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반여동 신촌마을 / 고기등마을
새로 형성된 신촌마을, 옹기를 만들던 고기등마을
•준공업지구 신촌마을
신촌(新村) 마을은 반여1동 지금의 장산중리시장 일대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을 말한다. 이 마을은 1960년대 후반부터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신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반여1동에는 유엔군 포로수용소, 유엔연합유격대 훈련장, 미8군 유엔교육대, 육군병기기술학교 등 미군부대가 주둔하자 인근에 상주하는 인구가 증가하였다. 반여동이 1980년에 준공업지구로 지정되면서, 동양고무, 흥아타이어 등 큰 기업체가 들어서자 상점이 들어서며 다방 등 위락시설이 비교적 많은 곳이라 반여동의 상권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은 공장들이 외곽지역으로 이전하여 공장이 있었던 자리에는 아파트나 연립주택 단지로 바뀌었다. 당시 길거리 난전은 미군부대에서 반출된 통조림 등 깡통음식물을 팔기 시작한 것부터 각종 물품과 사람들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넘쳐 생동하는 생활현장인 시장자리가 생겼다. 시장 마을로 자리 잡은 장산중리시장은 1980년에 생겼다. 이 시장은 60여 개의 소점포로 이루어진 상가건물형 시장인데, 그 마저도 최근의 대형마트의 등장과 인근에 반여농산물도매시장 등의 경쟁 상권으로 인하여 경기가 침체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3년간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고기등 마을, 현재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지역
고기등(古器嶝) 마을은 반여1동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던 자연마을이다. 장산초등학교 위쪽의 반여1동 주민자치센터, 센텀 롯데캐슬 1차아파트(삼해공업 자리), 대림아파트, 아시아선수촌아파트(옛 육군 기술 병기학교 자리) 일대에 있었다. 중리마을 아래쪽에 속해 있는 작은 마을이고, 무정마을 위쪽 등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고구디로 부르던 곳은 고기등으로 이곳에서 옹기를 만든 곳이라 마을 이름을 ‘고기등(古器嶝)’이라 하였다고 한다. 고기둥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지명에 대한 고증할 자료는 찾을 수가 없다. 고기등 마을은 중리 마을에 속해 작은집 행세를 하였다. 상처(喪妻)하면 집을 지어 분가를 시키고, 옹기를 굽는 옹기막 등 10여 채의 집이 밭 언저리에 있었는데 이 공간은 고층 아파트단지와 새 상권 중심지로 변해 옛날 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케 한다.
한국전쟁시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포로가 갑자기 증가하면서 부산ㆍ거제도ㆍ마산 등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이때 지금의 아시안선수촌 아파트가 포로수용소 자리이다. 당시 이곳의 논과 밭, 임야 3만평의 토지를 징발하여 수용소를 만들었다. 반여동 포로수용소에 포로가 많을 때는 1만 명에 이르렀고, 1952년 6월 18일 0시로 반공포로 석방을 선포할 때까지 3년간 포로수용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포로수용소가 거제도로 이전하고 일부에만 포로를 수용하였다.
이곳에는 유엔군 교육대가 설치되어 유엔군에게 지형에 관한 기초 군사훈련을 장산에서 2~3주 시킨 후 전선에 배치하였다고 한다. 유엔군 유격대 훈련장으로 사용하다가 미8군 유엔군 교육대가 있었다. 그 뒤 육군기술병기학교가 병기 교육장으로 이곳을 활용하다가 1999년 아시아경기대회 선수촌으로 지정되어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와 주민복지관, 생활체육시설, 편의시설 등 아파트 20동과 부대시설 7개동과 학교 2개교, 근린상가 등 선수촌을 옛 육군 기술병기학교 부지(20만1,700m2)에 건립하였다.
지금 장산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공동묘지로 솔밭이었다. 반여동 지역 주민들은 초등학교 건립이 숙원 사업이었다. 광복이 되어 학교 건립을 위한 재정이 부족할 때 주민들은 학교건립자금 모금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반여1동 중리 마을에 남평 문씨 할머니가 기증한 임야(16,000여 평)와 전답(1,000여 평)을 처분하여 학교건립 공사 자금으로 지원할 것을 결의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지역민이 염원한 장산초등학교(1946년 9월 1일 개교)가 역사적인 개교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