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찾는 삶이란?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정화하고 성찰하는 삶이요,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보기 위해 겸손과 사랑을 배우는 삶입니다.
주님 공현대축일과 또 새해를 시작하는 이 시간,
희망의 순례자로서 정말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그 별을 잃어버리지 말고
제대로 그 별을 따라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인류의 빛이신 주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날입니다. 주님의 별을 보고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도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사랑의 실천으로 주님께 맞갖은(흡족한) 예물을 드립시다. (매일미사에서 발췌)
성탄 때가 되면 제대 앞에 성탄 구유를 이렇게 준비하는데.오늘부터는 좀 다르게 준비가 되어 있지요. 어떤 모양들이 있을까요? 제대 앞에 동방박사 세 분이 아기 예수님이 누워계신 구유 앞에서 경배하는 모습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성탄이 되면 제단 앞에 설치된 구유를 경배하게 되는데, 성탄이 지났더라도 성당에 들어오시면 먼저 제단 앞으로 오셔서 구유에 누워져 있는 아기 예수님께 먼저 경배 드리고 자리에 앉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성탄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그 예수님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느껴보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또 한 사람의 동방 박사가 되어 지켜드리겠다는 마음으로 현장에 오시면 먼저 아기 예수님을 찾아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 주일을 맞이해서 새롭게 등장한 이 동방 박사들 이름을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원래 성경에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외경에는 동방 박사들에 관한 얘기가 잠시 언급되어 있고 그 이름도 나와 있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동방박사 3분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멜키오르 (Melchior), 가스파르 (Caspar), 발타자르 (Balthazar). 이 세 동방박사 이름은 중요한 건 아니지만, 동방 박사들의 방문이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인 큰 사건이었습니 다. 동방 박사들의 방문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경배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것을 배울 수 있을지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어떤 모임에서 남편들의 "아내를 위해서 어떤 남편이 되고자 하는가?" 결심을 한번 써보세요. 라고 이렇게 숙제를 내줬습니다. 그래서 남편들이 자기 나름대로 아내를 위해서 쓴 결심을 모아서 그 아내들이 투표해서 아내가 남편에게 주는 상을 선정했다고 합니다. 그 남편들이 쓴 결심 중에 어떤 결심들이 아내의 마음에 들었는지 상을 정했는데 장려상부터 대상까지 주어졌다고 합니다. 자 우리 부인들은 아주 기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장려상 수상자 " 아내의 아내에 의한 아내를 위한 남편이 되겠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얘기했던 그 얘기를 이용하여. 동상 수상자 “아내가 나를 위해 뭘 내려줄 수 있는지 생각하기 전에 내가 아내를 위해 무엇을 할지 먼저 생각한다.” 아마 이런 말들이 우리 부인들에게 마음에 쏙 들었다고 봅니다. 자 은상 수상자는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명언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내를 존경한다. 고로 존재한다.” 금상 수상자는 옛날에 여러분들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국민교육헌장을 인용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아내를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공로상도 있네요. “나에게 아내가 없다는 것은 저를 두 번 죽이는 겁니다.” 명예의 대상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나는 오늘 아내를 위해 설거지, 청소, 빨래, 요리를 열심히 할 것입니다. ” 그런데 대상자로 뽑힌 이유는 이렇습니다.
대상자 외에 다른 수상자들의 이야기는 약간 추상적이에요. 그냥 뭐 아내를 위해서 뭘 하겠다고 하긴 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데. 대상 수상자는 어때요? “내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오늘 나는 아내를 위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설거지, 청소, 빨래, 요리를 열심히 한다.” 아무리 그 추상적인 얘기가 좋다 하더라도 실제로 내 피부에 와닿는 구체적인 실천 사항이 있어야 아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이렇게 어떤 구체적인 실천을 생각하다 보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 헤로데왕(Herod the Great) 왕과 동방박사가 실천하는 면에서 완전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저 멀리서 발품을 팔아가면서 무거운 보물(황금, 유향, 몰약)을 들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서 왔어요. 근데 헤로데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도 아기 예수님을 경배 안 가고 오히려 나중에는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들을 모두 죽이는 살인을 범하게 됩니다.
