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간 헌신한 포스터氏… 안 먹고 안 입어가며 어려운 사람 도와
우리가 당신에게 드린 건 한국 이름 '표수다' 뿐인데 당신은 모든 것 주고 떠나셨군요
지난 11일 오전 9시
서울 행당동 성서침례교회 중앙예배실을 검은 옷을 입은 300여명이 가득 채웠다. 지난 4일 별세한 고(故)
아이작 포스터(Issac Foster·87)씨의 발인 예배를 위해 전국에서 모인 추모객이다.
고인의 한국 이름은 포스터의 한국식 발음인 표수다이다. 6·25전쟁 후 56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목사인 그의 양아들 폴 포스터(56)씨가 "검소했던 아버지는 '옷은 옷일 뿐'이라며 한 번 사면 50년 동안 입었습니다. 그렇게 아낀 돈을 모두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썼다"고 고인을 기억하자 장내는 눈물로 가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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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달 초 별세한 선교사 포스터씨의 생전 모습. 추모예배에서 이정범 목사는 “우리가 그에게 드린 것은 ‘표수다’라는 이름밖에 없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주시고 떠나셨다”고 했다. 교회 측은 고인이 기거하던 집을 ‘표수다 선교사 기념관’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성서침례교회 제공
이날 폴 목사의 이야기를 통역한 김희옥(64) 목사는 "나도 중·고교 시절 고인이 학비를 대주신 덕에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고 했다. 1962년 고인은 형편이 어려운 김 목사 가족을 교회에서 머무르게 하면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르던 소년은 20여년 후 목사가 됐다.
미국 텍사스주 캐슬베리 침례교회 소속인 포스터씨는 2차대전 때
일본에서 선교사로 있다가 6·25전쟁 직후 한국에 와서는 참상에 충격을 받아 일생을 한반도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54년 미군부대에서 버린 헌 자재를 구해 서울 행당동에 남루한 집을 짓고 부인과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밤에도 전등을 켜지 않았고 "라면이 제일 맛있다"면서 하루 2끼 중 한끼를 라면으로 때웠다. 교인들이 TV나 컴퓨터를 선물하면 남몰래 내다 팔아 그 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 고인이 떠난 집의 한구석에 4년 전 지인들이 선물한 에어컨이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놓여있었다고 한다. 40여년 동안 그를 지켜본 이정범(58) 목사는 "어떨 때는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검소했지만 정말 따뜻한 영혼을 가진 분"이라고 했다.
그는 1950년대 중반 의정부 고아원에서 혼혈 전쟁고아 둘을 입양했다. 3년 전 작고한 부인 제인 포스터(Jane Foster)씨는 젊은 시절 자동차사고로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이후로도 수십년 그 고아원을 후원했고, 왕십리에서 빈민들에게 빵·우유를 나눠주기도 했다. 그는 1955년 성서침례교회 교단을 세우고 예배당을 지을 때는 승용차를 팔았다. 1967년 성서침례신학교를 공동설립한 후에는 매년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기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몇년 전까지도 주말마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아이들은 키 198㎝의 그를 '표수다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
캔사스의 농부에서 한국 선교사로
아이작 포스터(이하 포스터)는 1941년 경 천막 집회 부흥회가 열렸던 캔사스 주의 엠포리아에 온 아트 윌슨의 설교를 듣고 17세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포스터를 복음 전파자로 부르셨지만 그는 소명을 거절하고 드넓은 미국 중부 캔사스 주 평원의 농부가 되길 원했습니다.
어느 날 말들이 끄는 커다란 쟁기 위에서 밭을 가는 동안 갑자기 번개와 천둥이 치는 바람에 놀란 말들은 정신없이 뛰쳐나갔고, 겁에 질린 말들에 끌려다니던 포스터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사방으로 날뛰는 말들에 끌려가는 동안 그는 ‘만일 하나님께서 살려주신다면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기도를 마친 직후 날뛰던 말들은 멈추었고, 포스터는 그들을 농장에 넣은 뒤 그때부터 복음 전파자로 순종하였습니다.
이후 텍사스의 성서침례신학교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만난 제인 딜모어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24살 되던 1948년 5월에 포스터와 제인부부는 일본선교사로 인준을 받아 그해 8월에 일본 도쿄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합류한 로져선교사와 1950년 2개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세 번째 교회를 개척하려던 중 한통의 편지가 미국에서 도착했고, 이것이 그의 인생을 또 한 번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중, 도웰은 포스터에게 한국 땅에서 성서침례교회를 시작할 수 있는지를 요청하였고, 당시 300불의 선교헌금을 편지와 더불어 보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후 포스터는 한국을 방문하여 굶주림과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았고, 이후 자신을 한국선교사로 부르시는 부르심에 순종해 1952년 10월 28세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포스터부부는 아이가 없었기에 여자아이도 남자아이처럼 소중하다는 사실을 한국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1954년 케이(미국명)라는 여자아이를 입양했고, 두 번째로 1957년 남자아이 폴(미국명)을 입양했습니다. 현재 케이는 목사님의 아내가 되었고, 폴은 오클라호마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포스터는 당시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넣고 관을 짜는 낡은 무덤이 있는 터를 구입했고, 그곳에 자신이 기거할 방과 첫 번째 교회를 1955년에 시작했습니다. 미군들이 쓰던 임시막사용 나무를 사용해 한국에서 첫 번째 성서침례교회(행당동)당을 세웠고, 그 건물은 지금도 예배처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서침례교회 선교에 있어 포스터의 일본과 한국에서의 사역은 이렇게 열매 맺어 오늘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 제인은 2006년 8월 하나님 곁으로 돌아가 1955년 그들이 처음 교회를 시작했던 한국 예천에 묻혔습니다. 86세의 포스터 선교사는 2010년 6월 4일 그가 처음 예배당을 세웠던 자신의 사택에서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하나님 곁으로 돌아가셨고, 교회 관리인에 의해 몇 시간 뒤에 발견되었습니다.
5년간의 일본 그리고 50년이 넘는 한국 선교, 이 땅에 수많은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한국의 성서침례교회를 시작했던 포스터는 비록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하늘의 상급은 그를 영원한 부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12: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작성: Paul Foster(포스터 선교사의 아들)/번역: 최용수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