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고난을 견디시고 수치를 견디셨다고 했는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주님이 부활하시기만 하면 우리 같은 죄인을 살릴 엄청난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요 또 하나님의 교회 신부로 만들기 위해 이 기쁨 때문에 수치를 견디시고, 아...고난을 견디시고 수치를 견뎠다고 그럴 때 despise the shame, 이 shame이 있는데 이거를 despise 한 거에요. 수치를 I hate you, I hate you 이렇게 한 거에요. 우리도 수치를 받을 때에 그 수치를 despise 해야 되요. I don't care. 이게 주님 따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 오실 때만 기다리면 수치는 아무 상관없어요.
흠정역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한글킹제임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시고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KJV
Looking unto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that was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despising the shame, and is se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오랜만에 송요셉 목사 비평 글로 돌아왔습니다. 근자에 그가 책을 낸다고 하니("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성경침례교회와 럭크만 목사의 가르침에서 대부분 가져다 썼을 것으로 생각되는 만큼 그 책을 입수하게 된다면 그에 대한 비평글은 나중에 올릴 것입니다. 본인이 갖고 있는 의문은 송요셉 목사가 그 시리즈를 홈페이지에 올린 분량으로 볼때 최소 대여섯 권 이상의 분량이 나올 법 한데 과연 그게 곧이곧대로 나올지(송요셉 식 구어체 그대로 담고) 편집 짜집기 해서 전혀 다른 책이 나올지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바로 입수할 수 있을런지도 아직 모릅니다만 한국에 유포하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송요셉의 목적이기 때문에 나올 것이라 봅니다. 그가 이것이 시작이라고 했고 다른 (럭크만을 짜깁기한) 강해집도 낸다고 했으니 지켜보고 대응하겠습니다.
럭크만 박사의 주석을 옮기면서 새삼 느끼지만 지식의 다과가 성경 주석의 탁월함과 연관되지는 않습니다. 아예 무지하더라도 성령께서 지혜를 주시면 탁월한 주석과 탁월한 책을 쓸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사람을 빚어서 쓰시지만 기본적인 소양이란 항상 그 사람의 소양 그대로 발휘됩니다. 모세는 모세의 혈기가 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기 나름 쓴 뿌리들이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의 경우에 쓴 뿌리는 기도와 절제로 극복할 수 있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자기 본연의 성품이 여과없이 자기 말과 글에 배여들게 되어 있어서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쓰는 사람을 성품 개조하여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네"라고 고백하지만 겉사람(육신과 육신의 본성)과 속사람은 같이 있기 때문에 서로 섞여서 나타납니다. 새 사람을 따라서 사는 것이지 옛 사람을 없다고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육신적 성품을 가졌다고 시인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고 그가 피터 럭크만 박사처럼 사역에 있어 "롱런" 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끝까지 달리지 못하고 그 교만한 성품 때문에 파국을 맞습니다.
송요셉 목사의 교만함의 실체는 영어와 영어킹제임스 성경과 그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환경, 미국 자체입니다. 이건 누구나 마찬가지라 생각할수 있는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예외도 있지만 이를테면 "내가 백만장자들과 사교 모임에서 만나서 교제한다면 자신이 백만장자가 아닐지라도 마치 그렇게 된 것처럼 착시, 착각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헛배가 부르다는 말과 같은 것이고, 실은 성경침례교회를 다니지만, 미국의 펜사콜라는 제가 모르고 한국은 아니까 말하지만 이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그 자체가 자부심이라면 영적으로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남의 믿음은 내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상황에 옮겨서 놓자면 메이플라워를 타고 온 청교도의 믿음이 뛰어나다고 그 자손들의 믿음이 좋은 게 아닙니다. 조상들은 조상들이요, 자손들은 자손들입니다. 특히 신약 그리스도인들은 조상 덕으로 혜택을 본다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민족적으로 부르심 받은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믿고 선택받았기 때문에 "우리 조상이 잘 믿었기 때문에 나도 믿음이 좋다"고 말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어떤 자만심에 찬 고신이라는 교단 목사들처럼 "신사 참배를 거절한 우리의 선대 교인들"을 입끝마다 올리는 것은 자기 모순이란 말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하고 그 기준에서 볼때 바른 성경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철저히 아웃입니다.
필자는 송요셉 목사가 자기 과거사에 대해 파편적으로 털어놓는 일부 진실들을 보며 "아 그래서"라는 깨달음을 몇번 얻었습니다. 고신 교단에서 종교 생활을 했었고 "국기 경례"를 거절하는 것을 대단한 믿음으로 여겼다(거듭나지 않았던 시절)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계속해서 개역성경을 믿어도 잘 믿으면 신사참배 거절한 주기철 목사만큼 훌륭한 믿음이 될 수 있다고 주장을 펴는 것입니다.
그러면 송요셉은 왜 개역성경을 고수하고 주기철 목사의 뒤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게 훌륭한 믿음이라면서요. 필자도 주기철 목사의 믿음을 뛰어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문제는 그것에 연관시킬 게 아닙니다. 한 개인의 탁월한 믿음은 성경을 어떤 것을 쓰는지와 관계없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암흑시대에는 바른 성경이 없었지만 순교자들이 수없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른 성경 없이 믿으면 순교자들의 믿음이 전수되어 똑같이 그렇게 될 수 있다 말입니까?
