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말했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도구 취급을 받고, 그 상처마저도 하소연할 곳이 없을 때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단언컨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0대 여자의 침착한 고독을 그린 일본 만화 <수짱의 연애>의 주인공 ‘수짱’처럼 현대 여성들은 그저 삶을 받아들이고 싶다. 자크 에밀 블랑슈가 썼듯이, 인습적 삶에 대한 경멸을 오만하게 시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저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거나 삶과 정직하게 대면한다는 건 여성들에게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종종 “인생, 하드보일드하게 가는 거야” 호기롭게 외치다가도 “어쩔 수 없이 사이보그가 돼야겠어”라고 비장하게 고백하는 친구들을 만나곤 한다.
오히려 우울과 불안의 신경증에 내몰린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은 영화다. 폭력적이고 마초적인 남성들의 피 칠갑 영화가 판을 치는 가운데, 가슴 아프고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되어서도 자기 극복 의지를 버리지 않는 신경쇠약 직후의 여배우들. 그녀들이 우리의 자화상이 되어 내면과 마주 보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 <그래비티>의 산드라 블록에게 정신과 의사 하지현은 중증 우울증 진단을 내렸다. 삶의 방향을 잃은 채 오로지 자신의 ‘제한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산드라 블록. 미끄럼틀에서 미끄러져 죽은 딸에 대한 끝나지 않은 애도로, 지구에선 석양이 질 때까지 도로를 미끌어져가는 운전만 하며 배회하는 그녀. 산드라 블록이 부서진 우주선 잔해들로 상징되는 상처들을 격렬한 속도로 떠돌 때, 그런 상황에서 그녀의 바닥난 여성성을 부드러운 수다로 회복시키는 남자 조지 클루니야말로 그녀를 살린 가장 훌륭한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을까.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은 좀더 거리를 두고 웃으며 바라볼 수 있다. 영화가 시작 되면 우리는 케이트 블란쳇이 길을 잃은 상태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녀가 혼잣말을 할라 치면 비행기 옆자리의 할머니나 같은 벤치의 아줌마나 다들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려 한다. 비벌리힐스의 호화 주택에서 살다가 파산으로 빈털터리가 되어 과대망상과 피해 의식에 시달리는 여성을 케이트 블란쳇은 기가 막히게 연기했다. 쫄딱 망해 가난한 동생 집에 얹혀살면서도 비행기는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명품 옷과 백 차림으로 혼자서 끝없이 중얼거리는 신경증적 모습. 저택 안에서 칵테일 파티를 열고 승마나 즐기던 귀부인이 치과에서 변덕스러운 할머니나 상대하는 리셉셔니스트로 전락하다니! 칼 라거펠트가 오직 케이트 블란쳇을 위해 선물했다는, 영화 내내 줄기차게 입고 나오는 샤넬 재킷은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 현실감각은 없고 분노 조절도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벗지 않은 샤넬 재킷이 그녀를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우리 여자들은 믿고 싶다.
