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대학 끝에 매달려 있는 후배의 우울함을 달래주기 위해 본 영화 <더 댄서>. 바로 옆 멀티플렉스관에는 우리 사회의 모성애 이데올로기에 힘입은 <어둠 속의 댄서>가 사람들을 줄잇게 했지만 후배와 함께 간 6000원짜리 상영관에는 우리를 포함해 고작 5명뿐이었다.
96년 이른바 '영화제'라는 것이 대학가에 한창 유행했던 시절, 동아리에 끼있는 장애인들이 우리도 뒤쳐질 수 없다면서 장애인 영화제-개성 영화제(Personality Film festival)-를 한 적이 있었다.
함께 간 후배도 장애인하면 딱 떠오르는 특수교육과를 다니고 있어서 사실 장애의 승화라고까지 극찬하고 있는 '어둠 속의 댄서'는 상당한 유혹이었지만 '시각장애'라는 기제가 단지 영화의 비극성을 강조하는 최루탄 역할만을 하는 것 같아 거북스러웠다.
그러던 것이 작년 10월 여기에 뜬(<더 댄서> 춤영화라고요?) 기사를 본 적이 있어 언제 개봉하나 기다렸었다. 원래는 작년 11월쯤에 개봉할 영화였으나 흥행을 생각해서 <어둠속의 댄서>에 묻혀 떠볼려 한 것으로 여겨진다.
결과는 장애를 전면에 내세운 '신파조 멜로물' <어둠속의 댄서>는 떴고 춤과 선정성을 전면에 내세운 진짜 '장애인 영화' <더 댄서>는 처참히 침몰했다.
여기서 굳이 <더 댄서>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를 분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어둠속의 댄서>와 비교하여 춤과 선정성을 걸러낼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했다고 평가하는 몇몇의 비평에 강한(?)쓴 웃음을 보낼 뿐이다.
난방도 해주지 않아 추위에 떨며 본 90분 <더 댄서>는 그동안 장애인을 소재로 한 영화와 달리 주인공들의 '장애'를 그리고 말하는 도식을 파괴해 버렸다. 미흡하긴 하지만 제작자 뤽베송과 <제5원소> <잔다르크>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프레드릭 가르송의 카메라는 여주인공의 말못하는 '언어장애'를 따라가지 않고 주인공 '인디아'를 따라감으로써 '장애'라는 카메라의 객체를 장애를 가진 '사람'을 카메라의 주체로 연출해 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영화에서 여주인공 인디아의 언어장애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결코 언어의 소실이 춤능력의 증대로 이어지지 않으며 영화의 결말도 '장애 극복'이나 '장애 좌절'이 아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언어 장애를 가진 인디아의 자기 정체성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가 대부분의 비평가나 관객이 이야기하듯 '춤'이 중심인 영화라면 더욱 그러하다.
여주인공 인디아가 춤을 단순히 '춤'에서 자기의 '언어'로 인식해 가는 과정이 사실상 이 영화의 기둥 줄거리다. 춤의 가장 직설적인 정의를 빌리자면 다른 형태의 '언어'라고 할 것이고, 자기의 언어로 자신을 인식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 자기 정체성의 획득이라고 한다면 이는 자기 정체성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영화의 여주인공인 인디아는 영화 첫장면에서의 음악 DJ가 마구잡이로 틀어대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대결을 벌인다. 또한 옆집 가게에서 아무 때나 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춤연습을 한다. 이는 세상의 언어와 반응에 대해 나름대로의 소통기제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자신의 장애를 드러내고 소통하는 것에 언제나 주눅이 들어 있다.
인디아가 자신의 정체성, 즉 자기의 '장애'를 커밍아웃하는 경우는 딱 두가지이다. 하나는 나이트 클럽에서 춤을 출 때와 농아학교에 자원봉사를 갔을 때이다. 이 경우에는 자신의 언어인 춤과 수화를 다 쓸 수 있으니까 '서로 다름'을 인식하는 커밍아웃을 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커밍아웃을 안하니 비장애인도 함께 가지고 있는 춤이란 언어 역시 자기 언어로 자각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춤이 멈추고 난 뒤가 문제다. 남는 건 수화밖에 없는데 그의 오빠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장애인이 있는 가족들이 그러하듯 영화 중반까지 그녀의 모든 장애를 춤으로 감추려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녀가 노출되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 한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정체성의 부재가 언어장애로 인한 공개 오디션 선발 탈락으로 이어지게 되고 자괴감과 자기 혐오감에 빠진 여주인공 인디아는 농아학교로 찾아가 농아 아이들을 한사람 한사람 포옹함으로써 자신을 다시 확인, 추스르게 된다. 여기서 이 공간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유일한 공간이다. 나이트 클럽에서의 춤은 언어가 아닌 춤일 뿐이므로.
물론 현실적으로는 오빠가 있든 없든 장애로 인한 오디션 탈락은 달라질 것 없이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혐오와 학대로 받아들이게 하느냐 아니면 엄연한 차별로 받아드리게 하는 차이는 바로 '자기 노출 긍정성' 곧 자기 정체성의 인식에 기인한다. 만약 자기 혐오나 학대로 이어지면 이는 장애 부정으로 이어져 개인적인 장애극복으로 귀결될 것이고 엄연한 차별로 자각하면 장애 인정을 통해 자기 퍼스널러티가 된다.
물론 감독은 인디아가 왜 자기 장애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 하는가를 길거리 가게 앞 춤공연에서 가게 주인이 동전을 던져주며 내쫓은 장면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주인공의 심정표현을 슬로우 모션으로 수화와 욕을 처리함으로써 극명히 드러내기도 한다.
이 영화가 단순 댄스영화로 머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그 동안 많은 댄스 무비들이 대부분 갈등 요소를 타자에 두었다면 <더 댄서>는 그 방향을 주인공 내부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젊은 과학자 이삭을 만나 그가 고안해낸 운동을 음향으로 전환시키는 장치에 의해 인디아는 자산의 언어인 춤을 처음으로 소리로 변환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기 학대와 혐오를 가져왔던 언어장애를 자신의 존재로 인정하고 사랑하고 인정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세울 계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 자체가 인디아의 장애를 초월하고 꿈을 이루게 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가서 그것은 소리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춤 실력을 자각시켜줄 뿐이다. 자신에 대해 확실히 세상을 향해 떠들어 댄 것이다.
이는 인디아를 차별했던 극단의 백인 감독이 이 장면을 보고 후회하는 것으로 잘 말해 주고 있다. 단원들간의 의사소통이 중요하다고 인디아를 떨어뜨린 이 백인감독의 존재는 가장 언어로써 춤을 인정하는 댄서 극단의 아이러니 역시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다른 뤽 베송의 영화와 같이 영어로 작업하여 '또 다른 무국적' 영화를 만들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프랑스 개봉시 주간지 피가로 스코프는 "<댄서>는 댄스영화로서 전혀 새로울 게 없다"라는 비난을 했고, 프르미에 역시 "미숙한 영화"라고 일축했지만 내가 이제껏 본 장애인 영화중에는 제일로 장애인 영화다운 영화였다.
장애인이 볼 때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가 내 '장애'를 인정하는 과정과 같으므로. 참으로 장애인이 스스로 자신들을 말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