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곡우절(4월 20일)에 전라남도 구례군에서는 남악제(南岳祭)가 열렸다. 남악이란 천자문화가 살아있을 때 국토의 남쪽에 자리 잡은 산(山)에 내린 위호(位號)이니 곧 지리산신의 벼슬이름이다. 몇 해 전까지 이 행사를‘지리산 약수제’라고 불렀다가 바로잡은 것이라 한다. 비록 지금 전통문화 운운하면 발붙이기 어려운 현실이지만, 제례를 올리는 위치에서는 형식적으로나마 최소한의 예의를 찾은 것 같아 무척 다행이다. 이번호에는 구례를 중심으로 지리산과 관련된 여러 지역을 찾아본다
‘화합의 땅’구례 가는 길 옛날 백제 조정에 견원지간(犬猿之間)인 두 정승이 있었다. 그 한 정승이 구례가 살만한 땅이란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산수를 벗 삼아 숨어살았다. 조정에 남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던 정승도 노년이 되자 지낼만한 곳을 찾아 길을 떠났다. 마침 날이 저물어 산 길 옆의 외딴집을 발견하고 행차를 멈추었다. 그런데 하룻밤 유숙하려고 주인을 찾고 보니 몇 년 전 원수처럼 지내던 바로 그 정승이 아닌가!
먼 길 지친 끝에 찾은 것이 원수처럼 지내던 사람이었으나 두 정승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집안으로 들어갔다. 구원(舊怨)은 다 잊어버리고 두 정승은 지난 세월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늦게 찾아온 정승은 먼저 자리 잡은 정승과 이곳에 살기로 하고 가져온 보화를 나누어 의좋게 살았다.
이 소식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이곳을 원수가 서로 예를 찾은 곳이라고 하여 구차례(求次禮)라 불렀다. ‘예를 구하는 곳, 구례(求禮)’로 이름이 바뀐 것은 통일신라 때다.
일행은 오전 10시 30분의 남악산제에 맞추기 위해서 아침 일찍 출발을 서둘렀다. 오늘따라 시계(視界)가 넓어 완연 상춘의 때다. 행사는 화엄사 경내에서 진행된다. 화엄사를 찾은 것은 이번이 초행은 아니지만 지리산신이 화엄사에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일행이 도착하니 이미 식은 시작되어 한창 독축이 진행되고 있었다. 위패에는‘지리산지신 신위(智異山之神神位)’를 모시고, 생쌀 소고기 돼지머리 닭고기 홍합 더덕 등이 날로 올려지고, 배 대추 은행 밤 등의 과일이 진설되었다. 축문 읽는 소리가 낭랑하다.
축문 그대로 지리산신은 삼신(三神)의 반열에 드는 지존의 위치로 혈식(血食)을 받고 있었다. 혈식이란 세월이 가도 그 위치가 변하지 않는 절대적 존재들(不遷位라고 한다)에게 음식을 익히지 않고 생것 그대로 올리는 것을 말한다. 사당(祠堂)에 모셔지는 분들을‘혈식천추’라고 칭하는 말은 이렇게 제례문화에서 파생 되었다.
지리산신이 봉작을 받은 역사 지리산신이 남악(南岳)의 호(號)를 받은 것은 신라시대부터이고, 고려 조선조에서도 그 지위가 계속 유지되어 왔다. 가장 최근은 1903년의 일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대한제국 광무(光武) 7년 3월 19일(양력)에‘다섯 방위의 큰 산, 진산, 바다, 큰 강을 봉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때 동악은 금강산, 서악은 묘향산, 북악은 백두산, 중악은 삼각산이고, 남악은 지리산이 봉해지고 있다. 이때는 곧 천자(天子)인 대한제국의 황제가 산천의 신들에게 봉작을 내리는 의식을 행한 것이다.
남악사 산신제 남악사 산신제는 매년 봄가을 그리고 정월 초하루에 언제나 임금께서 친히 향(香)을 내려 치제(致祭)를 하였다. 치제를 베풀 때에는 당상관(堂上官)으로써 헌관(獻官)을 삼고 수령(守令)을 대축(大祝)을 삼으며 집사(執事)는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 아니면 교생(校生)이 한다. 또한 모여서 제의를 도와주는 사람은 제생(諸生)들이 한다. 음식을 장만할 쌀은 관(官)으로부터 지급된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현종 9년(1668년) 9월 20일(병진)에 남원현감 이지행(李志行)이 남원지리산추례제(南原智異山秋例祭)에 헌관(獻官)으로 차출되고도 불참한 사실을 아뢰고 그를 파면하였다는 전라감사의 보고서가 남아있는 만큼, 남악사제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로 치러졌음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러던 중, 1908년 11월 12일1) 일제는 남악사를 폐지하였다『( 속수구례지』). 그 전해 대한제국의 군대를 경비절감의 이유로 해산하는 처지에 산신제 따위가 그들의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이로써 남악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지금의 남악사는 이를 안타깝게 여긴 구례 군민들이 뜻을 모아 1969년 화엄사 지장암 옆에 새로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매년 곡우절(穀雨節)을 기하여 군민의 날 행사와 함께‘지리산 남악제(智異山南岳祭)’라는 이름으로 제례를 올리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학자들이 산천신앙으로 기술하는 이 부분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원래 천자문화의 중요한 부분에 속한 것이다.
