 간격이 왜 이렇게 많이 벌어졌느냐 의아해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책을 내면서’에 나오는 그녀가 좋아한다는 ‘소사나무’의 유추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뿌리가 품은 그 숭고한 생의 열정과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깊이를 작품 속에 담고’ 싶어서다. ‘나무가 견디어 온 세월이 거뭇한 주름으로 겹쳐지고, 옹이가 되어 앉은 그 융숭 깊은 세월’을 기다려왔기 때문이리라.
작가에게서 통상적인 삶의 형태란 어떤 것인가. 수필가의 경우는 다른 장르와 사뭇 다르다. 전업작가가 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문학 한 길에 엄정하거나 단호하지 못한 것이다. 작가라는 이름에 앞서는 다른 직업으로서의 이름을 걸어놓고 세상 속에서 만나지는 것들의 보이지 않는 이면이나 속을 후벼 파서 다른 객관적 상관물로 치환하는 것이 수필가의 일이 아닐까. 삶을 삶답게 헤쳐 나가며 나를 나답게 하는 사람은 드물다. 말과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뜻대로,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면서 격렬하게 살기는 어렵다. 남과 다른 관점을 유지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면서, 특수한 체험을 특수한 언어로 말하면서 현실을 살아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여자의 이름으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김종희는 여느 여성작가와 다르다. 자신의 삶으로 자신의 호흡으로 자신의 판단과 기준으로 산다. 세계에 부딪치면서 당연한 것에 회의를 제기하며, 경계에 서서 늘 의문을 토해낸다. 이제 텍스트 분석을 통하여 김종희 수필의 핵심적 질료인 ‘역설과 경계’에서 피어나는 손맛과 눈맛을 탐구해 보기로 하겠다.
II. 김종희 수필의 손맛과 눈맛
1. 수필은 너무나 철학에 가깝다
- 문학은 어불성설이다
작가는 상식이나 상투적 감성에 호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온몸으로 저항해야 하는 사람이다. 김종희는 사유의 경직성에 대항하여 자유를 구가하고자 한다는 차원에서 저항적이다. 문학이 ‘어불성설’이라는 말은 김지하가 했다. 동시에 김종희 말이기도 하고, 평자의 말이기도 하다. 왜 어불성설인가. 문학은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해야 하고, 객관적인 것을 주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가지고 사실대로 쓰면 안 되고, 상상력으로 문학화해야 한다. 칸트는 ‘감각적 다양성을 수용해서 하나의 상을 형성하는 능력’을 상상력이라 하였다. 문학적 상상력에 관한 정의로 이보다 명쾌하고 탁월한 정의는 없는 것 같다. 문학의 원리는 ‘이것’을 ‘저것’으로 하는 치환원리다. 인식논리상 ‘이것’을 ‘저것’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모순인 것이다. 소재에 대한 비유창작은 ‘교술’이란 개념화로는 풀어낼 수 없다. 수필도 시와 마찬가지로 ‘서정’ 장르에 넣어야 할 것이다. 구성적 비유란 시적 발상 없이는 창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학원리는 인식론적으로 보면 이처럼 역설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문학적 논리에 대입시키면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수필이 있다. 바로 김종희의 수필이다.
그녀가 수필 속에서 부르짖고자 하는 메시지의 옷은 바로 역설이다.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만들어야 독자를 공감대에 세울 수 있고, 감동의 고지로 몰아갈 수 있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사물의 ‘그것’은 ‘그것’이어야 하고, ‘특수한 것’은 ‘특수한 것’이어야 하고, ‘보편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존재론적으로 사물을 보면 수기나 작문이 될지언정 문학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김종희는 인식론적인 관점으로 사물을 본다. 대상 앞에 선 작가는 누구나 초월론적 현상학적 주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독락>이란 첫 작품에 주목한다. 이 수필의 발단부는 역설로부터 시작한다. ‘여행은 휴식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휴식이 아니다.’라는 진술이 그렇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개부에 가면, 작가는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는 모순은 곧 진리가 되기도 한다.’라고 했다. 수필이 요리라면, 이런 역설은 연상과 상상을 통한 미적 사유로 독자를 유도할 수 있는 조미료다. 반어나 역설에 가까운 김종희의 진술은 작품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녀는 문학원리가 전달차단성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이다. 수필의 생명이 문장임을 명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락당에 가면 객관화 혹은 물아일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아니 독락이라는 말 속에서 사유의 무한한 자유를 전해 받는다. 즐긴다는 것은 세속적인 유희의 개념을 넘어선다. 즐긴다는 것은 대상과 하나 된다는 의미이며, 이는 자연과 친화하며 나아가 세속의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독락이란 어쩌면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은 아닐까.