사실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비비안 리에 대한 오마주다. 몰락한 명문가 출신인 블랑시가 농장과 저택을 잃은 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여동생 스텔라가 살고 있는 뉴올리언스의 ‘낙원’에 오면서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시작된다. 블랑시는 초라한 현실에 안주해버린 동생도 마음에 들지 않고, 동생의 거친 남편 스탠리와도 사사건건 부딪친다. 블랑시는 새로운 남자들에게 기대 외로움을 잊으려고 한다. 자신을 정신병원으로 데려갈 의사에게 “난 언제나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해왔어요”라고 말하는 블랑시의 대사는 그녀의 불안한 욕망을 대변한다. 실제와 허구 사이의 ‘이중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갈등을 그린 이 고전의 주인공처럼, 캐릭터와 동화되어 극심한 우울증으로 인생을 마감한 대표적 배우가 비비안 리다. 비비안 리는 영원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속 블랑시로 살았다. 수많은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대사는 미국 남부 농장주 스칼렛 오하라의 것이었을 뿐. 하지만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이런 신경증적인 캐릭터에 괴로워하기보다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 그들에게 공감한다면, 우스꽝스러운 허세에 빠져서라도 현실의 비참함을 잊으려는 그 여배우들을 경멸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을 그렇게 경멸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극도의 슬픔을 느낀 것은 <멜랑콜리아>의 커스틴 던스트와 <데인저러스 메소드>의 키이라 나이틀리 같은 경우였다. <멜랑콜리아>에서 커스틴 던스트는 중증 우울증의 전형이다. 행복의 절정인 결혼식에서 키스를 퍼붓는 신랑을 밀어내고, 처음 보는 남자를 덮쳐 성관계를 하고, 하객에겐 악담을 퍼붓는다. 그녀의 직장 상사는 결혼식장에서조차 광고 카피를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어머니는 결혼식을 혐오한다는 말로 딸의 시작을 조롱하고, 아버지는 딸에게 남긴 쪽지에서 딸의 이름을 잘못 호명할 만큼 무관심하다. 결혼식은 생산, 삶의 풍성함, 번식욕 등이 어우러진 가족 잔치인데, 그 결혼식장엔 우리가 감춰왔던 가족 간의 불화, 인간의 치졸함, 자본주의의 잔악함이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데인저러스 메소드>에서 키이라 나이틀리의 발작의 근원도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이었다. 정신이 아픈 두 여자는 반대로 ‘우울증의 힘’도 보여준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연기한 실제 인물인 사비나 슈필라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어떤 남성 분석가들보다 용감한 정신분석가가 됐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나중에 자신을 착취하고 가르쳤던 스승 융이 우울증에 걸렸을 때, 그를 찾아가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경이롭다. <멜랑콜리아>의 커스틴 던스트 또한 지구 종말이라는 외적 재난 앞에서 오히려 초연하다.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냉철한 예지자의 용기까지 보여주며.
우울한 여자들이 가진 이런 비범함에 대해 수잔 손탁은 <우울한 열정>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울한 인물은 죽음의 그림자에 쫓기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우울증 환자다. 혹은 세계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울한 인간의 관찰에 스스로를 내맡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 라스 폰 트리에 또한 커스틴 던스트를 통해 ‘내게 이 세계는 이미 죽어 있는 무의미한 세계다. 그러니 당장 지구의 종말이 온들 호들갑 떨 일이 뭐 있는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낙관적 실천가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종말은 닥친다’는 사실은 오히려 고난이나 고통 앞에서 담대한 용기를 생성시키지 않는가.
영화 <히스테리아>는 우울증에 걸린 여성들을 손 마사지 요법으로 치료하던 의사가 바이브레이터를 발명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19세기 비엔나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기 중심적인’ 여성을 ‘히스테리아’ 환자로 분류했다. 그리고 그녀들이야말로 ‘성적 욕구’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이끌어냈다. 영화 <히스테리아>에서 욕망에 충실한 진보적인 여성 매기 질렌할을 히스테리아로 ‘처벌하려는’ 법정 클라이맥스 풍경은 살벌하다. “폭력적으로 날뛰는 히스테리아 여성의 자궁을 적출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게 웬 현대판 마녀사냥인가 싶을 즈음, 바이브레이터를 발명한 젊은 의사는 법정에 나와 ‘양심선언’을 한다. “히스테리아는 날조된 병입니다. 히스테리아는 이기적이고 자존심만 센 남편과 사랑을 나눌 때 신통치 않아서 생긴 병입니다!”라고.
