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씹씨 뚜라 (popular uprising of 14 October 1973, Thai : หตุการณ์ 14 ตุลา)
1973년 10월 14일은 태국에서 발생한 학생 궐기, 학생 혁명, 학생 쿠데타의 날로 민주화를 호소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전날 타넘(Thanom Kittikachorn) 총리와의 합의에 의한 해산 지시에 따르지 않고 방콕 민주 기념탑을 중심에 모인 것으로 이것을 막으려는 무장 경찰이 무력 탄압을 실시해 수백명의 사상자가 나온 사건이며, 태국에서는 이날을 '10월 14일 (씹씨 뚜라, 14 ตุลา)' 또는 '민주화의 날(วันประชาธิปไตย)'로 태국 민주화에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이 때 학생들이 거점으로 하고 있던 곳은 탐마싿 대학(Thammasat University)이었으며, 군사 독재 정권이었던 타넘 총리가 사직한 후에 임시 총리로 지명된 인물이 당시 학장이었던 싼야 탐마싹(Sanya Dharmasakti) 씨였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로 지금 현재도 이곳이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인 대학이 되었다.
이들은 1973년 10월 타넘 독재 정권에 항의하며 13명의 정치범을 풀어 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학생 참가자가 13일에는 일반 시민이 가세해 4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태가 점점 커질 기미를 보이자 국왕 라마 9세는 타넘 총리와 데모 핵심 조직인 전국 학생 센터 간부와 만나 조정을 진행시켜, 정권측이 정치범 당일 석방과 민주 헌법 발효로 공평한 선거를 약속한 것으로 항의 운동은 성과를 달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국 학생 센터는 학생과 시민들에게 해산을 요청했고 군중 대부분은 이것에 따랐으나 학생 집단 일부 세력은 이것에 응하지 않고 남아 14일에 찌뜨라다 왕궁으로 데모를 진행시킨 것으로 무장 경찰이 탄압을 시작하면서 발포로 인해 학생 측에서 77명의 희생자와 85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이것으로 학생들이 폭동으로 번져 정부 청사가 방화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이날 밤에 타넘 총리는 유혈의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출국했으며, 임시 정부 총리는 탐마싿 대학 학장인 싼야 탐마싹 씨로 지명되며 사태가 서서히 마무리되었다.
이 후 10월 14일 이날을 무력 탄압으로 유혈에 이른 것으로 '피의 일요일 사건' '학생 쿠데타(학생 궐기, 학생 혁명)', 그 밖에 '커다란 슬픔의 날(씹씨 뚜라)'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 '씹씨 뚜라'의 배경과 시간별 정리
‘타넘 총리’는 ‘싸릿 타나랏(Sarit Thanarat)’ 총리의 꼭두각시로 1958년 1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총리직을 맡았었으며, 그 다음 총리인 싸릿(총리 재임기간 1959-1963)이 1963년 12월 8일 말라리아에서 유래한 간경변으로 급사한 다음날인 12월 9일부터 총리 자리에 다시 올랐다.(총리 재임기간 1963-1973)
그는 내각 임기 중인 1971년 11월 17일에 무혈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헌법 정지, 상하 의회 해산, 정당 활동 금지와 5명 이상의 집회 금지를 발령해 강권 독재체제를 시행했다. 정권 자리에 올라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던 최대 이유는 의회 때문이었으며, 의회 발족 이후에도 국가 예산이 연도 내에 결정된 적이 없는 등으로 행정이 재대로 가동되지 못했고 정책 결정도 선수를 빼앗기는 문제점들이 계속되었다. 치안 상황에서는 태국 공산당의 게릴라 활동, 이웃나라 캄보디아와 라오스 내전에 의한 난민 유입과 이것을 쫓는 군의 방위, 또한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의 문제 등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게다가 노동 운동과 파업이나 정당간의 테러 활동이 한층 악화되어 경제면으로는 베트남 전쟁 특수 수요의 대폭적인 축소, 무역적자(수입 초과 상태), 주력 수출품인 쌀값이 국제 시세에서 40% 하락으로 수지가 감소되는 상황까지 맞이하게 되었다.