-<독락> 일부
김종희 수필에 나타난 미학성과 철학성을 구조시학으로 분석하려는 데는 그녀가 일단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고, 학부는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대학원에서 한국미학과 미술사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모든 대상은 보편성과 개별성의 변주를 지니는데, 그것을 변증법적인 통일을 통해서 특수성의 형태로 범주화할 때 생성되는 양식이 바로 예술이다. 평자는 여기서 이들의 정체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위의 인용된 예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작가는 ‘즐긴다’는 것의 의미를 탐색하는데, 그 의미를 통상적인 ‘세속적 유희’에서 찾지 않고, 더 나아가 논의를 ‘대상과 하나 된다’는 객관화에까지 끌고 가서, 다시 ‘자연과의 친화’로 나아갔다가 ‘세속의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규정한다. 여기까지가 정-반이라면, 다시 역설의 논리를 가져와서 독락은 ‘어쩌면’이란 부사를 완충장치로 하여 다시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 아닐까 하면서 ‘합’의 형식을 취한다. 이런 정반합의 논리로 ‘즐기는 것’의 개념을 규정한 작가는 ‘여행’과 ‘독락’을 접합시킨다. 논리구조적 관점에서 그녀의 언어는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인 언어적 특성을 갖는다. 시어의 과장성이나 소설의 장광설과도 거리를 두며, 독자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공명전략으로서 로고스를 잘 활용하고 있다.
궁중음악을 들을 때도 그랬다. 아악을 들을 때면 들리지 않는 것의 존재에 대하여 보다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음과 음 사이에 존재하는 시공간의 개념, 한 번 현을 뜯고 다음 현을 뜯을 때까지 이어지는 가야금의 여음은 들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마지막 획의 종지부를 가늠할 수 없는 붓처럼 연주자의 유위(有爲) 속에 끌어들인 무위(無爲)는 동(動) 속의 정(靜)이 아닌가.
명묵, 그것은 구별이 사라지고 마침내 물아무간(物我無間)의 순간에 만나는 적요이다. 일상 너머 또 다른 일상을 만나는 순간, 언어 너머의 의미를 만나는 때, 어쩌면 그 순간을 만나기 위해 나는 날마다 길을 나서는지도 모르겠다.
-<명묵> 일부
<명묵>에서 작가는 ‘순간의 감동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기록을 한다. 시인은 표표히 흐르는 감성을 문자언어로 기록하고 화가는 조형언어로 순간을 담아낸다. 그 결과 만들어진 예술은 삶의 반영이며 이는 또 긴 시간을 이어가는 문화원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문화원형으로서 예술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며, 그 속에는 당대의 미적이상이 담긴다.’라고 적고 있다. 그녀의 예술론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수필의 구성방식은 주제의 형상화와 작가의 설득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작가는 ‘뭇사람들의 가슴에 잔잔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 순간을 명묵의 경계에 이르는 시간’이라 부르고자 한다. ‘마지막 획의 종지부를 가늠할 수 없는 붓처럼 연주자의 유위(有爲) 속에 끌어들인 무위(無爲)는 동(動) 속의 정(靜)이 아닌가.’라는 진술 속에도 역설적 논리가 유영한다. ‘유위’ 속의 ‘무위’, ‘동’ 속의 ‘정’ 등의 언술은 ‘물아무간’이란 사자성어로 귀착되는 ‘일상 너머의 또 다른 일상을 만나는 순간’을 이미지화한다. 그 ‘순간’을 만나기 위해 날마다 길을 떠나면서 그녀는 수필 속에 격조 높은 역설의 형식을 깔아둔다.
역설이란 철학을 담아내는 논리적 소통방식이 아닌가. 이런 역설적 소통은 변증법적 합일을 통해 독자에게 이심전심의 심리적 공감을 안겨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권두언에서 작가가 언급했던 ‘경계’가 다시 이 수필에서 등장한다. ‘틈으로 스며드는 은밀한 힘은 경계에 설 때마다 낮은 소리로 도란거리’듯이, 무릇 삶은 흔들릴 때 성숙한다는 그녀의 주장이다. 그녀는 명묵의 순간에, 세상의 구분과 구별은 비워지고 마침내 어둠으로 채워진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참으로 탁월한 인식이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지나치게 분석지향적 사고, 분석만능주의적 사고에 젖어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이전에 거의 모든 것을 분석하고 분해해왔다. 그런데 전체를 분석하고 분해해 버리면 대상을 다시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작가는 이런 점을 적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분석하고 분리하기 이전에 분석하려는 개체나 부분이 전체와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분석과 분해는 아무런 이해를 도모하지 못하는 것이다. 작가는 오히려 분리가 거듭될수록 대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는 불리하다고 말한다.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의 질서가 무의미해지는 그 순간은 일체의 관념을 초월한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관계처럼, 그 순간은 ‘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이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입장이다. 이루어짐과 이지러짐, 끝도 아니고 시작도 아닌 경계는 예측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준다는 미학자 김종희의 주장이다. 이런 역설의 논리는 수필 <비경을 찾다>에서도 이어진다. 이 글의 발단부 역시 예술론으로 시작한다. ‘추상의 세계를 구체화하고 때로 관념의 세계를 형상화한다. 그 순간 비경은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시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재해석의 과정을 통해 승화되기도 한다’고 적고 있다. 전개부에 가면, ‘삶이 아닌 예술이 어디 있으며, 예술 아닌 삶이 어디 있으랴. 인간의 몸은 시간의 한 부분이면서 전체이기도 하고 암각화 또한 긴 역사의 한 부분이면서 한 시대의 전체이기도 하지 않는가.’라며 ‘개전일여’의 사상을 드러낸다. 결말부에서 가서는 ‘비경’을 ‘눈물’로, ‘열정’ 같은 것으로 의미화했다가 다시 ‘깊은 공짜기의 울림’으로 치환해서, 그 울림을 비상의 원인으로 삼는다. ‘비경’을 ‘비상’과 동일시하는 공명전략은 탁견이라 하겠다. ‘유’이기도 ‘무’이기도 식의 어조를 패턴화하는 것은 경계를 찾아가고자 하는 그녀의 철학적 입장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어머니의 얼굴에도 이끼가 앉았다. 사람들은 이끼 같은 검버섯을 저승꽃이라고 부른다. 저승꽃이라 부를 때 검버섯은 삶의 외곽으로 밀려난 느낌을 준다. 저승꽃이라는 말 속에는 지극히 일상적인 정경들이 사라진 우울한 냄새가 배여 있다. 그것은 자꾸만 허무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래서 나는 저승꽃을 돌탑에 앉은 이끼 같은 것이라고 주문을 걸어 본다. 이끼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 시간의 퇴적위에 움 터는 생동이기 때문이다.
