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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은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개성에서 서인들을 가르치던
서인 주기학파 철학의 효시이다.
서경덕이 최초로 주자의 주리론을 주기론으로 뒤집어 버리고
혁명적인 성리학 반란 사건을 일으켜 주기론을 최초로 주창한 성리학자이다.
이일로 동인(후일 주리학파)의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 하여 개성에서 황진이를 제자로 받아 들이고
서인 후학을 가르치며 자신의 주기론이 맞음을 관철시켰던 주자학 개혁파의 선구자였다.
주기이론을 바탕으로
광주의 기대승은 사단칠정 논쟁을 거치며
이성을 주정설로 설명하고 "이성의 상호 통제론"을 내놓으며 이론적으로 확립시킨다.
기대승은 주기론에 힘을 실어주며 이성이 주기론 쪽에 약간 더 치우쳐 사고한다는
"이성의 상호 통제론"을 확립시켰다.
고봉 기대승 이론은 사회 이성철학적으로 접근하여 완성된 이성의 상호 통제론 확립 철학이었다.
승려 출신의 서인 이이(강릉/파주활동)는 기대승의 주정설과 이성의 상호 통제론을 바탕으로
역시 주기론에 힘을 실어주며 이성이 상호 통제하면서도 주기론 쪽에 약간 더 치우쳐서 상호 통제한다는
(기대승의 사단vs칠정 이론 중 칠정에 약간 더 치우쳐서 이성이 상호 통제 한다는 주정설) 주정설에
힘을 실어주고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을 내놓는다.
율곡의 이론은 종교 이성철학적으로 접근하여 완성시킨 이성의 정립 이론이다.
(물질, 육체, 자본, 종교(하느님) vs 정신, 넋, 혼백, 영혼, 에테르 중 이성이 정신, 넋, 혼백, 영혼 쪽에
약간더 치우쳐서 상호 통제한다는 이기론)
기호학파 중 한 분파인 주기학파의 형성은
경기 개성의 서경덕을 효시로 강릉 출신의 이이(파주),
정읍 태인의 일재 이항(남고서원), 장성의 김인후, 광주의 성혼(파주), 박순(영의정) 등
40여 명으로 형성되었다.
1580년대 광주의 성혼, 박순이 권력을 장악하자 동인과의 협상을 통해
이이의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으로 결론을 짓고 마무리가 된다.
[김포의 조헌은 성혼의 제자로 기호학파이며
원래 성혼은 주자학 중도파이며 조헌은 주기학파가 아님.
성혼이 광주 출신 한성 태생으로 파주에 거주하며 동인과의 협상을 주도했기 때문에
주기학파에 넣어준 것임.
김장생은 송익필의 제자로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정주학 신봉학파로 기호학파이지만 주기학파는 아님,
단지 조헌, 김장생은 윤선거 등을 통해 실학사상의 싹이 트게 만드는
양명학파 윤증에게 도움을 줌].
주기학파는 주자학 안에 있는 정이학, 정주학, 예학 등의 도교적인 학문을
모두 파내려고 하였고 주리학파는 파내지 못하도록 고수하려 하였으며 줄곧 대립하였다.
주기학파가 완전히 승리하였다면 도교적인 정이학, 정주학, 예학 등이 사라지고 예법이 간소화되어
허례허식이 타파되고 근대화의 길을 앞당길 수 있었으나, 주리학파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예학/예법 뿐만 아니라 관의복, 제사, 의복, 상투, 갓 등의 모든 제도가 혁파되었을 것이었다.
주리학파는 양광도를 중심으로 하는 학파다.
양광도는 경기 동부, 충남 금강/공주강 이북, 충북 전지역, 강원 영월, 경북 서북부 지역을 말한다.
이언적을 필두로 영덕/영해의 이산해, 안동, 의성의 이황, 김성주, 류성룡, 김성일 등으로 이어진다.
주자학 안에 정이학, 정주학, 예학도 포함시켜야 한다며 주기학파와 대립하였다.
정이학 ,정주학, 예학 등은 노장철학을 이어받아 도교적인 색체가 강한 도학적인 부분이 많았다.
이성을 풀이할 때 정이학(무극론, 음양오행론), 정주학(태극론) 등을 이용하여
도교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형이상학적인 학파였다.
도학을 주자학안에 포함시켜야 한다며 주기학파와 대립하였다.