1972년 11월 15일에는 타넘 정권이 임시 헌법을 공포했다. 요점은 정권에 권력 집중과 공산주의 운동의 탄압 등으로 정치적 강화를 도모했다. 하지만 경제면에서는 물가고, 인플레이션이 현저하게 나타나면서 파업이 더욱 횡행했고 물류가 막히는 등 악화의 일로를 걸었다. 그리고 경기 저하에 무역적자까지 겹치면서 11월에는 일본 제품 불매 운동, 정부의 배타적 정책으로 12월에는 외국 기업 규제법, 외국인 직업 규제법이 개정되면서 태국에 진출하는 해외 자본에 제한이 가해지게 되었다.
1973년에는 경제면이 더욱 악화되고 인플레는 심각해져 식료품 물가지수는 155.3으로 반년에 28.5%나 상승했고 하락하는 국제 쌀값 시세에 유통 통제의 실패로 흉작이 뒤쫓아, 국내 공급량은 계속 줄어들어 서민의 가계를 압박해 국민의 불만은 한계에 다다랐다.
그러면서 1973년 10월 4일에 민주화를 향해 정치가, 시민운동가, 학생 활동가, 교직원을 중심으로 ‘헌법 요구 백명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10월 6일 헌법 요구 백명 위원회 12명이 체포되었으며, 혐의 중에 하나로 쿠데타 음모를 들었다.
10월 8일 방콕 수도권과 치앙마이의 각 대학에서 12명의 체포에 항의 활동이 개시되었다.
10월 9일 카이센 전 국회의원이 추가로 체포되어 13명이 되었다. 타넘 총리는 임시 헌법 제 17조를 행사해서 이들이 공산주의자에게 선동되어 정부 전복을 꾀했다고 단정하며 무기한 구류를 명령했다.
10월 10일 전날의 각 대학 항의 활동은 전국으로 파급되었고, 탐마싿 대학에서는 아침 학생 1만명이 수업 포기를 선언했고 일부 교수도 체포자 석방 청원서에 서명하며 학생들에게 동조했다. 이른 아침부터의 집회는 열을 띠게 되면서 전국 학생 센터(National Student Center of Thailand) 간부들은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획득할 때까지 싸울 것이다!!”고 반복했고, 오전 7시에는 일부 학생들이 국기를 내리고 대신해 검은 기를 내걸기도 했다. 그 후 시민들이나 다른 학생도 탐마싿 대학에 와서 시민 연합을 선언하고 “우리는 너무 멈추었다. 우리는 전진을 결의를 했다. 오늘 우리는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싸우는 것을 맹세한다”는 연설을 했다.
그러자 타넘 총리는 사태가 커지는 것을 우려해 쁘라팟(Praphas Charusathien) 내무부장관 겸 부총리에게 특별 권한을 주어 공산주의 억압 활동 사령부(CSOC) 내에 ‘평화와 질서 회복 정책실’을 설치하고 임시 부관으로서 육군 총사령관 크릿 대장을 임명했다.
10월 10일 밤에는 전국에서 학생이 잇달아 집결했는데 그 수는 1만5000~2만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아침부터 전국 대학, 전문학교, 사범학교 등에서 방콕으로 몰려들었고, 전국에서 탐마싿 대학으로 모인 시민연합에 잇달아 지지를 표명했다. 전국 학생 센터 쏨밧 씨는 “헌법을 위해 일반 대중과 함께 싸우는 것을 맹세하며 체포자 13명의 석방과 요구를 쟁취할 때까지 유효한 모든 수단을 행사하겠다. 민주화를 위해 사람들과 협조해 싸우는 것을 여기서 맹세한다”고 연설했다. 또한 전국 학생 센터 부서기장은 “학생은 끝까지 싸운다” “과거 몇일간 정부가 우리에게 만족할 회답을 나타내지 않아 최후 통고를 보낸다”고 말하며, 전국 학생 센터의 요구가 실현될 때까지 계속해서 본부를 탐마싿 대학에 두고 평화적인 항의 행동을 계속할 뜻을 표명했다.