<돌탑에 이끼가 끼어 있다> 일부
작가는 <고인돌 루트>를 따라 삶과 문화의 족적을 좇아가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주를 담고 있는 돌의 암호 같은 흔적을 해석하는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감성이 비늘처럼 일어선다고 고백하고 있다. 작가는 ‘대상의 형태를 자유롭게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상상으로 정신의 절대자유’를 누린다. 다시 또 고인돌을 보면서, 특유의 역설 언어를 쏟아 붓는다. ‘물아무간’의 순간에 만나는 ‘적요’, ‘명묵’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면서 고인돌로부터 ‘죽음은 주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여기서도 역설의 언어는 빛을 발한다. 이끼를 돌탑의 진물, 돌탑의 언어로까지 승화시키는 작가는 돌탑에다 어머니의 얼굴을 오버랩시킨다. 저승꽃이라는 우울한 냄새가 배어있는 얼굴의 이끼에서 지난 시간의 퇴적 위에 움트는 생동을 느낀다. 이 즈음에서 역설의 미학이 또 피어난다. 이끼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라는 진술이다. 작가는 이끼를 ’숱한 시간에 곰삭은 결, 대상과 육화됨으로써 감동을 주는 돌탑에서 어머니를 떠올린다. 돌탑에 이끼가 살아있다는 진술을 통해 어머니를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로 격상시키기까지 한다. 체험에서 체험, 기억에서 기억으로 이어지는 누적되는 시간의 역사는 영원성의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것이다. 탑과 얼굴, 이끼와 검버섯의 대조전략이 매우 돋보인다. 심오한 통찰을 통해 획득한 심미적이고 철학적인 깨달음이 압권이다.
2. 수필은 너무나 개성적이다
- 유니크한 숨결과 칼라
작가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만의 유니크한 숨결과 칼라를 갖추는 일이다. 왜냐하면 수필은 개성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명작은 제재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통찰과 그 결과의 감동적인 미적 배열, 그리고 설득력을 지닌 개성있는 수사전략 등의 상호작용에서 태어난다. 구조와 문장의 상호작용이 원활하지 못하면 미적 울름은 현저히 약화되는 법이다. 철학성과 미학성의 조화 속에서 생성되는 미적 감동은 그녀의 개성에서 나온다. 우리 문학계에서 자신의 ‘칼라’를 뚜렷하게 갖춘 작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칼라는 단순히 작가가 가진 자기 특유의 숨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다수와 확실히 구분되거나 다른 개인의 사상적 특성, 인생관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김종희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은 느끼겠지만 그녀는 특별히 다른 면이 있다. 그녀는 감동의 일차적 질료인 철학성과 미학성을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생활에도 깔고 있다. 의식과 문장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차이’를 가치화하는 그녀 나름의 칼라가 만나는 사람을 압도하는 신비한 힘이라 하겠다.
김종희 수필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한국적 수필을 읽으면 마치 살포시 내리는 봄비소리 또는 겨울밤 흰눈 내리는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하여튼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는 봄비처럼 그녀의 글은 우선 생명력을 띠면서 독자에게 예술적 감흥을 안겨준다. 제재통찰 결과를 감성적인 문장에 담아 울림이 큰 미적 이야기로 변형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파토스와 에토스 등의 수사전략을 집중력있게 활용하는 까닭으로 어떤 수필도 미적 울림이 강하다. 특히 한국적 정조와 얼을 잘 형상화하고 있는 <거미, 거미줄>, <고서점에서> <울음, 그 언어>, <정자가 있는 자리> <쌈>, <죽비소리> 등의 작품은 인간구원이라는 문학적 이상을 충실히 지향하고 있다. 그녀의 수필을 읽으면 그녀가 추구하는 수필의 본령이 무엇인지 쉽게 드러난다. 그녀는 한마디로 수필을 ‘새로운 의미부여하기’ 즉 네오필리아적인 작가정신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생활인의 단순한 인식을 넘어서서 수필 소재에 담긴, 또는 묻힌 가치를,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것’, ‘꼭 봐야 할 것’에 초점을 맞추어 유의미하게 다듬어 낸다고 하겠다.