남명 조식학파는 영남학파로 경남 합천(경북 낙동강 서안까지 대변), 산청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학파이다.
조식학파는 정인홍이 계승자이며 여기에 이이첨, 곽재우, 김우옹, 정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노자의 도교철학, 장자철학, 제자백가(백이숙제)철학을 신봉한 학파이다.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을 성리학 안에 넣어 달라고 요구하였다가,
문묘종사 때 이황의 주리학파들로 부터 성리학의 이단파로 매도되어, 정인홍이
청금록(유적)에서 삭제되는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양명학에서 강조하는 실사구시, 실천철학도 하였으나,
이는 인격완성을 위한 이성의 정립이 없고 정신철학이 없는 사상누각과도 같은 학파였다.
인간의 사회 이성철학과 종교 이성철학을 정립해놓고 정치, 군사, 사회, 천문, 의약, 수학, 산수, 시,
그림 등을 발전시켜 가야 하는데도 정신 이성철학의 정립 사건인 사단칠정 논쟁(기대승vs이황)과
이기논쟁(이이v이황)을 공리공담(쓸데없고 부질없는짓)이라며 주장하던 학파였다.
1587년 전주, 호남 동부의 정여립 학파가 왜군 지리 정찰대를 토벌하면서 세력이 커져,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 권력을 호남 동부, 영남 낙동강 서안지방(경상 우도)으로 가져 오기 위해
정여립학파 vs 조식학파와 적대적 연합으로 제자들을 정여립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나 정여립이 죽자
모두 돌아가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을 신봉하던 학파였다.
양광도 이황의 주리학파에서 영남학파 합천의 조식학파와 남인 윤휴학파로 나뉘어진다.
이황의 주리학파 중 류성룡, 김성일은 1597년 정유재란 칠천량 해전 패전 이후 부터
남인을 대변하였다.
영남학파 남인 윤휴학파는 주리철학을 조식학파의 도교철학과 융합시키려 했던 변종 주자학파였다.
주리철학적 변종 개혁 성리학파이다.
이미 주자학 안에 정이학, 정주학, 예학이 도교적인 색채가 강했기 때문에
더 이상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이 들어오면 뒤죽박죽이 되어 변종이 되고
학문이 아닌 변종 학문이 되어버린다.
주자학과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이 융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양광도 서인 노론학파 송시열과 예송논쟁 당시 1차전에서는 3년상을 주장하고
2차전에서는 송시열이 법으로 정한 1년상을 주장하다가
화가 난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매도하여 윤휴가 사사되고 만다.
윤휴학파 허목 등은 예송논쟁 제 2차 전에서도 이기고 정권을 잡으면서
송시열을 유배보내고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북벌을 실질적으로 도모하려던 효종을 영의정으로 집권한지 하루만에 독살시키고
송시열을 사사시키며 더욱 더 폐쇠된 조선으로 이끌고 갔다.
주자학과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이 완전 융합하지도 않았는데도 저러는데
만약 완전 융합되었다면 참으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권력에서 물러나 후학을 양성하던 송시열은 결국 사사되어 복수당하고 만다.
노장철학은 자연과 무로 돌아가라는 자연의 법칙인 약육강식, 적자생존 법칙 철학으로
도학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중상모략, 권모술수 등을 남발하게 된다.
주술, 점, 굿, 역술/주역, 풍수지리, 사술[사주, 관상], 도술[도참설], 예언, 예언서, 토정비결,
저주의식 등을 이용하여 정적을 제거하는데 도학을 사용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서경덕은 개성 송도에서 서인 제자들을 가르치고 기호학파 중 한 분파인 주기학파를
길러 내던 학자였다.
동인 이황의 주리학파로 이어지는 양광도 동인에게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하여
정계에 나가지 않고 제자들만을 길러 내었고 이이 역시 제자들 만을 길러 내었다.
정치적 보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천하의 신과 같은 주자의 주리론을 주기론으로 뒤집어 버렸는데
정치적 보복을 당하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다.
주리철학이 중국에서 들어온 학문이기 때문에 중국에 신고하면 멸문지화를 당할 우려가 컸기 때문에
서인 기호학파와 함께 주기학파가 정치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하여
1589년 동인 주리학파가 서인 정철을 내세워 정여립학파, 조식학파 연합을 제거하며
동인권력을 독차지하고 1591년2월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 류성룡파가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정철을 강계, 강릉, 강진 등으로 주색을 가까이 했다는 모함으로
유배보내고 서인정권 마저 차지하면서 세력 중심체제로 권력이 교체되기 시작하며
1년후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을 맞는다.
