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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혜화문(동소문).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혜화문 바로 앞에 민가가 있고 그 앞에 흰둥개가 묶여있다. 조선시대 개는 흔한 가축이자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육류였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임금의 수라에는 늘 산해진미가 올라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임금도 국상 중에는 육식을 경계했다. 단명한 조선 제12대 인종(재위 1544~1545·1515~1545)은 그 정도가 심했다.
율곡 이이(1536~1584)가 쓴 <석담일기>는 "(인종이) 지나치게 채식을 고집해 피부로 뼈가 드러날 만큼 야위었다. 중국 사신이 왕의 몰골을 보고 육식을 해야 한다고 권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종은 특히 아버지의 병간호에 전념하느라 건강을 크게 해쳤다. 중종실록은 "20여일동안 수라를 들지 않았고 물도 5일간 입에 대지 않았다"고 적고있다. 인종은 아버지가 승하한지 5일뒤인 1544년 음력 11월 20일 즉위해 결국 이듬해 음력 7월 1일 죽었다.
반면 주색을 즐겼던 조선 제9대 성종(재위 1469∼1494·1457~1494)은 국상동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다시 고기를 입에 댔다. 그러면서 "채식은 과연 어려운 일"이라며 "나는 고기를 먹겠다.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으로 장례에 정성을 다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변명했다고 <석담일기>는 전한다.
먹는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음식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다를 바 없겠지만 그 문화는 시대별, 지역별 천차만별이다. 세태를 이해하려면 음식문화를 알아야 한다. 다양한 고전은 식문화도 놓치지 않는다.
사진2. 긁는개. 김두량.
<산림경제>는 개고기 중에서는 누런 개가 몸에 좋다고 전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사람들은 소고기에 열광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즐겼던 음식이 있다. 바로 개고기였다. 조선시대 개고기는 모든 계층에서 즐겼다. 궁중 수라상의 단골메뉴에 구증(狗烝·개찜)이 들어가 있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스스로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저술한 <활인심방>에서 무술주(戊戌酒)를 8대 보양음식으로 꼽았다. 무술주는 개를 통째로 여러 한약재와 함께 고아낸 개소주다.
17세기 양반가 조리법을 설명한 <음식디미방>에는 순대, 개장꼬지 누르미, 개장국 누르미, 개장찜 등 다양한 요리법과 함께 누렁개 삶는 법, 개장 고는 법 등이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향약집성방>(1433), <본초강목>(1578), <동의보감>(1611), <산림경제>(1715), <해동농서>(1799), <규합총서>(1815), <임원십육지>(1827), <동국세시기>(1849) 등 무수한 책에서 개요리를 다룬다.
중종 때 간신인 김안로는 개고기를 뇌물로 받았다. 1534년(중종 29) 실록은
"김안로는 개고기를 좋아하니 이팽수가 늘 크고 살진 개를 골라 사다가 바쳤다. 어느날 갑자기 이팽수가 청반(淸班·승정원 주서)에 올랐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가장주서(家獐注書·개고기 주서)라고 불렀다"고 소개한다.
사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개고기를 선호하지 않았다. 불교의 영향이었다. 불교는 살생 자체를 금지하지만 환생설화 등에 따라 개는 식용을 극도로 금기시한다.
개 식용은 조선에 와서 비로소 보편화된다. 개고기 애호가였던 공자의 영향이다. 논어엔 "제사에는 반드시 개고기를 쓴다"고 기록돼 있다. 성리학을 숭배하면서 유학자들도 공자를 따라 개고기에 빠져든다.
개고기 중에서는 누런 개가 우리몸을 보호하며 검은 것은 누런 개에 못 미친다고 실학자 홍만선(1643∼1715)의 <산림경제>는 전한다.
<산림경제>는 '호견(糊犬)'이라는 독특한 요리법도 소개한다. 개 한 마리를 잡아 깨끗이 씻어 뼈를 발라내고 소금과 술, 식초, 양념을 적당히 쳐 고루 섞은 뒤 동아(박과의 식물) 속에 넣는다. 김이 새지 않게 동아를 잘 밀봉해 겨를 태운 불 속에 하루를 재우면 된다고 설명한다.
