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4장 이젠 늦은 비 The Latter Ram
유적지에서 받은 감동
어렸을 때부터 나는 새로운 곳에 가는 걸 좋아했다. 부모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거기에 뭐가 있나 직접 보려는 마음에 나는 앞서가거나 뒤처지곤 했다. 갑자기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으니 적잖이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 드렸다. 겁날 것이 없었다. 건물이나 길 혹은 나무를 '나 홀로 탐사하는 것에는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
아마도 그런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여러 해가 지난 후 나는 터키에 있는 고대 도시 에베소를 여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동료 교수들과 함께 주요 도로인 쿠레스 거리를 걷게 되었다. 헤라클레스 문, 트라야누스의 샘, 바리우스 목욕탕, 또한 저 유명한 화장실까지도 '관찰'하려고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그랬다. 이런 시설들이 1세기에 존재했었다니! 게다가 공공시설들이었다. 우리는 고대에서 가장 큰 도서관 중의 하나인 셀수스도서관 앞에 서서 흥분으로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 건물은 첫 사도들이 그곳을 다녀간 지 불과 몇 십 년이 지나 건축되었다. 바울이 이방의 대도시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보았던 것들을 지금 우리가 목격할 수 있다니 여간 설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가 에베소 사람들이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행 19:23~32 라고 두 시간 동안이나 소리를 질렀던 곳으로 알려진 그 원형극장에 모였을 때 나는 점심을 거르고 혼자 돌아다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원형극장의 꼭대기에서 바라본 길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치명적 매력으로 나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그 길은 예전 항구로 이어져 있었다. 바울이 새로운 사역을 위해 발을 내디뎠던 항구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여행객들의 접근을 제한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6세기 비잔틴 교회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들판을 질러가 보기로 작정을 했다. 방울뱀이 나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가다보니 신기하게도 항구로 길게 이어지는 고대의 길을 만났다. 나는 정말로 특권을 누리는 느낌이 들었다. 금지된 길을 걸으며, 사복음서 기자들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게 헌정된 네 개의 기둥을 발견하였다. 참으로 놀라웠다. 조금 전에 나는 에베소의 수호 여신인 다이아나 아데미 신전의 유적을 보지 않았는가.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꼭대기에 황새가 둥지를 틀고 있는 기둥 하나뿐이었다. '놀랍다!' 혼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전적으로 사탄의 수하에 있었던 가장 세속적이고 가장 거대한 고대 도시 중 하나란 말인가. 그런데 바울이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 이곳이 온통 '소통'한 것이다. 수 세기가 지난 후,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알려진 그 신전은 딸랑 신전 하나만 남고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증거는 지금 도처에 있다.
세계 복음화를 위한 도전
어떻게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든 적이 없는가? 이것은 위대한 도전이다. 세계 인구 70억 명 중에 절반이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고 성경책을 본 적이 없으며, 셋째 천사의 기별'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2000년에는 519명당 한 사람이 재림교인이었지만 지금은 400명당 한 사람이 재림교인이라는 사실에 기뻐한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의 기별에 대한 무시무시한 장벽들이 존재하는 인도네시아와 중동, 북아프리카, 중국과 같은 지역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현실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오늘날 40만 명의 재림 신자들이 중국에 있으니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보다 그곳에서 가장 강력하고 성공적인 사역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중국보다 재림 신자가 더 많은 나라는 세상에 불과 십여 나라밖에 안 되니 자랑할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중국의 인구는 13억이나 된다. 중국에서는 3,250명당 한 명이 재림교인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겨우 0.03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초기 교회는 전혀 승산이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적어도 오늘날에는 세계 인구의 1/3이 어쨌건 기독교와 연관이 되어 있지만 사도들이 복음 전파를 시작했을 때는 '제로'였다. 오늘날은 전 세계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교에 관하여 보편적으로 관용을 베푸는 편이다. 그러나 과거 로마 제국에는 다원주의가 널리 퍼져 있었음에도 기독교는 예외적으로 배척당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주의의 분파로 여겨졌으며 유대인들은 제국 안에 많은 적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장애물은 기독교의 배타성이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그 하나님이 우리의 구주이시며, 이 구주께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로마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그들의 기별이었다. 뭐라고? 십자가형을 받았다고? 그들이 기독교의 도를 미련하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전 1:20~23
모든 이방 신들은 언제나 '능력'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세상을 능력으로 창조하셨다는 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수치를 당하도록 자신을 내어 주었다는 것은 믿기에 너무나 황당한 개념처럼 보였다. 로마 근교에서 발견된 유명한 벽화에는 당나귀 머리를 하고 벌거벗은 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어떤 남자가 그려져 있다. 그 그림 아래에는 조롱의 글이 새겨져 있다. "알렉사메노스, 그의 신을 경배하다.“
신약학자 고든 피 Gordon Fee 는 이렇게 말했다.
