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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화된 시간 속 이면의 층위들
_정선희의 시 세계
우리가 다가가서 만질 수 있는 것들과 아예 형체도 없는 기억에만 존재하는 통념도 시인의 상상력으로 새롭게 형상화된다. ‘샹들리에’, ‘자개농’, ‘장대’, ‘알 수 없는 K’, ‘황도 통조림’은 시적인 함의를 내포한 메타포다. 이렇게 다가온 물상에서 감각화된 접면을 놓지 않고 사유라는 영역으로 전환해 가며 그 안에서 변주를 거듭해 시의 형상을 드러낸다. 정선희 시인이 평소 바라보는 지점이 어디인가를 말해주는 시상 속의 세계를 통해 삶이라는 일상으로 마주하는 반 도시적인 감성을 주조로 시를 이루고 있다. 알게 모르게 일상으로 환기되는 삶의 시간들을 천착하면서 시라는 문장으로 부조하는 작업으로 헤아려가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가 그렇고 삶이 그런 거라서 처음부터 낯선 것 투성이다. 알지 못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래전 그래왔던 것처럼 시를 통해 말을 걸고 안면을 트게 된다. 마치 벌어진 껍질 안 빨갛게 익은 석류알을 처음 보았지만, 맛을 보지 않더라도 감으로 알아차린다. 정선희 시인의 시 다섯 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의 세계가 바라본 지점을 통해 시에 담고 있는 의미가 조금씩 다른 차이로 존재하지만, 상통하는 보편적인 세계 안에서 이해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다양한 생각들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대단한 가치로 욕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보며 과연 그것이 옳기만 한 것인가를 의문하게 한다. 시인은 도시라는 구실 아래 가공된 아름다움의 이면에 도사린 과거적 경험을 떠올린다. 그 안의 현재로 작동된 기제는 새로운 시도와 결합한 욕망으로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향수에서 비롯된다.
가끔 들르는 커피집에는
아주 커다란 나무뿌리 샹들리에가 있다
순교자처럼 매달려 벌을 받는 것 같다
뿌리가 저 정도면 몸통은 얼마나 큰 그늘을 앓았을까
무엇이든 오래되면 영물이 된다고
조상들은 큰 나무 아래를 지날 때 돌 세 개를 얹곤 했다
세 번 절하고, 세 번 침을 뱉었다
우리 엄니도, 서방도 일찍 데려가더니만
이젠 안 돼요 더 이상 아니 되오
저것 좀 내려주세요. 나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안 돼요. 그는 내 말을 단칼에 잘랐다. 저걸 올리느라 얼마나 돈이 많이 들었는데요. 구하기도 힘들어요.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한다
왜 창가 식물들이 죽어가고 빈자리는 늘어만 가는지
땅속에 모셔두고 술 석 잔 올려도 모자랄 판인데
천장에 매달아 놓고 장사가 잘되기를 바란다
고개 들어보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눈 감은 나무뿌리
뿌리가 뒤틀리는 시간에 속한 집
커피 맛은 언제나 쓰다
-<천장 天葬> 전문
우리가 추구하는 형상미에 영리 목적을 위해 가공되는 아름다움이 과연 합리적인 미의 추구인가를 되묻고 있다. 어떤 기회가 되어 한 번씩 들르게 된 커피집이 있다. 그 집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나무뿌리를 인공적으로 변형해 천장의 샹들리에로 설치하여 나름 실내 분위기를 꾸민다고 한 곳이다. 우선 상상이 되는 크기를 가늠해 볼 때 거목의 뿌리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화자의 눈에 비친 그 모양이 마치 “순교자처럼 매달려 벌을 받는 것 같다”는 데 있다. 결국 커피집주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부정적인 의미로 인상 지워지고 있다. “뿌리가 저 정도면 몸통은 얼마나 큰 그늘을 앓았을까”라며 뒤집힌 뿌리의 형상을 바라보며 화자는 이어서 뿌리가 품었음직한 생전의 생명력에 대한 상상을 한다. 