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45]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
노인은 고개를 숙인 채 뼛조각에 묻은 흙을 정성스레 닦아 내고 있었다 . 무슨 귀한 물건마냥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신중히 손질하고 있는 노인의 자그마한 체구를 우리는 둘러서서 지켜보았다 . 모두들 한동안 입을 다물었고 , 나는 흙에 적셔진 노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
“ 땅속에 누운 사람의 잠을 살아 있는 사람이 깨워서야 되겠소 . 또 그럴 수도 없는 법이고 . 원통한 넋이니 죽어서라도 편히 눈감도록 해야지 , 암 . 그것이 산 사람들의 도리요 …… 하기는 , 이렇게 불편한 꼴로 묶여 있었으니 그 잠인들 오죽했을까만 .”
노인은 어느 틈에 꾸짖는 듯한 말투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 두개골과 다리뼈를 꼼꼼히 문질러 닦은 뒤 , 노인은 몸통뼈에 묶인 줄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 완강하게 묶인 매듭은 마침내 노인의 손끝에서 풀리어졌다 . 금방이라도 쩔걱쩔걱 쇳소리를 낼 듯한 철사 줄 은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 살을 녹이고 뼈까지도 녹슬게 만든 그 오랜 시간과 땅 밑의 어둠을 끝끝내 견뎌 내고 그렇듯 시퍼렇게 되살아 나오는 그것의 놀라운 끈질김과 냉혹성 이 언뜻 소름끼치도록 무서움증을 느끼게 했다 .
노인은 손목과 팔에 묶인 결박까지 마저 풀어낸 다음 허리를 펴고 일어서더니 줄 묶음을 들고 저만치 걸어 나갔다 . 그가 허공을 향해 그것을 멀리 내던지는 순간 , 나는 까닭 모르게 마당가에서 하늘을 치어다보며 서 있는 어머니의 가녀린 목줄기와 그녀가 ⓐ 아침마다 소반 위에 떠서 올리곤 하던 하얀 물 사발 이 눈앞에 떠올랐다가 스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 멀리 메마른 초겨울의 야산이 헐벗은 등을 까내놓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 사위는 온통 잿빛의 풍경이었다 . 피잉 , 현기증 이 일었다 .
ⓑ 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가 모래밭을 걸어오고 있었다 . 돌돌거리며 흐르는 물소리를 거슬러 강변 모래밭을 어머니가 혼자 저만치서 다가오고 있었다 . 모래밭은 하얗게 햇살을 되받아 쏘며 은빛으로 반짝 였다 . ⓒ 허리띠를 질끈 동인 어머니의 치맛자락이 흐느적이며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 나는 햇살에 부신 눈을 가늘게 오므리고 줄곧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 그때였다 . 꿈속에서처럼 나는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는 한 사내의 환영을 보았다 . 그건 아버지였다 . 언젠가 ⓓ 어머니의 낡은 반닫이 깊숙한 옷가지 밑에 숨겨져 있던 액자 속에서 학생복 차림으로 서 있던 그대로 그건 영락없는 그 사내였다 . 나를 어머니의 뱃속에 남겨 놓은 채 어느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밤 , 산길을 타고 지리산인가 어디로 황황히 떠나가 버렸다는 사내 . 창백해 뵈는 뺨에 마른 몸집의 그 사내가 어머니와 함께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 놀란 눈으로 풀밭에 앉아 나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이윽고 어머니의 눈썹과 코 , 입의 윤곽과 야윈 목줄기까지 뚜렷이 드러날 만큼 가까워졌을 때 사내의 환영은 어느 틈에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 하얗게 반짝이는 모래밭 위로 ⓔ 어머니가 찍어 내는 발자국만 유령처럼 끈질기게 그녀의 발꿈치를 뒤따라오고 있을 뿐이었다 .
우리는 관 대신에 신문지로 싼 유해를 맨 처음 그 자리에 다시 묻어 주었다 . 도톰하니 봉분을 만들고 뗏장까지 입혀 놓고 보니 엉성한 대로 형상은 갖춘 듯싶었다 . 노인은 술을 흙 위에 뿌려 주었다 . 그리고 자신이 먼저 한 모금 마신 다음에 잔을 돌렸다 . 오 일병이 노파가 준 북어를 내놓았고 , 덕분에 작은 술판이 벌어졌다 . 음복인 셈이었다 .
“ 얌마 , 이런 느닷없는 장례식도 모두 너희 두 놈들 때문이니까 , 자 한 잔씩 마셔라 .”
“ 그래 그래 . 어쨌든 너희들은 좋은 일 했으니 천당 가도 되겠다 .”
소대장이 병을 기울였고 다른 녀석들도 낄낄대며 한마디씩 보태었다 .