그뿐이 아니다. 양식은 칼로 썰어 포크로 찔러 먹어야 하는 사실이 부담스럽다. 그럴 때면 십자군이 자꾸만 떠오른다. 마치 내가 영토를 찾아 포크와 칼을 들고 진군하는 십자군이 된 듯하다. 포크나 나이프는 자르고 찍어야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결국 상처를 내고야 만다. 그러나 우리의 젓가락, 숟가락은 찌르지 않고도 먹을 수 있으니 상처가 나기는 극히 드문 일이다.
우리는 유달리 쌈을 즐겨 먹는다. 바닷가 마을은 바다를 싸서 먹고 산골은 산을 싸서 먹고 농촌에서는 밭이나 들을 싸서 먹는다. 나도 쌈을 즐겨 먹는다. 어려서는 부뚜막에 선 채로 식은 된장과 식은 밥으로 시장기를 면하기도 했고 좀 더 자라서는 논두렁에 둘러앉아 쌈을 싸 먹기도 했다. 쌈은 먹는 맛보다 싸는 맛이 좋다.
<쌈> 일부
수필은 사실을 설명하거나 논리를 추구하는 학문적인 글이 아니라, 관조적 자세로 자아와 사물을 통찰하여 문학적 기능을 다하는 글이다. <쌈>에서 가장 강하게 어필하는 부분이 관조를 통한 대상의 새로운 의미화다. 자치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음식 이야기에 불과할 수 있는 생활이야기이지만 이것이 한 편의 명작으로 인정되는 것은 작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사랑과 치열한 탐구정신, 예리한 통찰이 빛나기 때문이다. 김종희 수필이 갖는 멋은 다른 수필에서도 공히 느낄 수 있지만, <쌈>의 ‘그럴 때면 십자군이 자꾸만 떠오른다. 마치 내가 영토를 찾아 포크와 칼을 들고 진군하는 십자군이 된 듯하다.’라는 진술에서 볼 수 있듯이, 대상의 본질을 멋지게 태질하는 데 있다. 흩어져 있어서, 숨어있어서 보이지 않는 감각적 재료들을 철학적 지성과 윤리적 이성을 활용해 한 군데로 모아 하나의 상으로 이미지화하는 솜씨는 칭찬을 해주어야 마땅하다. 서양식 음식의 특성을 재단하면서, ‘십자군’을 들고 나온다는 것은 대단한 전략이라 하겠다. 한국적 가치를 두드러지게 표현하기 위해 비교 대조의 기법을 써서 설득력 있게 주제의식을 건져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관용적 정서를 찌르지도 상처를 내지도 않고 먹을 수 있는 ‘쌈’의 특성에서 찾아내는 작가의 예리한 관조는 이 수필의 백미요, 이를 발견한 것은 탁월하다고 하겠다.
또 하나 김종희의 수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언어미학적 특성은 해학이다. 이는 ‘쌈은 먹는 맛보다 싸는 맛이 좋다.’는 데서 ‘먹는 맛보다’ ‘싸는 맛’이 좋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싸는’의 의미는 ‘포용’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배설’을 의미하고도 한다. 또 작가는 ‘싸는’의 의미를 이런 두 가지 의미에서 더 확장하여 함축적으로 변용하는데, ‘바닷가 마을은 바다를 싸서 먹고 산골은 산을 싸서 먹고 농촌에서는 밭이나 들을 싸서 먹는다.’에서 알 수 있듯이 ‘싼다는 것’은 어느 특정 지역, 특정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도 너도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전부 써서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쌈에 대한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해 단군신화, 신라인의 중용정신, 조선조의 시조 등을 인용하면서까지 자신의 메시지를 설득적으로 뒷받침하는 수사전략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수필은 사물의 속성을 잘 관조해서 ‘포용’ ‘관용’ ‘인정’ 등의 인도주의적인 정신 또는 동양정신으로 승화시켜내었다. 주제의 보편적 형상화와 미적 울림을 강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것은 바로 ‘포크와 나이프’로 상징되는 서양식에 대한 거부감이다. ‘십자군’은 수필 전체에 주제의식을 투사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이를 ‘진군하는 십자군’ 으로 이미지화해서 지배적 정황으로 설정한 부분이 압권이다.
