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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 얼굴을 자세히 보시면서 봄날의 꽃처럼 아름다우십니다. 진심으로 이제 우리 춘천에도 조금씩 꽃들이 피는 게 보이시죠? 벌써 앞에 아주 연두색 잎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고 아마 오늘까지 따뜻하니까 아마 오늘 내일이 되면 이제 좀 더 많이 피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데요.
여러분 이런 계절의 변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요.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을 주시는 귀한 교육 재료이기도 합니다. 마치 죽어 있는 것 같았던 나뭇가지에 새싹이 나고 또 꽃이 피고 우리의 신앙에도 여러분 이 봄날의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귀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예화를 들어본 적 좋은 분이 계셨나 봐요 이런 예화를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크루즈 여행을 어떤 사람이 통해서 세계 여행을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기 때문에 이 평생 소원을 위해서 열심히 돈을 모아서 난생 처음 세계 여행을 하는 크루즈선에 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힘겹게 이 돈을 모아서 겨우 티켓을 구매하다 보니 이 크루즈 안에서 이제 자기가 가지고 갈 돈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배를 타기는 했는데 그 배를 타고 이렇게 지내는 동안 호화로운 그 배 안에서 고급 레스토랑의 사람들이 앉아 식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의 그 굶주린 배를 움켜잡으면서 사람들이 즐기는 동안 자기는 자기 방에서 가지고 온 스낵과 크래커 크래커 간단한 이런 과자 종류로 끼니를 겨우겨우 때우고 있었습니다.
근데 이 여행이 세계 여행이다 보니까 기간이 너무 길어요. 거의 여행이 끝날 쯤에 이 사람이 너무 배가 고픈 거예요. 도무지 이 상태로는 이제 쓰러지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체면을 불구하고 이제 주방에 갔습니다. 그리고 식당 그 주방장에게 남는 음식 있으면 조금만 달라고 내가 배고파서 너무 힘들다고 그렇게 말을 했더니 그 셰프가 놀란 표정으로 이렇게 말을 했죠.
선생님 당신이 이 크루즈를 탈 때 지불한 티켓 값에 이곳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을 우리는 이제 오늘 드리고 예배합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하시는 그 장면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십자가를 기념하는 절기로 지키고 있지요.
근데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신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천국 여행을 하는 천국 크루즈선에 우리가 뭔가를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는데도 그 크루즈선에 탑승한 탑승객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천국 여행 크루즈선에 탑승하는 탑승객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그 배에 탄 사람으로서 그 배에서 공급되는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는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이 크루즈선에 타서 이 크루즈선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삶을 살면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의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라는 그 말 안에는요. 완불하였다 완납하였다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값을 다 치르셨다는 것이죠.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성취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도무지 노력해도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죄에서 해방함을 얻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용서함을 받았고, 우리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통하여 참된 평안과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자유와 승리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영광과 천국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 사람은 두 가지로 분류가 되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는 이미 우리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부어주셨는데 이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이 대표적인 사람 2명이 등장을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좌우에 못 박힌 강도들이죠. 그런데 한 사람은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고 한 사람은 똑같은 상황인데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 시간 예배하고 있는데요. 천국행 크루즈를 탄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허락하신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그러면 누릴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일까요? 먼저 첫 번째로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죄인이었던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로 그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릴 은혜의 첫 번째입니다.
오늘 십자가의 양쪽에 못 박혀 있는 그 두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지옥구덩이로 들어간 그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뭐라고 비방하고 있습니까? 39절을 보십시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 사람은 지금 행악자입니다. 행악자로서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인데요. 구체적으로 성경에서는 이 사람이 어떤 죄를 저질렀다고 명시하지는 않지만, 이 십자가 형은 그 당시에 최고로 수치스러운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지는 그러한 형벌이었기 때문에 악행을 저지른 죄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그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그 죄인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사람 아니냐 그러면 한번 우리 좀 구원해 봐라.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이죠. 근데 이때 반대편에 있는 이 사람은 다른 반응을 합니다. 40절을 보면 그 사람을 꾸짖어요.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꾸짖으며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여기서 정죄라는 말은 판결 선고를 뜻합니다. 한마디로 동일한 사형 선고를 받고서도 너 지금 사형 선고를 받고 죽는 죄인이면서 어떻게 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꾸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다음에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너와 나는 죄를 지어서 지금 이렇게 십자가에 지금 죽는 중이니 이건 당연한 거야.
