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인 <하나와 앨리스(花とアリス)>에서 11년의 세월을 넘어 에니메이션의 형태로 하나와 앨리스의 속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시간적인 배경은 오히려 전작보다 이른 시점인, 두 주인공이 중학교 시절 서로 조우하게 되는 순간을 그려내고 있죠. 그래서 이 영화는 전작보다 더 풋풋하고, 더 영롱하며, 더 경쾌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게다가 워낙 만화적인 개성의 두 주인공들이었던지라, 에니메이션이라는 표현의 도구는 이 영화를 위해서 참 적절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또한 신카이 마코토가 조금 더 소년적이고, 이와이 슌지가 조금 더 소녀적이라고 하더라도, 두 감독이 분명 크게 공유하고 있는 서정이 있는데, 이와이 슌지가 본작을 통해 처음으로 채택한 에니메이션이라는 도구는 그 공유점을 더욱 명확히 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대체적으로 낭만주의적인 작가들의 희구가 그러하듯이, 이를 실낙원의 꿈이라고 지칭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어딘가에 존재했던, 분명 우리가 경험했던 것만 같은,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이 가장 생생하게 호흡하고 있었던 그 아름다운 시공에 대한 동경이 두 감독의 작품에는 주요하게 드러나고 있어요. 이에 대해서도, 신카이 마코토는 잃어버린 낙원 밖에 아직도 남겨진 자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면, 이와이 슌지는 잃어버린 낙원 안에 여전히 남겨진 것에 보다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죠. 그래서 이는 다시 한 번, '어떻게 살아가는가?'와 '무엇이 존재하는가?'의 물음으로 귀결되기도 합니다. 은하철도 999 속에서 전자의 물음은 철이에 대한 것이고, 후자의 물음은 메텔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얘기한 것처럼 소년, 소녀에요.
이 철이로 은유하고자 하는 소년적 질감과, 메텔로 은유하고자 하는 소녀적 질감의 구분은 적어도 이 지점에서는 중요한데, 왜냐하면 본 작품에 대해 '과연 그때 그 시절에는 무엇이 존재했는가?'를 묻는 물음의 발화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이 물음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명확해질 수 있는 까닭입니다. 철이와 메텔의 은유에서 드러내보자면, 철이는 곧 시간을 사는 소년이며, 메텔은 곧 영원을 사는 소녀입니다. 때문에 '과연 그때 그 시절에는 무엇이 존재했는가?'라는 이 물음은 곧 영원이 묻는 물음이며, 그 자체로 영원성을 함축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존재했을까요? 이 작품에서는 그때 어떠한 것이 존재했다고 그려내고 있는 것일까요?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그 과도기, 그렇기 때문에 이미 아이도, 아직 어른도 아님으로써 단지 소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시절에 정말로 존재했던 것은, 타자와 관계맺고자 하는 가슴뛰는 만남의 소망,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의 애틋한 꿈이었습니다.
좋아하는 남자애의 옷에 벌을 집어넣고, 학우들의 배척에서 벗어나 지지를 얻기 위해 마녀가 되고, 고백의 편지 대신에 혼인신고서를 보내고, 짝사랑의 대상을 소재로 도시전설을 만들고, 그리운 이의 정보를 얻기 위해 전혀 모르는 인물을 미행하고, 그의 집 앞에서 밤을 새워 기다리며, 자신만의 허구로 현실을 채색해 낭만적인 시나리오 속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그 모든 일들이, 바로 너무나도 만남이 그리워, 스스로 만들어낸 만남의 향기에 도취되기까지 했던 마음의 소망이었습니다.
나와 타인이 정확하게 분리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융합 관계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타인이라는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경계로 다가가고자 했던 반짝거리는 시선이 분명 거기에 있었으며, 투박한 풋내만큼이나 아무 손익계산없이 경계를 넘어가고자 했던 정직하고 투명한 몸짓이 분명 거기에 있었으며, 경계가 곧 벽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 벽 앞에서 조금은 슬펐던 가슴이 분명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청춘이라고 부르는 삶의 어느 시절, 만남을 꿈꾸었던 바로 그 생생한 순간에 대한 모든 것일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빛나고, 두근거리며, 그립고, 애틋하며, 가슴아린 그 모든 것일 것입니다.
이것들은 분명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 모든 것입니다. 이것들이 존재했던 그 빛나던 시절은 분명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바로 우리 옆에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딘가에, 다른 누군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옆에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그 시절을 경험한 이래 단 한 번도 그 시절은 우리를 떠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떠난 적이 없기 때문에 돌아올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만나고 싶어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지금도 만나고 싶으며, 앞으로도 만나고 싶어할 것이라는 사실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만남의 소망은 곧 영원의 소망입니다.
'그 시절에는 대체 무엇이 존재했는가?'
영원이 묻고, 영원이 답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만남입니다. 만남의 소망입니다.
이 만남의 소망은 마음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영원한 만남은 곧 마음의 영원한 소망입니다. 마음이 영원히 만남을 소망한다는 바로 이 사실이 우리가 마음을 직접 만남으로써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소망하는 것은 특정한 어떤 대상과의 만남이 아니라, 만남 그 자체입니다. 다른 대상을 통해 만남을 이루려고 하는 모든 마음은 본 작품에서도 묘사되듯이 늘 허무진 혼자만의 꿈으로서 거듭 좌절될 뿐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움직임은 분명 아름답고 애틋하지만, 동시에 명확한 좌절입니다.
우리는 유년기에는 만남이 아닌 융합을 이루고 있고, 소년소녀 시절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대상을 통해 만남의 꿈을 꿉니다. 그리고 꿈의 좌절을 겪으며 우리는 이제 이 만남이 대상과의 만남이 아니라, 마음과의 만남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만남을 주관하는 어른이 되어가죠.
이 작품은, 정말로 우리에게 그 두근거리는 만남의 감수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전해줍니다. 그것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의 가슴을 애틋하게 매만져옴으로써 드러내고자 합니다.
만남은 시공을 넘어 언제나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영원의 사실이며, 그 사실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은 가장 생생하게 꽃피어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영원의 사실이라는 것을 지금 우리가 만남으로써 증명해야 합니다. 바로 마음을 만남으로써, 마음이 꿈꾸었던 그 모든 만남은 먼 과거 속에 기회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언제라도 눈부시게 펼쳐질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대상은 반드시 사라지는 까닭에, 대상에 대한 모든 추구는 필연적으로 잃어버린 낙원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러나 대상을 통해 알려진 만남은 영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이 아닌 만남 그 자체에 대한 소망은 언제나 늘 우리 옆에 존재해왔던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낙원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 낙원은 언제나 빛나는 시절이며, 언제나 성취된 소망이고, 언제나 일상에서 매순간 재생되는 본 작품의 서정의 공간입니다. 곧, 그윽한 영원의 내음입니다.
영원을 사는 소녀가 묻고 답합니다. 만남이 존재한다고 말이죠. 단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이, 지금 우리 옆에도 우리가 그토록 꿈꾸어왔던 만남이 영원히 존재하고 있다고 말이죠.
단지 대상에 대한 추구를 없앰으로써(殺), 즉 대상(人)에 대한 지향을 포기함으로써, 그 결과 펼쳐질 영원의 사건(事件)에 대한 그녀의 증언을 우리는 기쁘게 듣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