술이 가득 차오른 반합 뚜껑을 나는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 저것 봐라이 . 날짐승도 때가 되면 돌아올 줄 아는 법이다 . 어머니가 말했다 . 저만치 웬 사내가 서 있었다 . 가슴과 팔목에 철사 줄을 동여맨 채 사내는 이쪽을 응시하며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 퀭하니 열려 있는 그 사내의 눈은 잔뜩 겁에 질려 있는 채로였다 . 애앵 . 총성이 울렸고 그는 허물어지듯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 불현듯 시야가 부옇게 흐려 왔다 .
아아 .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쓰러져 누워 있을 것인가 . 해마다 머리맡에 무성한 쑥부쟁이와 엉겅퀴꽃을 지천으로 피워 내며 이제 아버지는 어느 버려진 밭고랑 , 어느 응달진 산기슭에 무덤도 묘비도 없이 홀로 잠들어 있을 것인가 .
반합 뚜껑에서 술이 쭐쭐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
[ 중략 부분의 줄거리 ] 노인과 함께 산을 내려와 헤어지면서 ‘ 나 ’ 는 어머니와 있었던 일을 회상한다 .
어머니는 훌쩍 등을 돌리고 앉았다 . 그리고는 주섬주섬 저고리 섶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 외아들 앞에선 좀체 눈물을 비치지 않던 그녀였다 . 아무리 앓아누웠을 때라도 입술을 앙당물고 애써 태연해 보이던 그녀가 쭐쭐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
아아 ,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 어머니가 그토록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려 왔었음을 . 내 유년 시절의 퇴락한 고가의 마루 밑 그 깜깜한 어둠 속 에서 음습하고 불길한 냄새와 함께 나를 쏘아보고 있던 한 사내의 눈빛을 , 그리고 청년이 된 지금까지도 가슴을 새까맣게 그을려 놓으며 깊숙한 상흔으로만 찍혀져 있을 뿐인 그 증오스런 사내의 이름을 , 어머니는 스물다섯 해가 넘도록 혼자서 몰래 불씨처럼 가슴속에 키워 오고 있었던 것이다 . 어머니한테 그 사내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 다만 곱고 자상한 눈매 로서만 , 나직한 음성 으로서만 늘 곁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
하지만 그녀가 울고 있는 건 그 미련스럽도록 끈질긴 기다림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 아니 , 사실상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 그녀의 기다림이 얼마나 까마득하게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자꾸만 자꾸만 밀려 나가고 있는 것인가를 말이다 . 스물다섯 해의 세월이 , 스스로 묶어 놓은 그 완고한 기만 이 목에 잠기어 흐느낌도 없이 지금 어머니는 울고 있는 것이었다 . 밥상을 받아 놓은 채 나는 고개를 처박고 앉아 있었다 . 눈앞에는 우리 가족의 그 오랜 어둠과 같은 미역 가닥이 국그릇 속에서 멀겋게 식어 가고 있을 뿐이었다 .
이제 노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그새 수북이 쌓인 눈을 밟으며 나는 오던 길을 천천히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 임철우 , 「 아버지의 땅 」 -
41. 윗글의 서술상의 특징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① 서술자의 내적 독백을 통해 서사를 전개하고 있다 .
② 빈번한 장면의 전환을 통해 긴박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
③ 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인물의 분열된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
④ 여러 인물의 내면을 서술하여 인물들의 다양한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
⑤ 공간적 배경에 따라 서술자를 달리하여 상황을 입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42. < 보기 > 를 참고하여 윗글을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 [3 점 ]
< 보기 >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한국 전쟁 때 생사 불명된 존재이다 . 아버지의 부재로 주인공은 어린 시절 상처를 입게 된다 . 이때부터 ‘ 망각 ’ 과 ‘ 어둠 ’ 으로 표상되는 아버지는 ‘ 기억 ’ 과 ‘ 빛 ’ 으로 표상되는 어머니와 대척점에 놓인다 . 그런데 군복무 중 우연히 발견한 유골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전쟁의 희생자였음을 깨닫고 두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쟁의 폭력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아픔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
① ‘ 살을 녹이고 뼈까지도 녹슬게 만든 ’ ‘ 철사 줄 ’ 의 ‘ 끈질김과 냉혹성 ’ 은 전쟁의 폭력성과 비극성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임을 보여 주는군 .
② 주인공이 유해를 수습하다가 ‘ 현기증 ’ 을 느낀 것은 불현듯 망각했던 아버지를 ‘ 곱고 자상한 눈매 ’, ‘ 나직한 음성 ’ 으로 기억해 냈기 때문이겠군 .
③ 주인공에게 ‘ 은빛으로 반짝 ’ 이는 어머니의 표상은 ‘ 마루 밑 그 깜깜한 어둠 속 ’ 의 아버지의 표상과 대비되는 것이겠군 .
④ 주인공이 아버지에 대해 ‘ 지금 어디에 쓰러져 누워 있을 것인가 .’ 라고 연민을 느끼는 것으로 보아 주인공은 아버지 역시 전쟁의 희생자였음을 깨달은 것이겠군 .