서경덕의 서인 제자들을 이이가 이어 받았다.
원래 기대승은 이황의 제자였지만, 나주에서 광주로 옮기면서
주자의 저서 700권을 120권으로 압축하여 일일이 주석을 달아 완성한 주자문집을
해석해 놓고 나서 서인화되었다.
서경덕의 주기론을 알게 되고 주기론에 힘을 실어주며 사단칠정 논쟁 당시
이성을 설명할 때 이성의 실례를 주정설로 설명하면서 이성의 상호 통제론을 제시하여
이론적 확립을 시켰다.
즉, 이성을 설명할 때 주기설의 칠정[희노애구 애오욕]을 하나의 정[情]으로 설명한 것이
주정설이라는 이야기이다.
주정설은 서경덕의 주기설을 설명할 때 칠정을 하나의 "[情]"으로 대체하여 설명하였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도 기대승은 이미 서경덕을 따르는 서인이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전남 광주지방은 서인지역이었다.
남인도 일부 있었으나 대부분은 기호학파에 속해 있었다.
기대승은 주기학파에 속하며 기대승의 이론인 주정설과 이성의 상호 통제론은
서경덕의 주기론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고 이이의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은
기대승의 상호 통제론을 바탕으로 확립된 것이다.
기대승은 사회 이성철학적으로 접근하여 완성하고 이이는 종교 이성철학적으로 접근하여
완성하여 확립된 것이다.
광해군 당시 임진, 정유재란에 소극적으로 의병 활동하던 조식학파의 북인정권이 들어서자,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면서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사이에 두고 무자비한
정치적 보복이 시작되자, 서경덕, 이이, 이항의 제자 서인 주기학파 40여 명이 북인, 대북정권에
현실론을 내세워 일시 협력하여 가담하였다가 인조반정으로 함께 동반 몰락한다.
이것은 학풍, 철학이 같아서 가담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보복을 피하기 위하여 잠시 광해군을 지지해주며 반 강제로 협력하였다가 몰락하는 사건이다.
이걸 가지고 서경덕을 북인이자 대북의 정신적 지주인 조식학파와의 학풍과 철학이
같은 학파라면서 분류하는 자가 있다면 제 정신이 나간 자 일것이다.
주기학파는 주자학안에 있는 도교적인 정이학, 정주학, 예학을 끊임없이 파내려던 학파였고,
주리학파는 정이학, 정주학, 예학 등을 주자학안에 포함시켜야 한다며
결사적으로 고수하려던 학파였다.
대북정권은 조식학파의 제자들로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 신봉학파로 도교를 숭상하는
학파였기 때문에, 정치적 보복이 시작되자 소나기는 피해 보자는 심정으로 일시 협력하였다가
인조반정으로 대북파 200명이 유배갈 때 호남 중심의 주기학파 40여 명도 유배를 가게 되면서
유배지에서 심장이 타들어 가는 시기를 보내며
정묘, 병자호란을 지켜보면서 조선의 근대화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 봐야만 하였다.
주기학파는 서경덕>기대승>이이>이항>성혼, 박순>김인후 등 40여 명으로 이어지는
호남학파를 말하고 충남 논산 노성의 윤증의 양명학으로 이어지는 소론학파가
양명학으로 대체한다.
[조헌(주자학 중도파 성혼의 제자/김포),
김장생(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송익필의 제자/서울, 논산)은
윤증의 가족 윤선거에게 양명학을 펼칠수 있도록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며
호남을 중심으로 하는 주기학파가 아님]
서경덕을 북인/대북으로 분류하는 것은 서경덕을 아주 모독하는 일이며,
주자학의 기본 개념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떠드는 소리밖에 안된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인 기호학파 중 주기학파의 효시는 서경덕.
주기학파의 주기론(이기 일원론)의 이론적 확립자는 기대승. (사회 이성철학 완성)
주기학파의 주기론의 집대성자는 이이. (종교 이성철학 완성)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으로 동인과의 협상 완결자는 성혼, 박순 [영의정].
이항(정읍 태인/실질적인 주기학파의 대부), 김인후 (장성)는 정통적 계승자/기대승 철학을 계승.
