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박민서 베네딕토 신부님 ㅣ서울대교구 청각언어장애인 사목 전담
청각장애인(聽覺障碍人)이나 농인(聾人)이 아닌 사람을 청인(聽人)이라고 합니다.
본래 청인이었던 청각장애인들 중에 청각장애인이
되고 싶어서 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각장애인들은 청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기적이 아니면 청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태어날 때 청각장애인으로 살고 싶은지,
청인으로 살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으시고,
어떤 사람이든 당신께서 계획하신 대로 창조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2살 때 열병으로 청력이 점점 약해지더니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왜 저를 청각장애인이 되게 하셨냐고 물어보아도,
알게 해 달라고 청해도 그분은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 장애인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되었다(참조: 요한 9, 3)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저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청각장애인이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사제로 살아가면서
청각장애인이 된 것이 주님의 큰 은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청각장애인을 위한 학교에서 고등부 학생이었을 때,
그 학교 전체 학생의 80퍼센트 이상이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그들이 다니던 교회에 청각장애를 가진 목사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열정으로 전하던 청각장애 목사를 롤모델(Role Model) 삼아
목사가 되려는 열망을 가진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과연 청각장애인도
가톨릭 사제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중 하느님께서 저를 사제로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청각장애인일지라도
사제가 되게 해 주실 수 있으리라 믿고 사제가 되기 위한 여정에 올랐습니다.
처음엔 한국 신학교에서 공부하여 사제의 길을 걷기를 갈망하였지만
아직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교육 환경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청각장애인이 사제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칠전팔기라는 말이 생각나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하느님께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7년이란 긴 시간을 기다렸더니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배워야 하는 언어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였습니다.
영어와 미국 수화를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어려운 공부를 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계획 속에 있던 저는 10년 만에
사제가 되는 데 필요한 과목을 다 이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신학교에서 더 공부를 한 끝에,
하느님께서 계신 가운데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저는 사제가 된 자신이 놀라웠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전 2살 때 사제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 받았고,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한 사제의 길을 걸어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된 후 서울은 물론 지방과 해외에 나가서도
청각장애 신자들을 위한 사목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활동을 하다 보니 우리나라가 아닌 미국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었다면 해외에 있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사목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제가 영어와 미국 수화를 배움으로써 해외에 살고 있는
청각장애 신자들과 원활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일찍 계획하셨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흘려야 했던 눈물과 남모를 아픔이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발판이 된 것입니다.
사목 활동 중 제일 힘들고 어려운 일은 청인들과
의사소통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청각장애인이셨으면 모든 청인이
장애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모든 청각장애인이 청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5천 만 국민이 모두 수화(手話, Sign Language)를 배우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느 날 수화를 모르는 청인이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매님, 청인들 사이에서는 저희가 장애인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자매님이 장애인입니다.”
서로 의사소통이 잘 안되면 마음이 통할 수 없고 깊이 마음을 나눌 수 없습니다.
삼중 장애(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가진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는 보이지 않는 것은 사물과의 단절이지만,
들리지 않는 것은 사람들과의 단절이기에 그 고통이 더 크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청인과 청각장애인을 구분하지 않으시고 동등하게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에는 청인과 청각장애인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두고 “참 좋았다.(창세 1, 31)” 하시고,
당신은 사람들처럼 눈에 들어오는 것만 보지 않고
“마음을 본다.”(1사무 16, 7)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에파타!”, 즉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마르 7, 34-35)고 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보지 못하는 우리는 청인과 청각장애인 사이의 벽뿐만 아니라,
청인과 청인, 청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 사이에 닫힌 마음의 문도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7)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