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부 스승의 부름/9 ]
"허준의 행적을 왜 제 입에서 듣자
하시 오니까?"
"묻는 말부터 대답하지 못하느냐?
아느냐 모르느냐를 묻고 있는 게다.!"
"조금은 아오 ..."
쩌렁 유의태의 성난 목소리가 그 말을
덮었다.
"아는 대로 말해!"
도지의 입가에 조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네 이놈!"
"할 까닭이 없소!
난 허준 따위에겐 아무 정도 품지
않았은즉!"
"해라!"
돌연,
도지가 가로막는 어머니를 밀어내고
마주 고함쳤다.
"이미 다 들은 눈친데,
굳이 내 입에서 듣자는 건 무슨 심술
이오니까?"
유의태의 손이 탕 서탁을 쳤고,
그 손에 움켜잡힌 벼루가 먹물째 아들의
면상에 날았다.
벼루의 먹물이 일어서는 도지의 가슴에서 검게 무늬지어 흐르기 시작했다.
소스라친 오씨가 아들을 가로막고,
"미쳤소!"
하고,
남편에게 소리쳤고 도지가 어머니를
밀치고 아비의 앞으로 나섰다.
먹물이 그 얼굴에 검은 핏방울 처럼
흘러내렸다.
그 씩씩거리는 아들에게,
"못난 놈!"
하고 유의태가 내뱉었다.
"무어라고요?"
"천하에 못난 놈!"
또 한번 내뱉으며,
그 아비의 손가락이 창날처럼 아들의 눈을 향해 뻗었다.
"못나고 못난 놈!
그걸 모르고.. 그걸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장구 치고 북울리며 나는 등제를 했음네!"
"하나 만일,
서방님이 허준이와 함께 그 버드네란 곳에 갔다면 보나마나 낙방올시다."
유의태의 손가락이 변명하고 나서는
임오근의 눈을 향했다.
"네놈도 나가거라. 꼴도 보기 싫은즉!"
"..."
"대체 허준이 허준이, 허준이가 무엇이오?"
오씨가 분해서 소리쳤으나,
유의태의 눈은 자식에게 박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감정을 삭인 얼음장같은 어조로
말을 뱉기 시작했다.
"의원은 영달하는 길이 아니니라,
의원은 돈 버는 길이 아니니라.
영달을 꿈꾼다면 중국말 열심히 배워
역관이라도 될 것이요!
돈 버는게 소원이거든 장사꾼으로 풀릴 일.
의원은 병자를 보살피는 게 소임이다.
그것이 첫번째 소임이요!
둘째도 세째도 의원의 소임은 그것뿐!"
그 서탁을 움켜잡은 유의태의 손이 다시 경련했다.
"한데,
한쪽에선 가던길도 멈추고,
왔던길을 되돌아가 병자를 보살피는데
유의태의 아들이,
바로 내 자식이 병자는 뒷전이요!
오로지 한양 갈 길만 재촉해?"
"..."
"그것이 아비의 훈도에 대한
네 대답이었더냐 그 말이다!"
"..."
"그래서 따낸 첩지!
그게 그토록 자랑스럽더냐?
울고 불고 소리쳐 부르는 병자들을
못본 체 외면한 의원이 첩지만 따냈대서
대단한 의원이란 말이냐!"
"대체 어느놈이 다 지난일에 이런
이간질을 놓는게요?"
오씨가 안광익과 김민세를 싸잡아보며
말머리를 바꾸려 했으나,
유의태는 또 한번 도지를 향해 손가락질을 뻗어왔다.
"너는 졌더니라.
네가 비록 내의원에 적을 두게 되었다만,
너는 허준에게 졌더니라.
못나고 못난 놈!
행여나 집안의 의업을 너에게 맡긴다
기대를 했거늘...
태어난 품성이 이토록 다르니,
너는 마침내 허준에게 미치지 못하리로다!"
"무엇이 어째요?
대체 그 뜨내기놈이 영감한테 항차
무엇이기에 말끝마다 그깟놈에게 빗대어
자식을 비방한단 말이오!
그놈이 당신의 살붙이요 피붙이요!"
김민세와 안광익의 도전을 기다리던
오씨가 유의태에게 손짓해 달려들자,
돌연 도지가 먹물이 핀 가슴에서 첩지를
꺼내들고 일어섰다.
"아버님 말씀이 일견 옳은 듯하오나,
분명히 말씀 드리오나 아버님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
"이 첩지는 당신도 못 따낸 것을 내가
따낸 것이오!"
아들의 입에서 당신이란,
냉혹한 말이 나왔건만,
유의태는 이미 미동도 않은 채
마치 타인이나 보듯 아들을 향한 눈이
차가웠다.
"여기엔 당신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이 써 있소!
이 첩지만 있으면 평생 의원으로서의
자격이 팔도 방방곡곡 어딜 가나 인정되는 바요.
