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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
마태복음 5:3-12
사람들의 언어와 행동은 그 마음속에서 나옵니다.
그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 하며 살아가는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원한과 살의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의 손에 들려진 칼은 흉기가 됩니다.
똑같은 칼이 요리사의 손에 들려지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는 도구가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4:23절 말씀을 보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지키며 살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 마음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 에 따라서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도 있고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는 왜 범죄 했습니까?
그 마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범죄하고 죄인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καρδια(카르디아) 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카르디아의 성경적인 의미는 생각, 의지, 판단, 동기, 양심, 욕망, 영적 방향 등을 다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통제하는 중앙통제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존재하는 장소가 어디인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님이 살았던 초대교회 당시의 사람들은 이 마음이 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중세에는 이 마음이 가슴 즉 심장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뇌에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근래의 의학이 발전하면서 도달한 결론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이론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차츰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성적인 생각이나 지능과는 다른 존재로서의 마음을 발견하면서 다시 마음의 위치에 대한 이론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은 느낌의 자리인데 어떤 사람은 머리로 느끼고, 어떤 사람은 가슴으로 느끼며, 어떤 사람은 배로 느끼며, 어떤 사람은 피부로 느낍니다. 마음은 감정이 우러나오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 역시 머리, 가슴, 배 등으로 나눠집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주로 어디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까?
마음이 머리에서 나오는 사람은 주로 냉정하고 이기적이며, 가슴에서 나오는 사람은 따뜻하고 이타적이며, 배에서 나오는 사람은 포용적이고 때로는 탐욕 적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어는 한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어떤 때는 가슴에서 나오고, 어떤 때는 머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좋고 나쁜 것들이 다 이 마음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믿음까지도 이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요한 마음을 노리는 마귀가 우리 곁에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며 철저한 전략을 세워서 역사합니다.
마귀는 우선 마음을 빼앗을 대상을 찾습니다.
마음이 깨끗하게 정돈되지 않은 사람 즉 갈팡질팡하는 사람을 우선 대상으로 삼습니다.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고 악한 것이 많이 들어있는 사람에게 접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귀가 사람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주인은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동의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 마음을 빼앗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우리 마음 상태와 우리가 처한 상황이 겹치게 될 때 우리에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행동하도록 하는 생각을 마음속에 불어넣습니다. 요한복음 13:2절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이때 사람들은 이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여깁니다. 그 생각에 마귀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알았더라면 마귀가 쉽게 마음을 빼앗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마귀는 유혹하는 자를 보내어 여자에게 접근해서 먼저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미스 김, 오늘 옷이 너무 잘 어울리네요”라고 말하든지 또는 “사모님, 참 아름다우시네요”라고 말하게 합니다.
자신과 별로 상관이 없는 낯선 남자가 아름답다고 하는 말이 도대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말에 솔깃해서 그 남자에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올무에 걸려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불행은 이 사소한 유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유혹되지 않았습니까?
처음에는 사소한 유혹으로 시작하지만 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는 범죄에 빠지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마귀의 사소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함으로써 끔찍한 범죄에 빠져 영혼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특정한 상황을 만날 때마다 마귀는 유혹합니다.
마귀의 유혹을 이기는 힘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 속에서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말씀,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말씀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선택의 갈림길에서 마치 우리의 생각처럼 위장하여 떠오르는 마귀가 주는 생각을 구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마귀의 유혹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영 분별의 능력이 아니며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에 기반합니다. 귀신의 공격은 영 분별의 능력으로 구분하지만, 마귀의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공격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자신의 생각을 불어넣습니다. 마귀가 주는 생각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대치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살면 마귀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어야 하고 또 올바르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귀의 역사를 이기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영적 전쟁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빼앗으려고 하는 마귀와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 사이에 끊임없이 벌어지는 싸움터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지키는 중요성에 대해 A.W Tozer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음을 지키고 마음의 경건을 유지하는 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는 항상 우리의 믿음을 해치려는 적들이 도사리고 있다가 그들은 우리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고 우리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분산시키려고 한다. 우리의 대적 들은 할 수만 있으면 우리 마음에 우리 환경 속에 역사하여 우리의 마음 안에 큰 파도와 풍랑을 일으키려고 할 것이다. 이런 세상 속을 살아가면서 내적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고 또 실재로 내적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다면 이보다 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의 방과 같습니다.