<사이드 이펙트>의 루니 마라는 아내들의 내면에 잠재한 ‘남편 죽이기’의 욕망을 현실화 시켰다. 결혼한 많은 여성들의 마음속 적은 곧 ‘남편’이며, 그들이야말로 가정이라는 울타리 내에 가장 친밀한 ‘우울 유발자’라고 할 수 있다. <사이드 이펙트>에서 루니 마라의 얼굴은 <밀레니엄> 시리즈에서보다 훨씬 더 무표정하다. 정신과 의사 주드 로의 신약 임상 시험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 그녀는 몽유병 상태에서 남편을 칼로 찔러 죽인다. 그것이 과연 약의 부작용일까? 무의식의 발현일까? 주드 로는 루니 마라을 일컬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여배우”라고 했지만, 남자들은 모른다. 여자들이 아내와 엄마라는 ‘돌봄 노동자’로 살면서, 그 자신의 정체성까지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케빈에 대하여>의 틸다 스윈튼은 그리하여 ‘괴물’을 낳는다. 아버지와 여동생을 정원에서 죽인 후, 친구들을 학교 체육관에 가둔 채 집단 사살한 아들 케빈. 원하지 않는 아이를 낳고, 그래서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없었던 엄마 틸다 스윈튼은 모든 여자들의 ‘공포와 죄책감’의 원형이다. 주홍글씨를 가슴에 단 헤스터 프린처럼, 틸다 스윈튼은 자식을 잃은 이웃들의 저주를 받으며, 다시 교도소의 자식을 찾아간다. 여기서 희망은 있는 것일까? 정신과 의사 정혜신 박사는 얘기했다. “미국의 연쇄살인범이 사형 집행 전 엄마와의 통화에서 ‘내 안에는 아직도 엄마가 기억하는 내가 있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살아가면서 엄마가 기억하는 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하는 나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런 나를 떠올릴 수 있게 터치해주는 사람이 한 명만 있다면 모든 인간은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까미유 끌로델>의 줄리엣 비노쉬는 가장 가슴 아픈 캐릭터다. 정신병원에 유배된 채 엄마에게 제발 자기를 꺼내달라고 호소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갑다.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과대망상과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병자’라고 분류하고 격리시킨다. “내가 뭘 잘못했나요? 고양이랑 혼자 살아서요?” “로댕은 내가 자기보다 더 잘될까 봐 내 것을 뺏기만 했어”와 같은 그녀의 호소는 정박아들과 수녀들과 시리게 푸른 아비뇽의 자연 속에서만 메아리칠 뿐. 유일하게 면회 오는 동생 폴을 기다리며, 그가 잘못 배달된 선물인지도 모른 채, 어린아이처럼 행복해한다. 결국은 죽을 때까지 정신병원에서 보낸 그녀가 청회색 드레스를 입고 아비뇽의 들판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은, ‘자기 앞의 생’을 담담히 걸어가는 성자처럼 보이며, 줄리엣 비노쉬의 클로즈업은 흑백영화 <잔다르크의 수난>을 상기시키듯 고립된 채 신성하다.
신경과학자들은 “예술가가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이 예술가를 만든다”고 분석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억압된 자아를 가진 사람은 그것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기만의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그 공상이 시와 소설, 그림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몇 년 전 <디 아워스>라는 영화가 개봉됐을 때, 여자들은 그 상상을 뛰어넘는 ‘여배우들의 신경증’에 환호했다. 매부리코를 만들어 붙인 니콜 키드먼(버지니아 울프)은 코트 주머니에 돌을 채워 넣은 채 워즈 강에 몸을 던지고, 줄리안 무어는 절망적인 상냥함이 깃든 얼굴로 아들의 생일 케이크를 굽다가 호텔로 뛰쳐나가 흰 시트 위에서 약을 털어 넣고, 메릴 스트립은 젊은 날 연인 리처드의 문학상 파티를 준비하다 그의 자살을 목도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메릴 스트립은 예의 그 모나리자 같은 미소를 지으며 겸손하게 타이른다. 서로를 위해 살아남으려고 하는 건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이야. 그렇지 않니? 니콜 키드먼과 줄리안 무어와 메릴 스트립은 우리를 조금씩 울게 만들지만, 그 눈물은 비애라기 보다는 공감의 황홀이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 신경증을 앓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여배우들의 위로와 함께 버지니아 울프의 잠언을 권한다. “우리는 명확한 이유도 없이 인생을 열심히 사랑하고 추구하고 자기 멋대로 꾸미고 자기 둘레에 쌓아 올리고는 허물어 뜨리고 한순간도 쉴 새 없이 다시 새로이 창조한다.” -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