이 말은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자기가 그런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자기는 그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근데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이것은요. 그냥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예요. 아무나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그 죄의 대가로 나는 지옥에 갈 사람입니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은혜받은 자가 그걸 인정할 수 있어요.
여러분 한번 여기 41절에 우리라는 말에 나의 이름을 넣어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작
노효철이는 노효철이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이에 당연한 것 하거니와
아멘 오늘 유초등부 예배 때도 현상수배범이라고 하는 종이를 크게 뽑아놓고 거기에 처음에 예수님의 사진을 붙여놨어요. 은 30냥에 팔리는 예수님. 근데 이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현상 수배범이 되고 나중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느냐 제가 얼굴을 툭 내밀면서 이 앞에 예수님의 사진이 뚝 떨어졌을 때 그 현상 수배 보면 원래 누구예요? 난 거죠. 나 나라고 했더니 목사님이 죄를 많이 지었구나 이럴까 봐 얼른 종이를 가지고 가서 애들 얼굴에다 갖다 대면서 사진을 한 장씩 찍어줬습니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우리 때문이죠.
여러분 우리는 죄인입니다. 가끔 착각해요. 옆에 있는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착각합니다. 기준점이 달라요. 근데 여러분 우리는 성경의 잣대로 우리를 갖다 대면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형벌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 이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 자체가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인은요. 자기가 죄인인 걸 깨닫지 못합니다. 악한 사람의 특징은요. 자기의 입장이나 권익을 포기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그 책임을 전가하는 겁니다. 악한 사람은 끝까지 자아도취에 빠져 있습니다. 죄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뻔히 알면서 어디 있느냐, 어디 있느냐 찾고요.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느냐라고 말할 때 서로 죄를 전가시키잖아요. 많은 사람들은요. 요즘 특히 이 선거철만 되면 서로 고발하고 고소하고 고발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수없이 질책하고 깔아뭉개니다. 그래야 자기가 높아지는 걸로 생각해 참 요즘 많이 안타깝습니다. 정말 더 좋은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 누가 더 안 나쁜 사람인가를 뽑는 그런 시대가 되어버린 게 너무 안타까워요.
여러분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말 그들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도 질책하고 우리도 평가하고만 있는 거예요. 오늘 대표 기도하시는 우리 장로님이 기도하셨지만 우리 전심으로 4월 10일까지 목적을 가지고 이 시대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그들이 깨어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정말 갈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악한 사람들은요. 기준이 다른 겁니다. 여기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 사람, 이 사람은 기준이 다른 사람이었어요.
40절에 보면 이 사람이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이 사람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근데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요. 내가 좀 다른 사람보다 좀만 나으면 우월의식에 빠져버려요. 그리고 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하면 열등의식에 빠집니다. 사람이 기준이 되면 그렇다는 거예요. 감옥에 간 사람 치고 억울하다고 안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왜 나만 들켜 가지고 다 다 죄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하필이면 재수 없이 내가 걸려가지고 내가 여기에 들어왔다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있죠. 내가 돈 없어가지고 백 없어가지고 내가 이런 일을 당한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와 사람 앞에 서 있는 나는 똑같은 것 같지만 굉장히 큰 차이를 보이는 겁니다. 사람들 앞에 서 있는 나는 기준점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거죠.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는 내가 지금 이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죄는 포장하면 포장할수록 더 곪아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큰 죄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죄를 덮어놓고 위장할수록 우리는 그 죄의 늪으로 더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무기력해집니다. 죄는 회개하고 고백할 때에 우리가 더욱더 자유와 평안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근데 그 죄를 고백하는 것조차도 십자가의 은혜를 누린 사람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바로 이 한 사람의 죄인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똑같은 사형수로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는 그 상황 속에서도 한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의가 살아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사람은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오.