지금까지 연륜 깊은 ‘거목’을 볼 때 ‘영물’이라는 두려움뿐만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관습을 믿고 있는 화자다. 우리가 살아온 전통적인 인습으로 볼 때 동네 앞 고목은 애니미즘인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곳을 지날 때면 “무엇이든 오래되면 영물이 된다고/ 조상들은 큰 나무 아래를 지날 때 돌 세 개를 얹곤 했다/ 세 번 절하고, 세 번 침을 뱉었다/ 우리 엄니도, 서방도 일찍 데려가더니만/ 이젠 안 돼요 더 이상 아니 되오”라며 집안의 재앙이 마치 그로 인해 발생된 것이라고 믿어 간절한 기원(세 번 절하고)을 간구하고, 혹시 모를 부정적인 것에 대한 경계의 마음으로 세 번 침을 뱉었을 것이다. 그런 ‘영물’의 거대한 뿌리를 볼 때마다 비명을 지르듯 커피집주인에게 뿌리 형태의 상들리에를 제발 내려놓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주인은 그것의 가치를 오로지 비용이라는 화폐가치로 환산할 뿐이다. 비록 살아가는 삶의 가치가 다를지라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행위는 결코 해선 안 된다는 금기 같은 생각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는 화자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생기 왕성한 식물의 뿌리가 천장을 향해 있을 때 뿌리가 내뿜는 기운이 부정적일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없는 화자다. 자연을 거스르는 행동 그 자체가 못내 불편한 것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어찌 보면 화자의 보편적인 생각과 같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가 한쪽 벽면을 미로로 만들었다
햇빛을 되받아 반짝이는 조개 껍질은
곧 밤하늘에 심어놓은 조약돌로 바뀐다
지나갈 때마다 몸을 웅크리게 된다
손이라도 스쳐 우주가 흩어져버릴까 봐
엄마의 이사는 언제나 자개농이 전부였다
집에서 제일 값나가는 혼수품 이전에
당신이 꿈꾸던 우주였을지도 모른다
가끔 학이 날아오르기도 한다
테두리 넘어 날아갈까 소나무 가지가 부러질까
조바심으로 엄마가 더듬어보는 손이 움켜쥔 것은 무엇이었을까
억지로 붙잡아 놓은 우주
별 사이로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학의 날갯짓
아무리 강력한 아교라 할지라도 잡아둘 수 없다
자개농에서 엄마가 머무는 시간이 늘어간다
늘어난 주름을 열면 젊은 날을 녹여 아교로 쓰는 엄마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엄마의 밤하늘에서 별 한 조각이 떨어진다
금이 간 집안의 무늬를 다시 맞출 때면
우주를 떠돌던 자식들이 대문을 밀고 들어온다
어머니 가슴 한켠에 그가 만들어놓은 미로
한 획 수평선을 긋고 반짝임을 채워 놓았다
-<손바닥 미로> 전문
사람들은 살면서 남들이 알지 못한 소중한 것을 가슴에 간직하며 산다. 결혼을 한 후 해를 거듭할수록 고독해질 수밖에 없던 어머니의 세월을 견디게 해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삶에서 우선시한 남편이었고 시간이 흘러 태어난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으며 살았을 어머니의 생애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 때 어머니에게 위로가 된 일들이 많았겠지만, 방 안을 지켜준 소장품 중에서 ‘자개농’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것을 알았다. 요즘은 ‘자개농’에 대한 인식이 많이 희석되었지만, 예전에는 부를 상징한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시집갈 때 필수품으로 소망했던 것이고 아무리 어려운 살림이지만, 자개가 촘촘히 박힌 자개농 세트를 장만해 보낸 것이다. 