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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자료는 이사무의 Soft한 해군사(http://home.paran.com/grim1980/)에서 퍼온자료임을 밝힙니다.
1. 대서양의 귀부인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보듯이, 항공기에 의한 여행이 보편화 될 때까지는 여객선에 의하지 않고는 대서양을 횡단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수많은 기선회사들이 보다 대형의, 보다 안락한, 그리고 보다 빠른 여객선을 취항시켜서 더 많은 승객을 유치하기 위해 제각기 경쟁을 했었죠. 당시 "거함거포"가 오늘날의 핵무기와도 같은 전략적 중요성을 지녔다면, 이런 대형 여객선들은 국가의 자존심을 건 경쟁과도 같은 의미를 지녔죠. 이제는 그런 대형 여객선들의 시대도 이미 흘러가 버렸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여행을 일종의 낭만처럼 여기곤 합니다. 이 글은 그런 삶을 살았던, 그리고 살아야했던 한 여객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진수되는 퀸·메리]
[뉴욕으로의 처녀항해에 나섬]
1936년, 영국의 큐나드(Cunard) 기선회사는 8만톤급 호화 여객선 퀸·메리를 취항시켰습니다. 길이는 약 310m, 갑판 수만 해도 12개 이상에 (선저부터 최상부까지 12층이란 이야기입니다), 승객 1957명과 승무원 1174명(총 3131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객선이었죠. 퀸·메리의 크기는 그때까지의 최대 여객선인 마제스틱(RMS Majestic)을 단숨에 50% 상회하여 사상 유례없는 방대한 용적을 승객에게 제공했던 것입니다. 또한 40,000마력의 터빈 4기를 탑재하여(4축추진) 그 속력도 30노트를 초과하였고 대서양 횡단에 필요한 날짜를 크게 단축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대의 다른 객선들과 마찬가지로 호화로움에 있어서도 그녀는 일류의 배였습니다. 가장 설비가 뒤떨어지는 3등실조차도 과거 정기여객선의 그것에 비하면 천지차이에 가까운 준수함을 보여줬던 것이죠.
[식당 : (상)1등실 / (중)2등실 / (하)3등실]
[휴게실 : (상)1등실 / (중)2등실 / (하)3등실]
[객실 : (상)1등실 / (중)2등실 / (하)3등실]
그렇지만 그녀는 불행하게도 유럽에 전운이 자욱한 불안한 시대, 그리고 대서양 횡단 여객선의 장래에 암운이 밀려오게 될 시대에 태어났던 것이고 그 일생은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2. 귀부인에서 회색유령으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 영국은 강력한 독일군에 맞서기 위해 많은 병사를 필요로 했지만, 원래 본국의 인구는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영연방의 각 국가에서 병력을 조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등등 나름대로 병력을 준비할 수 있는 나라들마다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군에 입대하여 다가올 전투를 준비하게 되었죠. 하지만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캐나다에서조차도 주 전장인 유럽까지는 너무나 먼 거리였고 각 국가에서 병력을 징집한다고 해서 그들이 곧바로 유럽 현지의 전력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영연방 병사들을 영국까지 실어나르려고 해도 일반 항로에는 필수물자의 수송을 위해 다수의 화물선이 취항하고 있었고 이들은 절대로 다른 용도로 전용시킬 수가 없었죠. 한편, 그다지 수가 많지 않은 정기 항로의 여객선만으로는 대규모의 병력을 충분히 실어나르기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때 주목된 것이 바로 대서양 횡단용의 고속 여객선들이었습니다. 오직 대양 횡단일수의 단축만을 목표로 한탓에 연비가 나쁘고 평소에는 국가의 보조를 받지 않으면 재정 면에서 효율이 안좋은 고속 여객선이지만, 이런 상황에 이르면 인원 수송에 대단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 거대한 용적은 1만명까지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고 순양함에 맞먹는 속력은 통상파괴함이나 잠수함의 위협을 최소한으로 억누를 수 있었으며, 양호한 대양 항해 능력을 지녀 어떤 바다에서도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들 고속 여객선들은 다른 군함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30노트 이상의 고속을 장시간동안 지속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들 여객선에 탑재된 기관은 2일이나 3일 정도라도 거의 100%의 출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배의 순항속도는 최대속도의 90% 정도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죠. 즉, 28-30노트의 속도로 3일 이상 항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주 : 일반 군함에서는 순항속도가 잘해봐야 최고속도의 절반 이하였고 그나마도 순항속도 or 경제속도가 20노트를 넘기기 어려웠습니다)
