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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14-21 - 말씀에 순종할 때 믿음이 됩니다 - 유기성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은 로마서 10장 14절부터 21절 말씀까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님,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은 들은 일이 없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에 "그들의 목소리가 온 땅에 퍼지고,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퍼졌다" 하였습니다. /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습니까?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들로 너희의 질투심을 일으키고, 미련한 백성들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겠다." / 또한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게 이렇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나를 찾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만나 주고, 나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나타났다."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고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 하신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롬 10:14-21)
오늘 본문 15절 말씀에 보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라고 했습니다.
정말 이번 주간은 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 분명한 실제가 되는 주간입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믿음이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라고 그랬습니다.
지난번 예멘 선교사님이 여기서 간증을 하실 때 어느 여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아프카니스탄에서 사역하실 때 그 언어 선생님이신 이슬람 자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좀처럼 전하기가 어려웠답니다.
그 나라는 복음 전하면 추방을 대거나 또는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 있는 나라이니까요.
얼마 동안 친밀해지고 교재가 깊어지고 난 다음에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안색이 싹 변하면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그런 이야기할 거면 만나지 않겠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전도하는 일을 포기를 했었습니다. 근데 어느 날 아침에 큐티를 하는데 이 언어 선생님이 일찍 오신 거예요.
그래서 방에 들어오시라 그러고 차를 준비해서 들어갔더니 큐티하는 그 말씀 묵상 노트를 이분이 보고 계시더랍니다.
그러면서 묻더래요.
이것이 당신 생각이냐고 그게 아니고 성경에 있는 내용이라고 이야기를 해줬더니 너무나 내용이 좋다고 나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그러면 읽어보시자고 그래서 신약 성경을 같이 읽기 시작을 했는데 아프카니스탄 사태가 일어나고 급히 아프카니스탄을 떠나야 할 사정이 생긴 바람에 성경책만 드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답니다.
1년쯤 지나서 안부 전화를 하게 됐는데 그 자매가 나도 너와 같은 사람이 되었어라고 말하더라.
정말 놀라운 일이잖아요. 정말 말씀은 믿음을 갖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 너무나 복 있는 일인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않고서야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만나시고 예수님을 믿으셨나요? 다 전도를 받고 말씀을 듣는 중에 믿음이 생겼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그 중요한 내용들의 말씀들이 나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는 것이고
그리고 전도자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노래가 나오는데,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의 중요한 핵심은 사실은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과 또는 전도의 귀한 사명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는 굉장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 믿음을 가르칠 때 또는 전도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 근거가 되는 굉장히 중요한 본문이지만 사실상 이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말씀하신 것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말씀하려고 하는 핵심은 유대인의 문제입니다.
유대인의 문제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안 믿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말씀을 듣지 못해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을 듣지 못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었느냐 그래서 18절에 묻습니다.
그들은 들은 일이 없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사도 바울은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다는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구약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오신 분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있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민족의 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유대민족이 사는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거기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17절 말씀처럼 믿음이 들으면서 나는 거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유대인은 세상에서 제일 예수를 잘 믿을 민족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배척했느냐 하는 것은 이것이 지금 사도바울이 말씀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나는 거고 들으면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유대인들이 어떻게 말씀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을 수 있느냐는 거 사도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6절에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님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바울이 이사야의 말을 인용했지만 유대 민족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던 사람들이 유대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 있느냐고 물으면 유대민족은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똑같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유대민족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믿음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이것은 유대민족에게는 아주 정말 충격적인 고발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은 동일하게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성경도 읽고 설교도 많이 들었지만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 그러신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예배에 오셨지만 솔직히 잘 믿어지지 않는 것 때문에 고민스러운 분들이 있으실 겁니다.
설교를 계속 듣지만 성경을 나도 읽어는 보았지만 다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경우에 여러분들이 꼭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성경도 보았고 말씀도 들었지만 말씀에 순종해 보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에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대부분이 다 믿으신다고 하실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에게 순종하십니까라고 이렇게 물으면 굉장히 당황스러워지게 됩니다.
