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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한형조 교수 ‘불교와 문화’서 주장>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교리’가 아니라 ‘과학’이고, ‘신앙’이 아니라 ‘지식’이다.” “한국불교는 과감한 자기부정과 에포케가 약하고 그 결과 배타성은 강하되, 관용과 포용은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불교는 집단과 체제에 발목 잡혀 있다.” 그동안 직설 화법으로 불교계 모순을 지적하곤 했던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이번에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파격적인 내용으로 불교계의 ‘몰개성’과 ‘집단 체제’ 등을 전면 비판하고 나섰다.
한 교수는 「불교와 문화」(12월호) ‘격외불교 한담’이란 글을 통해 “종교라는 용어의 뉘앙스, 혹은 권위에 휘둘리지 말고, 실상(實)을 더욱 분명하고 가까이 살펴봐야 한다”며 “종교(宗敎)는 19세기 중엽 이전까지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용어로 일본이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급속히 학습하고 습득하기 위해 발진시킨 대규모 번역사업의 산물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에 따르면 종교의 원어는 ‘reliogion’이고 그 기저에는 유대교, 가톨릭, 이슬람, 기독교 등 창조주 신을 공통의 뿌리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측면에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종교를 세속을 넘어 영원의 가치를 구현하려는 근본적 열망이라고 정의하거나 보이지 않는 것의 실재를 확인하고 그 합치를 삶의 길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경우 불교는 어떤 체계보다 ‘종교적’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 교수는 그럼에도 불교는 여전히 종교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체제’가 아니고, 아울러 배타적인 아이덴티티로 화석화하는 것을 스스로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맹목적 믿음을 강제하는 도그마가 아닐뿐더러 불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교리’가 아니라 ‘과학’이고 ‘신앙’이 아니라 ‘지식’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한 교수는 “불교는 열린 지식이자 방편적 체계이며 불교와 불교 아닌 것과의 경계 또한 불분명하다. 대승 중관 이래 선은 도저한 우상파괴와 박스 밖에서 생각하기를 촉구해왔다”고 강조한 후 지금 불교계에 그 정신이 살아있지 않음을 통렬히 비판했다. 한 교수는 “한국불교는 과감한 자기부정과 에포케(판단중지)가 약하고 그 결과 배타성은 강하되, 관용과 포용은 턱없이 부족하다”며 “불교가 ‘집단’과 ‘체제’에 발목 잡혀 있다”고 질타했다. 한 교수는 이어 “불교 내부의 문제를 지적하면 모르쇠로 일관하고 목소리를 낸 사람은 공공연히 이지메 왕따를 당한다”며 “불교인이 저지르는 비리나 범죄에는 대체로 관대하고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위협하는 주장과 행동을 오히려 옹호하는 것도 자주 보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또 “왜 일방적으로 ‘환경’이라는 이름(名相)에 열광하고 그것을 기치로 내건 행동과 집단을 그저 옹호하고 ‘평등’이라는 코드에 불문곡직 손을 들어주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한 뒤 “불교의 평등은 모든 존재가 다들 자신의 힘과 빛으로 살아가자는 독려이지,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평등을 주창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한 교수는 “특정한 행동이나 가치를 자동적으로 고취하지 않기에 길은 서로 엇갈리고, 불교와 선의 역사에는 수많은 개성들이 명멸했다”며 “가까이는 만해와 용성의 길이 부닥치고, 경허와 효봉이 서로 다른 길을 갔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지금 불교에 이런 다양한 개성들, 파격의 자유로운 주체들이 있는가. 당금 불교는 왜 이토록 획일적이고 몰개성적인가. 다시 용맹 성찰해야 한다. 한국의 불교와 불교계가 지금 불교라는 ‘이름’에 붙잡혀 그 ‘체제’와 ‘집단’의 논리에 너무 깊이 안주해 있는 것은 아닌지를…. 혹시 정치적 변화에 법답게 대응하지 못하고 전략 부재로 떠밀리며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 그 무기력과 타성으로 인한 것은 아닌지 근본적으로 점검이 필요하다”며 “역시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한형조 교수의 격외불교(格外佛敎) 한담 -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한형조_서울대 철학과 및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을 졸업했다(철학박사).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한국학부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에 『왜 동양철학인가』,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중고생을 위한 고사성어 강의』,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화엄의 사상』, 『한글 세대를 위한 불교』 등이 있다.