그렇다면 킹제임스 성경은 나올 필요가 없었고 한글킹제임스 성경도 필요없습니다. 그렇다면 카톨릭 성경을 거부할 필요도 없고 바른 신학도 불필요합니다. 북한과 중국 지하 교회는 바른 성경 없이도 잘 믿지 않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게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잘" 믿는 것인지 어쩐지 당신이 어떻게 기준을 결정합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고 많이 있고, 심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을 내어놓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많은 허물들은 일단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의로 바른 말씀을 알고 대적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런 불쌍한 사람들과 자유 세계에서 보고 싶은 성경 마음대로 골라 보는 사람들과 어떻게 입장이 같겠습니까? 자기 처지가 그런 것도 아니면서 어려운 사람들에 빗대어 자기 부정한 생각과 행실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위선자라는 것을 왜 모릅니까?
위에 써 놓은 구절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 원어 사전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결정해야 하는 것은 "한글의 의미"이고 스트롱 성구 사전이나 영의 성구 사전, 1828 웹스터 사전이 한글의 의미를 재정의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을 살펴봅니다.
영어 despise는 경시하다에서부터 멸시하다, 조롱하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례에 쓰일 수 있습니다. 경시와 조롱은 상당히 어감이 다릅니다. despise는 조롱의 강도가 10에서 100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도의 표현에 적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상식이니까 원론은 더 설명 안해도 될 것입니다.
믿는 주인을 섬기는 자들도 그들이 형제라고 해서 경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더욱 잘 섬겨야 하리니, 이는 그들이 신실하고 사랑받는 자들이며, 선한 일에 동참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라(딤전 6:2).
And they that have believing masters, let them not despise them, because they are brethren; but rather do them service, because they are faithful and beloved, partakers of the benefit. These things teach and exhort.
위 구절을 "멸시하지 말고"라고 옮기게 되면 의미가 이상해집니다. 그리스도인 주인들을 가진 그리스도인 종들은 형제라 해서 믿는 주인들을 경시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멸시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멸시한다는 것은 주인 앞에서 대놓고 건방진 짓이나 반항하는 행동을 해서 주인에게 모욕을 준다는 정도의 의미이고 경히 여긴다는 말은 주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인을 주인이 아닌 상급 직원 정도로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대놓고 모욕을 주느냐, 속으로 우습게 여기느냐, 그 차이는 적지 않습니다.
그 문제와 아울러서 본문 히 12:2에서 despise는 어떻게 번역한 것이 최선이라 할수 있을까요? 왜 거기에 "멸시"가 들어가면 어색해지는 것입니까?
"수치를 멸시하다"는 말은 우리말에서 매우 어색한 표현입니다. 영어가 아니라 우리말이 그렇단 뜻입니다. 1611 킹제임스 역자들이 성경을 번역할 때 당시 영어에 쓰던 관용구(idiom)를 간혹 적용하곤 했는데 오늘날에는 잘 쓰지 않는 말이 되어서 해설해 줘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despise the shame이라는 관용적 표현을 그 당시 사람들이 썼다는 증거를 갖고 있지 않기에 한킹만으로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즉 한국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멸시라는 말 자체에는 비하, 조롱이 들어 있습니다. 수치를 "신경쓰지 않을 수" 있지만 즉 개의치 않을 수 있으나 수치를 조롱한다는 말은 매우 어색하며 의미가 쉬 왜곡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수치를 멸시한다고 할때 깔본다, 비하한다는 그 멸시를 어떤 식으로 표출한다는 말입니까? 주님은 잡히시고 심문받으시고 처형되실 때까지 말을 많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조롱하는 뜻에서 입을 다무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복음서를 아무리 읽어도 주님께서 "수치를 조롱하신" 증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수치들은 죄인들의 죄를 제거하고 허물을 덮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사 53:5).
주님은 수치를 "개의치 않으신" 것이지 멸시하신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와 십자가와 함께 온 고난과 고통들을 멸시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으로 알고 받았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아버지의 잔(세상 죄)을 받아들이시는 대신 조롱하고 멸시하셨다면 갈보리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진지하게, 아주 진지하게 십자가 사건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어의 관용적 표현이 어떻든지 간에, 한글킹제임스 성경에서는 히 12:2에서 무조건적 "직역"을 주장해서 십자가의 의미를 이상하게 퇴색시켜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균형된 시각과 영적 감각을 갖고 성경을 번역한 역자가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송오 목사님은 그렇게 했지만 정동수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고 다른 짝퉁들도 마찬가지로 다 아웃된 것입니다.
송요셉은 자기가 알고서 "사사건건" 정동수 노선을 지지하는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영킹맨을 추구하다 보니 정동수와 어깨동무하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송요셉 본인의 말로는 정동수에 뭐 얻어먹은 것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 하니 그 말은 믿어주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마귀가 이끄는 대로 똑같은 영킹맨 구렁텅이로 들어간 셈인데 당신이 영감받은 성경, 한글킹제임스 성경을 고치고 흠집내려 애쓸수록 진리로부터 더욱 멀어질 것이고 원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조명을 주시지도 않았지만 앞으로 조명받을 기회도 점점 사라질 것입니다.
이 점을 꼭 생각하고, 이 글을 읽을지 안 읽을지 모르지만 꼭 읽고 회개하여 더이상 영킹맨의 음침하고 저주받은 길을 걷지 마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