분명히 나는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있느냐라고 말하면 자신이 없어집니다.
그 말은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믿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나는 순종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어 그 말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순종하게 될 때의 믿음인 것입니다.
순종은 안 하는데 믿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분명하게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믿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안 믿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의 믿음에 혼란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하면은 어떤 것이 연상이 됩니까? 무슨 살인죄나 또는 도둑질이나 무슨 사기죄나 이런 세상에 어떤 법을 어기는 그런 범죄인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은밀하게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들을 연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류 최초의 죄가 뭔지 아십니까? 아담이 무슨 죄를 지었죠?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가장 근본은 불순종이고 가장 악한 죄는 불순종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불순종을 그렇게 큰 죄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로 즉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가버렸어.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그렇게 분명히 들었던 요나가 불순종한 것에 대해서 충격을 받았다는 분이 계셨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그렇게 들었다면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못 들으니까 우리가 순종을 하는지 불순종하는지 애매할 때가 있는 거 아닙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여러분 용서하라 사랑하라.
하나가 되라. 기뻐하라 감사하라. 우리는 이게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모르기 때문에 지금 순종 안 하고 있는 거죠.
그거 진짜 하나님의 음성인가 다 압니다. 우리는 요나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불순종한 게 아닙니다.
우리도 이미 하나님의 뜻이라고 다 알지만 불순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본성이 아주 악하다고 하는 증거가 뭐냐 하면 순종은 답답하고 어렵고 나를 구속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자유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순종을 싫어합니다. 순종은 아주 답답하게 여깁니다.
순종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불순종은 나를 자유하게 해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건 완전히 속은 것입니다. 우리 속에 불순종의 영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죠.
여러분 사람이 암에 걸리고 나면 그러면 사람이 완전히 바뀝니다.
암에 걸린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그것이 자기 마음의 소원이 됩니다.
식성도 바뀝니다. 평소에는 나는 그런 건 안 먹어.
나는 내 식성은 이런 거야. 이러던 사람이 암에 걸리고 나면 그러면 몸에 좋다는 음식만 먹어요.
몸에 안 좋다는 건 금방 끊어버립니다. 새벽 기도 체질도 바뀐다니까 나는 새벽에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어.
이런 사람도 암에 걸리고 나면 아주 새벽기도 체질이 돼버립니다.
철야기도 체질이 됩니다.
암에 걸리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하나님 저는 순종만 하고 살겠습니다.
이 기도가 그냥 저절로 나옵니다. 순종이 사는 길이구나.
그냥 답이 와요. 불순종은 위험한 것이고 불순종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깨달아집니다.
암만 하나 걸려도요. 여러분 성령 충만한 사람은 순종이 기쁨입니다.
순종이 살 길입니다. 불순종은 두려운 길이에요.
불순종은 정말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여러분은 성령 충만하십니까?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어떤지를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불순종의 영이 무섭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렇게 어릴 때는 순진하고 말 잘 듣던 아이가 점점점점 나이가 들면서 반항적이게 되고 거칠게 성격이 바뀌는 이유가 뭐지 사람의 본성 속에 이 불순종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의 영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영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을 망치는 겁니다. 여러분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애를 쓰고 사십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말 노심초사하면서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하는데도 왜 행복하게 사는 사람 찾아보기가 그렇게 어렵지 이유는 우리 속에 있는 바로 이 죄악의 본성 불순종의 영 때문입니다.
순종은 너무 힘들고 너무 싫고 불순종하는 것은 그것은 나를 자유하게 해줄 거라고 하는 이 무서운 생각 때문에 우리 인생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순종하고 또 순종하고 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겁니까? 만약에 그렇게 대답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지금 심각하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날마다 잔치하고 살았던 부자가 죽고 난 다음에 가보니까 지옥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천국을 향하여 보니까 거기에 아브라함이 보이는데 아브라함의 품에 나사라고 안겨져 있었습니다.