10월 11일 쁘라팟 부총리는 전국 학생 센터 대표 외 11명을 불러 대화를 실시했다. 그 자리에서 쏨밧 서기장 등은 정부 전복 활동 용의로 체포된 13명의 조속한 석방을 요구했지만 부수상은 이것을 거부하며, 피의자들에게는 증거도 있고, 또한 여러 명은 공산주의 활동에 관한 문서 소지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처벌은 재판 판결을 기다렸다가 결과에 정부가 정상 참작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정부에서는 부총리가 위원장을 맡은 헌법 기초 위원회가 진행해 새로운 민주 헌법도 발표할 예정이라는 것도 설명했다.
10월 12일 이 전날의 대화에 응하지 않고 “시민 연합은 오늘 10월 12일 정오부터 24시간 이내에 체포된 헌법 요구 백명 위원회 운동가 13명의 석방과 민주 정치를 요구한다. 만약 만족할 수 있는 회답이 이 시간 내에 정부로부터 얻을 수 없을 경우 시민연합은 대담한 행동을 취할 것이다”는 최후통첩을 정부에 보냈다. 그 무렵 체포되어 있던 활동가들은 36시간 단식투쟁에 들어간 상황이었고, 결국 정부는 잇달아 계속 증가하는 데모 참가자를 염려해 13명의 보석 지시를 내렸지만 13명은 출소를 거부했다.
10월 12일 오후 7시 탐마싿 대학에 집결한 학생수는 15만명에 이르렀고, 학생들은 방콕에 집결하는 것 외에 지방 각지에서도 항의집회를 열었다. 치앙마이에서는 4만명의 학생, 우본에서는 3000명, 나콘싸완에서는 4700명, 마하싸라캄에서는 7600명, 피싸누록에서는 5000명이 각각 현지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다.
10월 13일 전날의 ‘최후통첩’ 기한인 정오에 대학교 내에서 민주기념탑(อนุสาวรีย์ประชาธิปไตย)으로 데모 행진을 개시했다. 이날 밤새도록 집회지로 합류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그치지 않았으며 일반 시민을 포함해 20만명 정도가 행진에 차례차례로 가세해 40만명에 이르는 태국 사상 최대 규모의 데모대가 되었다.
10월 13일 정오 데모 행진 개시시각에 체포된 13명이 구치소에서 강제로 추방되었다.
10월 13일 오후 상황이 급박해지자 국왕 라마 9세는 중재에 나서 타넘 내각을 불러 체포자 13명을 무조건 풀어주는 것과 헌법 기초 위원회의 진행으로 1974년 10월 공포 전망을 확인한 다음 전국 학생 센터 대표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정부 대응을 전하는 것과 동시에 평화와 질서를 지키도록 호소했다.
10월 13일 오후 4 시경 전국 학생 센터는 승리를 선언하고 학생과 일반 대중에게 데모 종료를 알리며 참가자에게 귀가를 호소했다. 민주기념탑의 데모대는 심야 전에 거의 철수했고 집회 여운으로 민주기념탑 주위에 약간의 사람들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종결 승리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집단이 있었다.
10월 13일 오후 4 시경에 전국 학생 센터 공격대(르엉 쓰아, 노란 호랑이)는 집회 속행을 호소하며 집단에서 분리되어 왕궁 광장(싸남루엉)으로 이동했다. 이들의 움직임에 14일 오전 1시경 데모대를 정부가 강제 해산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격양된 집회참가자들이 재차 항의행동을 계획했고, 전국 학생 센터 간부 쎈싹은 아침 이후에 찌뜨라다 궁전(Chitralada Royal Villa)으로 행진하는 것을 결정했다. 쎈싹은 전날 들은 국왕이 말을 재차 직접 들려주는 것으로 집단은 진정되어 수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한밤중에 전국 학생 센터는 잔류하고 있는 쎈싹 분파 집단에 대해 반란집단이라고 선언하며 급진 테러리스트 집단과 전국 학생 센터는 관계가 없다고 밝힌 후에 쎈싹에게 전국 학생 센터 제명 처분을 내렸다. 또한 이 위험한 반란 분자와 관련되는 것을 금지한다며 집단에게는 조속한 철수와 해산을 명령하는 성명을 보냈지만, 혼란한 상황으로 연락이 어려워져 성명이 왕궁 광장에까지 이르지 못해 이윽고 궁전을 향한 데모 행진은 실행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973년 10월 14일(씹씨 뚜라)
6시 30분 데모가 개시되어 찌뜨라다 궁전을 향해서 라체담넌넉 거리로 행진을 시작했다(약 50만명).
