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라하는 술꾼들이 호기롭게 하는 말이 있다. ‘청탁불문 안주 불문이요, 두주불사(淸濁不問, 按酒不問, 斗酒不辭)가 그렇다. 주종을 가리지 않고 어떤 안주와도 상관없이, 말술도 사양하지 않고 마신다는 뜻이다. 이중 두주불사는 항우와 유방에게서 비롯된 고사성어라고 하니 제법 뿌리가 깊다.
일전에 삼 형제가 모여 부평동 곱창 골목에서 소주를 한잔할 때였다. 동생이 어디서 들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술 주량은 유전이 된다는 말을 했다. 술을 못 마시는 할아버지, 아버지를 거친 자손은 간에서 술을 해독하는 기능이 약해진 유전자를 넘겨받아, 술을 전혀 못 하는 체질이 된다는 것이다. 동생 이야기는 라마르크가 주장한 용불용설 중 획득 형질이 유전된다는 논리와 일치한다. 그러나 획득된 형질은 유전되지 않음이 멘델에 의해 증명되었다는 사실을 놓쳤으니 주장에 무리가 있다..
절친한 친구와 같은 부서에서 근무할 때다. 그 친구는 앞에 언급한 술을 못 하는 인자를 유전 받았는지 맥주 반 잔만 마셔도 정말 온몸이 붉게 타올랐다. 꼭 참석해야 할 술자리에서는 안주만 축내며 몸을 비비 꼬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다 술값을 공동으로 정산할 때만 되면 새삼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불멘소리를 해댔다. 이런 공명치 못한 처사에 대한 반작용이었으리라. 어느 날부터 약까지 먹어가면서 억지로 술을 마시기 시작하더니, 퇴직할 무렵에는 꾼들에게 단련된 나 못지않게 술을 잘 마시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 사람은 환경의 변화가 있으면 살아남기 위해 그냥 적응하기 마련인 것이다.
술을 이기지 못하면 인생사에 오점을 하나씩은 꼭 남긴다. 팀장급으로 승진할 때의 이야기다. 순위부 상, 선두에 있던 내가 정기 승진심사에서 고배를 마셨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 갑자기 특별승진 심사가 있다고 하며 다면 평가를 하더니 또 앞서고도 후순위에게 밀리는 일이 재연되었다. 물론 발탁된 친구도 본선에서 탈락하여 같은 신세가 되었지만, 나로서는 큰 내상을 입고 말았다.
그 일을 빌미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심하게 마셨다. 아파트 문을 들어서며 정신을 차리니, 아뿔싸! 어디서 그랬는지 앞니 두 개가 끝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입술이 부어터져 있었다. 하필 그날은 김장을 한다고 장모님이 모처럼 집에 와서 하룻밤 주무시기로 한 날이었다. 꼭 맹구처럼 된 내 모습을 보고 장모님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고인이 되신 장모님에게 못난 사위로 기억된 것 같아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내가 공직에 몸담을 초창기에는 기관장으로 부임하는 분들이 직원들에게 군대처럼 긴장된 상태를 강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비상연락체계를 점검한다는 명목으로 자주 자체 비상소집훈련을 실시하곤 했었다. 이때 제대로 응소를 하지 못하면 경위서를 쓰고 벌 당직까지 세우는 불이익이 있었다.
하루는 비공식 채널로 내일 새벽 5시에 비상이 걸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늦어도 2시간 내에는 응소를 해야 하므로 그날 저녁에는 귀가를 서둘러야 한다. 그래서 구포 사는 애주가 선배에게 특별히 귀띔을 하며, 오늘 저녁은 딱 한 잔만 하고 가시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데 그 선배가 다음날 평소보다 더 늦게 출근을 하였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내 말대로 딱 1잔만 하고 완행열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더란다. 그런데 그만 깜박 잠이 들어 ’아차!‘ 하는 사이에 구포역을 넘어가 버렸고, ’에잇, 이왕 이렇게 된 것‘ 하며 대전까지 올라갔단다. 거기 대합실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새벽에 첫차를 타고 온 게 그 시간이라고 했다.
그 선배는 안타깝게도 한창나이에 간암으로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사람 좋고 정이 많은 선배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빈소에서 옷깃을 여미며 좋아하는 술을 한잔 따라 올리는 것밖에 없었다. 벌 당직을 서며 무안해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리는 점심시간만 되면 청사 운동장 벤치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우스갯소리를 나누는 게 일상사였다. 그날의 소담 주제는 어쩌다 보니 술 마시고 실수한 이야기였다. 입담 좋은 관리계 선배의 경험담은 이랬다.
“하루는 술이 엉망으로 취해 집으로 갔는데, 아침에 깨고 보니 건물을 짓는 공사장 부근이었다. 양복은 전봇대에 비상시 밟고 올라가는 툭 튀어나온 쇠붙이에 곱게 걸어져 있고, 구두는 그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가관인 것은 이불인 줄 알고 포근하게 덮고 잔 것이 합판으로 된 널찍한 거푸집이었다. 그걸 원래 위치로 돌려놓고자 들어보니 무거워서 꿈쩍도 않았다.”
평소 실없는 소리를 잘 안 하는 선배의 성향 상, 그날 이야기 중에서는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한 장원이었다.
지나고 보니 술꾼들의 공통점이 있더라. 술에 무슨 원수나 진 것처럼 전투적으로 마시고, 그 다음날 끄떡없다고 자랑까지 하며 비실거리는 사람을 패잔병 취급한다는 것. 내 경우만 하더라도 주량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배려하는 술꾼을 여태껏 본 적이 없다. 그 술꾼이 직속 상사라고 한다면 두주불사를 상대하고 있는 부하직원은 얼마나 고역일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은퇴하면서 오기로 버티던 주당(酒黨)에서 탈퇴했다. 세상이 어쩜 이렇게 홀가분하고 자유로운가. 한편 술친구가 없어 외롭고 쓸쓸하게 지낼까 봐 걱정을 태산같이 해 주는 주당 선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술을 술술, 아무나 하고 잘 넘어간다는 속성을 모르고 하는 오지랖. 술이 정 마시고 싶고 사람이 그리우면, 동생들과 만나 어릴 적 이야기를 하며 우애를 다지는 것도, 한 방법. 술값은 큰돈은 아니지만, 형인 내가 치를 수 있어서 이 또한 얼마나 폼 나는 일인가. 이도 저도 안 되면 아내와 같이 반주 삼아 막걸리 한잔하는 것도 더할 나위 없겠다.
술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때 술로 지새웠던 세월이 가위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생각이 든다. 술의 힘을 빌려서 ≪구운몽≫속의 양소유가 살던 세상에 잠시 머물다 온 것 같은 기묘하고도 허망한 꿈. 이제 현세로 돌아와 숨을 다스릴 줄 아는 건전한 주객(酒客)으로 살고 싶다.
첫댓글 글을 참으로 재미있게 쓰십니다. 책을 읽으며 한번, 한글 문서에 옮겨 치면서 두 번, 카페에 올리면서 세 번을 읽었는데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어 저를 웃게 만들었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