그 나사로는 자기 집 앞에서 죽은 거지입니다. 이 부자가 너무너무 간절한 마음으로 아브라함에게 요청을 드렸습니다.
자기를 천국에 좀 데려다 달라는 게 아니었어요.
동생이 5명이나 있습니다. 이 동생이 자기랑 똑같이 살고 있습니다.
지옥이 있는 줄 모르니까 결국은 이 동생들도 다 지옥에 올 게 뻔합니다.
그래서 이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요청드린 것은 그 품 안에 있는 나사롯 이미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동생들을 좀 찾아가서 너 형이 지옥에 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살면 다 지옥에 간다. 이제는 진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라 그 말씀을 좀 전해주세요.
아브라함이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으라는 것은 이미 그들 속에 선지자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 모세의 율법이 이미 그들에게도 있다.
그걸 읽으면 된다. 그 선지자의 말을 들으면 된다 아닙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면 동생들이 좀 관심 있게 들을 겁니다.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랬어요. 지금 있는 하나님의 말씀, 지금 있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는다.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다들 깨닫고 뭔가 변화가 오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혀 반응을 안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순종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불순종의 영이 없다면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불순종의 영을 작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고, 그 말씀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순종의 영을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 구원의 말씀을 듣고도 그들은 믿음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도 닦는 거 아닙니다. 우리는 무슨 도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그냥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리고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영으로 계신 것만 다를 뿐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려면 반드시 순종이 전제되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대로 순종입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가장 큰 믿음은 감사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항상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본질은 순종입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건 죽은 말씀이었습니다.
문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순종이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인격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을 때는 그냥 문자인 성경을 보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진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는 그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제로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와 계신 예수님은 우시는 것을 여러분 아십니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시인이 쓴 글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곁에 둘러 앉으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에 줄인 사람은 행복하다. 박해받은 사람은 행복하다.
고통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에서의 보상이 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이 말씀을 글로 적어놓고 싶습니다.
안드레가 말했다. 이 말씀을 외워야 하지 않을까요? 야고보가 말했다.
그걸 갖고 우리끼리 시험 쳐보겠습니다. 빌립보가 말했다.
이 말씀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참고 서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바돌로메가 말했다.
이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줘야 할까요? 요한이 말했다.
다른 제자들한테 이런 걸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요? 마테오가 말했다.
이제 하실 말씀은 다 끝나셨나요?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이 말씀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아닐까요? 그 자리에 참석했던 바리새인 하나는
예수에게 앞으로 하실 수업 계획서를 달라고 요청하면서 그 가르침의 최종적인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우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말씀을 들었으면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 빼고는 관심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은 우시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해야 된다는 생각이 없으면, 우리 주님은 우리 속에 오셔서 근심하시고 탄식하시고 그리고 통곡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순종하지 않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이 오늘 이 본문 말씀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고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 하신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눈물이 나더라고.
나는 복종하지 않는 내 백성에게 온종일 손을 내밀었다.
그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니까 하나님은 어떠신 마음으로 그 손을 내밀고 계셨을까요? 틀림없이 우셨을 거예요.
그렇게 불순종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온종일 손을 내밀고 계셨던 내 손을 붙잡아야 된다.
정말 내 손을 붙잡고 살아야 돼. 정말 순종해야 되는 거야.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었다는 거.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으신 거예요.
우리 주님은 오늘 저나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정말 내 손을 붙잡고 가야 돼. 사는 길이 그 길밖에 없습니다.
순종인 거예요. 그러나 우리 마음은 자꾸 순종이 싫습니다.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가 부흥되려면 주님께 순종해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목회할 때 깨달았어요.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주님께 순종해야 교회가 부응되겠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어떻든지 주님께 순종하려고 애를 썼는데 주님께 순종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뭔지 모르게 주님과 사이가 답답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목회를 해왔습니다.