그 마음에 무엇을 담아 두느냐에 따라 그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들이 지내는 방에 밥상을 놓으면 식당이 됩니다. 책상을 갖다 놓으면 공부방이 되지요. 방석을 깔거나 소파를 갖다 놓으면 응접실이 되고 이불을 깔면 침실이 됩니다. 우리 마음의 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아 두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루는 전도자 무디가 설교를 하다가 손에 컵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컵에서 공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공기펌프로 공기를 빼면 된다.’라고 하기도 하고, ‘진공상태를 만들면 된다.’라고도 하며 여러 가지 방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때 무디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컵에서 공기를 빼어 진공상태가 되면 컵이 깨져 버립니다. 컵이 깨지지 않게 공기를 제거하는 방법은 이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공기 대신 다른 것을 컵 안에 채우면 됩니다."라고 하면서 주전자를 들고 컵에 물을 가득 채워 보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살려고 해도 그것이 작심삼일로 끝나고 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마음을 깨끗이 비우기는 했지만 그 마음 안에 다른 어떤 것을 대신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빈 마음에는 무엇을 채워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가지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 우리 마음 안에 가득 채우고 살기를 기뻐하시는 마음으로 채워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 안에 가득 채우고 살기를 원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가득 채우며 살기를 원하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첫째, 가난한 마음입니다.
기독교는 자기만족 자기 성취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종교입니다. 갈라디아서 5:24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체를 못 박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정욕을 못 박는 것은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정을 버리는 것이며, 탐심을 못 박는 것은 세상에 대해 집중케 하는 탐욕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죄악에 물들어 있는 자기를 버리고, 세상 정욕을 버리고, 탐욕을 버린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난한 마음은 빈 마음을 말합니다.
가난한 마음은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주장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낮아진 마음이요,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듣고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수용성이 있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가난한 마음을 기뻐하실까요?
그것은 기독교의 독특한 인간 이해에 근거합니다. 기독교의 인간 이해는 인간은 범죄하고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입니까? 범죄하고 타락한 본성을 내어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하고 성결한 새 마음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컵이나 그릇에 이미 무엇인가가 가득 들어 있다면, 그런 컵이나 그릇에는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그것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컵이나 그릇이 텅 비어있으면 그 비어있는 컵이나 그릇에 내가 원하는 것, 내게 필요로 하는 것을 채울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그 마음에 무엇인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부유한 마음에는 다른 것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유한 마음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가난한 마음은 다릅니다.
가난한 마음, 텅 비어있는 마음에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거룩하고 성결한 신의 성품을 채워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텅 비어있는 마음, 겸손한 마음, 가난한 마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둘째,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가난한 마음 빈 마음에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은혜로 선물로 하나님의 마음을 채워주시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그 마음 안에 채워지게 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 변화는 그 채워주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는 눈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눈으로 자기의 죄악 된 모습을 보게 되면 따라오는 것이 바로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애통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눈으로 내 안에 있는 죄악 된 것을 보게 될 때 가지게 되는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된 그 죄악 된 마음을 버리고자 열망하지만, 죄악들이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것을 인하여 통곡하고 울부짖는 것이 바로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마음은 사람들을 ‘눈물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전에 믿음 없이 살 때는 죄악들이 사실 달콤했었습니다.
그때는 죄악들이 오히려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요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죄와 악을 은밀히 즐기는 삶을 살았었습니다.
