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바사)때 유다
BC550년경 유다인의 중심 거주지는 그들 자신의 본토인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흩어져 살던 바벨론의 남부지역이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유다인들의 거주민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비록 "흙의 백성"이란 칭호를 받았으나 앗수르가 다른 이방민족을 이주시킨 것과는 달리 바벨론은 BC589년 이후에 이방인들을 유대땅에 이주시키지는 않았다. 물론 가까운 이웃 지역에서 얼마간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인구밀도가 적은 지역에 들어와 거주는 했지만 유대 지방에는 철저히 파괴된 상태로 수십년이 지난 후 파사왕 고레스의 해방렬으로 속속 귀국하는 유다인들로 인해 비로소 삭막했던 유대는 점점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이때 유대는 귀환한 포로들의 명단(스2:1-70, 8:1-36)과 같이 나오는 주요 정착지의 명단과 성벽 수축자들의 명단에 지방 총독들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총독의 이름과 같이 있는 인장 자툭은 당시 유대의 크기를 말해 주는 증거가 되는 것으로 이 인장들은 북쪽의 미스바와 여리고에서 남쪽의 엔게디 그리고 서쪽의 게셀까지 발견되었다. 그리고 다리오 당시에는 고레스가 이루어 놓은 대제국을 애굽과 바벨론을 직접 통치하는 동안 제국의 나머지 부분을 20개 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영지)에 총독을 두어 지배했다. 그중에 예루살렘을 포함한 벧엘 벧술까지의 유대지역은 제5관할 구역에 속해 있었고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있었다.
이 유대 영지를 중심으로 남쪽은 이두매, 서쪽은 아스돗, 북쪽은 사마리아, 동쪽은 사해 건너의 암몬 영지가 있으며 나머지 영지는 모압, 돌, 길르앗, 게릴하고임, 하우란, 가르나임, 두로, 시돈, 맛시아스, 비블로스, 트피포리스, 아르왓, 하맛등이 있다.
유다의 여음(BC515-331년)
고레스의 해방령에 의해 본국으로 돌아온 귀환자들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후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해 종교 생활의 복구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바사의 관리로부터 사회개혁 운동에 정치적인 음모가 있다는 오해를 받고 바사로 소환되어 12년 동안 수사에 머물렀다. (느13:6-8)
느헤미야의 소환으로 유다 백성들은 다시 신앙생활의 퇴보를 가져왔다. BC433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철저히 복구운동을 재개했다.(느13:11-31) 이때 말라기 선지자도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4세기 동안 대제사장들을 지도자로 모시고 모세의 율법과 함께 어느 정도의 자치를 갖고 살아갔다. 그뒤 BC331년 알렉산더가 바사를 차지할 때까지 별다른 변화없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