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얼굴
연락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마땅한 방법이 없어 하 세월을 보내다가 소식이 닿으면 매우 기쁘다. 어느 모임에서 우연히 한 인물이 화제가 되었는데 듣고 보니 그동안 궁금했던 동생의 친구였다. 바로 연락처를 받아 귀가 길에 반갑게 통화하면서 옛날의 사연을 더듬어 보았다.
동생 소개로 첫 대면을 한지도 벌써 20년이 훨씬 지났다. 어느 겨울 날 마침 덕유산에서 스키를 탄다는 딸 일행을 스키장에 내려두고 그를 찾아 나섰다. 기암괴석과 울창한 아름드리 수목 그리고 눈이 쌓인 개울을 따라 맑은 물이 흐르는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그가 기거하는 마이산 자락의 『금당사(金堂寺)』를 찾아 반갑게 대면하였다.
당시 40대 초반인 그는 혈기왕성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추진력에다가 말도 달변이었다. 출가를 전후한 지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 고해의 바다인지를 새삼 절감하였다. 이곳에 들어와 인접한 대형 사찰과의 마찰, 정부 문화재청과의 보조금 문제, 대웅전 건물을 전혀 훼손함이 없이 이동하는 문제 등에 대한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보다도 사찰의 맞은편에 있는 산으로 안내하여 따라갔다. 새로운 공사를 하려고 설치한 자재 운반용 ‘임시 모노레일’이 매우 약해 보였는데 3명이 동승해서 상당거리를 올라갔다. 비탈진 길을 가는데 밑으로 보이는 아찔한 계곡이 현기증을 느끼게 할 만큼 위험한 길이었다.
올라가니 그곳은 커다란 석굴형태의 공간이었다. 고려 말에 「나옹화상(懶翁和尙:고려 말 승려)」이 이곳에서 주석(主席:최고의 자리)으로 지냈다는데 깊은 산 중의 정취가 묻어나는 전망이 좋은 곳 이었다. 그는 이곳에 새로운 법당을 만들고 있다는 야심찬 설명을 하였다. 「나옹화상」은 국문학에 나오는 가사문학(歌辭文學)의 효시(嚆矢)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곳에서 내려와 요사(寮舍)채에서 다양한 화제로 대화를 하였는데 나는 주로 경청을 하였다. 마침 얼마 전에 끝난 대통령 선거는 어느 노승의 염력(念力)이 작용한 결과라고 하였다. 얼마 전에 그 노승이 이곳을 다녀갔다고도 하였다. 이어서 소장품을 꺼내더니 몇 편의 그림을 골라 선물로 주더니 후에 「현로 규일(玄老 圭一)」이라는 전각가(篆刻家)가 새긴 도장을 보내왔다. 측관(側款;인장의 옆면에 연도와 새긴 사람의 이름 등을 새겨 넣는 글)까지 있어 마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알다시피 「추사(秋史) 김정희」의 제자인 「소산 오규일(小山 吳圭一)」은 유명한 전각가의 최고봉으로 그의 작품은 보물급 문화재이다. 그의 재능을 인정한 「추사」가 문하로 받아들여 안목을 넓히고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그의 전각에 있어 「추사」의 영향이 매우 컸으며, 「추사」의 제주도 유배시절까지 가르침이 이어졌다. 「현로(玄老)」는 아마도 그를 흠모하여 따르려는 작가인 듯싶다.
이런 사연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소통되니 반가웠다. 행적을 보니 그간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아 한 때는 승적이 박탈되기도 했었다. 하여간 저간의 활동에 대해서는 내가 왈가불가할 일은 아닌 듯싶다. 최근에는 큰 수술을 받고 요양 중이라 하니 당분간은 대면하기 어려운 사정이다. 큰 불사를 일으킨 그에게 부처님의 큰 은덕이 함께하길 바란다. 일단 전화로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동생의 극락왕생을 위해 기도해 주길 간절히 당부하였다. 아울러 전각가의 안부를 물으니 지금은 어느 시골에 들어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불현 듯 해남 『대흥사』의 「법강(法綱)」스님이 생각나 연락을 드렸더니 바로 소식이 왔다. 몇 해 전에 비가 내리는 가을날에 대흥사를 4번 째 찾아갔다. 동생 부부와 같이 경내의 고즈넉한 풍광과 함께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추사」의 ‘무량수각(無量壽閣)’의 현판과 ‘연리지(連理枝) 나무’ 등을 구경하고 산책을 하였다. 그런데 문득 『일지암(一枝庵)』에 가고 싶어 비탈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사실 『대흥사』는 ‘초의’를 빼놓고 논할 수 없으며, 목포인근에 있는 옛 고향마을에도 그를 기리는 시설이 있어 찾아간 일이 있었다.
