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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나무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 누이시며
빨래를 할만한 수돗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떨어진 쌀자루를 채워주시고
반찬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이끄시는도다.
내가 수상하고 음침한 시골의 구석 길을 다닐지라도
똥 밟을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바닥에서 던져주신 동전으로 후레쉬 밧데리를 샀음이라.
주가 스티커를 받은 아이들의 미소를 통해 보이는 모습이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나를 박대하는 이들의 목전에서 내게 텐트 칠 공간을 베푸시고
지방지 한 켠에 기사 내셨나니 내 후원금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유랑과 캠페인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텐트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카페리호 뒤를 따르는 괭이갈메기 사진 / 진해항에 도착하기 직전에 2007년 5월 11일]
[거제여 안녕]
거제수월초등학교서 캠페인을 끝낸 후에 거제의 최 북단 ‘구영’으로 향했다.
그곳에 진해로 가는 카훼리호가 있다.
너덧 시간 걸릴 거리였지만, 날씨도 더워지는데 괜히 무리할 필요가 없을 듯 해서
두서너 시간 걷고 난 후에 하청면에서 밥을 먹고 나서 인근 공터에
아침 이슬 가득 머그믄 텐트를 말리면서 두 시간 정도 뻗어서 잤다.
[논을 갈아 엎는 풍경 - 주위에 백로/황로 등이 갈아 엎어진 흙 사이로 튀어나오는 벌래 등을 쪼아 먹고 있다.]
앞으로 세 시간 정도 걸으면 거제 최북단이 나올 텐데, 오늘은 거기에서 머물고
내일 진해에 카훼리호를 타고 입성하리라.
어라?? 그런데 구영에 당도하기 두 어시간 전의 거리인 실전 쪽에 다다르니 카페리호 표지판이 보인다.
아하~ 진해가는 카훼리호가 구영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었다. 고현읍에 있는
여객터미널 지도만 믿고 ‘구영’으로 향하려고 했는데, 그 사이의 실전면에도 진해가는 카훼리호가 있는 것이었다.
‘외지고 황량한 벌판’을 5분 정도 걸으니 도무지 거기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여객터미널이 눈에 들어왔고,
3천 8백원짜리 여객 표를 하나 끊어 진해로 향하는 카훼리호에 몸을 실었다.
거제에서 진해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
따가운 햇살 아래
[선상에서 느끼는 햇살은 유난히 따가웠다.]
30여분은 거제의 작아지는 섬을 바라보았고,
[멀어지는 거제의 풍경]
30여분 간은 점점 커지는 진해를 바라보았다.
[가까워지는 진해의 풍경]
진해 속천부두에 도착하기 15분 쯤 전부터 갈매기 떼들이 나타나서 카훼리호의 뒤를 따르며
마중하는 모습이 장관이여서 부지런히 사진기를 눌러댔다.
[괭이갈메기 따르는 모습]
이러한 갈메기들의 모습은 우리 선조들이 수천년 전부터 나룻배를 가지고 바다에 나갔다가
만선해 돌아올 때부터 마중했던 그들의 생태적 습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 그때부터 우리 선조들도 갈메기들을 향해서 잔생선 몇 개씩을 던져 줬을 것이다.
[진해소개]
진해소개
[진해의 지정학적 위치]
[진해 위성사진 - 구글발췌]
이곳 진해는 뒤쪽으로는 산맥이 병풍으로 펼쳐져 있고, 앞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어서,
그 사이의 벌판에 도시가 형성된 지역이다.
[9 안민고개에서 내려다본 진해]
지역 곳곳에 군부대가 위치해 있어서 높은 빌딩 건립이 규제되어 있기 때문인지 높은 건물이 없었고,
다른 여타의 지역에 비해서 녹조공간이 잘 조성되어 있는 덕에
시종일관 시원하고 탁 트인 기분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곳은 ‘해군의 도시’라는 말이 걸 맞는 지역이다. 해군사관학교부터 시작해서,
각종 군부대 시설이 도시 중심부, 외곽 곳곳에 위치해 있었다.
[91 특히나 토요일 일요일은 외박/외출을 나온 해군 복장의 군인들을 사방에서 볼 수 있다.]
그 ‘여새’를 몰아서 누군가? 진해시를 두르는 산맥의 중심부에 ‘해병혼’이라는 큰 글귀를 파서 심어 놓은 듯 하다.
[91 산봉우리에 심어 놓은 글귀]
이곳 진해가 ‘국제적 -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은 과거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군들이 전함을 이끌고
대한제국에 입성할 때는 꼭 진해쪽으로 들려서 함상위에서 사열을 했다고 한다.
비록 400여년 전에는 자신들의 적이었으나, 단신으로 나라를 구해낸 ‘해상의 신’에 대한 ‘예’ 였던 것이다.
[93 진해의 북원광장로타리에 우뚝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
특이한 점은 진해에는 왠만한 벽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대충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그야 말로 정성들인 예술 혼이 느껴지는 그런 그림들였다.
‘여유’있는 동네여서 그런지... ‘예술적 감각’이 있는 지역이어서 그런지...
[931/932 진해의 왠만한 벽면에는 이런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진해는 인구 13만 대의 소도시로 그 직업의 특성상 2주에 한번은 머리를 손봐야 하는 군인들 때문에
미장원이 유난히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저녁 야영]
진해에 도착하자마자 PC 방에서 인터넷 지도를 살피며 중요시가지와 건물을 종이에 옮겨 적었다.
8시 30분 쯤에 짐을 챙겨 나와서 주변의 도천초교를 향했다.
학교가 진해시의 외곽에 위치해 있었고, 바로 인근에 좌우로 해군군부대/막사 등이 있다 보니
왠지 우범사건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안정되고 정렬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시종일관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텐트를 치고 휴식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적막’하고 ‘안정된 공간’ 한편에 마련된 수돗가로 물 뜨기 위해서 갔다가
어떤 새가 날카롭고 뜬금없는 소리를 뿜어내서 깜짝 놀랐었다. 소리도 직살 맞게 컸음@.@
다음날 알았지만, 옆에 동물 우리가 있었던 것이다.(칠면조/꿩/공작/비둘기/닭/오골 개 등등 )
놀란 가슴을 부여 앉고 텐트에 누웠는데, 낮에 낮잠을 많이 자서 한참을 뒤척인 후에야 잠에 들 수 있었다.
5월 12일
[도인?과의 조우]
진해 지리를 익히려고 이곳 저곳 뒤지고 있는데, 길 가는 앞쪽에 거지 행색을 한 아저씨 한 분이 평상에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흰 수염 세 줄 건너 한 줄씩 검은 수염이 보인다.
모자 창이 라도 그나마 성해서 그 형태를 유지했기에 망정이지,
처음에는 머리에 걸레를 얹은 줄 알았다.
한 30년 머리에 쓰면 저 정도의 모양이 되리라.