10시 30분 무장 경찰대는 복권국 빌딩 옥상에서 데모대를 향해 최루탄 투척과 발포로 충돌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강경하게 경찰과 군인에게 맞섰고, 그리고 전차가 동원되고 군 헬리콥터에서 발포(나롱 대령의 소행으로 예상)로 데모대는 몇 개의 정부 청사로 들어가 그곳을 점거하게 되었다.
11시 00분 육군 부대가 출동해 점거된 국세청에 돌입했다.
12시 00분 라디오 타일랜드는 정부군과 데모대의 격렬한 전투를 보도했다.
13시 15분 정부는 프라마인 광장 주변 주민에게 외출 금지를 통고했다.
14시 00분 데모대가 국가 행정 사찰청(BIFGO)을 포함한 4개의 정부 건물에 방화를 했다.
14시 15분 학생 5명의 사체가 3000명의 군중과 함께 메모리얼 다리를 건너 톤부리 광장으로 운반되었다.
14시 20분 학생(여자 포함) 50명 이상의 사체가 홍보국 앞에 가로 놓였다.
14시 30분 방란푸에 있는 파출소가 방화되었다.
14시 35분 정부는 데모대 지휘자에게 당국과 신속하게 절충하도록 요청했다.
15시 30분 국왕이 헬리콥터로 상황을 시찰했다.
16시 40분 정부가 방콕 수도권, 논타부리도, 싸뭍쁘라깐도의 교육기관에 일시 폐쇄를 통고했다.
17시 00분 정부는 탐마싿 대학에 잔류하고 있는 학생에게 철수를 명령했고, 지정시한 1시간 전에 교내에서 짜오프라야강을 건너는 등의 긴급 수단을 따르게 되었다.
18시 10분 국왕이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으로 평화와 질서를 지키도록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1시 47분 방콕 돈무앙 공항에서 타이항공기 특별편으로 타넘 총리, 쁘라팟 부총리, 나롱 대령(Narong Kittikachorn), 행정 사찰청장관(타넘 총리의 자식) 등 30명 이상이 가족과 함께 출국했다.
밤(20시 이후? 시간 불명)에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에서 타넘 내각의 퇴진과 타넘 총리가 10월 15일 출국한다는 보도가 나왔으며, 국왕은 전 법조관이자 탐마싹 대학의 학장인 싼야 탐마싹(Sanya Dharmasakti)을 총리로 지명했다.
23시 00분 라마 9세 국왕의 어머니인 씨나끄린(Srinagarindra) 황태후가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위로의 말을 전했다.
23시 30분 새로 임명된 싼야 총리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가능한 한 신속하게 민주 헌법을 발포하고 현재부터 6개월 이내에 총선거를 실시하겠다”며 질서 회복을 호소했다.
‘씹씨 뚜라’ 사건은 10월 13일까지는 정부 항의에 성과를 달성한 시민운동, 10월 14일은 그 잔류 집단에 강권 탄압, 그리고 타넘 정권 실각이라고 하는 정권타도의 쿠데타로 변모되었다.
결국 타넘 총리, 쁘라팟 부총리, 나롱 대령이 태국을 출국한 후로 태국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정부는 데모 학생의 희생자는 77명, 부상자 857명으로 발표했다.
■ 동영상 : 1973년 10월 14일의 역사적인 사건 บันทึกเหตุการณ์ 14 ตุลาคม 2516
■ 그날의 사진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