비 오는 날, 한갓진 곳의 정자는 우비를 갖추지 않은 나그네의 애첩이 된다. 머무르지 않고 잠시 쉬었다 가는…. 산을 배경으로, 들을 배경으로 젖은 몸을 말리는…, 하여 정자는 마을과 떨어진 곳에 저 홀로 있다. 인기척 없는 산야에 촉촉이 안개가 내려앉을 때 얼굴을 내미는 정자는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누가 그랬던가. 사랑에 빠진 얼굴은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안개 속에 얼굴 내미는 정자는 그리움에 핼쑥한 모습인 것만 같아 더 아름답다.
정자는 열린 공간이다. 사대부가의 안채가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는 폐쇄적인 구조라면 한 곳에 앉아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정자이다. 기둥에 기대서서 보는 산은 완만한 굴곡을 자랑한다. 초가지붕을 닮은 능선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주봉이요, 주봉을 중심으로 사방엔 너른 들이 펼쳐진다. 툭 트인 공간, 너른 세상을 볼 수 있는 정자야말로 시문(詩文)을 논하기에 안성맞춤 아닌가.
- <정자가 있는 자리> 일부
서른여섯 편의 작품, 어느, 하나도 가슴에 와락 안 안겨드는 작품이 없지만 특히 <정자가 있는 자리>라는 작품에 유독 끌리게 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정자 같은 여인이 되고 싶다는 도발적 선언이 마음을 움직였을까. 아니다. 관조와 전통미, 개성적인 작품이 어디 한둘이랴. 그럼에도 평자는 <정자가 있는 자리>를 여기 작품해설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개성적인 작가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대로 ’툭 트인 공간, 너른 세상을 볼 수 있는 정자야말로 시문(詩文)을 논하기에 안성맞춤‘ 이다. 김종희의 <정자가 있는 자리>에는 격조와 풍류의 품격이 내재해 있다. 문사인 선비들이 주어진 시제를 놓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격조 있는 화답의 소통이 있는 곳이 정자다. ’정체되어 있는 듯하나 그 속은 쉼 없이 흐르고 있으며, 비바람에 놓여 있는 듯하나 그 뿌리는 깊이 있음을…. 말하자면 일선에서 물러서 있으나 스스로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정자엔 벽이 없다. 그러나 벽이 없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을 뿐이다. 겉으로 보기엔 삶의 외곽으로 밀려난 것 같지만 그건 밀려난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 다가서는 것이다.‘라는 진술에서의 역설은 정자에서의 화답과 소통을 철학성이 함유된 놀이의 경지로 끌어올리고, 나아가 자연합일적 삶을 지향하는 선비들의 풍류정신을 고양시킨다고 하겠다.
지금 그때의 죽비소리가 그립습니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길을 찾을 것 같습니다. 흉내 내기란 결국 안개였습니다. 안개는 허상이었습니다. 지금껏 나는 달마 같은 글자를 흉내 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요. 안개 속을 걷고 있는 지금 큰스님의 죽비를 맞고 싶습니다. 게으름을 지켜보는 무설전의 소나무, 그 소나무 같은 문장을 만나고 싶습니다.
죽비소리 같은 문장을 쓰고 싶습니다.
- <죽비소리> 일부
수필 <죽비소리>는 격조 높은 예술적 산문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문학이란 상징의 틀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언어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언어가 퍼득거린다.’는 문장은 휠 라이트가 말한 열린 언어다. 앞단락의 ‘손바닥 만한 메기도 들어있었습니다.’와 뒷단락의 ‘내 솥은 언제나 비어있었습니다.’라는 문장의 대조적 표현 속에 녹아있는 구체어들의 상징은 고급독자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의미를 음미하는 맛이 솔솔하다. 김종희의 글은 형상화라는 프리즘을 통과해서 나온 정선된 언어들의 교직이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어려움을 어릴 때의 고기잡이에 비유하는 것이라든지, 글 쓰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작품의 만족도를 어종으로 표현한 것이라든지, 큰 욕심없이 피라미 같은, 붕어 같은, 메기 같은 말을 담고 싶었다는 문구는 상상이 부족한 수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김종희 수필의 또 하나 기둥은 자기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다. 작가는 문학의 길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끝까지 진리에 이르겠다는 굳은 의지가 ‘나는 수도승이 되기로 했습니다.’라는 문구에 잘 표현되어 있다.
흔히 글을 써보고자 해서 펜을 잡을 때를 ‘글자와 씨름한다’고 하는데, 이 수필은 작가가 얼마나 한 편의 좋은 글을 얻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가를 잘 나타내어 보여주는 글이다. 작가는 수도승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옛날 학창시절의 불교학생회수련회의 추억을 들고 나온다. ‘숨소리가 가라앉은 법당에서 작가 자신도 모르게 머리가 끄덕여지고, 그럴 때마다 기다렸듯이 등 뒤로 죽비가 내려쳐진 기억을 되새기며 자신의 나태를 일깨워주는 죽비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작가는 지금까지 자신의 수필쓰기가 흉내내기였다고 고백하면서, ’안개 속을 걷고 있는 지금, 큰스님의 죽비를 맞고 싶습니다. 게으름을 지켜보는 무설전의 소나무, 그 소나무 같은 문장을 만나고 싶습니다.‘면서 마지막 결구 문장을 ’죽비소리 같은 수필을 쓰고 싶습니다.‘로 정리하고 있다. 김종희가 구사하는 문체의 특징이 있다면, 일체의 만물을 인격화하는 수법이다. ’장삼 입은 책이 염불을 합니다.‘란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제물상을 보는 그녀의 눈은 온기로 가득 차 있다.