과거 세월도 아득하지만, 아직도 마음속에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화자의 애틋함이 지극하다. 그러기에 한 사람의 생애와 맞닿아 있는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자개농은 어머니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 안에 녹아든 어머니의 시간은 행복과 고통이 교차할 때마다 좌절보다 인내심으로 승화해 가는 심정을 아로새기는 ‘미로’ 같은 공간인 셈이다. ‘자개농’으로 대별한 풍경의 심연 속에서 무한한 인고의 사유가 깃들어 있어 그 세계는 어머니만이 알고 있는 우주의 세계다. 조개껍질 속에는 수많은 바다의 시간이 새겨져 있듯 생의 이야기가 손금처럼 결을 이루고 있다. 그런 조개껍질로 장식한 자개농이기에 매사 조심해 만지거나 원형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각별하게 정성을 쏟았을 것이다. 마치 “지나갈 때마다 몸을 웅크리게 된다/ 손이라도 스쳐 우주가 흩어져버릴까 봐” 그만큼 애지중지하며 어머니가 사랑을 쏟았던 자개 문양에서 “가끔 학이 날아오르기도 한다/ 테두리 넘어 날아갈까 소나무 가지가 부러질까/ 조바심으로 엄마가 더듬어보는 손이 움켜쥔 것은 무엇이었을까”라며 어머니가 꿈꾸었을 상상을 가늠해 본다. 시간이 세월처럼 켜켜이 쌓여 아름다운 문양을 형성하듯 장인의 숨결로 붙여진 자개가 접착력이 약해져 떨어진 일이 발생하곤 했을 것이다. 자개농 안의 이미지처럼 생애라는 온갖 형상에서 화자는 어머니가 살아온 세월을 읽어낸다. “억지로 붙잡아 놓은 우주/ 별 사이로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학의 날갯짓/ 아무리 강력한 아교라 할지라도 잡아둘 수 없다”며 어머니도 학처럼 언젠가 무한 창공을 날고 싶어 했을 것이다. 자개농에 잘 붙어있던 자개 문양이 잘못된 때에는 불길하거나 나쁜 징후라고 여겨 참회하듯 본래 모양처럼 손보는 것을 서두르셨다. 그 행위는 마음속 기원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신앙체의 한 모습으로 존재하며 간절한 기원은 결국 당신의 안위가 아닌 가족 구성원에 대한 평안이었을 것이다.
아파트 공터 옆에 긴 장대가 누워있다
저 장대, 나와 안면이 있다
마당 한가운데 서서 하늘 높이를 조절하던 장대
마당의 균형을 잡으면 하늘 한쪽이 기울어지는
그런 장대의 자세는 우리 집 감나무에게서 배운 것
내 마음이 옆집 석류나무 쪽으로 기운 것을 알아서
그 애 볼 볼록하게 홍시로 채우고 싶었던 날들을 다 보아서
그때마다 엄마는
구름을 타고 앉은 내 머리채를 잡아당기곤 했지만
장대가 치켜올린 하늘엔 멍이 든 엄마도 없고
밤도깨비 같은 아버지도 손이 다섯 개는 필요한 동생도 없고
그렇대도 인제 허공도 쉴 때가 되었지
뒷방 늙은이 같은 버려진 장대 끝에 앉아 본다
비스듬한 추억을 누가
허공 가득 풀어 놓았을까
-<안면이 있다> 전문
도시에 살며 우연한 기회에 낯익은 과거의 시간을 발견한다. 전혀 그럴만한 장소가 아닌데 “아파트 공터 옆에 긴 장대가 누워”있는 모양을 보며 잊고 지낸 유년기 추억이 생각난 것이다. 아련한 추억 속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요즘처럼 도시화된 주거환경에서는 옛날 같은 풍경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시골 어디를 가든 마당 이쪽과 저쪽에 빨랫줄을 매달아 놓고 가족들의 옷을 널어놓던 풍경이 집집마다 일상이던 때가 있었다. 힘에 부친 빨랫줄을 일으켜 세우며 마당 한가운데를 비스듬히 받치고 있던 바지랑대를 기억하는 화자다. 그 장대(바지랑대)에 걸친 추억의 타래를 따라가 보면 “마당 한가운데 서서 하늘 높이를 조절하던 장대// 마당의 균형을 잡으면 하늘 한쪽이 기울어지는// 그런 장대의 자세는 우리 집 감나무에게서 배운 것// 내 마음이 옆집 석류나무 쪽으로 기운 것을 알아서// 그 애 볼 볼록하게 홍시로 채우고 싶었던 날들을 다 보아서”라고 하얗게 빛바랜 추억을 불러온다. 간혹 그 장대 끝과 맞닿아 있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은 욕망을 품게 하던 시절을 기억한다. 