옷도 여기 저기 빛바래고 때가 찌들대로 찌들어있는 상황이다.
작은 가방을 하나 가지고 다니시는 듯 하다.
[94 도인? 할아버지]
눈을 마주치니, ‘한 푼 달라’고 손을 내 미는 것이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어디서 오셨냐’고 물으니,
‘쓸데없는 것 묻지 말라’고 하시면서
나랑은 ‘공부하는 분야가 달라. 학과가 달라’라고 하는 것이다.
!
그러고 보니 남루한 것은 확실한데...
그 남루함이 잘 단련된 느낌이 든다.
‘그럼 할아버지는 무슨 학과인데요’라고 묻는다.
‘나는 인문학이야’
헉~ 그럼 내가 인문학과 관계 없는 ‘사회과학’ 전공한 것을 어떻게 알았지?
아니 몸에 건 플랭[환경재앙 시작....]을 보고 ‘공과’계열로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하이튼 ‘인문학’을 한다면... ‘도’를 하시는 양반도 같고...
말씀 좀 나누려니 도무지 말을 안 붙여준다.
밥 값 안 보태 줄려면... 가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에게도 ‘노숙자’의 자존심이 있지,
같이 노숙하는 마당에 삥을 뜯길 수야 없지.
밥 값을 드리는 대신에 ‘라면 있으니 같이 끓여먹자’고 말씀 드려도 막무가네다.
(내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너는 너의 갈 길을 가라’는 식이다.
이 양반을 뵈니 내가 너무 ‘럭셔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학과가 다르다’고 말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양반의 조촐한 짐)과는 달리 산더미 같이 장비를 휴대한 것을 보니 충분히 세상을 버리지 못한 것이요,
옷도 때도 안타있음은 타인을 의식해서 옷 매무새를 가다듬은 것이고,
이것 저것 거추장 스럽게 ‘아우성’ 치는 글을 써 붙이고 다니는 것 자체가
‘타인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이라~
정도의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도’하는 양반들의 생리로 볼 때는 충분히 그렇게 봤을 수도 있다.
그래도 좀 넓은 견지로 ‘노숙인’의 대동단결을 이루는 차원에서 좀 받아주실 수도 있었으련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냥 내 길을 갔다.
먼 발치로 사진을 하나 찍어 남긴다.
다음에 또 뵈면 무조건 밥 값 투자하면서 말씀을 청해야지... ㅎㅎ
나는 뭐 ‘도’하자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세상을 배우면서 캠페인 차 유랑활동을 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삶에 매력을 느끼는 것까지는 아닌데...
하여간 그의 (세상사-핍박받는 민중의 고통-에 대해서마저 초연할 수 있는)‘버릴 수 있음’에 대해서는 상당한 부러움이 느껴진다.
여기서 ‘세상사에 대해서 초연하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도’를 한다는 이들의 ‘사회적 무책임감’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도’를 한다고 나서는 많은 이들은 ‘사회 속에 그 구성원으로 살면서 그 사회가 주는 온갖 풍요와 이익을 탐닉’하지만,
‘사회문제’에 대해서만 무관심하다.
그러면서 그것을 마치 ‘세상사에 대해서 초연하다’고 이야기 한다.
이것은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사에 대한 초연함’에는 ‘자기 자신의 욕망과 사고’까지가 포함되어야 하는데,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는 것은 ‘당연시’하면서 ‘타인’의 그것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말 그대로의 초연함이 아니라,
‘무지’가 바탕이 된 ‘무책임’ ‘이기주의’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세상사에 대해서 초연해지려 한다면, 우선 타인의 눈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습성을 버려야 한다.
거울 속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습성도 버려야 한다.
‘시각적 차원’에서 이 최소한의 것이 습득되면, 아예 외모에 대해서는 무심해 지게 된다.
옷에 일부로 똥을 뭍혀서 돌아다니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복장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거지 수준에서 평준화 된다.
이것이 ‘세상사에 대한 초연’을 달성하기 위한 기본이다.
이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초연’해서 ‘내일 먹을 것’ ‘모레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배가 고프면 먹고 없으면 굶으면 그만이다.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체면’과 ‘형식’에 얽매여서 ‘어떤 밥’ ‘어떤 집’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그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냥 있는 그대로의 ‘현재’에 그 자각적 의식을 맞추고 사는 것 이 바로 그들 ‘초연한 이’들의 삶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웃’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무책임’함에 의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초월한 이들’에게 있어서는 ‘무책임함’ 자체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말 그대로 그냥 초연한 삶을 사는 것이다.
길거리에 만난 양반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지 이 ‘초연한 삶’ ‘도 적인 삶’의 방식이 왜곡되기 시작한 듯 하다.
‘그래도 인간적인 최소한은 갖추고 할아야 하는데’라고 전제를 붙이고 나서,
‘삶의 수준’ ‘소비-소유의 기준’(삼시 세끼 잘 먹고 불편 없이 잘 잘 수 있을 만큼/세상사의 기준으로
타인에게 지탄받지 않을 정도의 외모/삶의 편리 등...) 을 작위적으로 높인다.
그 상태에서 ‘세상에 대한 관심’을 동결시키고 그것을 ‘초연함’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이들의 세상사에 대한 ‘무심’은 그야말로 ‘무책임’ 내지는 ‘무지’에서 기인한다.
문제는 이러한 자기 편의적이고 교묘하고 관념적인 말장난을 분별해 낼 수 있는 ‘기준’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 수준의 사람들’의 논의 과정에서 적당히’ ‘이 수준이다’라고 공표한 그 무엇을 ‘초연함’과 ‘도’ 로 인식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도’를 하는 이들을 비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모순’의 문제를 짚은 것이다.
일명 ‘도’를 체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조금만 숙고를 해보면 빠져나올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습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극히 허황된 것을 쫓기에 그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과거에도 세상사를 초월한 듯한 분을 한분 뵌 적이 있었다.
‘나주’인가 가는 국도상이었는데, 길 한쪽에 개량 한복을 입으신...
머리가 길고 수염이 덮수룩한 한 분이 비밀 봉지 두개를 놓고 서 있는 것이다.
나는 그분이 산에서 약초를 캐가지고 내려온 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약초봉지가 아닌 옷 보따리였고, 그분은 전국을 돌아다니시면서 ‘기도’를 하시는 분이란다.
서로 지나치는 길이어서 많은 얘기를 못 나누고 인사로 몇 말씀만 나눴었는데...
나중에 지나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하니 그 양반에게서 엄청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내공’이면 ‘비밀봉지에 옷과 가재도구를 챙겨’ 양손에 들고 전국을 돌아다닐 수 있단 말인가!
하여간 나주에서 분을 지나쳐 간 후에 많은 말씀을 나누지 못한 아쉬움에
‘다음에 비슷한 분을 만날 때는 놓치지 말자’는 다짐의 다짐을 했는데...
오늘 만난 할아버지는 그분보다 내공은 업그레이드 된 듯 한데, 아예 말도 안 붙여 주신다.