[귀부인에서 평범한 여성으로 : 회색으로 재도장 중인 모습]
[수송선으로 개장된 후의 객실]
[수송선으로 개장된 퀸·메리]
퀸·메리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어서 1940년 3월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에서 군 수송선으로 개장을 받게되었습니다. 여객선으로서의 사치스러운 내장 설비들이 제거되고 그 자리에는 대신 해상의 병영이 들어왔던 것이죠. 또한 상갑판에는 자함 방어를 위한 20mm 기관포 수 문과 12문의 로켓 발사기, 그리고 거리측정기 및 중앙 통제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수송선으로서의 수용 인원수는 본래 5,000명 정도였습니다만, 개장을 거듭하여 수용 인원수를 늘린 탓에 최종적으로는 한번에 16,600명 정도를 수송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수송 항해중의 모습. 갑판이 바글바글 하군요]
[미어터질 것만 같은 상갑판]
[함내생활이란 대충 이런 느낌]
[무료한 나날들...이라고 해도 5일 정도밖에 안걸리죠-_-;;]
본래 승무원과 승객을 합쳐서 3,000명 정도를 수용하던 배에 아무리 공간활용도를 높였다고는 해도 불시에 정원을 5배나 늘렸으니 당연히 거주성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죠. 침대수가 모자라서 함내생활은 2교대로 행해졌고(1명이 침대에서 잠을 자는동안 나머지 1명은 할 일없이 갑판 위를 어슬렁거리는 식입니다-_-;;), 식사는 1일 2회를 6조로 나눠서 공급했다고 합니다. 취사장도 하루에 12번이나 식사를 공급하려면 정신이 없었겠지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끝나자 마지막으로 퀸·메리는 여객선으로서의 흑백 도장을 지우고 회색의 미채 위장색으로 재도장되었습니다. 말그대로 숙녀가 화려한 치장을 벗고 수수한 군복으로 갈아입은 듯한 모습이었고 퀸·메리는 이후 재도장된 미채색을 따라 회색유령(Gray Ghost)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독일에 있어서도 이런 거대 여객선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이 배는 연합국의 전쟁수행 능력에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 될만한 거대한 크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죠. 때문에 독일은 현상금까지 걸고 잠수함을 매복시키거나 항공기에 의한 공격도 계획해봤지만 이것들은 최후까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독일인들이 그토록 바랬던 광경이지만 결국 이뤄지진 못했죠]
여객선의 출발 날짜와 항로는 엄중한 비밀으로 붙여졌지만 대부분 호위함은 붙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붙일 수가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25노트를 가볍게 초과한 속력으로 4일간이나 계속해서 항해할 수 있는 군함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퀸·메리는 1938년에 대서양을 3일 20시간 남짓으로 횡단하는 기록을 남긴 적이 있었는데, 그 평균 속력은 31노트를 초과하는 것이었죠. 물론 이런 사정은 상대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퀸·메리를 추격할 수 있는 독일 수상함 역시 전무했던 실정이었습니다. 뭐 어느 정도의 거리까지는 퀸·메리를 따라 붙는 것이 가능했던 순양함들이 있긴 했지만 아마도 그런 명령을 받았다면 그 함의 기관장은 꽤나 골치를 썩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3. 대서양 한복판의 대참사
퀸·메리는 1940년 5월부터 수송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최초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에서 영국간을 왕복하는 항로에 취역했으나 미국의 참전 이후에는 일본의 침공에 대비해서 미 본토의 미군을 오스트레일리아로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이 항로는 적도를 관통하여 기후 면에서 다소 위험한 곳이었는데 심할 때는 4시간마다 고온을 견디지 못한 환자들의 장례식을 치르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이후 1942년 중순에는 다시 대서양 전역으로 복귀하여 뉴욕과 영국간의 수송임무에 종사했습니다. 특이한 점으로는, 이 당시 영국의 처칠 수상이 미국 방문을 위해 3번 정도 퀸·메리를 이용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보안을 위해 선객 명부에는 "워든 대령"이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이 VIP를 위해서 수상이 탑승할 시에는 개전전의 일부 객실 설비를 복구하기도 했다가 수상이 내리면 다시 철거하기도 했다는군요.