추억을 소환해 준 ‘장대’에는 가족사의 아픈 추억이 깃들어 있어 “구름을 타고 앉은 내 머리채를 잡아당기곤 했지만// 장대가 치켜올린 하늘엔 멍이 든 엄마도 없고// 밤도깨비 같은 아버지도 손이 다섯 개는 필요한 동생도 없고// 그렇대도 인제 허공도 쉴 때가 되었지”라며 말을 하지만, 슬퍼서 더 안타까운 심정이 배어있다. 간혹 어떤 연유일지 모르지만, 집안에 긴장감이 맴돌았고 그로 인해 가슴에 슬픔 같은 멍이 깊숙이 밴 어머니의 삶을 기억한다. 그것은 ‘밤도깨비’처럼 아버지가 좋지 않은 일로 자주 집을 비웠다는 데서 연유하고 소홀해진 살림살이 때문 ‘손이 다섯 개는 필요한 동생’을 비롯해 가족 모두가 고된 삶을 부지하느라 고통을 감수해야 했음을 말해준다. 아파트 앞 공터에 부려놓은 ‘장대’를 보며 팽팽하기만 했던 추억의 허공을 풀어버린 모습에서 시간의 긴장은 어디로 흘러가버린 것일까? 처연하리만치 아름답기만 했던 추억의 한 토막을 채우고 있는 잊혀진 풍경을 통해 그 누구도 기억해 줄 수 없는 자신만의 시간을 간직한 채 덩그러니 놓인 ‘장대’가 갖는 의미와 가족을 다시 생각해 본다. 집안의 살림살이를 낱낱이 알려주기라도 하듯 빨랫래줄에 가득 널린 삶의 무게를 힘겹게 부지하던 ‘장대’, 이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의외이거나 의아스러운 일들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은 요즘이다.
택배가 왔다
영어로 된 포장지에 싸여
먼 곳에서 온 선물이거니
뜯고 나서 동물 사료인 것을 알았다
눈을 흘기고 있는 갈색의
CAT이란 단어가 발톱을 세운다
누구일까 잘못 보낸 것 아닐까
수신인은 분명 내 이름
알 수 없는 K가 내게
고양이를 데려온 사람을 내쫓은 적이 있다
눈살을 찌푸린 적도, 길냥이에게 밥 주는 사람에게
밤 산책에 고양이를 마주치면 소스라치곤 했다
고양이를 홀대한 그동안을 묻는 걸까
다시 돌려보낼 수도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고양이 한 마리의 불안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를
좁은 골목길이 아득해진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알 수 없는 K가
나를 사방에서 옥죄어오고 있다
-<알 수 없는 K> 전문
익명의 시대를 살아가며 아는 사이인 이웃끼리도 몰랐던 사람들처럼 자꾸 교류의 벽을 높여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 ‘알 수 없는 K’다. 철저히 감춰진 신상이 우리가 흔히 호칭으로 사용하는 ‘아무개’가 아닌 외래어 ‘K’로 지시되고 있다. 그것도 영어로 된 포장지를 사용해 상당한 ‘선물’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섬뜩한 의도를 담고 있다. 도통 황당하기 그지없는 소포도 그렇지만, 뜯고 보니 ‘동물사료’라니 집안에 사육한 동물이 없었으니 이것은 황당한 것을 넘어서 두려운 일이 된다. 의사 표현일지 모른 포장지 그림자마저 “눈을 흘기고 있는 갈색의/ CAT이란 단어가 발톱을 세운” 모습이 그런 마음을 더 강하게 일게 한다. 화자는 누군가가 동물사료를 보낸 진의도 궁금하거니와 익명의 ‘K’에 대한 정체가 갖는 속내가 아리송할 뿐이다. 불쑥 배달된 소포와 ‘알 수 없는 K’로 인해 안온하기만 했던 일상이 불안해지며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지금껏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면서 ‘익명’이라는 불안한 도시의 이면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자꾸만 파고드는 불길함과 그 원인이 된 빌미는 어디서부터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고양이를 데려온 사람을 내쫓은 적이 있다/ 눈살을 찌푸린 적도, 길냥이에게 밥 주는 사람에게/ 밤 산책에 고양이를 마주치면 소스라치곤 했다// 고양이를 홀대한 그동안을 묻는 걸까// 다시 돌려보낼 수도/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고양이 한 마리의 불안”한 눈빛처럼 가족이 살고 있는 집안까지 밀고 들어온 것이다.
