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일 2021년 02월 28일 최양업 토마스 사제 시복기원미사
미사 시작 때 말씀드린 것처럼, 내일(3월1일)은 최양업 토마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내일 성모당에서는 11시에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기원하며 대주교님 주례로 미사가 봉헌됩니다.
현재 최양업신부님은 '가경자'라고 불리고 있지요? 한국천주교회에서는 20년전부터 시복준비작업과 시복청원을 올렸고, 2016년에 교황청 시성성에 최양업 신부님을 ‘가경자’로 선포했습니다.
가경자라는 호칭은 복자품에 오르기 전 단계에 있는 하느님의 종들을 가리키는데, 시복시성 후보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몇 년도에 태어났을까요? 금년이 탄생 200주년이니 당연히 1821년에 탄생하셨지요. (김대건신부님과 동갑. 8월 21일/ 최양업 3월 1일)
아버님이 누구신지 아시죠? 103위 성인 중 최경환 프라치스코 하비에르이십니다 어머니는 이성례 마리아이신데, 2014년에 프란치스코교황님 오셨을 때, 시복되심
최양업 신부님의 부모님과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인 김재준 이냐시오 성인 역시 1839년 기해박해 때에 모두 순교하셨고, 신학생의 부모라 하여 더욱 더 고초을 겪으셔야 했다고 합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15살 되던 해 1836년에 모방신부님에 의해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당시 파리 외방전교회의 극동 대표부가 있던 곳이 마카오였고, 임시신학교가 거기 있었지요. 그래서 그 3명은 사제수업을 위해 중국을 거쳐서 그 멀고 먼길을 걸어. 마카오로 간 것입니다. 한겨울 12월3일에 한양을 떠나 다음해 6월7일에 도착했다고 하니 그 여정이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웠을까, 추위에 얼마나 떨었을까 싶습니다.어린 소년들인데..너무나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안타깝게도 최방제 신학생은 공부하던 중에 그만 병이 걸려서 부모형제 없는 머나먼 타국 땅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마카오에서 5년간 공부한 다음. 최양업신학생은 (1842년에) 중국 소팔가자라는 곳에- 파리외방전교회의 만주지역 선교거점이었고, 아주 오래된 교우촌입니다-있으면서 신학공부를 계속했고, 1년 뒤에 헤어졌던 김대건신학생도 그곳으로 와서 함께 있게 됨. (그래서 지금도 소팔가자에는 천주교신자가 95%나 되고, 김대건기념과도 있고, 우리나라 교우들이 만들어준 ‘김대건로(金大建路)’가 있습니다.)
-(1844년에) 두분은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같이 받았는데, 그후 김대건부제는 페레올 주교님과 함께 조선입국을 위해 노력하다가 중국 상해에서 1845년에 먼저 사제서품을 받았고, 최양업 부제는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조선 입국을 몇차례 시도하다가 계속 실패를 했습니다. 1846년. 47년, 48년, 49년 계속 실패했지요. 그러다가 김신부님보다 4년 늦게 1849년 4월에 부활 제2주일에 중국 강남서 사제서품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 김대건 신부님은 조선으로 들어갔었고, 입국 다음 해인 1846년에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이미 순교를 한 뒤였습니다. 사제로서 13개월만에 너무나 빨리 돌아가신 것이지요.
최양업신부님은 유학길에 나선지 14년 만에 조선 땅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순교하고 나니, 정말 조선땅에 방인 사제가 최신부님 한분 뿐이지요... 정말 당신이 하실 일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입국해서 서울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곧바로 충청도로 가서 페레올 고주교님을 만나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바로 산악 지대의 교우촌을 찾아가 사목활동을 시작하셨다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사목활동이 돌아가실 때까지 11년 6개월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선교 활동은 한마디로 발로 뛰는 사목, 교우촌을 찾아가는 사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신부님을 한국의 바오로사도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그만큼 열성적으로 사목활동을 펼치셨다는 것이죠. 당시 페레올 주교님도 다블뤼신부님도 건강이 좋지않으셔서, 최양업신부님의 활동이 너무나 절실했습니다. 쉴 여가가 없었지요.
뒤에 새로 관할구역을 받았는데, 충청도 경상 좌우도와 전라 좌우도 5개도에...