3. 문학적 물음이란 무엇인가
- 역설에 피어나는 손맛과 눈맛
문학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물음과 대답이 아닌, 주관적 판단에 해당하는 물음과 답이다. 이렇듯 문학은 개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주관적인 것이다. 개인을 확장한 공동체적 물음이다. 바로 나를 향한 물음이며, 그 메아리는 우리 들을 향한 울림인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나를 중심축으로 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재해석하고 변용시켜 나가면서 우리들의 삶의 무게를 감당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종희 수필은 독자에게 무엇을 하는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사람다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해 준다. 삭막한 사회를 잠시 접어두고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인생을 음미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김종희 수필의 샘물이다. 햇빛을 그냥 보면 눈이 부시지만 프리즘을 통해서 보면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빛깔을 드러내는 것과 같이, 김종희 수필은 우리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프리즘의 역할을 해준다. 아니, 프리즘으로 우리들의 일상을 바라보면 무지갯빛 아름다움이 우리 주변에 폭넓게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해주기도 한다.
언어에 권위까지 곁들이면 그 힘이야말로 막강해질 수 있다. 문학은 이 언어의 힘을 빌리는 것이지만 본격수필에서는 주제의식의 의미화를 곁들여서 독자의 마음을 더 효과적으로 사로잡는 간접화 방법을 쓴다. 일상 언어 속에서 불필요한 언어를 최대한 배제하는 등의 문학적 용법이 필요한 것이다. 문학의 힘은 언어로부터 나오지만 단순히 개인을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다. 문학의 힘은 단순히 언어의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독자의 정서에 울림을 주는 파도와 같은 것이다. 오래 지속되는 정서의 힘이라는 것이다. 글을 눈과 귀로 느끼는 것을 일컬어 ‘손맛’이라고 하면 어떨까. 어조 문체 율격 상징 언어유희 언어적 뉘앙스, 어감 감각적 언어 등에서 오는 미세한 차이를 손맛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다. 이는 글쓴이의 개성을 일컫는 말이다. 글쓴이의 개성은 그 손맛에 있다고 할 것이다. 정호승은 ‘가슴 속의 시를 끄집어내는 능력 있어야 좋은 시어를 낳을 수 있다.’고 했다. 김종희 수필은 손맛이 철학과 만나서 눈맛도 낸다.
날마다 두 공간 사이에서 나는 일상과 일탈을 오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탈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생명의 힘과 같은 것이라고 억지 부리기를 잊지 않는다. 하기사 일탈은 일상이라는 터를 박차고 오르는 힘 아닌가. 그 힘에 담긴 낭만적 풍조가 있기에 일상은 신명이 난다. 어쩌면 그것은 자조의 울림, 의식적 자아가 주체적 자아를 지키고 발전시키며 완성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해체 직전의 응집이 만들어내는 존재의 몸부림처럼 자아의 경계에 서면 우리의 의식 또한 몸부림친다. 몸부림이란 신명이랄 수 있겠다. 내 육체와 정신을 일체화 하고 때로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도록 해주는 신명은 생명이다. 생명력은 기억과 계획 사이에서 부지런히 연필을 끄적일 때 응집된 의식을 만들어내는 근원이 된다.
사이에 서서 사이를 본다.
<사이에 서서> 일부
내가 진정한 나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를 벗어던져버리고 ‘참나’로 거듭나야 한다. 김종희는 ‘경계’의 작가다. 그래서 날마다 일상과 일탈을 오간다. 경계에 서면 분절이 없어져서 타성에 젖어 사는 게 아니라 탄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일탈’을 보는 관점이 우선 남다르다. 남다르다는 것은 현실반발성이 강하다는 말이다. 그녀에게 일탈은 ‘일상이라는 터를 박차고 오르는 힘’이다. 그녀에 의하면, 일상은 비상의 보고이자 비상할 수 있는 상상력의 텃밭이다. ‘낭만적 풍조’나 ‘신명나는 일상’은 전부 일탈적 사고에서 나온다는 주장이다. 그녀가 ’그것은 자조의 울림, 의식적 자아가 주체적 자아를 지키고 발전시키며 완성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고 했듯이, 나와 다름을 조화롭게 끌어안고 거기서 새로운 창조의 꽃을 피우는 사람이 바로 김종희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셀리는 ’사랑의 철학‘이라는 시를 통해 경계와 경계 사이에 존재하는 이질적 사물과 사람이 섞여서 하나가 되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경계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라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아름다운 사이다. 그 사이에 의식을 놓는 김종희는 그 경계에 서서 아름다운 차이를 발견하고 이를 신명나게 즐긴다.
