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저 높은 곳을 향하여! Date 2018. 6. 24
Text Hbr 11, 13-16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 어제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김종필 전 총리께서 돌아가셨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그분을 직접 만나본 일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2004년 크리스챤 국회의원 명단에 정동제일교회 권사로 등재되어 있는 것을 보면 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믿음이 있어서 천국에 갔으면 좋겠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교회에도 몸이 노쇠하여 이미 돌아가신 분들도 계시고 꽤 심각한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분들도 계시며, 입원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교회에 오는 것조차도 버거울 만큼 힘들어하는 분들이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픈 분들은, ‘왜 아프지?’ 하는 질문만 하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자신의 마지막 모습에 대하여서는 제대로 준비가 되었는지는 걱정하는 얘길 못 들었습니다. 여기저기 아픈 데는 있지만 아직 걱정할 정도가 아닌 분들은 아예 걱정 목록에 마지막에 관한 항목을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찾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역을 말씀드리고 믿음을 확인시키려고 해도 이 복음을 심각한 태도로 받지 않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많습니다.
월드컵축구대회에 출전한 한국대표팀의 졸전에 실망하고 화가 난 국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월드컵축구대회는 다음에 오늘의 부끄러운 성적을 만회할 기회가 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이 가는 길은 돌아올 수도 없고 반복할 수도 없는 길입니다. 한번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걸로 그냥 영원한 나라에서의 운명이 정해지고 맙니다. 때문에 이 인생의 마지막을 위한 준비는 가장 우선하여 확실히 해놓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신앙을 여전히 인생의 액세서리 정도로 알고 교회에 적을 두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다면, 여러분, 오늘 이 순교자기념주일에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여 말씀드리니 여러분의 믿음이 제대로 된 믿음인지 확인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2. 오늘 읽은 성경을 보면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인생들을 가리켜 “외국인과 나그네”(1 3절)라고 표현하였습니다. 14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본향 찾는 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15절에서는 성도들에 대하여 이 세상의 본향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더 나은 본향은 16절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런 성도들을 위하여 하늘에다 예비한 한 성(城)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 예비해 놓으신 본향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역의 은총을 믿고 그 은총의 능력 안에 자신의 영과 혼과 육을 온전히 맡기고서 주님의 말씀을 길로 삼아 걸어가는 순례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누구라고요? 이 망할 세상에서 나와 주님이 예비해 놓은신 하늘나라를 향하여 걸어가는 나그네, 여행자입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pilgrim, 즉 순례자라고 합니다. 순례자로 살아간다는 뜻에서 성도의 인생은 pilgrimage라고 합니다. 13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창47,9에서 야곱도 그리 말하였고, 대상29,15에서 다윗도 임종 직전에 남긴 말에서 그리 말하였으며, 예수님께서도 마25,35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벧전1,17과 2,11에서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그냥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 구름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아니라 주님 예비하신 나라를 향하여 가는 순례객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꾸 순례객들이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착각하여 세상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 첫째요, 저 천성을 향하여 가는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훼방을 이기라는 것이 둘째입니다. 방금 본 13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순례자인 성도는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을 따라 죽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벧전1,13-17입니다. “(13)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2,11-12입니다. “(11)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으십니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믿음이 있으십니까?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대신하여 내 무서운 죄 값을 다 치러주셨다는 것을 믿고, 그렇게 하셨다는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여 받아들이며, 그분께 나의 영원을 온전히 맡기는 믿음입니다.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3. 히11장은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3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들은 11,4-12까지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등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뒤에도 모세와 라합이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1,32에 말하기를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살았습니까?
믿음으로 산 그들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나라들을 정복하고, 정의를 실천하고, 약속된 것을 받고, 사자의 입을 막고, 불의 위력을 꺾고 칼날을 피하고, 약한 데서 강해지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고,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여자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가족을 다시 만났습니다. 큰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또 그분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았고,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순교자기념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순교자란 어떤 분입니까? 믿음의 길을 가는데 그 길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믿음의 길과 맞지 않는 자신들의 길을 따르라고 총칼로 위협을 하는데도 저 천성을 향하여 가는 길은 순례객으로서의 길밖에 없음을 확신하였기에 그 위협 앞에 굴복하지 않은 분들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도 좋은 것이지만 그것들은 잠시 후면 다 지나갈 것들이고 하늘나라에 예비하여 놓으신 좋은 것들이야말로 영원히 누릴 최고의 것임을 믿기에 세상은 포기하고 저 천국을 선택한 분들이 순교자이십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라는 죤 번연의 ‘천로역정’이라는 신앙소설에는 순례객인 성도가 이 세상길을 가는 동안 만나는 사탄의 훼방에 대하여 우화적으로 그려놓았는데 큰 교훈이 됩니다. 죤 번연은 우선 이 세상을 장차 망할 성이라는 뜻으로 ‘장망성’이라 하였습니다. 장망성에 살다가 전도자를 통하여 믿음의 길을 걷는 성도들은 고집과 변덕, 절망의 늪, 구원의 길은 다른데도 있다고 하는 세속의 여러 현자들, 좁은 문과 좁고 협착한 길, 정욕과 조급함, 단순, 나태, 거만, 허례, 위선, 겁쟁이와 불신, 울부짖는 사자 등의 위협과 유혹, 게으름과 같은 온갖 함정들을 물리쳐야 한다고 합니다. 순교자는 이 길을 잘 가야 한다고 오늘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순교자 신석구 목사님께서는 그 힘든 것을 한시(漢詩)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달은 어느새 서산에 지고 동네마다 종소리 요란하다 험한 산길에 얼음마저 덮였으니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어찌 갈거나’ 그렇지만 그 비틀거리는 걸음으로라도 가야하는 길이라며 찬송을 지었는데, ‘갑시다 갑시다 갈 길을 갑시다 / 가고서 안 쉬면 갈 길을 가리라 / 한 걸음 한 걸음 더딘 듯 하여도 / 이 걸음 저 걸음 다다름 있도다 // 합시다 합시다 할 일을 합시다 / 하고서 안 쉬면 할 일을 하리라 / 한 고비 한 고비 갑갑할지라도 / 이 고비 저고비 되는 일 있도다 // 가는 이 발 아래 먼 길이 없으며 / 하는 이 손 아래 못할 일 없도다 / 어려운 길 가는 우리네 일꾼아 / 가기만 갑시다 하기만 합시다’
4.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 특별히 16절이 더욱 무디어진 제 심령을 두드립니다.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본성이 천박함과 죄로 인해 악해진 성품과 그들의 외적인 조건 상태의 빈곤에도 불고하고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엄마들이 속상할 때 하는 말이 있지요. 널 낳고 미역국을 먹은 것이 아깝다고.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빈털터리에 몸마저 병들어 쓸모없게 된 탕자에게도 ‘누가 뭐래도 내가 니 애비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뿐입니까? 세상 누구도 빼앗을 수도 없고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최고로 멋지고 좋은 저 하늘나라에 나를 위하여 처소까지 예비하여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더 어마어마한 말씀이 있습니다. 날 위해 방 한 칸 마련하신 것이 아니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답니다. 더 이상 뭘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도 이것을 알아 당연히 순교자의 길을 따라 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