“수보리야, 내가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진리라고 한다.”
(須菩提, 所言法相者, 如來說卽非法相, 是名法相. 『금강경』 31장 「知見不生分」)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이 말에 자동적으로 ‘반응’하기 이전에, 양구(良久)부터 하고… 회광반조(回光返照), 그 반응의 곡절, 혹은 메커니즘부터 살펴보자. 조고각하(照顧脚下), 불법(佛法)은 어디나 있고, 불법조차 불법의 대상이고 현장이다.
1.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당장 모욕감에 주먹을 부르쥐는 사람들이 있다. 절집에 몸담고 불법을 존중하는 사람들의 대체적 반응이 그럴 터이다. 그들에게 “종교가 아니다”라는 말은 “미신이거나 시시하다”는 콧방귀 정도로 들린다. 그러나 그런 선이해는 정당한가. ‘종교’라는 용어의 뉘앙스, 혹은 권위에 휘둘리지 말고, 즉 ‘이름(名)’에 붙잡히지 말고, 실상(實)을 더욱 분명하고 가까이 살펴보자. 불교는 변계소집, 즉 이름과 형상을 객관화하지 못하면 해방은 없다고 단언하지 않던가. 그 성찰은 ‘불교’라는 이름, ‘종교’라는 이름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왜냐. ‘종교(宗敎)’는 19세기 중엽 이전까지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일본이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급속히 학습하고 습득하기 위해 발전시킨 대규모 번역사업의 산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놀라지 마시라,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한자어의 90% 이상이 이때 만든 번안 한자들이다. 이때 ‘철학(哲學)’과 더불어, ‘이성(理性)’이나 ‘감성(感性)’, ‘인식(認識)’과 ‘논리(論理)’와 더불어 ‘신학(神學)’과 ‘종교(宗敎)’를 창안하였다. 짐작하겠지만 신학의 원어는 theology이고, 종교의 원어는 reliogion이었다.
2. 불교에는 창조주의 개념이 없다
요컨대 ‘불교가 종교냐?’라는 물음은, 불교가 진정 ‘최상의, 마루(宗)가 되는 가르침(敎)’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체계가 서구의 릴리전(religion) 개념과 전통에 합당하느냐는 것이다(부연하자면 이 사태는 종교만이 아니고, 전 학문과 과학에 전방위적으로 덮어씌워진 오리엔탈리즘의 질곡이고 타율성이다. 이 제국주의 너머 여여(如如)한 사태의 실상과 만나기 위해서는 고고학적 개념의 성찰을 치밀하게 거쳐야 한다). 릴리전의 뿌리에 단연 ‘유일신’이 있다. 유대교, 가톨릭, 이슬람, 기독교가 창조주 신을 공통의 뿌리로 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유일신이 있어, 세상과 만물을 창조했으며, 이 세상을 규율하고, 사후의 영혼을 심판하고 역사의 종말을 관장한다.” 불교는 이 창조주의 개념과 그의 역사(役事) 비슷한 것을 갖고 있는가. 단연코 없다. 그렇다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릴리전을 일본 학자들이 종교(宗敎)로 번역한 것은, 종(宗)에 담긴 ‘최고의’라는 의미 외에 ‘조상신과 그에 관련한’이라는 오래된 유교적 관념을 의식한 것이다. 유교는 이 점에서 확실히 ‘종(宗)에 기반한 교(敎)’임을 변명하고 나설 터이지만, 그러나 이 한자적 기원 또한 불교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어 보인다.
3. 불교는 영원의 가치를 구현하려는 종교다
그럼에도 ‘불교는 종교이다’ 관점을 이동해보자. 종교의 기반은 초월적 인격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은 ‘세속(世俗)’을 넘어선 전망이기도 하다. 일상의 관심, 그 욕구 충족의 실용적 전망 너머에 영원과 본성을 향한 인간의 오래된 관심이 있다. 불교가 진속(眞俗), 즉 진리와 세속을 극명하게 가르는 것을 보라. 세속을 넘어 영원의 가치를 구현하려는 근본적 열망이라는 점에서 불교는 누구보다, 어떤 체계보다 ‘종교적’이다.