그때에는 죄가 가져다주는 감각적인 쾌감을 느끼고 싶어 하고, 또 그런 쾌락을 사모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난하고 빈 마음에 하나님이 은혜로 신의 성품을 부어주실 때, 우리는 죄와 악을 아파하는 애통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을 보며 애통하고, 가족의 죄를 보며 애통하고, 가정이 깨어지고 그래서 아직 철도 들지 않은 청소년들이 죄와 악으로 빠져들어 가는 모습을 보며 애통하고, 이기적인 탐욕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포기한 사람들을 보며 애통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행되고 있는 죄악들을 보며 애통하고, 나라와 민족의 삶 속에서 만연 되어 있는 죄악들을 보면서 애통해하고, 세상 부귀영화 때문에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망적인 미래를 내다보면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두 번째 마음은 죄와 싸우게 하며 죄와 투쟁하며 살게 하는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셋째, 온유한 마음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과 같은 내면적인 성품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은 순수한 내면적인 성품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이 가난한 마음을 가졌는지, 죄를 애통해하는 마음을 가졌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은 다릅니다.
온유한 마음도 내면적인 성품이지만 이 온유한 마음은 다른 사람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그 살아가는 삶의 태도 속에서 나타나고 드러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은유와 하나님의 성품인 온유가 있습니다.
그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온유는 한계가 있는 온유입니다. 그래서 어느 수준까지는 온유할 수 있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면 온유함도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유는 한계가 없는 온유입니다.
요한복음 13:1절 말씀을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는 사랑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유에서도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사랑을 해도 제한적이고, 능력도 제한적이고, 모든 것이 다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가지신 모든 것들이 다 영원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해도 영원한 사랑을 하시고, 참으셔서 영원히 참으시고, 온유하심도 영원하신 것입니다.
온유함에는 헬라어 ‘프라에이스’라는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이 단어가 사물과 관련되어 쓰일 때는 ‘온화한’으로 사용되고 있고, 동물과 관련되어 쓰일 때는 ‘길들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사람과 관련되어 쓰일 때는 ‘친절한’으로 사용되고 있고, 우리의 행동이나 감정과 관련되어 쓰일 때는 ‘관대한’으로 쓰이고 있으며, 하나님과 관련해서 쓰일 때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기는 ‘순종함’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9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마음이 온유하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배우라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 ‘배우다’라는 말은 헬라어 ‘만다노’입니다.
이 말은 ‘발견하고’ ‘익숙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발견하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온유한 마음을 주셨음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신 온유한 마음이 내 마음처럼 익숙하게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마음이 자라고 열매를 맺고 결실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온유를 갈라디아서에서는 성령의 열매라고 한 것입니다.
이 온유한 마음은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주신 성령의 열매입니다.
열매라는 말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로 주신 이 온유한 마음이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물로 받은 이 온유한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늘 애쓰고 힘쓰며 살아가는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도 우리 내면적인 성품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마음에 대한 대표적인 두 견해가 있어 왔습니다.
첫 번째 견해는 이의(義)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의라는 견해입니다.
이런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치 공자와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다가 믿음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 견해는 하나님의 의(義)라는 견해입니다.
이런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주신 말씀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 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의’를 목말라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얻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칭의입니다. 칭의는 그 죄를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화입니다.
성화는 그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들, 그래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그 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영화입니다.
영화는 이렇게 예수 믿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때 덧입게 될 영화로움을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들도 그렇게 완전한 의와 거룩함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에 주시고 목말라 하는 마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금 이런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부귀영화에 목말라하지만, 예수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복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마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자기 안에는 내 세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살아가는 삶을 통해 드러내고 나타내 보이며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긍휼은 무엇입니까?
이 긍휼을 한자어로 보면 ‘긍(矜)’자는 ‘창 모(矛)’자에 ‘지금 금(今)’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긍’자는 창을 들고 지금이라도 찌르려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휼(恤)’자는 ‘마음 심(心)’변에 ‘피 혈(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손에 창을 들고 찌르려는 순간이지만, 그 창으로 남을 찔러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창으로 먼저 내 자신을 찔러 내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의 참 의미입니다.