이렇게 몇 차례의 수송항해를 거친 다음.. 1942년 9월 27일, 퀸·메리는 10,400여 명의 병사를 싣고 뉴욕을 출발하여 단독으로 대권항로를 타고 영국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겨우 5일만에 여객선은 영국에 근접하였고 독일 항공기의 공격이 가능한 수역에 접어들었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은 이 애지중지하는 거대 여객선을 지키기 위해, 그때 투입할 수 있었던 최대의 호위를 내보냈습니다. 그 호위함은 방공 순양함으로 개조되었던 1차대전형의 경순양함 큐라소(HMS Curacoa)와 몇 척의 구축함 전대였지요.
[경순양함 큐라소. 1918년 준공. 기본배수량 4,015톤]
1942년 10월 2일 아침 9시, 대서양 서쪽으로부터 접근해오는 퀸·메리를 육안으로 확인한 큐라소는 속도를 25노트로 증속한 뒤 방향을 크게 바꾸면서 여객선의 앞에 서고, 항로를 선도하는 위치에 자리잡았습니다. 이때 퀸·메리는 잠수함으로부터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지그재그 항법을 취하고 있었죠. 이는 잠수함의 위험이 있는 수역에서는 필수로써, 이러한 패턴으로 항해를 하면 만약 잠수함에 발견되어도 그들이 목표의 미래 위치를 추측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지그재그의 패턴에 따라서는 오히려 적의 품안으로 뛰어드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것은 꽤 유효한 전술로 생각되고 있었습니다. 최대속도가 25노트에 불과했던 큐라소가 퀸·메리를 간신히 쫓아갈 수 있었던 것은 퀸·메리가 이 지그재그 항법을 취하느라 약간 거리의 손실을 보는동안 최단거리의 직선항로를 최대의 속도로 젖먹던 힘까지 써가며 달려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퀸·메리가 취하고 있던 지그재그 패턴은 다음과 같았죠.
① 기준 항로를 4분간 진행한 다음 침로를 우현으로 25도 변경하고 이것을 8분간 진행함.
② 침로를 좌현으로 50도 변경하여 8분간 항해하면 다시 기준 항로로 복귀하며 이것을 4분간 진행함.
③ 좌현으로 25도 변침하여 8분동안 나아가고, 우현으로 50도 변침하여 8분간 진행함.
④ 기준 항로에 돌아온 지점에서 키를 좌현으로 25도 돌림으로써 1회의 패턴이 완료. 후는 이것을 반복함.
그런데 이 때 퀸·메리의 자이로·컴퍼스에는 오차가 있었고, 그들이 108도라고 말한 기준 침로는 사실 106도였습니다. 그렇긴 해도 이것은 굉장한 문제는 아니었고 합류를 마쳤던 함대는 새로운 항로를 따라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구축함을 대잠 진형에 전개하고 호위함대 기함인 큐라소는 퀸·메리의 전방 5해리에 위치했죠. 이 함대는 상당히 고속인 편이므로 측면이나 후면에서의 위협은 낮다고 판단하여 대 잠수함 경계를 전방에 한정된 범위에만 집중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항공기에 의한 습격은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30노트를 상회하는 고속이라 해도 항공기의 속도 앞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기 때문에 대공 호위함인 큐라소는 호위 대상에 충분히 접근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죠.