가끔씩 드라마의 줄거리보다 소품이 눈에 들어온다. 대행사란 드라마에서 대기업 회장 딸과 그는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 소녀에게 바나나우유 빨대를 꽂아주곤 했다. 소녀는 자라서 그가 대표로 있는 회사로 출근했다. 아직 감정 조절을 제대로 못 하는 그녀에게 그는 말없이 바나나 우유를 건네 주었다. 빨대도 꽂아드릴까요?
그녀는 흘러내린 브래지어 끈을 올리듯 자신의 감정을 추스렸다
내게도 바나나우유에 비길 만한 추억의 간식이 있다. 아플 때마다 입 안에 넣어주던 황도 통조림.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혓바닥의 맛. 캔 뚜껑을 따면 물속에 보름달이 떠 있었다. 소원을 빌었다. 가끔 아프게 해주세요. 부드럽고도 환한 달밤이면 아프고 싶었다. 이마를 짚어주던 넓고 두툼한 손바닥. 아버지는 보름달이 든 밤하늘을 방 한켠에 내려놓았다.
-<가끔 아프게 해주세요> 전문
아련한 추억을 연상시킨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그 드라마 속 관계로 설정된 “대행사란 드라마에서 대기업 회장 딸과 그는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 소녀에게 바나나우유 빨대를 꽂아주곤 했”던 추억이 있다. ‘소녀’가 성장해 그 대기업에 취직한 뒤 재밌는 일이 발생한다. 그날도 어릴 적 ‘소녀’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회장님이 ‘바나나우유’를 건네준다. 그러면서 예전 그랬던 것처럼 회장님이 빨대도 꽂아줄까요? 라며 묻는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성장한 여성이 된 ‘소녀’를 악직도 어릴 때처럼 생각하며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달라진 진 것은 자기도 모르게 반 존대어가 튀어나온 것 말고는 없다. 당황한 “그녀는 흘러내린 브래지어 끈을 올리듯 자신의 감정을 추스렸다”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모호한 순간을 맞은 것이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화자는 유사한 추억을 끄집어낸다. “아플 때마다 입 안에 넣어주던 황도 통조림.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혓바닥의 맛.”을 기억하는 어릴 적 달콤한 때를 상상한다. 그 추억 속 아버지는 딸의 몸이 아플 때면 으레 ‘황도 통조림’을 챙겨 먹였고 “캔 뚜껑을 따면 물속에 보름달이 떠 있”던 것처럼 황홀하리만치 좋았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다정다감한 아버지와 ‘황도 통조림’의 상관성은 필연 같은 추억 속에서 세월이 흘렀어도 연속성으로 존재한다. 그와 유사한 일들이 마침 보고 있는 TV 드라마에서 재현되면서 자신이 겪은 상황과 비슷한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런 모습을 통해 잊었던 일들을 상기하고 그 안에서 잠시나마 즐거웠던 한때를 떠올린다. ‘가끔 아프게 해주세요’라는 구호성 문장 속에 내재된 함의는 아름다운 기억을 환기시켜 주는 계기가 된다는 것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작지만, 삶의 의미에서 반복되는 지속 가능한 것들이 무엇으로 유지되는가를 보여주는 시다.
시간의 경과로 환경도 변화되고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게 된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것과 변모하는 것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그중 오래도록 변함없는 것의 본질 속에 깃든 아름다운 기억은 우리가 간직해야 할 소중한 것들이란 것을 말해준다. 정선희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시에서 그러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과 시의 언명을 통해 결핍해 가는 현대인들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