뭐... 하기야... ‘그의 문법’은 ‘지나쳐 보낸 것’에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 낸 것일 수도 있지만...
5월 14일
해가 길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섯시 조금 넘으면 어둑어둑했었는데, 이제는 7시가 훨씬 넘어도 환하다.
그래서 학교 구석에 일찌감치 숨어 들어가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기가 힘이 들다.
당연히 저녁 밥 시간도 늦어진다.
저녁에 진해우체국에서 스티커를 찾아 들고 머리를 좀 깎은 후에 도천초교로 향했다.
텐트를 치고 나서 몇몇 사람들이 운동장을 배회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 사람은 옆에까지 와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고 살피기까지 했다.
한참 후에는 경찰차 한대가 운동장을 가로 질러 텐트를 정면으로 비춘다.
ㅠㅜ
아마 텐트를 직전에 살폈던 사람이 학교 관계자인데, 그가 경찰에 신고했을 수도 있다.
경찰은 텐트 옆으로 오더니 텐트 한쪽을 잡고 흔든 흔들 흔들어 본다. ㅠㅜ
‘예~’ 하고 지퍼를 열고 나선다.
나에게 ‘뭐 하시는 분’이냐고 묻는다.
대꾸를 할까 말까 고민한다.
...
2년 전부터 경찰에게 감정이 있는 상황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공무원답지 않은 행태로 일관한 [과거 군산경찰서장] 등에게 감정이 있었는데,
이를 상식적으로 해결해 주십사 경찰청에다 진정서를 낸 것에 대해서 시종일관 조롱하는
수준으로 경찰청에서는 답변이 왔었다.
더군다나 바로 이날 14일 아침에는 그 문제 관련해서
전북 경찰청에까지 가서 그 최종 진술을 하고 진해로 왔던 터였다.
결국 이로 인해서 경찰들을 보면 ‘혈압’이 먼저 오른다.
따라서 학교 구석에 텐트 치고 나서 잠을 자려고 하는 시민에게 경찰차 헤트라이트를 들이대면서
‘뭐하시냐?’고 물어오는 것에 ‘친절히 답을 해야할지’ ‘댁이 무슨 상관이요’라고 퉁명스럽게 쏘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내가 범죄행동 내지는 범죄 예상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텐트치고 자는데 쓸데없이
타인의 ‘사생활을 간섭’을 하는 것은 과거 군산경찰서장이 사법만능주의적 발상으로 시민의 위에
군림하려고 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에도 더욱 그랬다.
하지만 학교 관계자의 신고를 받고 왔으나 신고자 보호 측면에서 ‘그냥 순찰 중에 발견했다’고 얘기했을 수도 있고,
그냥 한명의 인간이 순수한 관심으로 물어 오는 것으로 받아들여, ‘이런이런 캠페인 한다’고 설명해 줬다.
그 경찰은 낮에 내가 도서관에서도 자료 정리하는 것을 봤다고 하는데, 보고서를 기록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활동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지 이것저것 꼼꼼히 물어보고 스티커도 종류별로 다 달라고 해서 받아갔다.
막 눈이 감기면서 잠 들려는 순간에 경찰이 다녀가다 보니 신경이 자극되어서 한참 뒤척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5월 15일
아침 7시 30분 경에 전날 해 놓은 밥을 해 먹고 근처
중앙동 사무소 화장실에서 빨래를 빨아 말렸다.
전날에 퇴근하던 동사무소 아가씨 한명이 화장실을 찾는 나그네의
청을 들어서 화장실을 열어뒀던 것이다.
평소에 학교 급수대에서 빨래를 빨더라도 말릴 곳이 없어서
많이 고심스러운 면이 없지 않은데,
이곳 동사무소 화장실 옆에는 걸래 빨아 널어 말리는 건조대가 있어서
아침에 화장실에서 바로 빨아서 말아 널고
하루 종일 볼일을 보로 다닐 수 있었다.
[ 빨래를 걸어 말리고... 아래는 혹시나 해서 빨래 걸이에 붙여놓은 안내문]
저녁에 와 보니 빨래가 그대로 널려져서 바짝 말라져 있었다.
이에 [진해 시청]에 중앙동사무소 동장에 대한 1계급 특진을 추서 글???을 올렸다.
1계급 특진 추서문
안녕하십니까? 진해시장님
저는 전국을 유랑하면서 지역의 인심을 두루 살피고 있는 박성수라는 사람입니다.
진해에서의 몇 일은 고마운 일들이 연속이지만,
그 중에 접한 공무원들의 친절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에 한 말씀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해는 녹지공간/쉼의 공간이 인간의 생산 공간과 잘 어우러져 생기 가득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기 좋은 진해에 머무르면서도 가진 것 없는 저는 여느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의식주/생리적 필요의 해결 문제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5월 14일 저녁으로 기억됩니다.
거리를 터벅히 걷고 있던 찰나 갑작스런 생리작용의 촉발로 근처에서 화장실을 찾던 중
주변에 눈에 띈 중앙동사무소를 향했습니다.
6시 30분이 넘었기에 동사무소 문은 이미 잠겨 있었지만, 급한 상황을 알아차린 여직원분이
돌아가다 말고 화장실 문을 따주셨습니다. 더군다나 감사하게도 동사무소 한쪽에는 50m 좌측에 위치한
공원화장실까지 친절히 표식해졌음으로 인해서 그 후 몇 일간 도 필요한 용무를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저는 동사무소 화장실에서 빨래를 빨 수 있는 천혜의 세탁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건물 옆에는 빨래걸이까지 비치되어 있었던 이유로, 15일 아침에 밀린 빨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빨래를 널어 말리고나서 하루 죙을 볼 일보며 다니다가 저녁에 다시 돌아와서
바짝 마른 옷가지를 추려 갈 수 있는 행운을 진해 말고 어느 지역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본시 이 사회가 사람이 사는 사회라고 하지만, 만연한 각박함과 이기주의로 인해서
하루를 살아가기가 숨이 막히는 상황에서, ‘(거지레벨의)나그네’에게 감격을 줄 수 있었던 공무행정은
분명 아름다운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이는 아마 동사무소 운영 철학이 시설관리차원에 삼투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임에,
이에 총책임자인 중앙동사무소 동장의 덕을 기리 높이기 위해서도 1계급 특전을 추서드리오니,
가련한 한 백성의 뜻을 물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 2007년 5월 일 길 가는 나그네 박성수 올림
* 참조 : 남는 쌀과 텐트 칠 수 있는 공간 제공받습니다.
ㅎㅎ 좋은게 좋은거~
[기형적 개인주의 ]
파시즘과 전체주의/집합주의에 대항하는 관점으로서의 [개인주의] 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 ‘개인주의’가 (파시즘과 전체주의에 반하는 작용으로서가 아닌)사회적인 무책임에 기반한
[무턱댄 개인의 자유의 실현]으로 이어질 때는 그것은 ‘이기주의’와 같은 이름이 된다.