"대적들이 십자가에 매달도록 자신을 내어 준 신에 대한 이 이야기가 1세기 헬라인이나 로마인에게는 얼마나 미친 소리처럼 들렸는지 기독교를 믿는 서양인들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이 어리석고 야단스러운도의 심오한 핵심이다. 십자가가 신자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상징하는 표로 부각되기 1세기 전에는 왜 이것이 훨씬 더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말이다." 마이클 노울즈, <우리는 자아를 전하지 않는다〉, 86
오순절 사건 이후 30년이 흐른 즈음, 바울은 감히 복음이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 골 1:23 라고 선포할 수 있었다. 천하 만민이 단지 로마 제국 내의 세계만을 의미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당대의 절대다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그들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가? 무선 통신도, 인터넷도, 라디오나 TV도 없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대륙 횡단 비행기나 휴대폰, 서적조차 없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해 낼 수 있었는가?
"보라, 그들은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가. 그들은 얼마나 서로를위해 죽음이라도 불사하는가." 이것은 이방인들이 마지막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죽은 지 1세기가 흐른 후의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보여 준다. 테르툴리아누스, <변증론> 39장 엘렌 화잇은 이렇게 덧붙인다....
"성령 강림 후, 제자들은 그분에 대한 사랑과 그분이 위하여 죽으신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였으므로 그들이 하는 말과 그들이드리는 기도로 인해 사람들의 심령이 녹았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하였으며, 그 능력의 감화 아래 수천 명이 개심하였다." 행적, 55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적으로 반사하는 말과 행동으로 인해 녹을 수는 없는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할 때 그들의 마음에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 성경은 초기 교회에 대하여 명확하게 기록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행 4:32~33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이른 비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의미를 연구할 때, 우리는 이 용어를 두 가지방식, 곧 시대와 교회에 초점을 맞춘 '역사적-객관적인 의미와 이것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영향을 주었는지에 초점을 맞춘 '개인적-주관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초대 교회가 그런 모습이 되게 한 것은 이른 비 성령이었다. "사도 시대에 성령을 부어 주심은 이른 비 혹은 먼저의 비의 시작이었고 그 결과는 영광스러웠다." 행적, 54~55 얼마나 영광스러웠던가 복음은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의 가장 끝까지 전파되었다.
“제자들이 구속하시는 은혜의 기별을 선포하였을 때 사람들의 마음은 그 기별의 능력에 굴복하였다. 교회는 각처에서 모여 온 회심자로 가득 찼다. 뒤로 물러갔던 사람들이 다시 회심하였다. 죄인들은 값진 진주를 구하며 신자들과 연합하였다. 복음에 대해 가장 혹독하게 반대하던 어떤 이들이 복음의 옹호자들이 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의 형제들에게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행적, 48..