공소가 127개나 되어서 1년에 7천리씩. 무려 2,800여㎞를 걸었다고 합니다. 최신부님이 쓴 편지에 보면,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해야 하고, 공소 순방이 끝나면 한밤중에 모든 일을 마치고 새벽녘 동이 트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또 당시 신자들이 너무나 사제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애처러운 마음에 쉽게 떠날 때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자없는 양같이 측은히 여기신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의 위험 속에서도 하루하루 산골짜기를 오르내리며 교우촌을 찾아다니셨지요. 그것도 관헌의 눈을 피해 짚신을 신고서 주로 산길로만 다녀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찾아, 걷고 또 걸었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최양업 신부님을 우리는 ‘길 위의 사도’, ‘땀의 증거자’로 부르게 되는데. 유학길에 오른 15살 이후 늘 길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신부님은 해마다 선생신부님들께 편지를 보냈는데 얼마나 바빴는지, 1852년과 1853년에는 편지를 한통도 보낼 수 없었다 합니다.
-참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
교우촌을 찾아다니는 일 외에도 최양업신부님은 신자들이 교리를 쉽게 배우고 이해할 수 있도록 베르뇌 주교님이 편찬하신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도 하고, 천주교 교리를 문답형식으로 만든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을 번역하고, 천주교 주요교리를 4.4조나 7.7조의 가사로 쉽게 배우고 전할 수있도록 만든 것을 천주가사라고 하는데, 그런 천주가사를 지어서 보급하는 일도 하셨다 합니다. (베르뇌 주교님. 남종삼. 남상교등 양반들도 했다 함)
최양업신부님은 부제 시절(1847년경) 홍콩에 머물 당시 아주 중요한 일을 한가지 하셨는데, 교우들(현석문 가를로, 이재의 토마스)이 수집한, ‘기해박해 순교자(73명)·병오박해 순교자(9명)들의 행적’을 페레올 주교님이 최부제에게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도록 맡겼는데, 여행중에 사전도없이 그것을 번역해 냈고, 라틴어로 번역된 이 문서는 교황청으로 보내져, 10년뒤 1857년에 그 82분이 가경자가 되는 기초사료가 됐고, 그 뒤 1925년 82분 중 79분이 복자가 되신 것이지요.. 그분들의 시복식. 시성식의 숨은 공로자가 바로 최양업신부님이셨습니다.
또 최신부님은 당신들처럼 3명의 신학생들을 선발해 말레이시아 페낭에 있는 신학교에 보내시기도 했습니다.
신학생때의 선생신부님인 리브아 신부님의 증언에 따르면 최양업신부님은 김대건신부님보다 훨씬 건강하고 체력도 좋았다고합니다. “토마스는 아주 건강합니다. 토마스는 계속해서 유리한 상태에 있고 천주님께서 그의 건강을 허락해 주신다면 조선 포교지를 위하여 유익한 몸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불쌍한 안드레아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늘 위병과 두통과 요통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김대건신부님은 피의 순교를 했지만, 최양업신부님은 그만큼 온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힘과 노력과 땀으로 일하셨고 그렇게 우리 한국교회를 키우는 자라게 하는 땀의 순교자가 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최신부님은 1861년 사목활돌을 보고하려고 서울로 가던 길에 문경새재 초입의 어느 주막집에서 음식을 잘못 먹고, 겹친 과로로 말미암아 장티프스에 걸리고 맙니다. 그래서 발병한지 보름만인 6월 15일에 40세의 나이로 선종하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선종하기 8시간 전 그곳에서 170~180리 떨어진 배론신학교의 푸르티에 신부가 달려와 병자성사를 주었는데 선종할 당시 신부님은 예수, 마리아 이름을 되풀이하여 부르면서 돌아가셨다 합니다.
그리고 배론 뒷산에 안장됐습니다. 지금 무덤이 배론에 있습니다.
[이후 안동교구는 2002년에 문경새재 입구의 진안리 주막터를 매입해서 성지로 축성했지요. 그곳이 바로 진안성지입니다.]
최양업신부님은, 오늘 독서에서, 주님의 명이기에 자신의 아들마저 하느님께 바치는 믿음을 보인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두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신것처럼 참으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로 일생을 바치신 분이 분명합니다.
비록 피를 흘려 목숨 바친 순교자는 아니지만,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성실한 하느님의 종으로서, 사제로서, 모든 힘을 다 쏟은 땀의 순교자, 백색 순교의 삶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기도가 주님 대전에 받아들여져 신부님의 시복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고, 그 은혜로 우리 한국교회의 믿음도 더욱 성장해 갈 수있기를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