⑤ 어머니가 ‘ 스스로 묶어 놓은 그 완고한 기만 ’ 에 울고 있다는 주인공의 생각은 어머니를 전쟁의 희생자라고 인식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군 .
43. ‘ 노인 ’ 에 대해 설명한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① 전쟁의 상처를 보듬는 인간애를 보여 주고 있다 .
② 제의적 의식과 절차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
③ 전통 윤리의 가치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 .
④ 전쟁의 원인에 대해 무관심한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
⑤ 가족 간 대립을 중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 .
44. ⓐ ~ ⓔ 를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
① ⓐ 는 남편의 귀환을 소망하는 어머니의 간절함을 보여 주는 것이겠군 .
② ⓑ 에서 ‘ 나 ’ 의 마음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짐작할 수 있겠군 .
③ ⓒ 는 세파에 시달려 온 어머니가 남편에 대한 굳은 믿음이 한때 흔들렸음을 보여 주는 것이겠군 .
④ ⓓ 에서 남편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 어머니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겠군 .
⑤ ⓔ 는 오랜 세월 어머니가 외로운 삶을 살아왔음을 보여 주는 것이겠군 .
45. 윗글의 장면을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정리할 때 , 다음 중 가장 뒤에 오는 것은 ?
① 밥상에서 미역국이 식어 가는 장면
② 군인들이 봉분을 만들고 음복을 하는 장면
③ 노인이 철사 줄 묶음을 허공에 던지는 장면
④ 어머니가 내게 등을 돌리고 앉아서 우는 장면
⑤ 아버지가 밤에 산길을 따라 도망치듯 떠나는 장면
도움자료
[41~45] ( 현대소설 ) 임철우 , 「 아버지의 땅 」
이 작품은 한국 전쟁으로 인한 가족의 비극사를 통해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조명하고 있는 작품이다 . 주인공은 어린 시절 이념적인 문제로 사라진 아버지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는다 . 어른이 된 주인공은 군대에서 훈련을 받던 중 유해 수습 과정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갈등을 해소하고 극복하게 된다 .
41. [ 출제의도 ] 작품의 서술상의 특징을 파악한다 .
유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환영을 보는 장면과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주인공의 내적 독백이 잘 드러나고 있다 .
[ 오답풀이 ] ② 긴박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 ⑤ 현재와 과거의 공간이 달라지고 있지만 서술자는 ‘ 나 ’ 로 일관된다 .
42. [ 출제의도 ] 외적 준거를 통해 작품을 이해한다 .
‘ 곱고 자상한 눈매 ’ 와 ‘ 나직한 음성 ’ 은 주인공이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 기억하는 부분이다 .
[ 오답풀이 ] ④ 유해 수습 과정을 통해 망각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를 기억해 낸 주인공은 무덤도 묘비도 없이 어딘가에서 잠들었을 아버지를 떠올리며 연민의 정서를 느끼고 , 전쟁의 희생자였음을 인식하게 된다 .
⑤ 돌아오지 못할 것을 짐작하면서도 25 년 동안이나 아버지의 귀환을 믿고 기다려 온 어머니 역시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라고 인식한 것이다 .
43. [ 출제의도 ] 인물의 역할을 파악한다 .
노인은 나에게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고 용서와 화해의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로 , 전쟁의 상처를 보듬는 인간애를 보여 주고 있다 .
[ 오답풀이 ] ② 유해를 수습하는 의식 자체를 강조하는 인물은 아니다 . ③ 전통 윤리의 가치를 보여주는 인물은 아니다 . ④ 세태를 비판하는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 ⑤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로 보기 어려우며 가족 간의 대립을 중재하는 것도 아니다 .
44. [ 출제의도 ] 문맥의 흐름을 고려하여 작품을 이해한다 .
ⓒ 는 주인공이 어머니의 환영을 떠올리는 장면으로 어머니가 살아온 삶과 관련한 것이지 , 남편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
[ 오답풀이 ] ⑤ 아버지와 함께 걸어오던 어머니의 환영에서 어느 순간 아버지는 사라지고 어머니의 발자국만 그녀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은 , 어머니가 오랜 세월 아버지의 부재로 외롭게 살아왔음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45. [ 출제의도 ] 사건 순서를 재배열하여 서사 전개를 이해한다 .
어머니와의 장면은 과거 회상이고 노인과 유해를 수습하는 장면은 현재이다 . 따라서 일어난 순서대로 장면을 재배열하면 ⑤→④→①→③→② 이다 .
카페 게시글
[문제] 현대소설
[2015 3월 11일] 3학년 수능 모의고사(A,B형) - 임철우, 「아버지의 땅」
구렛나루
추천 1
조회 3,022
15.03.14 19:59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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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중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