정말 놀랍지 않은가? 그도 그럴 것이 "하루에 수천 명이 회개하였다." 행적, 38 재림교회는 놀라운 늦은 비의 부어 주심을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늦은 비는 이른 비가 먼저 내리기까지는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른 비는 정확히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회심으로 이끄는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라고 말할 것이다. 더욱 완전한 그림을 요엘 2장 23절에서 살펴보자.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17문제는 "이른 비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 '모레에 있다. 이 단어는 '선생'을 의미하며, '이른 비'에 해당하는 '요레'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구절의 마지막에 있는 이른 비는 히브리어 필사본들에서 요레'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본문의 이른 비는 '비'가 아니라 '선생'이라야 맞다. 동일한 단어 '모레'를 잠언 5장 13절과 이사야 30장 20절에서 볼 수 있는데, 두 곳 모두 "선생으로 번역하였다.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잊어버렸을 당시 만들어진 구약 성경에 대한 해석적인 아랍어 번역 탈굼
17 신명기 11장 14절의 이른 비 역시 '요레'이다.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Targums 과 3세기 라틴어 번역 성경인 불가타역 The Vulagte Bible 에서도 이 단어를 "선생으로 번역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실제로 "의의교사가 맞다. 성경주석 4권 참고
이를 기초로 아래 성경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너희 하늘들아, 위로부터 내리며 창공으로 의를 부어 내리게 할지어다. 땅은 열어서 그들로 구원을 내게 하고, 의도 함께 솟아나게 할지니라." 사 45:8, 한글킹제임스
"너희 묵은 땅을 파 일구라 이는 지금이 주를 찾을 때임이니, 그가 오셔서 너희에게 의를 비처럼 내리실 때까지라." 호 10:12, 한글킹제임스
선지자들은 이른 비를 의의 시대, 곧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우심이 마침내 드러나는 때라고 말했다.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해 오셨다. 오순절에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심으로 "의의 교사가 되셨다. 주님은 약속하셨다. "성령・・・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그러므로 '역사적-객관적인 이른 비는 하나님께 완전하게 순종하셨고 그분의 의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신 십자가의 은혜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을 향한 오순절의 기별이었다. 그 기별은 세상에 영원한 혁명을 일으켰다.
'개인적-주관적' 관점에서, 이른 비의 경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과 순종의 기별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른 비는 늦은 비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경험이다. 이것이 1888년 기별의 각성을 통해 엘렌 화잇이 재림교회를 향해 기대하였던 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늦은 비는 무엇인가?
역사적인 늦은 비
이른 비가 모든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이 시작된 그리스도인 시대를 열었다면, '역사적-객관적 늦은 비는 그 사역을 정점에서 완성시킬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엘렌 화잇은 늦은 비의 부으심으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 “인자의 오심을 위해 교회를 준비시킬 것이며 행적, 55 둘째, "셋째천사의 큰 음성에 능력"을 줄 것이며, 셋째, "마지막 일곱 재앙들이 부어지는 시기에 성도들이 서도록 준비시킬 것이다. 초기, 86
또한 엘렌 화잇은 "이기심과 방종으로 인하여 "교회의 대부분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협력하지 않고 있는 한 늦은 비는 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리뷰, 1896년 7월 21일 한편 1897년에 늦은 비의 부으심이 있을 “정해진 때는 없다."라고 단언하였지만 그러한 때는 "지금"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런 언급을 한 때가 지금으로부터 무려 110년 전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왜 우리는 복된 약속의 성취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적들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아마도 다음 문장이 마지막 때의 늦은 비 성령의 역사에 관한 가장 잘 알려진 진술일 것이다.
"위대한 복음 사업은 그 시초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 못지않은 큰 능력이 나타남으로 마치게 될 것이다. 복음 사업의 시초에 이른 비가 내림으로 성취된 예언들은 그 사업의 마지막에 늦은 비가 내림으로 다시 성취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 베드로가 기대했던 '유쾌하게 되는 날'(행 3:19)이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행3:19~20).
