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 여행을 위해 미리 예약해 둔 숙소에 가기 전 현리시외버스터미널 앞 카페에 들렀다. 인제군 기린면에 위치한 현리터미널은 전형적인 시골 버스정류장이다. 다방도 틈틈히 보이고, 오래된 식당과 여인숙들이 모여있다. 내린천 가까이에 있어 레프팅을 즐기러 온 뚜벅이 여행자들이 도착하는 곳이다.
카페문을 열고 들어가니 10여명의 군인들이 일제히 나를 처다보더니 이내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많은 군인들을 보니 비로소 인제에 온 실감이 난다. 인제는 강원도 북동부에 위치한 군으로 군사분계선과 접하고 있는 최전방지역이다. 고등학교 때 국군장병들에게 편지를 쓸때만해도 군인은 아저씨였는데 앳된 얼굴의 군인들을 보니 지나가버린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인제에 온 이유는 만해 한용운을 만나기 위함이다. 만해는 독립운동가 겸 승려, 시인이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님의 침묵>의 그의 작품이다.
인제에 오기 전 <님의 침묵>을 다시 찾아 읽어봤다.
다소 길지만 전문을 적은 것은 한구절 한구절 시인의 절절함을 느껴보기 위함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기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면서 시를 읽어도 가슴속 슬픔이 솟구치는 데 조국을 잃은 망국의 백성으로 읽으니 가슴을 치게 만드는 통곡의 울림이 들려온다.
한평생 독립운동에 몸바친 만해 한용운
만해는 한평생 독립운동에 몸바친 인물이다. 그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 오세암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 백담사에 가서 승려가 됐다. 이후 <조선불교유신론>등을 쓰며 불교를 개혁하고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1919년 3.1운동때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1933년 서울 성북동에 심우장이라는 집을 지을 때도 만해는 남향을 포기하고 북향으로 지은 일화는 유명하다.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몸바치던 만해는 결국 광복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눈을 감는다.
공자는 30살을 '뜻을 세우는' 이립의 나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뜻을 세우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 뜻을 지키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젊은 시절에 뜻을 세우는 건 쉽지만 그 뜻을 포기하지 않고 지킨다는 건 나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다.
만해의 인생을 찬찬히 돌아보니, 가슴속이 서늘해지고 아파온다. 고통의 시대를 살다간 지성인에 대한 존경과 미안한 마음일 것이다.
백담사는 첩첩산중의 설악산 자락에 위치해있다. 가는 길이 험해 직접 차로 갈수는 없고, 별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백담사 전용 셔틀버스를 타야한다. 셔틀버스는 마을 주민들이 직접 운영한다. 7km의 짧지 않은 길인데 올라가는 길이 생각보다 험하고 구불지다. 맞은 편 차가 온다면 한참을 후진해 차를 비켜줘야한다. 덜컹 거리는 버스에서 보이는 설악산의 풍경은 그야말로 비경이다. 이 길을 걸으며 만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20분 정도 아슬아슬한 산길을 달리면 백담사에 도착한다. 백담사에 온 또 다른 인물로는 전 대통령도 있다. 하지만 그 인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 신성한 공간에 마음을 흐트리고 싶지 않다.
백담사까지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타야한다
사람들의 소망이 빚어낸 장엄한 풍경
백담사까지는 짧은 돌다리를 건너는데 믿을 수 없는 풍경이 시선을 압도한다. 사람들의 무수한 소원을 담은 돌탑들이 다리 양 옆에 쌓여있다. 사람들의 간절함이 빚어낸 장엄한 풍경이다.
사찰 까페에서 따뜻한 차한잔을 마시고 둘러보니 김시습의 싯구절이 보인다. 백담사는 김시습과도 인연이 있는 곳이다. 어렸을 적에는 천재로 불리던 김시습은 계유정난으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관직을 벗어던지고 세상을 유랑했다. 부여 무량사에도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낸다지만 다음해는 어느 산을 향해 떠나갈꺼냐"
호방하면서도 서글픈 천재시인의 한숨이 이곳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백담사 내에 있는 찻집
백담사에 머물렀던 김시습
만해 기념관
백담사는 아담한 사찰이다. 한바퀴 천천히 걸어도 20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다. 대웅전 왼쪽 건물은 전 대통령이 참회를 한다며 머물던 곳이지만, 몇년전부터 폐쇄됐다. 그리고 한쪽에는 만해기념관이 있다. 만해가 남긴 수많은 글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만해는 독립운동으로 옥살이를 하면서 3대 원칙을 세웠다.
보석을 요구하지 말라.
사식을 취하지 말라.
변호사를 대지 말라.
빨리 출소하고 싶다고 자존감을 버리는 비굴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그의 소신이 요즘 시대에 꼭 필요하지 않을까.
백담사를 나와 오세암으로 가보기로 했다. 만해가 깨달음을 얻은 오세암은 백담사의 백미다. 하지만 이런. 오세암까지 가는 길이 온통 빙판이다. 5시간정도가는 쉽지 않은 여정인데 출발부터 불안하다. 예전에 아이젠 없이 산에 올랐다가 낭패를 본일이 떠올라 출발이 쉽지 않다.
결국 난 출발하지 않았다. 무리하게 올라가는 것 또한 욕심이 아닐까. 욕심을 버려라, 깨달음의 시작일터이다.
백담사에서 10분 거리에 만해 마을이 있다. 만해의 모교인 동국대학교에서 조성한 복합문화공간이다. 만해를 기리기 위한 문화행사가 열리고 숙박시설도 있다. 조용하고 호젓한 곳이라 하룻밤 머물러도 참 좋을 공간이다.
만해기념관을 둘러본 뒤 만해마을 안에 있는 갓듸일나무라는 독특한 이름의 북까페에 들렀다. 만해의 시 <생명>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카페안에는 불교서적부터 다양한 인문학 책들이 꽂혀있고 한쪽 벽면에는 LP판들로 꽉 차있었다. 잠시 대학생 때 즐겨가던 신촌 뒷골목 카페가 떠오른다.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면 테이블에 준비된 메모지에 곡명을 적어 주면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신청한 노래가 언제 나오나 기다리는 재미도 쏠쏠했다. 지금은 유튜브로 바로 노래를 듣는 세상이지만, 간절한 기다림의 그 시절이 그립다.
인제 여행은 만해의 흔적을 쫒은 여정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숭고한 의지와 뜻을 가슴깊이 느꼈던 여행이기도 했다.
만해마을 입구
만해마을 북까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