18세기 이후 아시아의 효율적 지배를 위해 그 문화와 습속을 연구하던 유럽의 학자들은 유일-창조주-인격신에 기초하지 않은 종교적 전통이라는 광대한 지평과 맞닥뜨렸다. 루돌프 오토는 그 곤혹 위에서 ‘종교’를 다시 정의했으니, 그 중심에 유일신 대신 ‘궁극적 관심’이라는 탈인격적 기반이 들어섰다. 불교는 그 초월적 열정과 세계관의 정교함, 수행의 체계성에서, 나아가 전파된 지역의 광대함을 고려하면 가히 종교의 대표 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윌리엄 제임스 또한 종교를 인격이나 교리가 아닌 심리학에서, 그의 표현을 빌리면 래디칼한 경험에서 찾는다. 그는 종교성의 핵심을 ‘보이지 않는 것의 실재성(reality of the unseen)’으로 정의했다. 요컨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살고 있고, 그 존재와의 대면이 삶의 책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언뜻 선가의 말이 떠오르지 않는가. ‘부모도 태어나지 않았을 때의 네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바로 이 실재를 가리킨다. 법신(法身)이라 불리는 것, 대승(大乘)이라 불리는 것, 그리고 이윽고 불성(佛性)이라 불리는 우주적이면서 자기 내면적인 이 존재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고, 오직 천안(天眼)과 불안(佛眼)으로 볼 수 있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이다. 이 실재는 그러나 창조의 유일신의 특성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이 궁극적 실재가 불교만의 고유는 또한 아니다. 노장(老莊)은 그것을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희미(希微)의 존재(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 其下不昧, 『노자』 14장)’라고 말했다. 유교는 『중용』에서 “숨겨진 것보다 더 드러난 것은 없고, 은미한 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莫見乎隱 幕顯乎微 故君子 愼其獨也.)… 그리고 우리는 이 존재를 한 시도 떠날 수 없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고 한 바 있다. 인간의 일은 이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대면과 통합, 또는 일치를 위한 것이다. 이 점에서 불교와 유교, 그리고 노장이 다를 바 없다. 이 언급에 저기 누가 묻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잔다. 그런 허황한 말로 지위와 출세, 권력과 재화에 갈길 급한 나를 막지 마라.” 불교는 이들을 가로막고 말리지 않는다. 업장(業障)이 두텁거나 인연이 아닌 뭇 삶(衆生)들은 들어도 쇠귀에 경 읽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옅든 강하든 이 현실, 세속의 삶에서 모종의 불편(uneasiness)을 느끼고 산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잘나가는 인생도 무엇인가 어긋나 있다 싶고, 누구나 충분히 행복하지 않으며, ‘옛집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조바심에 흔들린다. 그렇지 않은가. 이 불안과 조바심을 해결하지 않으면 구원이나 해방(deliverance)은 없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것의 실재를 확인하고, 그 합치를 삶의 길로 제시하는 것을 종교라 한다면, 불교만한 종교가 다시 없다. 그는 불교가 동서양의 다른 종교적 전통과 근본 이념을 공유하면서도, 구원의 열망이 남다르고, 아울러 유효한 수행 체계를 정교하게 개발해온 점에서 어느 종교보다도 수승하다고 말했다.
4. 다시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그렇지만 다시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체제’가 아니고, 아울러 배타적 아이덴티티로 화석화하는 것을 스스로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1) 우선, 불교는 도그마가 아니다. 일방적 ‘명령’을 책에 담은 것도 아니고, 맹목적 믿음을 강제하지도 않는다. 불교는 자신을 ‘실용적 목적’하에서만 한정하며, 그렇기에 강제가 아닌 설득의 방식을 띤다. 믿지 않는 자를 감옥에 보내거나 사지를 찢겠다고 협박하지 않는다. 여기가 기독교나 이슬람과 극명하게 갈리는 곳이다. 그래서 어느 종교보다 평화적이고, 덜 억압적이다. 종파 간이나 종교 간 분쟁이나 갈등은 불교의 정신하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2) 불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교리’가 아니라 ‘과학’이고, ‘신앙’이 아니라 ‘지식’이다. 이 지점은 아주 중요하다. 불교는 가령 일본의 신도처럼 습속이나 민족에 의존하지 않고 보편적 인간의 토대 위에서 발언한다. 습속과 언어를 넘어 보편적 인간에 호소했기에 아시아를 넘어 지구적 전파와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불교의 핵심은 무전제의 관찰과 이해이다. 『반야심경』의 첫머리를 기억할 것이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믿는 자’가 아니라 이름 그대로 ‘보는 자’이다. 그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는 ‘객관적 사태’를 조견(照見), 즉 ‘봄으로써’ 그 지식과 통찰을 통해 궁극적 구원을 얻었다. 여기 아무것도 신비나 강제가 없다.