이 [개인주의]의 문제를 다루면서 특이하게 발견하는 점은 상당히 많은 이들이 [경제사회 지반]은
파시즘/전체주/집합주의를 지향하거나 묵인하는데, [감성적/관념적]으로만 ‘개인주의’ ‘주체’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경제사회가 제공하는 ‘편리’와 ‘풍요’는 그대로 섭취하면서,
그 경제사회적인 구조 속에서의 책임을 등한시하기 때문에 발생된다.
특히나 이렇게 감성적/관념적 개인주의에 몰입한 이들은 그들의 ‘감성적’ 특성상 자신이 놓여 있는
경제사회적 기반을 확인할 수 있는 역량이 없다.
자신이 ‘사회경제적’으로 작용하는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이에 따른 사회적인 책임과 실천의 문제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자유’라는 개념이 주는 해방감과 무한한 편의 만을 쫓는 이러한 기형적인 형태의 개인주의를
온전한 개인주의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문제는 이러한 ‘기형적 개인주의’는 ‘온전한 이기주의’보다 더욱 해악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온전한 이기주의’는 그러한 삶이 사회에 미치는 해악이 ‘공감’되면서 그에 대한 지양기준을 제공하지만,
‘기형적 개인주의’는 흔히 ‘개인의 자유’의 실현 이라는 미명하에 전염병처럼 일상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실은 그러한 ‘개인적 자유’(기형적 개인주의)가 ‘타인의 자유로울 수 없음’ ‘후손들의 존립할 수 없음’
‘생태계의 파괴’를 기반으로 하는 것 처럼 극히 ‘이기적’이지만, 이의 관계를 이해할 만한 사회경제적 시야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전체적이고 파시즘 적인 구조’ 속에서 늘 그 변형된 이기주의’를 실현하고 있다.
‘개인적인 자유’를 누린다는 환상에 빠져서...
그 ‘개인적 자유’를 누리려는 의지는 사회적 무관심을 다시 가중시키고,
이러한 상황은 끝없이 악순환 된다.
[도천초등학교 활동?]
도천초등학교 앞에서 스티커를 펴 놓고 기다리는데 8시까지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한 명’은 지나갔었어야 할 시간인데... 하면서 의아해 하고 있는 터~ 아이 한명이 보인다.
그런데 가방도 없다.
애들이 왜 안보이냐고 물었더니... ‘스승의 날’이란다.
@.@
앗차! 스승의 날이구나.
제길... 근데 스승의 날에는 스승만 쉴 것이지 왜 애들까지 쉬는거여.
하여간 도천초등학교 앞에서 스티커 ‘한 장’을 그 아이에게 건네고,
그 옆 담벼락 그늘 아래 배낭을 깔고 누워서 한 시간쯤 부족한 잠을 잤다.
[상가캠페인]
중원로터리에 인접한 상가를 두 시간 정도 훑었다.
손님이 있어서 설명은 못하고 전단지와 스티커를 놓고 온 상가 20여 곳,
설문/이야기에 응하기 싫다는 상가 7,8 곳을 빼고,
20여 상가에서 총 3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이야기를 나눴다.
그 중에서는 버스를 기다리는 한 무리(10여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계셨다.
앞으로 생태계가 파괴되고 후손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특별히 ‘많이 소비하고 많이 쓰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수준의 삶(과거 300년 전보다 2000배 이상의 에너지 소비수준)이
그리 만들었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조금이라도 ‘줄이면서’ ‘나누면서’ ‘환경보존하면서’
자식들에게나 손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많이 전파해야한다고 말씀 드렸다.
그 중에서는 무심하게 계신 분들이 계셨지만, 백발에 이빨도 별로 없는 할머니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시종일관 추임새를 해주셔서 이야기 하는데 힘이 났다.
말씀 끝나고 ‘이 스티커 손자들에게 가져다 주실 분은 드릴께요’라고 여쭈니,
그중에 3분의 2의 분들이 손을 드셔서 받아 가셨다.
설문조사와 이야기를 나눴던 20여 상가의 경우에는
그중 두 곳에서 이야기 중에 ‘안끝났냐’고 말을 끊었고,
세 곳에서 무심하게 반응했지만,
나머지 15개 상가에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주변 사람들에게 [하루 한 명에게만 전파]해서 우리가 소유하고 소비하는 양의
10분의 1이라도 줄일 수 있으면 후손들은 극단적인 파국은 피해갈 수 있다’고 이야기를 마무리 하며
관련한 전단지와 스티커를 두고 나오는데...
‘주변에 이야기 하겠다’고 답변을 하는 그들의 눈 빛을 보면 그 중의 몇 명은
실로 그러하리라는 믿음이 가져지곤 한다.
하루에 20 여명씩 전파하고, 그들이 다시 주변 20명씩 전파하고... 그 20명이 다시...
피라미드 조직의 역학에 대해서 좀 공부해야할 듯 하다.
일반 피라미드 조직과는 달리 ‘이권’이 떨어지지 않는 분야에서도 그것이 작용할 것인지는 미지수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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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 캠페인 중에 ‘특이한 사례’를 접하게 된다.
무턱대고 들어가서 ‘설명 드릴께요’라고 말을 시작할 수가 없는 이유로,
‘설문조사’의 형식을 취해서 접근하는데,
그 중 한 문제가 ‘그러면 *님은 인간과 환경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가요?’라는 질문이다.
그 답변은 ‘1. 많다’ ‘2. 보통’ ‘3. 거의 없다’에서 선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나오는 답변은 ‘보통’인데,
TV를 통해서 기사 나오면 관심을 갖는다거나, 집에서 세제 적게 쓰고 재활용 잘한다는 식의 답변을 하신다.
그런데 ‘3.거의 관심을 안 갖고 산다’는 답변을 하시는 분이 10명 중에 한명 꼴로 나온다.
‘보통은 한다’는 식의 ‘평균반응’을 보이지 않고, 이렇게 ‘자기 소신 껏’ ‘관심 없었다’고
이야기 하시는 분들을 보면 왠지 ‘자기 주관’을 가진 이의 집중력이 느껴진다.
이들에게 환경문제에 대한 설명할 때는 눈빛이 초롱거리면서 능동적으로 반응 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원래 한국사회가 ‘체면치례’를 중시하기 때문에 ‘보통은 한다’는 의식이 강한 마당에
그렇게 ‘(보통이하이다)관심이 없다’는 식의 답변을 당당히 할 수 있는 것은 소신 있음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의 성향을 좀 더 면밀히 분석해서 ‘맞춤형’ 이야기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5월 16일
[돌아보기 : 1960년 5월 16일은 박정희 소장이 구데타를 통해서 제 2공화국을 무너트린 날이다.]