남악사 옛터를 찾아서 일행은 점심을 먹고 나서 옛 남악사 터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남악제 행사를 진행하던 구례군청 직원의 안내를 받고 떠난 길이었지만 막상 광의면 온당리 당동(堂洞) 마을에 도착하니 길을 찾기 어려웠다. 마침 노인회관에서 할머니 한분이 직접 안내해 주겠다며 차에 동승하셨다. 마을 뒤편 야트막한 언덕을 돌아가다 소나무와 대나무로 둘러싸인 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좁은 숲길을 몇 걸음 들어가니 조선시대 내내 지리산신을 모신 남악사 터가 눈에 들어온다. 1908년 폐사될 때까지 해마다 세 차례씩 임금이 향(香)과 축문을 보내오던 곳. 포근하고 아늑한 곳이다. 지리상으로는 지리대간의 서부맥인 간미봉(갈뫼봉, 艮美峰)을 주봉으로 간인방(艮寅方=동북방)으로 머리를 돌려 그 맥이 내려와서 임금 제(帝) 자 끝 부위에 맺힌 길지로 궁터(궁안)라고 부른다고 한다. 해방직후 이 사당 터에 한 사람이 몰래 묘를 쓰자 크게 가뭄이 들어 인근 주민들이 괭이 호미를 들고 묘를 파내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큰 비가 내려 그해 모내기를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후 지금까지 그 터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런 연고로 지금은 일대가 쑥밭이 되어 봄 쑥 향이 코를 진동한다. 노파는 우리에게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고 치성을 모시려는지 묻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에서 사방서 와요, 돼지도 잡고 소도 잡아와요.”폐사된 지 올해로 꼭 100년이지만 아직까지 이곳으로 사람들이 찾아와 치성을 올린다는 것이다. 화엄사에서는 개인 치성을 허락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지리산신 전라도로 귀양 온 사건 일행은 모두 지리산신의 치마폭에나 휩싸인 듯 아늑한 이곳 빈 터 마당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지리산신이 여신(女神)이라는 이야기. 해발 1,728m의 거봉(巨峰) 반야봉은 여자 엉덩이 형상을 하고 있고, 그 남쪽에 있는 노고단(1,507m)은 음부 형상이라는 등. 그런데 지리산은 전라남도(구례군), 전라북도(남원군), 경상남도(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등 3도 5군에 걸쳐있고, 80%가 경상도에 있으며 제일 높은 천왕봉 역시 경상도 땅에 눌러 있는데 왜 이곳 구례 땅에 사당이 있을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이성계는 창업 당시 팔도강산을 다니며 산신제를 올렸다. 이 때 남해(경남 남해) 금산 산신이 이성계를 크게 환영하였기에 나중에 비단 금(錦) 자의 금산(錦山)이 되었고 덕유산 산신령도 찬성하고 진안 마령에서 마이산 산신도 찬성하였으나, 지리산 산신은 응하지 않았다. 위패가 돌아앉고 소지(燒紙)도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때는 고려 말 왜구가 지리산 자락 인월(引月)을 거쳐 남원으로 들어올 때, 이성계 장군이 왜장아지발도(阿只拔都)를 죽이고 왜구를 섬멸한 황산대첩 이후였다. 기도드린 장소는 운봉에서 삼십리 거리인 성수산(聖壽山)이라고도 하고, 여원재 지나 운봉 권포고남산(古南山)이라고도 알려진다.
어쨌거나 지리산 산신령에게 외면 당한 이성계는 대권을 잡고 나서 당시 노고단에 있던 남악사를 이곳 구례 땅2)에 옮겨 지리산신을 귀양 보냈다는 것이다.
상제님이 이곳에 오신 때 상제님께서 지리산 산제당에서 지리산신에게 제를 지낸 것은 1904년 봄의 일이다. 1904년 1월 15일에는 장효순의 난이 있었다. 이때 가족들은 모두 피신한 상태였다. 상제님은 김형렬 성도와 더불어 운봉을 갔었다고 김호연 성도는 기억하였다. 남원 운봉 여원(女院)재 산록에도 산제당이 있었다고 하니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곳이라면 주변에 국립종축장이 있고 과거 산양을 방목하였는데 지금은 철쭉군락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산양이 독이 있는 철쭉은 먹지 못하고 나머지 풀은 모조리 청소해 주었기 때문이란다. 또 당시에는 근방에 쟁기절이라는 매우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땡중이 한 명 있어 지나가는 사람 머리에 칡을 감고 물을 붓는 등 행패가 보통 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도사의 도력에 의해 절이 망하게 되었다고 구전되어 온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시대가 상제님 계실 적이니 이 지역에서의 상제님 행적을 추정해 볼 따름이다.