아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기 위하여 잡혀가는 그날 밤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주제자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며 나아갔을 때도 예수님은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그가 통곡하고 회개하는 그 베드로를 보셨거든 다윗이 가늠하고 살인하는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애통하며 회개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존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성인도 방탕한 인생으로 인생을 허비했지만 하나님께 나아와 참여하고 돌이켰을 때 그는 성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1장 18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휘어질 것이오,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히게 되리라.
아멘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주님 앞에 나올 때 우리는 죄사함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얻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이 참된 구원자로 믿게 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두 명의 강도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까요? 근데 아마 이 사람들이 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짓게 되는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옆에서 이 사람들이 그렇게 가지 못하도록 말리거나 이 사람들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어떤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 이 사람들은 결국 이러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들의 인생의 수많은 만남이 이들을 이 결과로 인도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 순간 그들은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두 사람에게는 동일한 기회가 주어진 거예요. 지금까지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인생의 역전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그들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니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면 한번 구원해 봐라 비방하는 사람이 되었고, 또 한 사람은 그를 꾸짖으면서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성지 순례 뭐 이렇게 tv로 이렇게 영상으로 이렇게 볼 때 보니까요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그 땅이 아주 그렇게 큰 땅이 아니에요. 춘천만 해도 여러분 소문 빠르죠. 다 엮여 있어가지고 조금만 뭐 해도 소문이 확 이렇게 퍼지잖아요.
그런데 그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성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땅덩어리가 조그마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3년의 공생회를 지내는 동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그 지역에 아주 가득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십자가에 달린 이 두 사람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충분히 들었던 것이죠.
그런데 충분히 들었지만 한 사람은 비아냥거리며 조롱하는 사람으로 한 사람은 이 예수님과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상태에서 예수님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받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무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죄하십니다.
그것을 같이 십자가를 지면서 이 한 사람은 깨달은 거예요. 나는 죄 때문에 내가 이 형벌을 받지만 저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는데 저렇게 십자가에 죽으시는구나 자신과 예수님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한 사람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이 사람도요. 원래 처음부터 예수님을 그렇게 봤던 사람이 아니라는 거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사람들이 막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아놓고 막 조롱하고 욕할 때 양쪽에 매달린 두 강도가 똑같이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처음에 그런데 언제 이 사람의 마음이 변화가 일어났는지 우리가 명확히 그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34절에 보면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들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상태에서 예수님이 행동하는 행동, 예수님의 말들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죽어가는 그 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모욕하고 자기를 희롱하는 자들을 향하여서 원망이나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저들은 이 일을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오히려 그들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은요. 죽을 때가 되면 솔직해집니다. 죽을 때까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죽는 순간에는 그냥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거예요. 진실이 된 말을 하겠죠. 만약에 예수님이 가짜였다면 그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그 순간에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억울합니까?
끝까지 발버둥치고 나는 죄 지은 게 없다고.
나 죄 지은 거 없는데 너희들 나를 이렇게 했어 너희들 저주받아라
하고 아마 욕을 하고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고통 가운데서도 오히려 용서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 한쪽의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죠. 다른 분이에요. 진짜구나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그 예수라는 분에 대한 실체가 진짜였구나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아니 믿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예수님 믿는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이 자기가 생각해 놓은 자신의 경험 한계 속에 그것을 가둬놓고 자기의 생각 안에서 비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행동을 판단하며 비난합니다. 진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냥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만 보면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십자가상에서 선포하신 예수님의 용서의 메시지, 구원의 메시지, 사랑의 메시지를 우리 더욱더 깊이 묵상하고 발견하는 이번 한 주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십자가를 지면서도 사랑하시는 예수님, 저주하는 사람들까지도 용서하시는 예수님,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버티고 견디는 구원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예수님을 진짜로 만났을 때 우리는 이 은혜 받은 강도처럼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고백하는 고백으로 변화가 될 줄 믿습니다. 이미 우리는 은혜로 크루즈선에 탄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흔들릴 것이 없습니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맡겨놓고 누리십시오.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내 요구대로 안 된다고 흔들리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과정 속에 또 한 사람의 고백이 있었죠. 바로 백부장입니다. 이 일을 주관하는 백부장 그 백부장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는 그 모든 장면을 주관했던 사람 아닙니까?