근데 어느 날 제가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마음에 애통함이 와요.
그런 일도 처음이어서 너무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급히 몸을 닫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정말 너무너무 울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 왜 이런 애통함이 있는지를 잘 모르겠어요.
제가 기도하면서 제가 뭘 하나님께 회개하고 있는지를 모르겠어요.
그때 마음에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어. 제 순종이 온전한 순종이 아니었다는 겁.
저는 목표가 교회 부흥이었습니다. 제가 교회 목사고 담임 목회를 하니까 어떻든 이 교회가 부흥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교회가 부흥되려면 순종해야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저는 순종을 하려고 한 거죠. 제 마음은 교회 부흥에 있었습니다.
순종은 그 방법이에요. 주님은 그것이 안타까우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저에게 깨닫게 하시기를
너가 목표로 삼아야 될 것은 순종 그 자체로 교회의 부흥은 그건 그냥 선물일 뿐인 거 하나님이 주실 수도 있고 안 주실 수도 있는 겁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역사를 하시겠지만 그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속안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냥 완전히 순종하는 것 그 자체입니다.
순종은 때때로 어려움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순종했다면 성공인 것입니다.
저는 그 사실을 그때 깨달았어.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교회가 부응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다 맡깁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저의 목표가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제가 계속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계속 순종하는 것이 저의 한 가지 목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때때로 아주 선한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선한 일을 하는 데도 우리 개인적인 고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그런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이 90이 되도록 그는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음이 점점점점 불안해지면서 자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거예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자기는 생각하기를 이미 사라는 단산했고 그러니 하가를 통해서라도 자식을 낳아야 되겠다.
그래서 종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계획이 뭐 특별히 나쁜 계획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말할 수가 없습.
사람의 계획은 선해 보여도 온전히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도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자기는 애굽의 왕자지만 자기의 뿌리는 히브리인이라는 걸 히브리인들은 노예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세가 마음에 뜨거운 마음이 일어나서 내가 내 민족을 위해서 살리라.
그리고는 그는 주먹으로 자기 민족을 해방시키려고 했습니다.
선한 계획이죠.
모세가 잘못했다고 누가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 때문에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 도망자 생활을 해야 됐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어 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나 피묻은 손으로 하나님은 성전 지어지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뭘 큰 걸 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뭘 대단한 것을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순종의 삶을 살라는 지금 단기 선교를 나가 있는 교우들이 많은데 어느 해인가 단기 선교 파송 파송 예배를 드릴 때 어느 집사님이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 집사님은 유일하게 단기선교를 떠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단기 선교를 가고자 하는 마음을 받았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기 선교 훈련을 받으려고 지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남편과 시어머니가 극심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훈련을 받는 도중에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남편과 어머니의 마음을 바꿔 주실 거라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훈련을 받고 수료를 했습니다. 이제 파송예배를 드릴 때가 됐습니다.
남편과 어머니의 반대는 더 심해졌습니다. 이 집사님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단기 선교를 떠나야 되나 아니면 남편과 어머니의 반대를 받아들여서 내가 가지 말아야 되나 어떤 게 하나님의 뜻일까? 목사님과 상담을 하다가 이 집사님이 깨달았습니다.
자기는 가정에 보낸 선교사가 먼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파송예배 때 단기선교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간증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열방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가정이었습니다. 제가 선교 완성을 위하여 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기 선교회 훈련을 다 마치고 실제로 단기 선교를 떠나지 않는 그분의 간증이 가장 은혜로운 간증이었습니다.
그는 남편과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여보 당신의 고집을 꺾기 위한 것도 내 고집을 세우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미안하고 사랑합니다. 어머니 부담스럽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이 한 통의 편지로 남편과 어머니의 마음이 다 녹았습니다.
여러분 선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짜 원하는 것은 선교도 아닙니다.
