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짐한 닭알탕 보소, 결코 가난하지 않은 한 그릇고된 하루를 보낸 노동자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인천 동구의 이색 음식들
이 푸짐한 닭알탕 보소, 결코 가난하지 않은 한 그릇
고된 하루를 보낸 노동자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인천 동구의 이색 음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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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항구다. 광복 후 이 나라의 경제부흥에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즈음 이 나라는 피폐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산업재를 외국에서 실어 와야 했다.
국내로 들여오는 산업물자의 90% 가까이가 인천항으로 들어왔다(인천항만공사 홈페이지).
이는 서울을 비롯해 전국으로 퍼져나가 대한민국 경제부흥의 소중한 자산으로 쓰였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은 그마저도 쓸어가 버렸다.
전쟁 후 우리가 살 길은 외화밖에 없었다. 수출이 답이었다.
인천항은 수입항에서 수출항으로 변신했다. 처음엔 땅에서 나는 천연자원이나 바다에서 잡아
올린 수산물부터 팔았다. 70년대 들어서는 경공업 제품이었다. 가발, 가방, 섬유류 등이 주요 품목이었다.
동남아에서 들여온 원목을 가공한 합판도 그중 하나였다. 항구 주변에 원목가공공장이 들어서
밤을 낮 삼아 나무를 깎았다. 그즈음 인천항엔 국내 최초로 컨테이너 전용시설이 세워졌다.
80년대에 들어 산업적 기반이 안정화 되고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수출품은 철강, 기계,
전자제품 등으로 대체됐다. 인천항 주변의 제철, 기계 공장의 불빛은 꺼질 줄 몰랐다.
인천항은 그렇게 대한민국 부흥을 이끈 수출의 전초기지였을 뿐 아니라 경공업부터
중화학 공업에 이르는 제조업의 성지였다. 그때 맹활약한 공장의 대부분이 인천 동구에 몰려 있다.
도시 전체의 30% 정도가 공장부지다. 가히 노동자의 도시다.
당시 노동 환경은 열악했다. 사람이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노동자들은 국가발전이라는 대의 아래 가혹한 희생을 강요받았다. 노동의 강도는 살인적이었지만
그들이 손에 쥐는 경제적 대가는 형편없었다. 착취에 다름 아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지만 도무지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다. 늘 배가 고팠다.
그런 이들이 모여 사는 도시도 가난했다. 그 도시에선 그들을 위한 음식이 만들어졌다. 그건 필연이었다.
노동자의 도시, 노동자의 음식
1960년대 초 동구 송림동 로터리 인근에 현대극장이 문을 열었다.
볼거리가 귀한 시절, 많은 사람들이 '극장 구경'하러 왔다. 사람들이 몰리자 그 맞은편엔 노점상들이 자리를 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법 규모가 큰 시장이 됐다. 현대시장이다. 극장이나 시장이 모두 '현대'다.
재벌그룹 이름과 같다. 그 현대 그룹은 진짜로 1978년 인근의 인천제철을 인수했다.
인천제철은 현대제철이 됐다. 인천동구와 현대는 운명적으로 엮여 있는 사이였는지 모른다.
그 시장 앞엔 고만고만한 식당들이 즐비했다. 식당이라기보다는 선술집에 가까웠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실내포장마차쯤이었다. 가난한 노동자들과 장사 마친 시장상인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그들은 가게에 들어서면서 한결같이 외쳤다. "싸고 양 많이", "삼 인분 같은 일 인분". 식당들은 저렴한 가격에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찌개류를 주로 냈다. 생선구이나 찜은 고급 안주였다.
식당 주인장들은 더 싸고 푸짐한 안줏거리를 고심했다.
그러던 중 한 집에서 새로운 메뉴를 내놓았다.
그냥 척 보면 여느 찌개와 다를 바 없었는데, 빨간 국물 속의 내용물이 희한했다.
노랗고 동그란 덩어리가 마치 삶은 달걀의 노른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크기가 달랐다.
훨씬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었다. 겉은 반지르르 윤기마저 흘렀다.
함께 들어 있는 식재료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돼지 곱창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이름마저 생소한 '닭알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계란탕? 아니죠~ 닭알탕이죠
닭알은 한자로 계란이요, 한글로는 달걀이다. 그런데 생뚱맞게 닭알은 또 뭔가.
계란 혹은 달걀은 산란한 후의 이름이다. 닭알은 이를테면 세상에 나오기 전의 달걀이다.
껍데기가 생기기 전, 아직 암탉의 몸 안에 있는 알이다. 닭알은 암탉이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알을 낳지 못하는 노계를 잡아 얻는다. 이 닭알이 탕에 들어가면 한 사람당 예닐곱 개씩
돌아갈 만큼 냄비에 담겨 나온다. 달걀을 한꺼번에 그만큼 먹는 셈이니, 이만저만한 고단백 음식이 아니다.
닭알 맛은 오묘하다. 그 맛은 잘 표현이 안 된다. 생소해서다.
처음엔 살짝 비린내가 도는 듯도 하다가 씹을수록 고소해진다. 맛은 몇 번을 변주한다.
우리가 아는 달걀 맛은 전혀 없다. 식감은 조금 딱딱한 젤리 같다.