“지극한 아름다움에 스며든 지극한 슬픔, 지극한 슬픔이 토해내는 지극한 아름다움, 발아래 뒹구는 나뭇잎의 말아빠진 맥이 앙상한 핏줄처럼 보였다. 머무는 것과 떠나는 것 사이, 해체와 응접의 사이에서 시간을 또 다시 흘러간다.” 이 글의 발단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거대한 아우슈비츠처럼 관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어떤 모습을 해야 할까. 아도르노는 예술이 사회와 비동일성을 주장하며 타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예술은 스스로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 ‘역광을 받은 나뭇잎은 붉은 노을이었다.’가 주는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의식의 시간은 사이에 서 있을 때 가능하다. ‘화광반조’, ‘해체와 응집’, ‘포장해야 할 시간과 놓아주어야 할 시간’, ‘새벽과 아침’ ‘저녁과 밤’, ‘일상과 일탈’, 그녀의 경계철학은 손맛으로 귀착된다. 끝없는 탈주의 선을 그리면서 손맛도 낸다. 예술은 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게 되는데, 새로운 예술의 창작은 내용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그 누구도 아직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형식은 침전된 내용이기에 진리는 재료를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에 있는 것이다. ‘기억과 계획 사이에서 부지런히 연필을 끄적일 때 응집된 의식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경계에 서서 않으면 철학적으로 반동적이다.
어느 날, 문득, 갑자기, 순간순간 다가오는 부사적 용법의 난무 속에서 이성의 제어가 길을 잃을 때 느끼게 되는 외로움은 감각의 산물이다. 감각에 마비된 이성은 판단력이 흐려지고 마침내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이에 비해 고독은 감각의 세계를 벗어나 자신과 세계를 객관화하기 위한 선택적 삶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인식체계로 들어가는 일이다. 나와 세계의 대결구도가 아닌 화해를 추구한다.
가을은 외로움에 젖을 것이 아니라 고독 속에 자신을 두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삶도 익어가기 때문이다.
<가을엔> 일부
우리는 저마다의 이랑에 씨앗을 뿌린다. 그러나 모든 씨앗이 싹을 틔우지는 않는다. 겨울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한 씨앗만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쓴다. 삶의 결이 올올이 스며든 언어로 쓰는 시는 낮은 여울이 된다. 그 여울은 마침내 뭇사람의 가슴에 고인 감성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이 되는 것이다.
예술은 정신활동이다. 삶은 예술이며, 예술은 삶에 부단히 말을 걸면서 우리는 성장한다. 예술이 삶에 말을 걸 수 있도록 하는 힘은 정성적 정량적 평가와 함께 무엇보다 지속성이 절실하다.
- <예술, 삶에 말을 걸다> 일부
김종희는 ‘예술은 인간의 기본적인 정신활동이며 사고를 토대로 상상으로 이어지는 미적 활동’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위에 인용된 <가을엔>과 <예술, 삶에 말을 걸다> 등 상당수 수필들의 특성이 예술철학적 범주에 속한다. 자본주의가 매번 새로운 것을 평균적 코드로 표준화해서 대중에게 제공해버린다는 점에서, 계속 새롭게 한다는 게 가능할까 의문이 들지만, 결국 새로운 방식도 익숙한 형식으로 해석되지 않는가. 또한 예술이 끝없는 탈주를 하게 되면 남아있는 대중은 누가 위로하는가. 예술마저도 화해를 꿈꾸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을까. 김종희는 예술이 마중물이 되려면 ‘겨울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한유의 ‘불평즉명’과 같은 논리다. 한유는 훌륭한 문학은 기만지득의 자족에서가 아니라 궁고수사의 부득이함에서 나온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문학을 하려면 한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김종희의 ‘겨울이라는 긴 터널’은 한유와 구양수의 고전시학을 따르면서, 트릴링이 말한 ‘현대의 문화인은 예술적 실존적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 상태에 있다’는 맥락과 그 의미를 같이 한다고 하겠다. ‘삶에 부단히 말을 걸어야 한다는 것’은 기성의 권력체계 혹은 질서체계, 사유체계에 대항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것은 느슨하고 현실 타협적이고,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항하되, 중용에서 말하는 ‘능구’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소수자로서 이 시대에 대항하는 무의식으로 살기 위해서라도 예술은 그렇게 갈가리 찢겨진 것들을 비폭력적인 구성으로 다시 종합함으로써 현실을 화해의 빛 속에 드러내야 한다. 작가는 역설적이지만 예술은 비화해적인 것을 증언해야 하며 그것을 화해시키려는 경향을 가져야만 한다는 차원에서 김종희는 <가을엔>이란 작품에서 ‘고독’이란 개념을 제시한다. ‘외로움’과 ‘고독’을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그 차이를 읽어내는 철학적 역량은 높게 평가된다.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와 삶의 온당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확보하려는 의지로 사는 것이 김종희가 말하는 작가적 삶이요, 익어가는 삶이다. 예술은 삶을 받아들이고, 삶에 말을 걸도록 함으로써 거기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드러낸다. 이로써 예술 속에선 ‘존재하는 것’에 대한 탄핵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대가 서로 결합된다. 이를 위해 그녀는 지속성이 절실하다고 주문한다. ‘모든 씨앗이 싹을 틔우지는 않는다. 겨울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한 씨앗만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는 진술로써 그녀는 자신의 예술론을 구양수의 고전시학 ‘시궁이후공론’ 위에 놓는 데 성공하고 있다.