그것이 순종이냐고 하는 것은 이것이 순종인가? 오스왈드 챔버스는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순종한다면 큰 성공을 거둘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순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소원하는 어떤 특별한 목적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그저 부수적인 일일 뿐입니다.
우리가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님은 목적이라고 부르십니다.”
여러분 순종을 하면 하나님이 어떤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고 이렇게 기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순종하면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순종하면 포기해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정말 잘할 일입니다. 왜 하나님이 원하는 거는 순종 그 자체이니까.
순종이 곧 성공입니다. 순종이 가장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역사는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프랭크 루박 선교사님은 영성일기를 쓰신 지 7년 만에 일기의 처음 부분에 순종 몇 퍼센트 그걸 꼭 기록을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 영성일기에도 순종 퍼센테이지를 꼭 쓰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눈이 뜨이게 되면 그때부터 예수 믿는 삶은 순종 생활입니다.
주님과 동행함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남자 권사님께서 처음 영성일기를 쓰셨던 이야기, 그때 간증을 하셨습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렸을 날입니다. 하나님 앞에 많은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회개한 첫 번째가 아들에게 한 회개입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그리고 아들의 손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는 회개의 기도입니다.
내가 이 아들에게 상처를 너무 많이 주었어.
하나님 내가 내 아들에게 너무나 어렵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아들은 깜짝 놀랐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용서해 달라고 그러니까 아버지 왜 이러시냐고 생일날 아들의 생일날, 편지를 썼습니다.
구구절절 아들에게 깨달아지는 잘못했던 일들, 미안했던 것들, 마음에 상처 주었던 것들을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보냈습니다.
아들이 그 편지를 보고 우리 아버지가 정말 변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남자 집사님은 영성일기를 쓰고 그리고 첫 번째 변화를 이렇게 썼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일을 하러 가는데 언어 장애를 가진 아이가 이 종이 쪽지를 쭉 나눠주더라.
구걸을 하는 거지. 평소 같으며는 거들 떠 보지도 않고 인색한 마음으로 반응도 안 했던 일인데 그날은 너무나 불쌍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갑에서 천 원을 꺼내서 주었답니다. 일을 보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이 아이를 또 그 열차 안에서 만났어.
또 만나서 여러분 어떤 느낌일까?
반갑더라. 야 너 오늘 참 복 있다.
그래서 또 천원을 꺼내서 그 아이를 주었어.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아이가 또 와서 구걸을 하더래요.
약간 짜증이 나려고 하다가 오늘은 하나님이 이렇게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고 하시는 뜻이 있는 날인 모양이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더래요.
그래서 그 아이에게도 또 천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내려서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데 그 계단 옆에 어느 연세 많은 노인분 노숙자 한 분이 거기서 구걸을 하고 있더래요.
또 천원을 꺼내서 그분에게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뭔가를 작정하시고 나를 다루신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날 그분은 4천 원을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뭐 그렇게 대단하게 큰 돈도 아니지만 그것은 그 집사님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집사님은 쓰기를 아마 이것이 목사님이 강조하는 영성일기의 위력인가 보다.
위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돈이 작지만 그 집사님에게는 정말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님과 동행함은 우리의 삶을 바꾸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진짜구나.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정말 진짜구나.
그것이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앞에 질문에 대답을 할 준비를 하셔야 됩니다.
어디든지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이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질문에 부담스러운 것은 평소에 순종의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순종의 기쁨을 경험 안 해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무것도 구한 게 없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가장 강력한 기도였고 온 인류를 구원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도 이 기도로 살기를 권해드립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우리의 기도는 오직 하나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그러면 우리 인생은 진짜 믿음의 삶이 뭔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삶이 됩니다.
정말 주님이 역사할 수 있는 그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 같이 기도하십시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이제부터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주님 말씀하시면 저는 온전히 순종하겠습니다.
그 기도로 살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시고 여러분이 나아갈 길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의 구원이 뭔지를 여러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