곱창 닮았다던 그 정체 모를 흰색 고기류는 닭알을 품고 있던 알집이다.
식감이며 맛이 잘 씻어 푹 익힌 실제 곱창 같다. 쫄깃쫄깃하고 단맛이 난다.
거기에 깻잎과 양파 따위의 채소를 곁들여 끓인다.
국물 맛은 반전이다. 그냥 닭볶음탕이나 닭갈비와 비슷한 맛이 날 듯도 싶은데 실제 먹어보면 전혀 기름지지 않다.
오히려 맑고 깔끔하다. 식당마다 조리법이 조금씩 다르지만, 깻잎이나 청양고추 같은 향 짙은 채소를 곁들여
잡내를 잡고 시원함을 더한다. 눈 감고 먹으면 생선 알탕이라 해도 믿을 정도다. 건더기를 다 먹고 나면
면 사리를 넣어 먹는 것도 별미다. 라면과 쫄면 두 가지가 있지만 단연 쫄면이 잘 어울린다. 인천 음식이라 그렇다.
이곳엔 생김새며 취급하는 메뉴가 비슷한 가게가 모두 6개다.
5곳은 잇닿아 있고 한 집은 두어 칸 떨어져 있다. 저마다 닭알탕을 대표로 내세우고 있지만
레시피며 비법 양념 맛은 다 다르다. 여기 식당들은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매체에 소개된 맛 집이다.
그건 그들만의 암묵적인 약속 덕이라고 한다. 예컨대 최근 어느 방송에서 찍어간 집에 또 취재를 나오면
옆집으로 양보하는 식이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 경쟁자면서 동업자였다.
급할 땐 세숫대야로 쓰는 거대한 냉면그릇
동구 화평동 철교 인근엔 술집이 많았다. 그렇다고 죄다 그런 건 아니었다.
개중에 분식집이 하나 끼어 있었다. 모녀가 하는 작은 식당이었다.
인근에 중고등학교가 많아 학생들이 주요 고객이었고, 주말엔 젊은 노동자들도 많이 찾았다.
그네들 주머니 사정이야 뻔했다. 가진 건 없어도 한창 나이니 먹성이 좋았다.
만인의 할머니였던 사장님은 가격은 학생 수준으로 받고 음식의 양은 곱빼기 이상 퍼줬다.
그냥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특별한 양은 금방 유명세를 탔다. 메뉴 중 특히 냉면이 인기가 있었다.
그것만을 위한 전용 용기까지 만들었다. 크기가 낯 씻는 세숫대야만 했다.
그게 그대로 냉면 이름이 됐다. '세숫대야 냉면'이다. 그게 이름을 얻으면서 다른 메뉴는 과감히 없앴다.
TV나 신문 등에까지 소개되어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그 주위에 비슷한
식당들이 여럿 문을 열었다. 그동안 많은 식당들이 명멸했다. 지금도 10여 곳이 성업 중이다.
원조 격 냉면집의 할머니 사장님은 이미 돌아가셨다.
함께 식당을 시작한 당시 갓 스물의 딸은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됐다.
그래서 '할머니'라는 상호는 지금도 유효하다. 명절 당일만 빼고 문을 열었다. 참 열심히 했다.
오빠와 동생도 그 주변에 냉면집을 차렸다. 가족이 차린 식당 이름은 원조와 다 다르다.
원조의 명성에 기대지 않겠다는 기백이 넘친다. 경쟁 속의 협력, 그 위력을 잘 간파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냉면은 특별할 게 별로 없다. 육수도 그렇고 면도 공장에서 뽑은 걸 쓴다.
솔직히 그냥 동네 분식집 냉면 수준이다. 그런데도 맛과 느낌이 특별하다. 일단 면 삶기는 신공에 가깝다.
일반인들은 공장 면으로 절대 그렇게 못 한다. 메밀면보다 쫄깃하고 감자 면보다는 부드럽다.
독특한 식감이다. 빨간 양념장도 별미다. 전혀 자극적이지 않게, 그저 적당히 풍미를 돋운다.
식초나 겨자를 따로 넣지 않아도 된다. 유명한 덴 다 이유가 있는 거다.
가난한 사람들은 척 보면 안다. 지금 저 사람이 얼마나 힘이 들며. 배가 고픈지.
그 자신부터 그걸 겪어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서로 돕고 보듬는다.
나누고 보탠다. 도움을 주고 힘이 되려 애쓴다. 달걀조차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닭알탕을
고안하고 아기 욕조만 한 그릇에 국수 담아 내주는 건 그런 정과 애틋함의 표현이다.
그 순간만이라도 서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잘 아는 그들이다.
송림도 닭알탕 거리나, 화평동 냉면골목은 주인장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리를 잡았다.
물론 시작은 경쟁 관계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다투거나 시기하지 않는다. 경쟁 이전에 그냥 이웃이며, 동반자다.
그래서 넉넉하게 양보하고 배려한다. 돈만 보면 그리하지 못한다. 사람을 보니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 골목엔 사람 냄새가 물씬하다.
그건 절대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퀴퀴한 냄새 따위가 아니다. 익숙하고 기분 좋아지는 친구의 향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