『일지암』은 과거 「추사」가 제주도 유배 길에 이곳에 머물던 「초의(艸衣)」선사를 예방하여 ‘초의차’를 대접받았던 곳이다. 「추사」는 「초의」와 동갑으로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었는데 서로 시·서·화·차 4절(絶)에 대한 품격을 갖추고 있어 고차원의 교유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미 젊은 시절에 「추사」는 북경에서 고급차 맛을 맛보았는데 그만 『일지암』의 ‘초의차’에 반하고 말았다.
이런 사연으로 오늘 날 우리나라에 차가 유행되었다고 한다. 「초의」선사는 「다산 정약용」과도 ‘초의차(艸衣茶)’를 통하여 교유하였다. 인근 강진에 유배된 「다산」은 「초의」에게 유학을 가르쳤다고도 한다. 이처럼 『일지암』은 우리나라 다문화의 성지이자 조선 후기 예술과 문화의 산실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초의」와 「추사」 두 사람의 교유는 각별하게 평생을 통해 지속되었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초의」는 당시 험난한 뱃길을 건너 세 차례나 제자 「소치(小痴) 허유(許維)」를 통해 「추사」에게 손수 법제한 차를 보내고, 「추사」는 「초의」에게 일로향실(一爐香室)등의 글을 써 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아무도 없는 곳이라 기웃거리다가 내부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구경하였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아담한 마당이 있고 대웅전, 요사 채, 자우홍련사「紫芋紅蓮社, 혹은 (자우산방 紫芋山房)」와 『일지암』 초정(草亭)등이 있다. 영산홍이 필 때 다홍색 꽃이 연못에 투영된 모습을 보면서 마시는 ‘초의차’는 다(茶)와 선(禪)이 하나가 되는 신선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일지암』은 초가로 지은 조그만 집인데 그 현판을 쓰신 분이 「강암 송성용(剛庵 宋成鏞)」선생이었다. 「강암」은 전 북지사를 지낸 시인이며, 서예가인 친구의 선친으로 현대 서예사의 큰 획을 그으신 명필이시다. 뒤편에는 돌 틈 사이에서 졸졸 쉼 없이 물이 나오는데 바로 차를 끓여 마시던 물이었다. 정원에는 배롱나무가 품격 있게 자라고 암자 하단부로는 그 유명한 차밭이 단정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뒤쪽에서 누구시냐고 묻는 말에 이곳을 관리하는 「법강」스님을 대면하고 추가적인 안내와 설명을 들었다. 스님은 원래 『동화사』에 머물다가 「초의」와 차에 심취하여 이곳으로 자원했다고 하였다. ‘자우산방’에 들어가 향기로운 차를 대접받고 선물로 주시는 귀한 차까지 받았다. 이후에 종종 안부 소식을 나누는데 이번에는 연못가의 돌에 새겨진 한자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돌에 새긴 글씨는 「초의」선사의 글을 모사하여 다른 후학이 쓴 ‘다암(茶盦)’이라고 하였다. 「초의」가 남긴 원작품을 사진으로 보내주었는데 ‘초가지붕이 덮인 차를 마시는 곳’을 뜻하는 듯하다. 『일지암』 마루에서 차를 대접하고 싶다는 사연도 함께 왔다.
처음으로 사찰에 간 것은 부모님을 따라 간 『관음사(觀音寺)』였다. 당시의 여러 여건을 고려하면서 큰 자식의 앞날이 궁금하시니 관상으로 유명한 주지스님을 찾은 것이다. 자세한 설명으로 그나마 안심이 되어 이후 차질 없이 선택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다음 인연은 우연히 설악산 줄기인 관모산(冠帽山) 자락에 있는 『영혈사(靈穴寺)』에 갔다가 역시 주지스님과의 대면이었다. 이곳은 「원효(元曉)」 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백두대간의 심장부에 위치한 곳으로 영험한 곳이며 이곳의 약수는 제일로 치는 명소라고 한다. 마침 한국전쟁 당시 부근에서 산화한 장병의 넋을 기리는 위패가 모셔진 ‘지장전(地藏殿)’에서 참배를 하였다. 차를 마시면서 관상을 살피시더니 미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해주어 그 언사를 고이 마음으로 새겨 두고 지내고 있다.
이렇듯이 지나고 보니 사찰과 스님과의 인연이 있었던 과거사를 돌이키게 되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는데 어쩌면 그들과 억겁(億劫)의 사연이 쌓였는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형다운 역할을 하지 못한 동생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선량하고 착한 성격이었지만 모질지 못해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고 술로서 화를 다스렸으나 이를 제대로 어루만지지 못한 형의 책임이 크다. 무릇 살아생전에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들과 우애하며 자주 보면서 소통하고 살 일이다. 지난 세월에 켜켜이 쌓인 인생무상의 분진(粉塵)을 씻으려 해도 그리운 얼굴은 떠나지 않는 법이다. 그나마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시간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 속에 살아있기를 바랄 뿐이다. (2024.3.18.작성/3.20.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