나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암, 그것으로 족해야지.
더 이상 바랐다간 제 분수에 맞지도 않는 복이니.
세상의 조롱거리로 끝날 것인즉슨...."
"아니, 고생. 고생.
그 고생 끝에 성공해온 제 자식에게 애썼다 칭찬은 커녕 악담을 하시꼬!."
"악담도 귀담아 들으면 약이오!"
"무엇이 어째요!"
"나가 있지 못하는가!"
"그리구 말이야...
바른 말로 의원은 무슨 흙 파먹고
산답디까!
침 놓아주고 대가 받는 건 응당한 보순게구 그만한 보수도 없어 뵈던 것들이오.
제 갈 길 바쁜 사람 ..."
"흙 파먹을 때 흙 파먹더라도 봐줘야 할
병자는 봐줘야 해.
그게 의원이랄밖에 ..."
"난 후회하지 않소!."
씨근덕거리는 어머니를 밀치고 도지가
다시 소리쳤다.
그 아들을 유의태가 연민을 담아 건너
보았다.
눈이 충혈되어 붉었다.
눈물 같았다.
"내의원, 암!
그 경쟁 뚫고 들어간 곳이니 어찌
자랑스러운 곳이 아니리.
하나 과연,
네가 내의원의 진짜 모습을 아느냐?"
"...?"
"천하에 내노라 하는 의원들만 모인 곳이 그곳이다.
침술의 재주도 약 짓는 재주도,
조선 팔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술들만 모여서 내의원이다."
"...?"
"특히,
그 내의원의 어의 양예수가 누구며 ,
상약 이봉정, 침의 김윤헌, 그밖에 남응명, 정희생, 박춘무, 김영국...."
"날 걱정하여 하시는 말론 들리지 않소!"
"너는 아직 익지 않은 감이다.
고작 그 첩지 하나로 자만하고서야
어찌 더 높이 날 수 있으랴..."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는
내의원 높은담을 넙지 못한채 왜
떨어졌습니까?
하나 나는 거뜬히 넘었소,
새삼 내게 시기할 것은 없다 그 말올시다."
더 눈을 뜨지 않는 아버지에게 도지가
소리쳤다.
"아버지가 감취놓은 비방을 돌려
주십시오."
"비방?"
"어차피 이젠 아버지의 슬하를 떠나
한양 살림을 해야 할 것이오.
새삼 가르침을 받으러 한양 산음 간을
오르내릴 수 없으니 내주시지요."
"암,
그건 네가 가져가야 하고 말고....
허준... 허준...
그 허준한테 간까지 빼줄 사람인데,
네가 그걸 미리 차지해야 해...."
"어서 내주시오!"
"..."
"어디다 감추었나 모르나,
그것만은 기어이 가져가야 겠습니다."
"감춘 적 없다. 떼어 가거라"
"떼어가다니?"
"내 비방은 내 머릿속에 들었으니
내 머리를 떼어가는 수밖에!"
"무어라고요?!"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자가
어찌 비방을 얻을 수 있단 말이냐?
스스로 체험하지 않고서야 무엇이
비방이 될지 어찌 미리 알더란 말이냐!
세상의 어떤 병도 고치려는 욕심이 없는
자가!
세상 누구의 병이라도 고치겠다는 맹세가 없는 자가!
어찌 어디에 누구에게 쓴 비방을 알 수가 있단 말이냐!"
"네 아버지는 미친 사람이다."
하고 부인이 악을 썼다.
남편의 친구가 두 사람이나 눈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을 만큼,
오씨는 남편에게 실망해 있었다.
제 속으로 난 자식보다 남의 자식을
추켜 세우는 데에 분함과 억장이 무너지는 절망 뿐이었다.
"난 네가 한양에 가는 것은 반대니라."
하고,
유의태가 그 또한 깊은 절망을 담아 아들을 건너보았다.
"그건 무슨 심술 이시오?"
"뜻이 있다면 새로 시작해도 늦지 않아."
"전 이미 내의원에 합격된 사람올시다!"
"그걸 명예로만 알고,
이곳에 남아 새로이 배우고 깨치면
능히 너도 윗대가 물린 가업을 번창시킬 수 있으리라.
하나,
섣불리 그 정도의 재주로 내의원에
올라가기를 조급히 굴다가는 ..."
"난 갑니다!"
"큰 나무에 가리면 작은 나무는
시드는 법!."
도지가 일어섰다.
그 눈이 아비와 아비의 친구들을 한꺼번에 비웃고 있었다.
"난 갑니다.
더불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소!"
도지가 뛰쳐나가자,
오씨와 도지의 아내도 달려 나갔다.
임오근과 꺽새들은 이미 도망친 뒤였고,
상화 혼자 죄책감을 담아 방문앞에
꿇어앉아 있었으나,
질끈 눈을 감은 채 유의태는 아무도
더 보지 않았다.
그 감긴 눈에서 눈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내일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