[사건 당시 큐라소와 퀸·메리의 시간별 위치 및 침로]
이 당시 양함의 크기는 현격히 차이가 났습니다. 퀸·메리의 배수량은 군함 기준으로 환산하면 대략 60,000톤 전후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호위함인 큐라소의 배수량이 겨우 4,000톤이었던 것과 비교가 됩니다. 크기 면에서는 퀸·메리가 길이 310m, 폭 36m였던데 비해 큐라소는 길이 137m에 폭 13.3m 정도에 불과했으며, 높이 역시 퀸·메리의 함교는 해상에서 30m 가까운 높이에 있지만 큐라소의 그것은 약 10m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정도로 차이가 나면 만약 큐라소가 퀸·메리에 근접할 경우 퀸·메리의 함교에서는 큐라소의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선수의 그림자에 가리게 되지요)
[퀸·메리와 큐라소의 크기 비교]
다시 상황으로 돌아가자면, 13시경 퀸·메리의 함교에서는 점심식사를 위해 한창 당직 교대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수인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교대한 후임 당직사관(B)은 큐라소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고 판단, 나름대로 적절히 침로를 조정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퀸·메리의 침로가 이상하다고 느낀 선장이 함교에 들어와 침로를 다시 원상복귀 할 것을 지시하였고 상황은 다시 퀸·메리와 큐라소가 지나치게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는 불안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죠. 14시 4분, 점심을 먹고온 전임 당직사관(A)이 다시 함교로 돌아와 당직근무를 인수인계 받았습니다. 후임 당직사관(B)은 도중의 침로 변경과 선장의 지시 등에 대해 인수인계 했지만 현재 퀸·메리와 큐라소의 위치가 불안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인수인계를 끝낸 전임 당직사관(A)은 주위를 둘러본 후 처음으로 큐라소가 함교의 사각에 들어가 있다는 것, 즉 이상할 정도로 근접해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곧바로 지그재그 항해를 중지하기로 결심하고 조타수에게 타를 좌현으로 약간 돌릴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 정도로 근접해 있는데 큐라소 측에서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을테니 큐라소가 곧바로 우현으로 변침하고 거리가 멀어질 것을 기대했던 것이죠. 그러나 순양함은 특별히 새로운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위험을 느꼈던 당직사관(A)은 "좌현 최대"를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거대한 퀸·메리는 이미 선수를 돌릴 수 있는 시간도 없었고 뒤로부터 그대로 큐라소를 들이받아버렸던 것입니다. 그 날카로운 뱃머리는 경 순양함의 얄팍한 현측장갑을 어렵지 않게 절단해버린 후, 정확하게 후방 3분의 1 정도에 위치한 기관실 부근에 격돌했습니다. 금속과 금속이 스치는 날카로운 굉음을 내며 26.5 노트의 속도로 6만톤의 선박이 순양함을 절단하고 지나간 것입니다. 큐라소는 완전히 두 조각으로 절단되어버렸고, 후방부는 곧바로 가라앉아버렸지만 전방부는 전복된 상태로 간신히 부유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떨어진 보트나 파쇄물이 해상에 흩어지고 순양함의 승무원들은 순식간에 해상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사고로 인해 손상된 퀸·메리의 선수 : 순양함 1척을 두동강낸 것치고는 손상이 약한 편이군요]
이런 사고를 낸 퀸·메리 측은 완전히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분위기에 휩싸였지만, 그래도 퀸·메리는 속력을 10노트로 떨어뜨렸을 뿐 멈춰 서는 일 없이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충돌로 인한 손상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순 없었지만 어쨌든 중대한 손상이 아닌 경우에는 절대로 해상에서 정지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칫 해상에서 정지할 경우 잠수함의 손쉬운 표적이 될 수 있었으므로 항해중에는 절대 정지하지 않는 것이 상층부 차원의 절대적인 명령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죠. 즉, 달리 말하면 소수의 승무원을 구출하는 것보다도 퀸·메리에 탑승하고 있는 10,000명의 안전쪽이 더 우선시 되었던 것입니다.