동방 박사들은 자신들의 나라의 임금이 아닌 딴 나라 임금 유다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을 찾아서 그 먼 거리에서 경배드리러 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힘든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아기 임금에게 바칠 예물까지 준비하고 과감하게 머나먼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힘든 여정을 거쳐서 도착한 곳이 화려한 곳도 아니라 아주 초라한 마구간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그 아기에게 무슨 희망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그 아기를 위해서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다 내놓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 이런 사실들이 참 우리 눈에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공현대축일을 맞이해서 동방 박사들이 보여준 이 여정, 아기 예수님을 그 먼 곳에서 찾아와서 또 경배드리는 이 동방 박사들의 행위를 통해서 세 가지를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제일 <첫 번째> 신앙이라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다. 야고보 님께서도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하셨듯이 삶으로 실천하여야 합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는 말은 신약성경 야고보서 2장 17절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영어로는 "Faith without works is dead"라고 표현되며, 이는 믿음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 구절을 통해 단순히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 믿음을 실천하는 행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교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김 프란치스코 註)
동방 박사가 그 머나먼 여정의 발품을 팔았기 때문에 결국 아기 예수님이라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된 겁니다. 자 <두 번째>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또 합리적인 생각을 했을 때 ‘이해타산적인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분이시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상식이 통하지 않아요. 오로지 그 사랑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고 아까워하지 않게 됩니다. 또는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힘든 일을 하더라도 어떤 수고를 하더라도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동방박사들도 나름대로 사랑과 자비를 체험했기 때문에 인간적인 이해타산을 넘어 진리를 향한 갈망, 참된 사랑을 향한 갈망으로 그 모든 여정의 힘겨움이 오히려 기쁨이 되었던 겁니다. 이 사실을 보면서 또 가령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가운데 오신 그 여정도 그냥 억지로 온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설레는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위에 내려오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드디어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 딸들을 위해서 그 아들, 딸들의 모습으로 내려갔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반겨주겠는가? 얼마나 좋아해 주겠는가? 얼마나 설렜을까요?
‘우리 가운데 오신 그 예수님을 소홀히 대하지 않도록 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고요. <세 번째>로는 동방박사들이 별만 보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듯이, 오로지 별에만 의지하고 예수님을 찾아가신 것처럼 ‘우리의 신앙 여정도 하느님 이끄심에 맡겨야 한다’라는 겁니다. 하느님을 찾아 나선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이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성장하여 봉사하고 또 어려운 이웃을 돕고 전례에 참여하고 성가를 부르고 기도하고, 하는 이 모든 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 그분과 온전히 하나 되기 위해서 일치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신앙의 목표도 예수님을 위한 내가 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이 목표를 잠시 잊어버리고 ‘나를 위한 예수님이 되어 주기’를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있어 주기를 고집’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찰의 시간 또 정화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 동방 박사들도 별을 보고 잘 걸어오다가 잘못된 길을 한 번 간 적이 있어요.
그래서 동방박사들도 중간에 정화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별을 따라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다 잠시 길을 잃은 때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이 ‘유다’ 땅에서 임금이 태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별을 보고 잘 걸어오다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아 임금으로 태어나실 분이니 왕족들이 사는 궁궐에서 태어나겠지’ 하고 베들레헴으로 곧장 가지 않고 예루살렘 궁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을 이끌던 그 별이 사라져버렸죠? 별을 잃어버렸습니다. 궁궐에 가서 예수님을 찾지도 못했습니다. 엉뚱한 임금을 만났어요.
하마터면 그 임금에게 푹 빠져서 완전히 별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정신 차리고 자신이 원래 바라봤던 그 별을 찾아서 그 궁궐을 나왔을 때 제대로 된 자신을 이끌었던 그 별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으니 이것처럼 우리도 하느님만 보고 가다가 딴 별을 쫓아가는 경우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원래 있던 별이 사라져버리고 내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위기에 처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두 뚫어주는 구원의 별은 화려한 거기에 있지 않습니까? 궁궐에도 있지 않습니다.
좀 어둡고 누추하지만, 침묵 가운데 조용히 나를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듯이 정말 다른 별보다도 희미하게 보이는 별이라 할지라도 그 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나를 참으로 구원의 길로 진리의 길로 이끌어주는 그 하느님의 별을 내가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정 중에 있는 순례자요 아버지 해드립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대 희년을 선포하시면서 희망하는 순례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시면서 그 희망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순례를 하다 보면, 때로는 쓰러지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된 길을 가기도 하고 때로는 길을 잃고 방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헤로데처럼 궁에 궁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머리로만 하느님을 찾지 말고 직접 그물을 향해 길을 찾아 나서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우리의 별을 다시 볼 수 있는 눈을 감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과 용서입니다. 끊임없이 사랑을 향해 끊임없이 용서를 향해 길을 찾아갈 때 사랑이신 주님께 도달할 수 있고 용서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지금 나의 별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나의 별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지금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내가 드릴 수 있는 예물은 무엇입니까? 앞서 아내가 남편에게 주는 상에서 나온 말에 예수님과 나를 넣어 다시 한번 말씀해 보겠습니다. 장려상 수상자입니다. ‘예수님의, 예수님에 의한, 예수님을 위한 제가 되겠습니다. 우수상-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뭘 해줄 수 있는지 생각하기 전에 제가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지 먼저 생각합니다.’ 대상은 뭐라고 했죠>
‘내일 지구가 멸망을 한다 해도, 나는 오늘 예수님을 위해 사랑과 용서를 실천할 것이다.’ 결국 하느님을 찾는 삶이란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정화하고 성찰하는 삶이요.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보기 위해 겸손과 사랑을 배우는 삶입니다. 주님 공현대축일과 또 새해를 시작하는 이 시간, 희망의 순례자로서 정말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그 별을 잃어버리지 말고 제대로 그 별을 따라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아멘
□녹음/조영택 베드로, 정리/ 김동출 프란치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