상제님은 산제당에서 종이로 바가지를 만들어 쓰시고, 솥단지도 만들어 솥 둘레에 흙을 발라서 걸어놓고 밥을 하셨다. 제를 지내실 때는 생조기를 종이 위에 놓고 지내셨다. (道典3:78)
지리산신은 그동안 나라가 선 이후 숱한 음식공양을 받았을 것이고, 풍악소리도 들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렇게 상제님께서 친히 치성용 솥을 만들고 밥을 지어 메를 올리는 황송한 제를 받은 적이 있었을까? 더욱이 생조기를 준비해 오셨다는 점이다. 필자는 그동안 누군가로부터 산신은 비린 것을 싫어하여 산신제에는 물고기는 쓰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보면서 의식이 확 바뀌어 버렸다. 상제님이 지리산신 치성에 생조기를 사용하셨다.
지리산신을 생각한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지리산신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지리산은 산 이름도 많다. 어리석은 사람도 그곳에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智理山을 비롯하여, 地理, 智異, 地利, 智利, 頭流, 頭留, 南岳, 方丈등이다.
또 그만큼 산신에 대한 설도 분분하다. 신라 때에는 창업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를, 고려에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가 본래 지리산 신이라고 하였다. 또 노고단(老姑壇)은 이름 자체가‘늙은 시어미 제사터’로서 최초의 인간을 탄생시킨 마고(麻姑)할미3)의 무조(巫祖)전설이 있는가 하면, 석가모니의 어머니‘마야부인’설도 있다. 그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리다고 할 수도 없다. 신도(神道) 세계를 안다면 천자문화의 속성상 왕조가 바뀌면 신도도 전면 개편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한편『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은 지리산이‘태을성신’이 사는 곳이며,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하였다. 정말로 절묘한 표현이다. 이는 지리산의 과거와 미래를 하나로 묶어서 말했기 때문이다. 이를 좀 더 살펴보기 위해서는 후천이 오는 소식을 담은〈춘산채지가〉한 구절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여기 더 이상 불복산과 같은 갈등의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때는 바야흐로 남조선배가 저 태평양 험한 파도를 헤치고 피안의 세계로 노저어가는 시기이다. 동남풍 운수 받고 봉황이 오동나무에 둥지 틀면 죽실(竹實)4)을 빨갛게 익히는 상서로운 바람이 분다. 하늘의 삼태성과도 함께하는 일이니 어찌 용봉을 따르는 큰 일꾼들이 다 나서지 않으리오?
백두산이 머리라면 지리산(頭留山)5)은 엉덩이요 음부요 자궁(子宮)이다. 태을은 전쟁도 없고, 질병도 없고, 죽음도 없는 생명을 잉태하는 근원 자리를 말한다. 아직 지리산이 이런 역할을 한 적이 없지 않은가. 지리산에 태을성신이 산다는 것은 결국 지리산이 후천선경 건설에 큰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중환 같은 지리(地理)의 대가가 유독 지리산에 이같은 화두를 걸어놓은 이유는 바로 후천을 전제로 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어디를 가든 상제님의 다음 말씀으로 모든 것이 귀결됨을 깨닫게 된다.
‘산하대운(山河大運)이 진귀차도(盡歸此道)라.’6)(道典4:19:7)
노고단에 오르다 일행은 남악사지를 떠나 지리산 종주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노고단을 향하였다. 구비 돌며 바라볼수록 거대하고 어머니 품과 같은 산세, 때늦은 왕벗꽃이 점점이 있고, 곳곳에 진달래도 자태를 뽐낸다. 굳이 산세를 볼 줄 몰라도 좋다. 성지 이상의 역사적 깊이가 모든 사람을 품에 안는다. 누구나 보는 사람끼리 기룹은 표정으로 반긴다. 할머니 품이 그러하듯 누구나 아이가 된다.
무조(巫祖) 할머니가 계신 곳. 추호의 거짓이 통할쏘냐. 그러나 또한 우리 영혼의 가시를 모두 뽑아주고 순화시키는 곳. 새 사람으로 만드는 곳. 그곳 노고단에서 우리의 순례는 끝을 맺었다.
1) 이 지역의 언론인이자 한말의 애국자인 매천 황현은「매천야록」에서 1909년 1월에 남악사가 폐지되었다고 기록하였는데, 음력과 양력의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차이가 나는 관계로 더 세밀한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 2) 처음에는 갈뫼봉 북쪽 내산면 당동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광의면 당동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3) 마고할미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에 살고 있다고 하는 인류 최초의 인간을 탄생시킨 여신으로서 그가 살고 있는 곳을 마고성(麻姑城)이라 했는데 이곳은 지상 최고의 낙원이라고 한다. 4) 봉황이 먹는다는 대나무 열매 5) 백두산이 흘러와 멈추었다는 의미 6) 산하(山河)의 대운이 다하여 우리 도에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