[도천초교 동물우리]
아침에 일어나서 빵 한 쪼가리를 챙겨 먹고 공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니 주변에 ‘풀’들이 무성한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한 아름 뜯어서 도천초등학교 동물우리로 찾아 들어갔다.
안에 토끼, 오리, 닭, 꿩 등이 있는데 몇 일 전에 풀 좀 뜯어서 줬더니 맛나게 먹었었다.
특히나 토끼는 ‘조류’들 속에서 ‘포유류’를 대표해서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녀석 건네 줄 토끼풀도 몇 줌 모을 수 있었다.
내부의 서열관계를 보면 상당히 복잡하고 정신없다.
우선 ‘토끼’는 핍박의 대상인 듯 했다. 먹이를 먹고 있을 때는 닭과 오리가 와서 꿱꿱거리거리는데,
굳이 피해 다니지는 않지만 기가 죽은 표정으로 묵묵히 먹이를 먹고,
자기 앞에 놓여진 먹이를 항상 닭과 오리에게 삥 뜯긴다.
토끼의 코가 비 대칭으로 툭 튀어나온 것을 보니 닭에게 과거 여러 차례 쪼인 듯 했다.
토끼 혼자서 기가 푹 죽어 있는 모습은 상당히 안쓰럽다.
[기죽은 토끼]
오리 녀석은 콱 한대 패 주고 싶을 만큼 '꿱꿱‘거리면서 다른 녀석들을 괴롭히며 먹을 것을 빼앗아 먹는다.
아마 ’실질적인 서열‘은 가장 높은 듯 하다. 이 녀석은 닭과 꿩 등이 먹이를 먹고 있으면
소리를 지르면서 나타나 고개를 흔들어대고 부리를 딸각거리는 위협을 하면서 쫓아 버린다.
오리보다 훨씬 키도 크고 위세도 있고 힘도 세 보이는 ‘칠면조’가 있지만,
이놈은 ‘다른 차원’에 사는 녀석 같이 다른 동물들로부터 ‘무시?’를 당한다.
이 칠면조 녀석은 그 커다란 등치를 앞세워 다른 녀석들에게 위협을 주기 위해서 한껏 몸에 힘을 주고
깃털을 세워 그것을 바닥에 직직 끄시면서 그 위세를 더한다.
얼마나 깃털을 바닥에 끄시면서 ‘위협적 마찰음’을 냈으면 깃털 아랬 쪽은 다 달았을 정도이다.
[위세를 떠니라 깃털을 바닥에 끌어대서 깃털 바닥이 닳고 닳은 칠면조]
하지만 이 녀석은 부리로 쪼거나 하는 식의 직접적인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아마 자기 종들 끼리 자웅을 겨루면서 ‘세운 깃털’과 ‘바닥 끄시는 소리’로‘만’ 위협을 주는 습성이 있는가 보다.
문제는 동물우리 내의 다른 동물들은 그에 ‘전혀’ 아랑 곳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욘석이 혼자서 다른 동물들을 위협하는 ‘원맨쇼’하고 있으면 다른 동물들은
아무런 위기의식도 못 느끼고 태연한 표정과 행동으로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바닥에 떨어진 먹이들을 쪼아 먹곤 한다. 그 위협이 ‘허풍’임을 진즉에 눈치 챈듯 하다.
수컷 공작은 이들의 서열싸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높은 횟대 위에 앉아서 시종일관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시종일관 덤덤한 공작 수컷]
비둘기는 닭과 오리 등을 피해 있는 것인지,
먹이를 던져 줘도 비둘기 집에서 구경만 할 뿐 내려와서 먹으려 하지 않는다.
도천초등학교 캠페인
[966 도천초등학교 옆문 전경 - 저 나무 바로 옆쪽에 텐트를 치고 잔 것이 4일쯤 되는데,
무당벌레 애벌레가 텐트에 많이 떨어져 대는 통에 텐트 관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아이 딱 한명 말고는 모두 잘 받아 갔는데, 중간에 몇 장 버리고 붙이고 한 것이 있어서 선생님이 잠시 오셨다가셨다.
학교의 위치가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져서 차량의 이동이 비교적 적고,
작은 공원이 학교 벽면을 따라 가꿔져 있으며, 나무가 사방에서 신선한 공기를 뿜어줘서
아이들의 심성이 다져져서그런지 전반적으로 아이들이 싹싹하고 관심 있게 반응했다.
스티커 나눠주다 보면 정신이 없는데, 이곳은 등굣 길이 여유 있게 조성된 이유로,
스티커 나눠주면서도 별로 숨이 차지 않고 상쾌한 기분을 내내 유지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의식에 가해지는 자극의 의미...]
초등학교 앞에서의 인간사랑 자연사랑 캠페인...
이러한 캠페인 활동의 자극은 아들로부터 직접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활동이 아니다.
단지 어떤 ‘미묘한 자극’을 아이들에게 선사할 뿐이다.
100명의 아이들 중에 50여명은 나눠준 스티커 내용을 읽어는 본다.
그 중에 10명은 좀 더 진지한 관심을 가질 것이고, 다시 그 중 한 두명은 좀 더 집중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것 자체가 내 활동의 의미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 나의 활동에 적대적인 몇몇 선생님들의 말씀처럼 ‘학교에서 교사들이 알아서 잘 하고 있는데
왜? 이런 활동을 하는가?’라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교단위에서 하시는 말씀과, 길바닥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하는 말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위엄’을 가진 주체(교사)가 하는 말과 ‘누군지도 알지도 못하는 인물’이 하는 말의 차이가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위엄을 가진 주체]가 하는 말은 주로 논리적으로 억은 잘 되고 형식적인 복종은 가능하지만,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인물]이 하는 이야기는 (아예 무시되는 경우는 많지만) ‘수렴’만 잘 되면
곧바로 자기 것으로 소화가 된다. (물론 이렇다고 교사들이 모두 권위적인 복종을 강요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아이들의 반응을 통해서 현실적으로도 그대로 드러난다.
‘아무것도 아닌 인물’인 내가 길가에서 아이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인간과 자연을 사랑해 주세요’라고 스티커를 건네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인물’(나)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아이들을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받기 싫어요’하고 지나가는 모습에서부터,손만 내둘 거리면서 싫다고 의사표정을 하거나 흘깃 쳐다보면서 그냥 지나가고,
받자 마자 바로 앞에서 바닥에서 버리는 모습은 분명히 나라는 인물을 ‘아무것도 아닌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인 모습이리라.
위엄 있는 선생님에게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인물’이 건네는 메시지를 사려 깊게 받아들고 골똘히 고민하는 아이들에게는 긍정적이고
자발적인 감성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선생님이나 힘 있는 사람이 ‘시켜서’가 아닌, 스스로 ‘원해서’ 하는 고민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이 경험상으로 봤을 때 반수는 넘는다.
