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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들..
 
 
 
카페 게시글
서원이야기 스크랩 소양서원 이야기
아라 추천 0 조회 65 14.09.07 16: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소양서원(瀟陽書院)
소 재 지 :  문경시 가은읍 전곡3리 769
(원소재지 : 가은읍 전곡리 소양마을)
건 축 주 :  동래정씨, 순천김씨, 청송심씨, 의령남씨, 연안이씨 문중.
건축시기 :  1712년
중건시기 :  1801년, 1990년
훼철시기 :  1871년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05호, 2006. 06.15 지정

건축 배경
1712년에 창건하였다가 1745년에 훼철된 후 1801년에 중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들은 1871년 훼철된 것을 1990년에 복원한 것이다.

건축 특징
1871년(고종 8) 서원 훼철 당시 사당만 철거되고 강당과 동재는 남았으며 강당은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강당의 천장은 양측 청방 간 상부의 종보와 종보 사이에 종보 폭으로 길게 설치하였고 반자꾸밈은 반자대를 도리 방향으로 길게 걸치고 그 사이에 반자 판을 끼워 독특한 천장 구성을 이루는 등 건축적 가치를 살필 수 있다.

건축 구성
강당의 오른쪽 뒤편에는 동재(東齋)를 세웠고 마당의 뒤쪽에는 내삼문과 사당으로 이루어진 묘(廟)의 영역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관련이야기
- 소양서원
소양서원이 있는 전곡리의 소양마을은 연산 무오사화 때에 안유 선생의 현손인 안귀손과 거창현감인 한천처사 신숙빈이 개척하여 상강정을 지어 풍류를 즐기며 후학을 양성한 곳이다. 또 신숙빈의 손서인 인백당 김낙춘이 이곳의 산수가 수려함을 보고 안동군 풍산읍 가곡에서 옮겨와 소양동 강 위에 영류정이란 정자를 세워 풍류를 즐겼다.

소양서원은 전곡리 마을 중간쯤 전망 좋은 곳에 뒷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위치하며, 강학과 제향 공간이 각기 별도의 곽을 이루며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담 하나 옆으로 김낙춘이 풍류를 즐긴 영류정이 있고,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에는 상강정이 있으며, 마을 입구에서부터 보면 고색창연한 기와집들이 마을의 지난 영화를 보여주는 듯하다.

소양서원은 지난 2001년에 경상북도가 안동의 지촌 종택과 수애당, 예천의 천곡서당, 경산의 한 장군 놀이 전수회관과 더불어 지정해 운영하고 있는 다섯 곳의 전통 생활 체험장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 전통 생활 체험장은 가족 단위나 단체 여행객이 숙식을 하며 화전?송편?다식 등 전통 음식 만들기를 비롯하여, 제사상 차리기, 새끼 꼬기, 짚신 만들기, 장작 패기, 디딜방아 찧기, 전통 혼례 등을 통해 조상의 얼을 느끼고 옛 생활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전통 고가나 서당, 서원 등지에서 우리의 전통 생활 문화를 체험하고 전례 놀이를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관련인물
- 제사 인물
정언신(鄭彦信)
자는 입부, 호는 나암이다. 관은 동래로써 좌랑 진의 아들이며 호군 신예의 사위다. 병인년인 1566년(명종)에 등제하여 이국(吏局)에 있을 때 명망이 높았다. 동고 이준경이 사람을 알아보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더니 하루는 통천서각을 주면서 “장래에 나를 대신할 것이다” 라 하였다. 1579년(선조 12)에 우승지로 함길도 절도사가 되어 주군을 순찰하니 치정이 엄정하여 북관 주민들이 자식을 낳으면 공의 이름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1583년(계미)에 여진족 니탕개의 난에 함길도 순찰사가 되어 북관에 임명되니 호령이 엄숙하고 용병이 특출함에 적도들이 싸움 한 번 못하고 도망갔다. 공이 사람을 알아보는 지감이 뛰어나 그 막료 중에는 이순신, 신립, 이억기, 김시민 등 후일 임란에 국운을 짊어질 명장들이 많았다. 병조 판서로 소환되어 기축년인 1589년에 우의정이 되었으나 아깝게도 정여립이 옥사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에 적소에서 졸하였다. 출장입상(出將入相: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돌아와서는 재상이 된다는 뜻으로 문무를 다 갖추어 장상의 벼슬을 모두 지냄)에 모두 흠모하였으며 임란 시에 이제독이 조령에서 “정나암이 살아 있었다면 적이 어찌 이 고개를 넘었겠는가?”라고 탄식하고 한탄하였다.

김낙춘(金樂春)
자는 태화요, 호는 인백당이며, 관은 순천이다. 평양 부원군 양경공 승주의 6세손으로 을유년인 1525년(중종)에 출생하여 21세 때 사마시에서 생원이 되었으나 나라에서 파방이 되어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고 퇴도 문인으로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에 3년간 무덤을 지키고 일찍이 말하기를 향당은 부형종족이 있는 곳이라 하여 필히 말에서 내렸다. 을유년인 1585년(선조)에 졸하였다.