탈무드를 보면,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시켜서 이웃집에 가서 낫을 빌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낫을 빌리려 간 아들에게 그 이웃집 사람이 ‘낫을 빌려 줄 수 없다’라고 하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상황이 바뀌어서 그 이웃집 사람이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낫을 빌려주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저 사람들은 우리에게 낫을 빌려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빌려주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 줄 수 없다는 것은 복수이다. 저 집에서는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와 같지 않다’라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증오이다. 그렇지만 저 집에서 거절당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낫이 필요하니까 빌려준다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은 긍휼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짧아서 7.80년을 살면 죽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지인들에게 초상이 많이 일어납니다. 초상은 상호 부조 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초상집에 가주면 상대방도 우리 집 초상에 와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우리 초상 때는 한 번도 얼굴을 비치거나 부조하지 않던 사람이 부고장을 보내 줍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될 수 있으면 내가 아는 사람들을 섬기려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 받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전에 개척교회를 하며 어려울 때, 모든 지출이 사모를 통해서 나가야 할 때, 사모는 우리 부모님 때 참석한 사람들에게만 마음을 표현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모가 가정 대소사의 재정을 지출했기에 마음으로는 함께 하고 싶었지만 성의를 표시하지 못한 경우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제 은퇴하고 나니까 좀 자유로워졌습니다.
어렵기는 전이나 이제나 마찬가지이지만 상대가 어떻게 했든지 누구이든지 관계 없이 부고장을 보내오면 긍휼의 마음으로 적은 정성은 표현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긍휼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역의 기초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역은 긍휼한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누가 긍휼히 여기고, 누가 그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보다 같은 유대인이고 또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더 긍휼히 여길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라 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모든 삶과 우리의 모든 사역의 기초가 바로 긍휼이어야 하며 긍휼한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복음을 전합니까?
그 이유는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서 멸망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한 마음에서 전도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론 긍휼의 마음이 없이 전도에 열심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한 사람의 성도가 늘어나면 그만큼 헌금도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세상 사람들이 자기 사업을 하듯이 그렇게 전도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을 보면 바울은 사람들이 어떻게 전도할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이 얼마나 복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고 있는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전도뿐 아닙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목회자가 왜 설교를 합니까? 내가 배운 그 많은 학력, 내가 가진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난 지적 능력과 통찰력을 드러내고 나타내기 위해서 설교합니까?
아닙니다.
혹 이런 목적을 가진 사람들은 지적으로 뛰어난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도 사실은 그 기본에 긍휼의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떤 설교를 하게 되겠습니까? 설교자는 내 지적 능력을 드러내려고 설교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보다는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겪고 있고, 고민하고 있고, 갈등하고 있을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해답을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설교하고, 성도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고, 신앙의 삶에 유익을 주기 위해 설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일 학교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같습니다.
이것은 목회자를 위해, 교회를 위해, 다른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든 사역의 동기는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목적 다른 의도에서 하게 되는 일들은 바람직한 사역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여섯째, 청결한 마음입니다.
이상의 살핌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그 마음을 고치는 것이 참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능력이 있고 나름대로의 자랑거리가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그 마음을 고쳐먹지 못한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마음을 바꾸는 것이 복’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들도 있고 실패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에 복이 달려있지 않고 마음이 바뀌는데 복이 달려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도 그 성공을 통해 마음이 바뀌면 복된 사람이 되고,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도 그 실패를 통해 마음이 바뀌게 되면 복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들이 가진 마음에 대해 이렇게 서로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너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없다.’ 라고도 하셨으며, 율법의 정신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한 율법사에게는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깝다.’라고 정반대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의 자세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 나라에서 먼 사람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과 잘못된 믿음이 어떻게 구분됩니까?
바른 믿음의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 앞에 자신을 세우며 살고 또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기 때문에 늘 그 죄를 애통해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아니고,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섬기며 사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아비 사단을 따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의와 불법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몸을 씻지 않고 진한 향수를 뿌리고 다니면서, 마치 그 향수가 진리라도 되는 양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삶에 회개가 없고, 말씀을 읽어도 찔림이 없고, 하나님 앞에 서서도 별 잘못이 없게 느껴지는 사람들은 이미 그 영혼이 심각하게 병이 든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고, 하나님과 함께 살지 않아도 별문제가 없는 사람들, 내 입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와 가족과 이웃과 사람들을 향한 감사와 긍휼이 메마른 사람들은 이미 그 신앙에 위기가 오고 그 심령에 심각한 병이 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엇보다 그 심령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치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성령이 주시는 부드러운 마음 가지길 소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받기를 열망하며, 그 마음이 청결해질 때까지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청결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을 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일곱째, 화평케 하는 마음입니다.