5. 불교는 도그마가 아니고 배타적이지도 않다
나는 말한다. 불교는 보편적 인간학 위에 서 있으므로 그 지식은 도그마가 아니고, 아울러 특수한 집단의 배타적 체제하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금강경』은 이 원리를 강조한다. “수보리야, 내가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진리라고 한다.”
불교는 열린 지식이자 방편적 체제이며, 불교와 불교 아닌 것과의 경계 또한 불분명하다. 대승 중관 이래 선은 도저한 우상파괴와 박스 밖에서 생각하기를 촉구해왔다. 지금 그 정신이 아직 살아 있는가. 한국 불교는 과감한 자기부정과 에포케가 약하고, 그 결과 배타성은 강하되, 관용과 포용은 턱없이 부족하다. 불교TV(btn)에서 로버트 버스웰 UCLA대학교 교수는 한국의 선이 책에서 배운 바와는 달리 우상파괴적, 자기부정적, 체제일탈적 행동들을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고 웃으면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스님들이 제도적 틀 안에서 각자 일상의 소임에 바쁘고 역할은 격자화되어 있어서, 참선 같은 본분사조차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는 말까지 했다. 이 소임 중심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선의 정신일 수도 있지만, 자칫 출세간의 승단을 세간의 사회집단처럼 세속화할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다.
6. 불교에는 다양한 개성들, 파격의 자유로운 주체들이 있다
불교가 ‘집단’과 ‘체제’에 발목 잡혀 있다. 이를테면, 불교 내부의 문제를 지적하면 모르쇠로 일관하고 목소리를 낸 사람은 공공연히 이지메 왕따를 당한다. 불교인이 저지르는 비리나 범죄에는 대체로 관대하고,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위협하는 주장과 행동을 오히려 옹호하는 것도 자주 보았다. 불교는 또 왜 일방적으로 ‘환경’이라는 이름(名相)에 열광하고, 그것을 기치로 내건 행동과 집단을 그저 옹호하는가. 또 왜 ‘평등’이라는 코드에 불문곡직 손을 들어주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불교의 평등은 모든 존재가 다들, 자신의 힘과 빛으로 살아가자는 독려이지,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평등을 주창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지금 환경을 부정하고 평등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름 아래의 실상을 따져야 한다는 말이다. 불교는 특정한 행동이나 가치를 자동적으로 고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길은 서로 엇갈리고, 불교와 선의 역사에는 수많은 개성들이 명멸했다. 가까이는 만해와 용성의 길이 부닥치고, 경허와 효봉이 서로 다른 길을 갔다. 지금 불교에 이런 다양한 개성들, 파격의 자유로운 주체들이 있는가. 당금 불교는 왜 이토록 획일적이고, 몰개성적인가. 다시 용맹 성찰해야 한다. 한국의 불교와 불교계가 지금 불교라는 ‘이름’에 붙잡혀, 그 ‘체제’와 ‘집단’의 논리에 너무 깊이 안주해 있는 것은 아닌지를…. 혹시 정치적 변화에 법답게 대응하지 못하고 전략 부재로 떠밀리며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 그 무기력과 타성으로 인한 것은 아닌지 근본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역시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유신론의 전제는 반드시 이 세계에 대하여 이 세계 밖에 있는 창조주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도 인간 밖의 구세주가 없으면 안 된다. 그러나 불교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으며, 구세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과 우주 밖에 있는 초월적 존재자로서의 신의 개념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불교는 분명한 무신론이다.
그럼 불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유신론의 형상화가 아닌가? 대승불교는 대중에게 불타의 참 가르침을 전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소승불교는 개인의 수양에 초점을 맞추는데, 대승불교에서 불상을 도입하면서부터 엄청난 대중운동으로 발전, 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러한 계기를 통해서 자멸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도 있다. 즉 불교의 진면목은 무신론이었는데, 불상을 도입하면서 오히려 유신론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다. 불상숭배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에 대한 일반재가신도들의 불교 이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고자 하는 유일 신관과 비슷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일반 신도들의 불상에 대한 집착은 현실적으로 불타를 중심으로 한 일신교 사상이라 말해도 하등의 변명이 있을 수 없는 수준으로 불타를 유신론화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