남영(南嶸)
자는 사수요, 호는 고산이며, 관은 의령이니 선성 부원군 강무공 암의 5대손이다. 하괴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효성이 극진하였다. 6세에 이미 『효경』에 통하고 부모를 공경하니 모두 효자로 칭송하였다. 18세에 친상을 당하여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주야로 호곡하며 몇 숟갈의 죽만을 마시고 소금, 간장, 약과 등을 먹지 않으니 마침내 두 눈을 실명하게 되어 사물을 볼 수 없게 되었다가 치료한 지 여러 달 만에 사물을 보게 되었다. 오직 학문 탐구에만 힘쓰고 명리를 세상에 구하지 않더니 50세가 넘어서 서애 류성룡 선생이 한 번 만나보고 그 후덕하고 재국(才國)을 겸비함을 알고 조정에 천거하여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가 되었다. 선조가 환두풍(患頭風)하여 밤중에 잠을 못 이루는지라 공이 천류지기지리(川流地氣之理)로 사람들이 월맥지소하니 선조가 크게 기뻐하여 달리(達理)한 선비라 칭찬하고 당상관을 제수하였다. 진천, 양성, 마전, 음죽 등 여러 군현을 출재하여서는 선치(善治)를 하였다.

심대부(沈大孚)
자는 신숙(信叔)이요, 호는 가은(嘉隱)이며 관은 청송(靑松)이니 청원부원군 대(岱)의 아들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아버지가 임진왜란에 전사하니 공의 나이 7세임에도 거상(居喪)에 예를 다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광해군 5년에 진사가 되어 그 뒤에 찰방이 되었다. 1630년 경오년에 사부(師傅)가 되고 사화 현감을 지냈다. 삼남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크게 주릴 때에 경상도사 겸 진휼사가 되어 사의균세사 누백언(累百言)을 상소하니 임금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뒤에 사간이 되었으며 병신년에 졸하니 그때 나이 71세였다.

이심(李?)
자는 자첨(子瞻)이요, 호는 가은(稼隱)이며 관은 연안(延安)이니 감사 창정의 아들이다. 광해조 때 세상이 크게 어지러움을 보고 몸을 깨끗이 지키며 과거 보기를 피하고 가족을 이끌고 가서내촌(加西內村)으로 이사하여 농사지으며 자급하니 군내 자제들이 날마다 모여 수업해 사는 집이 학교가 되었다. 형제 6명이 흩어져 각자 살지 않으며 모든 아우들이 지위가 높으나 매양 귀가할 때에는 동구 밖에서 말을 내려 한집에 모여서 공경하며 엄부와 같이 대하였다. 공은 스스로 은거하며 진고한 곳에만 왕래하니 이른바 청사였다. 아들 관징은 판중추에 이조 판서요, 손자 옥은 예조 참판 부제학이요 증손은 식산 만부이다.

 

문경 > 남서권 > 전곡리
- 전곡리.
1500년경 사복시정(司僕寺正)인 이만력(李萬曆)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 개척하여 샛땀이라 칭하였으나, 1800년경 이진기(李鎭基)라는 선비가 이촌(李村)으로 개칭하고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곡이라 명명하였다.

1) 앞속골 : 전곡1리
1500년경 사복시정(司僕寺正)인 이만력(李萬曆)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 개척하여 샛땀이라 칭하였으나, 1800년경 이진기(李鎭基)라는 선비가 이촌(李村)으로 개칭하고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곡이라 명명하였다.

2) 큰골(大谷) : 전곡1리
이 마을은 산이 높고 물이 깊어 넓다하여 큰골이라고 하였으며 1500년경 거창현감(居昌縣監)을 역임한 한천처사(寒泉處士)신숙빈(申叔彬)공의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평산(平山)신씨의 집성촌(集姓村)을 이룩하여 큰골(大谷)이라 칭하여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정리 시에 전곡리로 개칭하였다.

3) 중마 : 전곡1리
신촌과 골마의 중간지점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중마 라고 하게 되었고, 1980년대에 큰 수해를 입어 황폐하였으나 동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아름다운 마을로 변모시켰다.

4) 학교마?문양
1950년대에 문양국민학교가 개교되면서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는데 학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학교마로 부르게 되었다.

5) 물미?수산(水山) : 전곡2리
1380년경 조만영(趙萬永)이라는 농부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산에 물이 난다고하여 물뫼라고 불렀으나 변음 되어 물미라고 부르게 되었고 수산(水山)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곳에 풍양 조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6) 소양(瀟陽) : 전곡3리
연산(燕山) 무오사화 때에 안유(安裕)선생의 현손인 안귀손(安貴遜)과 거창 현감이던 신숙빈(申叔彬)이 개척하였다. 이곳에는 신숙빈이 세운 상강정(上江亭)과 안귀손의 부인 강릉최씨(江陵崔氏)의 정여각이 있다 이 마을에 소양서원(瀟陽書院)이 있는데 조선 숙종 계사년(1717)에 향인(鄕人)인 나암(懶庵) 정언신(鄭彦信) 인백당(忍百堂) 김낙춘( 金樂春) 가은(嘉隱) 심대부(沈大孚) 가은(稼隱) 이심(李?), 고산(孤山) 남영(南嶸)의 다섯 분의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 인백당 김낙춘 선생이 이곳의 산수가 수려함을 보고 안동군 풍산읍 가곡으로부터 이거하여 소양동 강위에 영류정(暎流亭)이란 정자를 세워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현재는 순천김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7) 너븐열 : 광탄(廣灘) : 전곡3리
1800년경 소양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마을 앞에 흐르는 냇물이 폭이 넓다하여 너븐열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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