9절에 나오는 화평에는 '에이레네'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평화’(살롬), ‘복지,’ ‘안녕’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화평을 말할 때, 세 가지로 구분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화평이며, 둘째는 우리 심령 안에서의 화평이며, 셋째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화평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마태복음 5: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화평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타나게 되는 화평’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9절 말씀의 ‘화평하게 하는 자’는 ‘화평케 하는 삶을 사는 자’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주신 직분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8-19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화목의 직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불화하고 원수 맺기를 잘하는 세상 속에서의 우리가 화목의 직분을 감당하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화목의 직분을 이루는 삶을 살려고 하면 희생이 필요합니다. 희생이 없이는 화목을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그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듯이, 사람들 사이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누군가 기도에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 가족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 누군가 죄인을 위해 울어주며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웃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화목 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자기를 주장을 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대립과 반목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화목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럴 때 화목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잘 이해하고 있어야 화목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절망도 잘 알고 계셨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 시켜주시는 중보자가 될 수 있으셨습니다.
이상의 살핌을 통해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고 할 때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내적인 화목을 이룬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화평케 하고자 하는 사람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화목의 직분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정도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이제 그 삶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보고 ‘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야.’라고 인정해 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자신을 닮은 이런 사람들을 보고 ‘그는 나의 아들이야.’라고 인정해 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단계까지 이르게 되면 하나님 아들의 권세가 그 삶 속에서 나타나고 사단도 더 이상 어찌하지 못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 화평케 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이 마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여덟 번째, 의를 위하여서라면 박해까지 감수하는 마음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높은 차원의 삶이든지, 하나님께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내 아들’이라 일컬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박해’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감수하고자 하는 이 마음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마음입니다. 아멘입니까?
이 단계에 이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순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을 보면 메시야 왕국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될 사람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영화 ‘쿼바디스’를 보면 로마에서 극한 박해가 일어나서 바울도 죽고 기독교 지도자들이 하나 둘 다 죽어갈 때, 성도들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 사도라도 남아서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 라고 하면서 순교를 피해 피신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베드로도 그 말을 좋게 여겨서 로마를 빠져나와 도망하던 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내 백성을 버리고 떠나니 나는 다시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한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가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길을 가되,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베드로의 삶 속에서 ‘의를 위해 핍박을 감수하는’ 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런 차원 높은 삶을 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기독교사를 보아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드물기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할 수만 있으면 이런 영광의 자리, 순교의 자리에 우리도 설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순교할 수 있는 이 믿음을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도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두 대의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앰뷸런스였고, 다른 하나는 최신식 모델의 세단이었습니다. 이 두 차는 차선을 무시하고 마구 달리면서 다른 차를 추월하고 때로는 중앙선을 침범하여 위험스럽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저러다가 무슨 사고를 낼 것 같은 모습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이 위험한 두 대의 차량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엔진입니까? 차체의 모양입니까? 차의 값어치입니까? 아닙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 차를 원전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차는 생명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가진 운전사였고 또 다른 한 차는 술에 취해 객기를 부리는 운전사였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내 얼굴이, 내 몸이, 내 건강 상태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운전석에 무엇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가득 담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마음을 가득 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은 우리의 행동을 낳고, 우리의 행동은 결국 우리의 습관과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팔 복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여덟 가지 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 이 마음을 씨앗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복된 마음 주심을 감사하며 하나님이 주신 이 복된 마음에 물을 주고 돌보아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더욱 자리 가도록 하는 우리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삶 속에 믿음의 선한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으며 살아가는 거듭난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