거룩한 헌신으로 빛나고 밝은 표정을 얼굴에 띤 하나님의 종들은 하늘에서 온 기별을 선포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저곳으로 분주히 왕래할 것이다. 온 세상에 수많은 목소리가 경고의 음성을 발할 것이다. 이적들이 일어나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게 될 것이며, 표적과 기사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따를 것이다. 사탄 역시 거짓 기사들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의 눈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게까지 할 것이다
라."라고 기록하였고, 14째 단락에서는 "주께서 그의 영을 크게 주실 늦은 비의 때가 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계 13:13) 그리하여 이 세상의 거민들은 그들의 입장을 분명히 취하게 될 것이다.
기별은 변론으로 전해지기보다 하나님의 성령의 깊은 감동으로 전해질 것이다. 변론은 벌써 제시되었다. 씨앗은 이미 뿌려졌으므로 이제는 그것이 자라나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쟁투, 611~612
하나님의 좋은 위의 인용에서 언급한 조건들이 많은 부분 성취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알려 주었다.
"그리스도인이라 공언하는 자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생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육과 영과 혼의 성화가 있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실 수 없으시다. 그 후에라야 그들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될 것이다.” 서신 139, 1898년 12월 16일
이제 우리는 우주 행성이 정렬되는 날이나 정치적인 야합 혹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흥과 같은 것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늦은 비 성령의 부어 주심이 지연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미백 년도 전에 늦은 비의 시대가 왔다고 선지자가 말했는데도 늦은 비가 지연되는 단순한 이유는 교회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늦은 비가 그 역사를 성취하려면 성도의 "개인적인생애'에 이른 비가 물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늦은 비
늦은 비에 관한 엘렌 화잇의 기록은 대부분 우리의 심령에 있는 성령의 개인적인 역사를 가리킨다. 엘렌 화잇은 늦은 비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완성", 우리에게 "완전"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보았다. 목사, 506 이것은 율법주의가 의도하는 완전주의 혹은 오순절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기적의 발현이 아니다. 이 "완전"은 우리의 완전한 보혜사이신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복종을 말한다. 화잇 여사는 또한 우리가 교만, 이기심, 세상을 사랑하는 것, "각양 괴롭히는 것”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한, 이 "새롭게 됨을 나누어 받을 수 없다고 경고한다. 초기, 71
늦은 비는 의심의 여지없이 강력한 치료제이다. 그래서인지 죄라고 불리는 질병, 그것도 말기에 이르러 그러한 변화를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처방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강력한 도움을 가지고 있다. 그분이 채찍에 맞아 죽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셨기 때문이다. 시 103:34 우리가 전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며, 그런 후에는 그분과 함께 살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그분을 떠나고자 하는 불경건한 열망을 지니기도 하며 자아를 우리의 우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매 순간 주님을 신뢰하는 것 외에 더이상 어떤 것도 구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 안에 둔 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구주이시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당신과 나에게 그분의 신실하심을 입증하실 것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3, 쉬운 개인적으로 늦은 비를 받기 위하여 우리는 계속적으로"그릇을 깨끗이 하고 올바르게 하여" 예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받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원고, 1891년 9월 26일
그러나 이 부분에서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른 비는 오순절에 내렸고, 늦은 비는 마지막 때에 내릴 것이니 그 사이에는 수천 년의 공백이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재림교인들이 많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성령님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시지 않는다고 결론을 짓는다. 차라리 하나님의 백성이 성령님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성령님을 붙들고 계시니까 성령님을 놓아주시도록 반드시 설득과 납득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적 기근은 늦은 비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늦은 비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모든 일을 바로 잡으실 때까지 우리는 마냥 기다리게 된다. 이런 생각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폴슨, 135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는 항상 진행형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대가를 치르고 얻게 되는 심령의 내적 변화 대신에 외적으로 나타나는 초자연적 변화를 믿고 바라고 기다리는 신은사주의자들의 개념에는 커다란 약점이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작은 단계를 밟아 나가도록 하시는 주님의 권면을 따르는 대신에 하늘의 의원께서 당장 고통을 없애 줄 마법의 약을 주시리라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많은 사람이 이른 비를 받는 데 큰 실패를 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제공하시는 유익을 전혀 얻지 못한다. 