내 개인적인 경우를 통해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어렸을 적 수업시간에 그러한 ‘인간과 자연의 문제’를 주제로 ‘수업’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은 종종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자신이 별로 그 문제에 대해서 실천하는 모습을 안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건 그냥 ‘시험공부’의 일부분이거니 하고 대충 대충 흘려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어떤 ‘순수한 할아버지’가 학내 마이크를 통해서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한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은 기억하고 있다.
그분은 특별히 학교로부터 초빙되거나 하신 분이 아니고,
소개해주신 선생님의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자신이 직접 교장선생님을 찾아뵙고
그런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선생님’ ‘부모’도 아닌... 생판 모르는 사람이 ‘순수한의지’를 가지고 그런 얘기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잔잔한 파문으로 남아있다.
그러한 ‘측정할 수 없는 미묘한 자극’들이 하나 하나 쌓이고,
얽히고설킨 결과 현재의 나 역시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며 살 수 있는 것이리라.
물론 이런류의 활동이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을 것인지를 명확히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없고,
그래서 몇몇 시민활동가들로부터 ‘활동의 부질없음’을 충고받기는 하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아이들의 의식이 일정순간에 개화되기 전까지 필요한 ‘자극’의 단계 중에 틀림없이
‘거쳐야 하는 자극 수준’인 것은 명확하기 때문에
성인이 될 때 까지 단 한 번도 그러한 자극을 받지 못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활동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몇 번 인용한 이야기이지만,
1999년 모 시의 20개 초등학교의 4,5,6 학년 아이들 50명씩 총 900여명을 직접 설문조사해 본 결과
(사회적으로 가장 관심과 지지를 필요로하는) ‘장애인’에 대해서마저
수업시간에 ‘한 번도 안들어 봤다’는 아이들이 50%에 육박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그 필요성은 더욱 요구된다.
선생님들 자체도 ‘장애를 가진 이들’에 대해서 잘 모르고
기껏 수업시간에 설명을 해봤자 (자신의 경험에 우러난 살아있는 이야기)가 아닌,
책 읽는 이야기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고 보니, 아이들은 ‘들어봤다는 사실’ 조차도 기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인’이라도 한 번씩 나서서 그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자극’을 준다면,
아이들은 그 다음단계의 자극이 올 때 좀 더 감수성 있게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자극 없이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 후로 ‘인간사랑’ ‘자연사랑’의 문제에 대해서 거창히 떠벌려봤자,
그것은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 ‘지식’으로 쌓이거나, 아예 두뇌에 수용조차도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학적인 근거’가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성격 급한 한국 사람들의 ‘직접적인 효율성’만을 따지는 성향은,
그러한 ‘자극’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음으로...’
성장과정에서 우리는 누구나 그러한 자잘한 자극과 경험을 통해서 성장해 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회구조와 제도의 개선의 변화를 위한 힘찬 노력과 함께 이러한 의식적인 자극을 주기 위한 미묘한 활동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야만 사회가 변할 수 있는 현실을 인식해서, 입체적인 방향의 활동을 이뤄내야 할 것이다.
상가캠페인 활동
전날 도서관에서 ‘구걸’해서 ㅠㅜ 전단지를 40여장 복사를 했었다.
그것을 가지고 한 시간 반 동안 설문/설명을 하면서 중원광장 주변 상가를 돌았다.
어느 미용실에 들렸는데,
눈이 초롱초롱한 아가씨 하나가 눈을 맞추면서 정말로 열심히 듣는 것이다.
순간 긴장이 되어서 시선을 위로 아래로 떨구면서 설명을 했는데,
설명 끝나고 나니 차나 한잔 하고 쉬고 가란다.
앉아서 이런 저런 잡담을 좀 하고 나왔는데,
미용실 나올 때는 기분이 참 유쾌했다.
캠페인 다니다 보면 나를 ‘잡상인’ 취급하거나 이상한 ‘종말론자’로 보고 콧방귀를 뀌거나
문전 박대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가끔 이런 사람들도 만날 수 있음으로 마음의 환기되곤 한다.
[비오는 오후]
점심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내리는 풍경]
오후부터 비가 갠다고 해서 도서관에 피난해 있었는데, 비가 계속 내리는 것이다.
대기실 소파와 컴퓨터 검색대에 앉아서 전전긍긍하면서 비가 그치기만을 고대한다.
종종 하는 푸념이지만, ‘설마 오늘 비가 올 줄이야...’
더군다나 이곳 진해에서는 비를 피할 수 있는 학교 내의 널찍한 통로 지붕이나 건물의 길쭉한 처마를 본 일이 없다.
어쩌나...?
우산이 없는 한 30대 남성 하나가 종이봉투 하나로 머리를 가리고 밖으로 나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도서관에 올 때 하늘이 맑아서 우산을 안챙겨 온 듯 한데, 종이봉투를 그렇게 머리에 두르고
밖으로 나서는 모습에 무한한 부러움이 갑자기 밀려온다.
저이는 비를 무릅쓰고 도착해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을 집으로 향할 것이 아닌가...
추적 추적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니 따스한 방바닥에 뒹글뒹글하고픈 생각만 밀려온다.
[진해 도서관 입구 비오는 풍경]
더 이상 그곳에서 발이 묶여 있어서는 안 되었다.
분침이 8시로 치닫고 있어서 우선 스티커를 맡겨 놨던 수제비 집으로 향해야 했다.
비가 오는 터이기에 당장은 어디 숨어들어가서 텐트치기도 어려운 상황이고, 배도 고프고 하니 그곳에 가서
수제비라도 먹으면서 생각해 보자.
배낭에 판쵸위를 덮고, 가방은 비 가리게를 씌우고, 머리에 모자를 쓰고 도서관을 나서서 음식점으로 향했다.
제법 매섭게 내리는 비속을 뚫고 5분 후에 수제비 집에 도착했다.
이곳은 이틀 전부터 갔던 수제비 집이었다. 가격도 싸고 음식 맛도 정갈하고 해서, 계속 갔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그마한 가게에 손님들이 가득하다.
북적대는 가게에 가방을 내려놓고 빗물을 한껏 머금은 판쵸위를 벗어서 밖에다 ‘탈탈’ 털었다.
들어올 때부터 상당히 관심 있게 나를 지켜보시던 한 손님이 말을 붙여 오시면서 이것 저것 물으셨고,
내가 시킨 수제비 값도 대신 내 주신다. 이런 고마울 수가...
그 일행분들은 이곳 사장님이 이곳에서 3년 전 터를 잡고 장사를 하고 난 후부터 알게 된 사이로
형동생으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성격도 좋고 호탕하신 분들이어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그의 아버지께서는 과거 경남에서 가장 큰 철공소를 하셨고 현재도 본인이 비교적 큰 사업을 하는 듯 했는데,
‘권위’를 찾고 ‘허세’를 부리는 것이 싫어서 골프 같은 것을 싫어하신단다.
이렇다 보니 이렇게 소박하고 친환경적인 가게에 발을 들일 수 있었고
가게 사장님과 마음이 통하고 해서 친하게 지내신단다.