근데 예수님이 딱 돌아가시는 그 순간 그의 입술에서 고백합니다. 마가복음 15장 39절 말씀에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지금 그 사형의 모든 집행을 주관하는 백부장이 예수님의 그 죽음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이 고백을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그래서 은혜라는 것입니다. 2명의 강도는 예수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알았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믿었고 한 사람은 끝까지 믿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아무리 많이 들어도 은혜가 없으면 그는 믿지 못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
아멘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았다고 하는 이 사실을 믿는다면 이거는 내가 뭔가를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참된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만나면 우리의 인생에는 역전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생이 허비된 것 같고 또 여러 가지 연약한 인생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인생이 새롭게 될 줄 믿습니다. 슬퍼하던 인생이 기쁨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낙담하고 우울한 인생이 용기와 희망으로 넘쳐나게 될 줄 믿습니다. 죽음 앞에 두려워하던 인생이 두려워하지 않고 소망으로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이미 크루즈선을 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구원자로 만나서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하는 확신의 믿음을 은혜로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향하여 니가 메시아면 우리를 구원해 봐라 조롱하고 있을 그때에 사람들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지금 이렇게 불의한 시대에 뭘 하시는 거야? 나쁜 놈들 좀 혼내주시지 아니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좀 병든 사람들 빨리빨리 낫게도 해주시고, 아니 병 안 걸리게도 해주시고, 또 하나님 살아계시면 내 자녀들의 진로의 문제도 좀 빨리빨리 해결해 주시고, 또 결혼 문제, 취업 문제 그런 거 문제되지 않게 좀 해결해 주시면 얼마나 좋아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아니 홍해 바다가 가르게 하시고 여리고성이 무너지게 하셨다는데 나의 삶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면 얼마나 좋아 그러면서 조롱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말들은요. 지극히 현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말들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신비한 경륜을 알지 못하는 그러한 연약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기준, 자기의 이익에 따라 하나님을 자기가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주인 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죠. 여러분 은혜받은 이 강도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십시오. 42절 말씀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한 사람은요. 자기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분이 구원자이구나라고 믿는 것까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이분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겠다고 하는 소망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있는 죄명을 보고 그는 그 겉모습으로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겠다고 하는 그러한 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면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공생애 기간 동안 내내 늘 어디를 가실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병자가 치유되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어떤 그런 기적의 역사만을 예수님의 행적으로 기억할 때가 많은데요. 주된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이도 예수님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십자가상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진짜구나라고 믿어지게 된 거예요. 그래서 내 힘으로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 당신이라면 내가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이런 고백을 드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죠. 한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믿음이 있었고요. 한 사람은 지금 죽음의 현장 속에서 끝까지 악을 바라는 그러한 삶으로 마감을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끝까지 자기가 중심적인 삶으로 자기가 왕이 된 삶으로 살아갔지만, 한 사람은 자기가 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온전히 고백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내가 주인 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주인으로 모신 삶을 살고 있습니까? 십자가상에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강구하는 이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아멘 이제 한 사람은 대박 난 겁니다. 마지막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을 얻었습니까?
여러분 주인됨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기록한 우리에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이 말씀들을 그냥 남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씀으로 기억하면서 이번 한 주간 다시금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하는데요.
우리 3개의 구절의 말씀을 읽을 겁니다. 사도행전 2장 21절 시작,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또 4장 12절 시작,
아멘 16장 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도 이 양쪽에 매달려 죽어가는 두 명의 강도처럼 우리의 인생도요. 분명히 끝날이 옵니다. 누가 더 빨리 끝날을 맞이할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자로 인생을 마감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누리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그 인생을 맞이하고 싶습니까? 오늘 세 가지를 기억하길 원합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다. 그 죄인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함을 받았다.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구원자이시다. 나의 구원자이시다. 세 번째, 그 예수님을 통해 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하나의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온전히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 세 가지 사실을 더욱더 깊이 누리고 이 은혜의 감격으로 이번 한 주간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