그들은 그 부족이 늦은 비로 채워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들은 풍성한 은혜가 가장 많이 부어질 때, 그것을 받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끔찍한 실수를 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그분의 빛과 지식을 주시는 일을 시작하셨고, 그 일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 틀림없다. 그 일 칭의 을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온전하게 하심으로 그분의 일 성화 을 마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 비로 나타난 은혜를 조금이라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빛대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더 큰 빛을 받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미덕의 실례로서 매일 진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늦은 비의 때에 성령님의 호소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늦은 비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내리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받지 못할 수 있다." 리뷰 앤드 헤럴드, 1897년 3월 2일..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모두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서구의 많은 지역에서 교회가 쇠락하고 있다. 예수님 안에 달란트와 자원과 무수한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적인 일에 관심을 뺏기고, 우리의 참된 상태에 완전히 눈멀어 영적으로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정말로 말기 환자의 상태에 있으나 정작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약을 복용했기에 건강이 어떠한지 이제는 알지도 못한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혹독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당신이 이 책을 읽기로 한 이상, 하나님의 성령에게 마음을 열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성령충만을 온전히 얻지 못한 상태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당신은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즉각적이고도 영원히 지속되는 도움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갑절의 영적 도움, 곧 그리스도의 품성이 드러나는 것과 성령의 완전한 침례이다. 요엘 2장의 교훈을 기억하는가? 비와 의의 선생" 간에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참된 계시, 그분의 부요한 은혜와 은총에 대한 참된 모습, 그분의 본성과 능력에 대한 참된 관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의의 기별이 세상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울려 퍼질 것이다. 이것이 셋째 천사의 일을 마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배틀크리크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엘렌 화잇의 편지, 대총회 보고서, 1893년 1월 28일
당신은 지금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교회를 변형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초기의 제자들은 죄를 고백하고 버림으로, 또한 기도하고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오순절에 성령의 부어 주심을 위해 준비되었다. 그 동일한 일이 더 위대한 수준으로 지금 성취되어야 한다" 리뷰 앤드 헤럴드, 1897년 3월 2일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더 위대한 수준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오직 그분만이 그것을 어떻게 각각의 제자들에게 적용시킬지 아사기 때문이다. 관건은 우리의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킴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구하고 순종하고 신뢰하고 다음 단계가 이루어지기 전에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결정적인 말을 남겼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 6:1~3
♣ 적용과 소그룹 연구를 위한 질문들
1. 1세기의 교회에 있었던 도전보다 훨씬 큰 도전인 세 천사의 기별을 온세상에 펼치는 데 있어서 당신은 무엇으로 용기를 얻는가?
2. 바울은 30년 만에 복음이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 (골 1:23) 되었다고 선포하였다. 오늘날에도 그와 유사한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어떻게 가능할까?
3. “이른 비는 정확하게 무엇인가? 그것이 어떻게 “의와 관계되는가?
4. 늦은 비는 교회에서 어떤 역사를 이루게 되는지 세 가지를 말해 보라.그 밖에 다른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5. 늦은 비의 부어 주심을 막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적인 삶에서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6. "만약 우리가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미덕의 실례로서 매일 진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늦은 비의 때에 성령님의 호소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늦은 비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내리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문장에 대한당신의 생각을 말해 보라.
7.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승리자가 될 수 있는가?
8. 오늘날 "하나님이 성령님을 붙들고 계신다.”는 생각은 왜 잘못되었는가?
9. 엘렌 화잇이 "그 동일한 일이 더 위대한 수준으로 지금 성취되어야 한다.”고 말한 그 동일한 일은 무엇인가?
10. 당신의 생애에서 성령님을 향해 활짝 열기 위해 취해야 할 단계들은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