마음씨도 좋은 분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곳 사장님과 잠깐 인테리어 작업을 함께 했다.
사장님은 손수 친환경 재료를 가지고 가게도 꾸미시고 하셨는데,
이웃들이 그것을 알고 자신들 가게의 인테리어 부탁해서, 잠시의 짬을 이용해서 인테리어 작업을 했던 것이다.
한 시간 정도 자잘한 작업을 끝마치고 다시 앉아서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딱 두 잔만 마시고...)
가게 사장님은 환경친화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연과 인간과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시는 분으로 보였다.
생태공동체 등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신 분이셨고, ‘오늘 하루만은’이라는 전제를 다시면서
나에게 모든 의무감과 소명을 털어 놓고 쉬라고 하셨다.
2, 3시간 전까지만 해도 텐트 칠 곳을 찾을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었는데,
잠자리는 물론 맛난 음식과 좋은 분과의 만남에 따른 이 ‘포만감’이라...
12시 넘어까지 사장님에게 많은 좋은 말씀을 듣고 잠자리에 들었다.
식구들이 과거 쓰던 방이었는데, 친환경 소재로 만들어져서 의례 구석방에서 맡아지는 ‘퀘퀘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모기’들이 때문에 밤새도록 전쟁을 치루는 것이 여간 곤역이 아니었다. @.@
* 재미난 일은 저녁에 이곳에 도착해서 이틀간 맡겨 놓은 ‘스티커 박스’를 뜯어서
스티커를 가방에 챙겨 넣으려고 할 때 사장님이 ‘그게 스티커였냐’하시는 것이다.
왜 그런가 했더니, 아침에 캠페인 했던 학교가 사장님의 아이가 다녔던 곳이었고,
그 아이는 종류별로 다 챙겨서 가져와서 집에서 자랑을 했단다. 그래서 누가 나눠줬는지 궁금하셨었나보다. ㅎ
[975 - 황태와 수제비 가게 전경 - 진해에 오면 꼭 이 가게를 들를 것.
싸고 맛있는 수제비에 인간에 대한 자상한 관심을 가진 사장님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음.
5. 17 경화초등학교 캠페인
아침에 한 시간 정도를 부지런히 걸어서 경화초교에 도착했다.
차량의 통행은 별로 없는 정문 앞 작은 도로 너머로는 문구점이 너덧 개가 늘어서 있었다.
캠페인을 하며 보니 ‘투자한 규모’와 ‘가게 주인의 적극적 마케팅’이 손님(아이들)의 양과
비례하는 모양을 살필 수 있었다.
가장 크고 물건의 종류가 많으며 시설이 깔끔히 인터리어 된 가게는 아주머니도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장사가 잘 된 듯 했는데, 그 반대로 가게에 물건 종류도 몇 개 없고,
문도 닫혀진 체로 아이들 오기를 기다리는 한 아저씨가 하는 가게에는 손님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의 소비성향에 따라 대형할인점이 기세를 높이면서 점차 구멍가게가 기를 못 펴고 사라지는 현실이,
학교 앞 문구점이라고 피해갈 리가 없다.
캠페인 중에는 별 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고, 종류별로 가져가는 아이들이 꽤 많이 발견되었다.
[977 경화초등학교 전경]
캠페인 끝나고는 진해시청으로 이동했다.
한 시간 반 쯤을 걸어서 도착했다.
진해시는 12만 여의 인구의 도시인데,
병풍처럼 둘러진 산맥 아래쪽으로 길쭉히 뻗어있는 지역이다 보니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관공서 등의 사이가 멀어서 활동하는 것이 상당히 곤역이다.
지나는 길에 개들 좀 쓰다듬어 주다가...
[978 왼쪽부터 수캐, 새끼 밴 암캐, 개똥]
[979 시청으로 향하는 길 인도]
[남신희 님과...]
남신희님은 4년 전에 알게 된 분이다.
광주사시는 분인데, 그 오빠와 함께 세 시간 거리를 차 타고 달려왔단다.
신희님이 내 ‘야그’를 들으로 오셨다고 하길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주로 혼자 떠들어 댔다. ^>^
이분은 인간과 문화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함께
곳곳에 숨어 있는 한국의 ‘맛’을 감칠 맛 나는 언어로 잘 덖어 내시는 분인데,
진해에 ‘해초비빔밥’이 유명하다며 이름난 음식점으로 끌고 갔다.
함께 오신 오빠분은 ‘노골적’으로 그 비릿한 음식을 개탄했다.@.@ 나는 생선을 안 좋아 해서 약간 비릿한 향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나라는 인간이 풀 종류는 (껍질 안 깐 선인장을 통째로 베어 먹는 것 말고는)
다 잘 먹는 특성이 있는지라 맛있게 밥그릇을 비웠고,
반찬 통에 고급음식점의 정갈한 반찬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파전 먹던 조각까지 함께...)
밥을 먹고 해안공원을 따라 대형정자가 하나 세워져 있길래 그곳에 앉아서 한 시간 반 쯤 떠들어 댔다~
[980 해안공원 중간에 우뚝 치솟아 올라온 대형 정자/사진에 뒷통수 -> 신희님]
시종일관 조용하고 수용적인 성격의 신희님이 질문하면 나는 소란스럽고 번잡하게 떠들어 댔다.
신희님은 과거 4년전에는 내가 구시청 자리에 ‘서서’ 1인 캠페인을 하고 있을 때도 와서
그 특유의 수용력과 날카로운 ‘질문’을 조용히 퍼 붓고 나서 내 하는 넋두리를 한마디도 빠짐없이 듣고 갔었는데...
지금은 ‘걸으면서’ 1인 캠페인을 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동의 발전 방향으로 봤을 때 앞으로 ‘뛰면서’ 1인 캠페인을 할 때도 또 한차례 만날 수 있으리라~~~
4년 쯤 후에 뛰어다닐 기력이 남아있을 줄은 모르겠지만...
해안 공원 옆으로는 작은 하천 하구로 운동장 대여섯개 크기의 갯벌이 있었는데,
그 조그만 공간에 아주머니들 수십여명이 부지런히 조개 등을 캐고 있었다.
[982 - 해안 갯벌 조개캐는 풍경]
(이 장면을 보니 지켜내지 못한 내 고향 새만금의 갯벌(만경강 - 어은동하구)이 눈에 아른거린다.
이보다 수천 수만배는 큰 그 새만금 갯벌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의 ‘생계’가 맞물려 있었을까...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죽음의 땅이 되고 있는 그곳...)
덕산초교에서...
신희님과 헤어진 후에 인근 학교로 야영 장소를 알아보기 위해서 들어갔다.
늘상 그렇지만 인조 잔디가 심어진 학교 내에 뛰노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곳분위기가보 다른 곳보다 더 어수선하다.