퀸·메리는 호위함대의 구축함에 큐라소와 충돌했다는 사실을 알렸고 구축함들은 곧 집합하여 생존자의 구조를 시작했습니다. 퀸·메리 측의 손상은 그다지 크지 않았고 다소 속도를 올려도 견딜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퀸·메리는 속력을 13노트로 올리고 참사의 장소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한편, 호위함대의 구축함들은 최대한의 노력으로 큐라소 승무원의 구조에 임했지만 이미 함체는 완전히 침몰해버린 상태였고 결국 338명의 사관과 수병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한 사고 당시 함교에 있던 사관중 살아남은 것은 큐라소의 함장 뿐이었고 이는 후일 사고 원인의 구명에 장애를 초래했죠.
4. 그후의 퀸·메리
이 해난사고는 전시의 사건이긴 하지만 전투중의 사고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해난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심의는 충돌의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가를 놓고 양측의 공방이 지루하게 이어지기만 하였고, 결국 1949년까지도 분명한 결론이 나지 않은채 양쪽 모두가 책임이 있다는 약간은 흐지부지한 판결이 내려짐으로써 종결되었습니다. 한편 큐라소의 사망자들에게는 사건 직후 큐나드 기선회사 측에서 개인당 40파운드의 보상금이 지급되었고 최종 심판 종결 후에는 개인당 300파운드가 최종 지급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죠.
[해외파견 미군 귀국수송 임무중의 퀸·메리. 좌측은 자매함 퀸·엘리자베스]
어쨌거나... 퀸·메리 그 자체는 영국에서 응급수리를 거친 후 1942년 12월에 보스턴에서 드라이 도크에 들어가 완전수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946년까지 수송선 임무를 계속하다가, 1946년 9월 27일에 수송선 임무에서 해제되어 다시 민간 소속으로 돌아오게 되었죠. 여객선으로 재개장하는데는 꼬박 10개월이 걸렸고 퀸·메리가 다시 대서양 정기 항로에 취역한 것은 1947년 7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항공기에 의한 여객수송이 활발해지던 시기였습니다. 대다수의 여행객들은 아무리 편안하고 빠르더라도 배보다는 비행기에 의한 여행을 선호했고 이제 정기 여객선의 시대는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던 것이죠. 1963년에 이르면 퀸·메리는 처음으로 크루즈 여객선 업무를 시작하였고, 이는 정기 여객선보다는 점점 더 배의 중심적인 역할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조차도 점점 더 수지가 맞지 않는 상태가 돼가고 있었고 1967년 당시 퀸·메리는 항해시에 1일당 수천 파운드씩의 적자를 내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퀸·메리의 마지막 항해 : 사우샘프턴에서 캘리포니아로]
[롱비치에 영구 정박중인 퀸·메리]
결국 퀸·메리는 1967년 9월 16일에 마지막 항해를 끝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롱비치에 매각되었습니다. 오늘날 퀸·메리는 롱비치 항에 조용히 정박해있으며, 그곳에서 박물관과 호텔, 그리고 회의장으로써 제 2의 함생을 살고있습니다. 젊은 시절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귀부인이 나이 들어서 시골에 은거한 뒤 화려했던 옛 시절을 추억하듯, 그녀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은 대양 정기 여객선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때를 잔잔한 추억처럼 떠올려볼지도 모를 일입니다.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http://www.queenmary.com/
- http://hull534.freeshell.org/
- http://www.sterling.rmplc.co.uk/visions/index.html
- http://members.aol.com/~bry1976/qnmary.htm
- http://uncommonjourneys.com/pages/queenmary.htm
- http://www.d3.dion.ne.jp/~ironcl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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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 퀸메리호가 수송함으로 개장된적이 있었군요;; 이번에 새로 알고갑니다^^ 대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