개는 그저 식용일 뿐이던 그런 시대에 개를 애지중지 키우던 사람도 있었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1814∼
1888)의 <임하필기>는 판서 조상진의 유별난 개사랑을 언급한다.
<임하필기>에 의하면 조상진은 개가 병이 나자 대궐의 의원을 불렀다. 조상진의 부름을 받고 온 의원은 개를 보고 기가 막혔다. 그는 "대감, 저는 어의요"라고 하자 조상진은 공손히 의원을 돌려보냈다.
그 개가 통통하게 살이 찌자 조상진은 주위에 자랑하고 다녔다. 누군가 그런 그를 두고 "복날이 머지않았으니 안타깝소"라고 농담을 걸자 조상진은 "늙은이가 아끼는 것에 대해 무슨 말이 그렇게 경박한가"라고 버럭 화를 냈다.
사진3. 신선과 사슴.
<산림경제>도 여러 고기 중 사슴고기를 최고로 쳤다. 사슴은 신령한 풀을 먹어 다른 육류와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육류 중에서는 맛은 사슴류가 제일 탁월하다. 캐나다인들은 무스(큰 사슴) 고기를 좋아하는 것을 잘알려져 있다.
<산림경제>도 여러 고기 중 사슴고기를 최고로 쳤다. 사슴은 신령한 풀을 먹어 다른 육류와는 다르다고 했다.
사슴고기를 요리하는 방법은 구이와 곰탕, 국, 포 등 여느 육류의 조리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슴의 혀와 꼬리는 곰탕 재료로, 꼬리는 주로 절임용으로 썼다.
곤충도 훌륭한 음식이었다. 실학자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은
"참새, 종달새와 함께 매미와 벌을 임금에게 진상하며 개미알과 메뚜기 새끼 등은 잔칫상에 올린다. 이 중 개미집 속에 흰 좁쌀처럼 생긴 개미알은 매우 작아서 모으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어 "메뚜기는 떼를 지어 날아다니며 벼싹을 파먹는데 우리나라 메뚜기는 벼의 싹과 잎을 파먹기는 해도 재앙은 되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앙엽기>는 아몬드가 18세기 조선시대에 존재했다고 말한다. 아몬드는 밤이나 도토리 같은 견과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복숭아나 자두 같은 핵과에 속한다.
다음은 <앙엽기>의 한 대목이다.
"교서관(숭의여대 자리에 있던 인쇄 기관) 숙직실에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동쪽 담장 아래에 심어져 있었다. 그 복숭아나무에 납작한 열매가 맺었는데 '구수시', 우리말로는 '또애감'이다. 사람들이 '감복숭아'라고만 할 뿐 다른 나라에서 진품으로 여기는 줄은 알지 못한다.
당나라 단성식이 지은 '유양잡조'에 따르면
'편도는 파사국(페르시아)이 원산지다. 파담수(婆淡樹) 열매라고 부르며 복숭아와 비슷하나 형상이 납작하다. 서역의 여러 나라가 모두 편도를 보배로 여긴다'고 돼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 전래는 됐지만 귀한 대접은 받지 못했던 모양이다.
오늘날 흔해진 땅콩은 아몬드보다 늦게 들어왔다. 이덕무는 땅콩을 중국에서 처음 먹어보고 참깨 맛이 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앙엽기>의 내용이다.
"낙화생은 형체가 누에 같으면서 몸뚱이가 옹크려져 있다. 허리는 묶은 듯이 오목하고 빛깔은 말린 생강 같다. … (중략) … 알맹이는 번데기 같으며 자색 꺼풀이 감싸고 있으며 꺼풀을 벗기면 말갛게 희고 맛은 참깨 같다. … (중략) … 정조 2년(1778) 내가 연경에 갔다가 이조원(청나라 문인)의 종제 이기원을 만나서 그것을 심고 기르는 법을 자세히 들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45.조선시대 임금 수라상 단골메뉴는 개고기찜 [식문화2]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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