초등학교 축구팀이 한쪽에서 열심히 운동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여성축구팀이 몸을 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 건장하게 생긴 남자들이 반바지 복장을 하고 모자를 쓰고 있고,
해군외출복 차림의 모습도 몇몇 보인다.
학교를 한 바퀴 뺑 둘러 나와서 한쪽 그늘에서 잠시 눈 좀 붙인 후에 일어나서 보니,
여성축구팀과 초등생들과의 경기가 시작된다.
[983 탁 트인 경화초등학교 전경]
원래 여성이 체력적으로 좀 열등한 이유로 중고등학교 연습경기 때는 주로 초등생남자애들과 시합을 시키는 것은
익히 알던 터여서 ‘그런 경기인가보다’하면서 경기를 지켜보는데...
경기장 밖에서 건장하게 생긴 반바지 복장의 남자 한명이 경기를 하는 여성들에게
‘생도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아~ 그러고 보니 해군사관학교 여생도들이 체력단련 차 축구 시합을 하로 온 것이었다.
초등생 축구팀에 비해서 실력은 좀 딸리기는 했지만, 쉬지 않고 열심히 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984 - 운동장을 쉬지 않고 열심히 누비는 해군사관학교 여생도들]
경기장 한쪽에서는 시합에 출전하지 않은 아이들이 연습을 하고 있길래,
감독님에게 허락을 맡아서 한쪽에 모아 놓고 사진을 찍었다.
고생하는 아이들에게 이정도의 추억은 기억될 수 있게 남겨져야 하지 않겠는가.
[사진에 잡스런 글귀가 들어 있는 것은 사진을 뽑아서 학교로 보낼 목적으로...]
꼬마 아이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길래,
카메라를 들이 밀었더니, ‘경계’하는 눈빛을 한다.
그래서 ‘사진 찍어줄게~’ 했더니,
갑자기 얼굴이 미소가 확~ 번지더니 손으로 V자를 해 보이며 자세를 잡는다.
[987 - 이렇게 자연스러운 미소의 소유자일 줄이야]
[저녁 야영]
덕산 초교에서 야영을 하려다가 인조 잔디에는 늘상 아이들이 붐비는 경향이 있어서,
그 바로 옆에 있는 중학교에 어둑해질 무렵 숨어 들어갔다.
수돗가 옆에 마침 공간이 있어서 텐트를 쳤는데...
‘아뿔싸~’
낮에 ‘일기예보를 좀 잘 봐둘 것을...’ 하며 후회를 한 것은 새벽 한시 쯤이었다.
한순간 비가 우두두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ㅠㅜ
아 머리가 돌 지경...
아닌 밤중에 홍두깨~
다행히 그 근처 10여m 주변에 학교 통로 지붕이 있어서 그 바로 밑으로 텐트를 옮겼다.
발생한 긴급상황에 맞는 긴장감으로 무장하여 ‘후다닥’ 짐을 옮겨 놓은 후에,
텐트를 들어서 옮기고 다시 그 안에 짐을 집어넣고 침낭에 들어가 누웠다.
한차례 전쟁을 치루기는 했지만, 이러한 작은 난관?의 극복 후에는
그 결과로 인한 ‘편리’와 ‘안락’함에 대한 기쁨이 따르곤 한다.
재 배치된 야영 공간에서 비 떨어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얼굴에 미소 가득 담고,
다시 그 펑퍼짐한 침낭을 껴안고 잠에 드는 기분은 이를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누릴 수 없는 기쁨이다.
그런데 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한 차례 후두둑 떨어졌던 소나기가 전부였다.
분하고 억울함에 잠이 오지 않는다. ㅠㅜ
[988 실컨 이렇게 옮겼는데... ㅠㅜ]
518 광주민주화 항쟁 기념일
1979년 10월26일 대통령 비서실장인 김재규는 군부독재자 박정희를 시해한다.(1026사태)
박정희의 총애를 받고 있던 당시의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국가의
모든 정보를 관리 통제할 수 있는 보안사령관위치에 있었는데, 박정희 시해 사건 후에
‘계엄사합동수사 본부장’의 직책을 갖게 되고, 무소불위의 수사권을 손에 쥐게 된다.
이러한 권한과 하나회(전두환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육사 계조직)을 통해서
12월 12일 자신과 반대하는 군부세력(육군참모총장까지 포함)을 모두 숙청하고 실질적으로
권력의 1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1212 구테타)
이에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신군부세력(전두환 등)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며 전개한 투쟁이 바로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이다.
관련 글 =>
아래는 518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한 고 3 정민경학생의 시이다.
그 날 / 정민경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518 덕산초등학교 캠페인
이 학교(앞서 해군사관생도들 축구했던 학교)는 진해를 삥 두른 웅장한 산맥이
한눈에 들어옴으로 운동장에 들어오면 가슴 탁트이는 시원한 감을 준다.
캠페인 하면서도 시종일관 즐거울 수 있었다.
타 학교의 경우에는 안 받고 지나가는 아이들이 많게는 열 댓명씩 있고 적어도 한 두명씩은 꼭 있는데,
특이하게도 안 받고 지나가는 아이들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산맥의 정기 때문일까?~
떨어진 휴지를 줍고 있는데, 1학년 4반 꼬마 아이 하나가 끝까지 붙어서 함께 주워준다.
너무 대견해서 학교 게시판에 칭찬의 글을 남겨줬는데...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사 보내야겠다.
(이럴 때 마다 주머니 사정 생각해야 하는 이 처량한 신세...)
저녁 야영
저녁에는 중앙초등학교로 찾아 들어가 야영을 했다.
바로 다음날에 창원으로 이동할 계획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창원으로 넘어가는 ‘안민고개’ 길목에 위치한 중앙초교에 터를 잡았다.
이 학교는 웅장한 천자봉 산맥을 배경으로 떡 버티고 서 있었는데,
이 대문에 교문을 지나 운동장에서면 안정감이 밀려온다.
[990 - 중앙초등학교 해질 무렵]
아니나 다를까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이 학교 운동장에는 밤 늦게까지 운동하는 사람으로 북적였는데,
주차장 한쪽에 텐트치고 ‘숙면’을 취하려는 의도는 이로 인해서 물거품이 되었다.
새벽에도 4시 좀 넘어서부터 운동하는 사람들이 나와 소란을 피우는 통에 잠이 깼는데,
특히나 한 아저씨가 5분간 내지른 괴성은 내 새벽 잠을 강탈해 가서 무참히 유린하고 고문하며
쥐어짜내어 내 아침 기상 과정을 힘겹게 만들어 냈다.
학생수가 500여명 남 짖한 학교라 번잡하지도 않고, 아이들이 모두들 맑고 순하고 해서 활동하는데
시종일관 여유가 있었다.
한 여선생님이 아이들을 끌고 휴지를 줍고 있어서 없지 않아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말씀을 안 하시고, 아이들에게만 ‘벽에 붙이면 안 된다’고 멀찍이서
조심스럽게 주의를 주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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