논산 노성에서 양명학으로 명맥을 이어간 자는 소론 영수 윤증.
인조반정으로 주기학파 40여 명이 유배가서 정묘, 병자호란을 겪으며 근대화의 길이 사라짐.
이성주의, 경험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 철학이다.
칠정/정신, 넋, 혼백, 영혼 등 정신적 사고에 강하다.
깊은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성적인 판단, 합리주의적인 사고 체계를 가진 사람이 많다.
냉철한 이성으로 이성 회복을 하지 못하면 칠정에 치우치는 사람도 일부 나올 수가 있다.
누군가를 병적으로 숭배하면 사이비에 빠지는 단점도 소수있다.
(실례로 김구 추모제 때만 되면 여대생들이 흠모하여 자살을 하는 등의 사고가
1980년대 해마다 발생하였다. 김구 추모제를 없애자 자살자가 사라짐).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전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철학이다.
주기학파는 선조 당시 양명학과 실학사상이 대두되기도 전에 바로 근대기로 개혁시키려 했었던
근대식 개혁학파이자 근대 이성철학파였다.
주리학파의 주리론(이기 이원론)은 주자의 이론이다.
이언적이 처음으로 주자의 주리론을 제시한다.
이기 이원론은 주자가 주장한 이론이다.
주자의 이론을 정리한 것이 이황이다. 이걸 가지고 집대성했다고 주장한다.
계승자는 류성룡, 김성일이다.
위정척사 사상으로 이어지며 일본 성리학에 영향을 준다.
도덕 원리주의, 인간성 회복주의, 이상주의, 신비주의, 초월주의, 서원주의 철학이다.
물질, 육체, 자본, 종교(하느님) 등에 아주 약하다.
사단(인의예지)에 약하므로 서원에서 인간성 회복을 시키기 위한 도덕성을 가르쳐
수양철학을 통해 서원에서 먼저 인간성을 회복시켜 보자는 철학이었다.
그러나 주리철학은 대실패하며 사립 서원의 난립현상만 벌어지게 되고,
흥선대원군 때 이르러 철폐하게 된다.
금전, 애욕, 애정, 사이비 종교에 쉽게 빠지는 단점이 많다.
서원에 머리 맡겨 놓고 스승들이 알아서 해탈시켜 주기만을 바랬기 때문에
돈만 내면 서원에 받아주고 중앙 성균관에 대비되는 유명서원의 학벌 간판만 얻고 나가 놀면서,
스승들로부터 대리 해탈받으려는 사이비 서원이 난립하여
조선은 더욱 더 폐쇠된 국가로 전락한다.
사단이 약하고 리(물질, 육체, 자본, 종교)가 부실해 지기 쉽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이비에 빠지는 단점이 많다.
대북정권처럼 부패해 지기 아주 쉬운 학파로 전락되고
또한 요즘 기성 정치, 종교와 비슷한 성격을 띄고 있다.
평시에는 주리철학이 이상적인 철학일 수도 있지만, 전시가 되면 대처하기 아주 어려운 철학이다.
주자학 중 성리학인 이성학만 제대로 이해해도
모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위대한 이성철학 학문이다.
또한 자신 속의 이성을 제대로 움직이고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을 때도 이성속의 이성으로
자신을 재 통제하며 사용할 수가 있는 학문이 성리학이다.
주자학은 조선에서 주기학파에 의해서 선조때 마지막으로 완성되었다.
선조이후 시작되는 주자학은 이미 죽은 학문이나 다름없었다.
주자학 원리주의자들이 주리론을 바탕으로 이끌어 나가는 조선은 이미 죽은 학문으로
조선을 이끌어 나가겠다고 하는 것이므로 조선은 이미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리학이 위대한 학문으로 평가받는 것은 주기학파가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이성이 리(사단/물질, 육체, 자본, 하느님 (종교))에서 태어나지만,
이성은 기(칠정/정신, 넋, 혼백, 에테르, 영혼)쪽으로 옮겨가서 체험, 경험하고
다시 중간으로 돌아왔다가 칠정/정신, 넋, 혼백, 에테르, 영혼 쪽에 약간 더 치우쳐서
상호 통제한다는 이론이었고, 이 이론의 확립을 주기학파 기대승이 완성하였던 것이다.