III. 로그아웃
인문학적 사유와 문학적 성취, 여기서 바로 김종희의 수필은 단지 미적 가상에만 머물지 않고 상상적 가상으로 승화된다. ‘아직 있지 않은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철학이 필요했다. 사이의 역설적인 사고 기능은 미적 가상으로서의 예술이 상상적 가상으로 승화되는 지점에서 필수적이다. 김종희는 이 무서운 디스토피아를 극복할 실마리를 인문학과 예술철학에서 찾았다. 아름다운 역설로 가득한 김종희 수필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로처럼 느껴진다. 수수께끼 같은 역설의 바다를 헤엄치는 모험, 그 끝은 누구도 알 수 없는 모험이기에 더욱 흥미진진한, 구미가 당기는 내면의 모험, 그것이 바로 이 수필집이 지닌 은밀한 매력 중 하나였다. 작품을 해석의 미로로 만들어내는, 풍요로운 역설과 경계의 춤을 발견할 수 없는 작품은 마치 아무런 비밀이 없는 연애처럼 따분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하나의 해석으로 만족할 수 없는 역설, 해석하면 해석할수록 신비해지는 역설의 미학은 문학이 가진 은밀한 특권처럼 다가왔다. 역설의 날개를 단 철학적 수필들은 독자를 감동으로 실어 날랐다. 의미심장한 상징을 제목으로 단 수필들은 ‘현실이라는 육지’와 문학이라는 섬’을 이어주는 기나긴 징검다리 같았다.
<명묵>에서는 경계의 미학, <독락>에서는 미적 이상, <돌탑에 이끼가 살아있다>에서는 초월적 현상학적 환원의 중요성, <비경을 찾다>에서는 우연의 핀 감성 미학, <녹우>에서는 ‘언불진의 입상진의’의 형상미학, <절을 한다>에서는 조응관계, <소쇄>에서는 흔들린다는 것으로부터 욕망론, <원원>에서는 로고스와 파토스의 설득전략, <환벽>에서는 물아무간의 경계론, <거미, 거미줄>에서는 복잡계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 <고서점에서>는 온고지신의 미학, <울음, 그 언어>에서는 눈물을 통한 원형회귀론, <모깃불>에서는 어울림의 미학, <나는 날마다 신화를 꿈꾼다>에서는 탈영토화, <소주예찬>은 술의 미학, <편지>는 정에 대한 단상, <고모>는 절대고독의 의미, <봄날은 간다>는 생사에 대한 철학적 담론, <묵은 시간의 기억>은 애틋한 사모곡, <밤 그리고 밥>은 자신의 행복론, <병산에 서다>는 건축론, <본다>에서는 공간미학, <한 줌 바람처럼>은 죽음의 문화와 예술의 상관관계, <34번 국도>에서는 언어철학, <길을 찾는 사람들>에서는 반성적 성찰, <있는 그대로>는 관조의 중요성, <흐르는 것이 시간뿐이랴>는 독설의 의미, <혼돈의 죽음, 그 이후>에서는 예술과 기술의 관계를 풀어놨다.
인문학이란 인간의 삶 곳곳에서 그 의미를 따져 묻고 다른 대안을 탐구하는 과정이다. 사실 인문학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문학을 하는 과정에서 몸에 배기 마련인 의미를 따져 묻는 성찰과 탐구의 자세다. 이렇게 의미를 따져 묻고 성찰하는 자세가 이미 도구적 이성의 반대편에 서 있는 객관적 이성의 참모습인 것이다. 김종희 수필은 이 지점에서 빛을 내고 문학적 성취를 갖는다. 대학원에서 한국미학과 미술사학을 공부했던 경험은 그녀에게 사유를 크게 확장시키고 공감 능력과 상상력을 길러 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역사상 예술은 현재 보이는 현실 너머를 상상하는 역할을 해왔다. 예술적 소양이 높은 작가는 다른 사람을 하나의 대상, 수치로 대하지 않는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로 대한다. 김종희는 특수한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많이 접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하기 쉽다. 서로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사이에 들기도 철학적 소통도 쉽다. 역설과 경계미학으로 빛나는 김종희 문학의 힘은 철학적, 언어적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독자의 정서에 울림을 주는 파도와도 같은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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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시지요~
수필은 과학인듯 어렵네요
주관적일듯한것을
객관적으로 가는것에 그치는
제생각보다는
원대한 지구를 생각하게 해주네요
많은 도움입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
네, 수필은 문학이고, 예술에 속하기 때문에
결코 쉬울 수는 없습니다. 하하
예술은 난해성, 즉 어려운 성질을 특질로 갖고 있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