즉, 이성을 사용할 때 리(사단/물질, 육체, 자본, 하느님(종교))쪽에 치우치지 않고,
기(칠정/정신, 넋, 혼백, 에테르, 영혼)쪽에 약간 더 치우쳐서 사고하는 체계를 갖춰
상호 통제해야 한다는 이론적 확립을 통해 널리 국민들에게 가르치려 하였던 것이
기대승, 이이의 주기 성리학이었다.
가장 먼저 이성을 정립시켜 놓고 그 다음으로 도덕성 확립을 위한 교육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시키면 자연스럽게 인격은 완성된다.
그런데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와 동인 주리학파는 가장 중요한 이성의 정립 과정과
확립 과정이 없이 도덕성 확립만으로 인간성 회복이 된다고 보았으며
수양철학을 통해 인격이 완성된다고 보았다.
서인은 "예"[예학]를 통한 도덕성 확립만으로 인격이 완성된다고 주장하였고,
동인은 "서원"에서 수양철학을 통하여 인간성 회복을 시키는 것만으로도
인격이 완성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둘다 핵심적인 "인격완성"을 위한 "이성의 정립과 확립과정"을
무시하는 바람에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주기학파의 사단칠정 논쟁과 이기논쟁은 중요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이황 마저도 가치가 상대적으로 올라간다.
학문의 발전은 실수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주자학을 개혁시키고 혁신시키고자 했던 근본 이유는
인간이 신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의 주권을 가지고 이성주의, 경험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적인 사고체계를 확립시켜, 모든 국민들에게 전파하여 가르치고
완전한 성리학 국가로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
바로 근대화된 "군자의 나라"로...
백성들은 무당, 점, 굿 등의 샤머니즘,
곰, 호랑이 등 동물 숭배 사상의 토테미즘,
주역/역술, 예언, 예언서, 도참설[도술], 사술[사주, 관상], 풍수지리, 토정비결, 주술,
저주의식 등의 도교니즘, 탑돌이등 기복 불교 신앙으로 불교 사찰만을 쫓아 다니며
시주하고 극락 왕생만을 빌며, 도저히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 이성철학과 종교 이성철학을 학문적으로 정립시켜,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려고 주자학을 개혁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성철학의 정립이 없는 대군양성은 정신철학이 없는 사상누각과도 같았고,
끊임없는 권력투쟁과 군사반란만을 일으켜 왔기 때문에 인격완성을 위한 이성철학을
제대로 정립시켜 놓고 전 국민에게 가르친 후 귀족들과 결탁한 대상인들이 장악했던
육의전을 혁파하고 일정기간 자본시장을 개방하여 국가 사회를 개화하여 발전시켜 가기 위함이었다.
이 성리학 반란 사건이
바로 주기학파 서경덕, 기대승, 이이, 이항, 김인후, 성혼, 박순 등 40여 명으로 이어지는
개혁 성리학파인 주기학파(근대 이성철학파/근대식 개혁학파)이며, 윤증의 양명학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이다.
[양광도 서인 노론정권으로 부터 주기철학이 탄압을 받아 잇지 못하고,
중국의 신진 학풍인 양명학으로 윤증의 소론이 대체하는 것이지만 양명학도 노론으로 부터 탄압을 받음].
p/s
선교는 수문제 양견이 북주를 차지하고 북주왕으로 있다가 수나라를 건국하고
고구려에 조공을 요구하는 사신을 보내자 영양태왕이 사신의 목을 쳐서 돌려보내
수양견이 침공하려 하자, 국교 정상화 조건으로 선교를 받아들여 고구려인들이 선교에 빠져
멸망하는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중국 정부는 도교철학에서 나온 선교 (00궁)를 맹렬히 탄압중이다.
중국이 도교철학으로 인해 더디게 발전하다가 외세의 침공으로 뼈저리게 당해 봤기 때문에
강력하게 탄압하는 이유이기도 하며 오히려 자본주의의 꽃인 자유 무역주의를 요구하며
미국(트럼프의 미 보호 무역주의), EU 등에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등소평(덩샤오핑) 때부터 중국을 이끌어 가는 리더들도 주기학파의 사상철학을 이해하고 나서부터
중국 경제가 급 발전하며 통제가 가능하다고 판단하면서 공산당이라는 이념을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오히려 전세계에 자유 무역주의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왜 새만금 공항 건설시 향후 성공하는지에 대한 그 해답이 될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