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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고전 읽기(3. 26.) 자료입니다. 논쟁과 관련한 부분이 많아 난삽한데 귀담아 들을 부분이 많습니다.
L. 트로츠키: 『영구혁명 및 평가와 전망』, 정성진 역, 신평론 1989.
제1장 이 책의 불가피성과 목적
수없이 많은, 매우 값진 레닌의 문서⋅논설⋅연설⋅의사록⋅편지 등은 스탈린 및 그의 동료들을 겨냥해 비판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트로츠키주의’라는 신화를 약화시킨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여전히 공표되지 않고 은폐되어 있다. 당사(黨史)는 말할 것도 없고 세 번의 러시아 혁명의 역사에 대해서도 손질이 가해지지 않은 곳은 문자 그대로 단 한 곳도 없다. 레닌의 이론, 그에 관한 사실들, 그로부터 내려온 전통들, 그가 물려준 유산−이 모든 것들이, 레닌의 와병 이후 트로츠키에 대한 개인적인 투쟁으로 시작되어 조직화되고 나중에는 맑스주의에 대한 투쟁으로까지 발전해 나간 반(反)‘트로츠키’ 투쟁을 위해 곡해되는 희생을 당해 왔다.(영구166)
사실상, ‘낡은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캠페인은 새로운 관료군(群)에게는 점점 그들을 속박하고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 10월혁명의 전통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제거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트로츠키주의’로 규정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반트로츠키주의 투쟁은 점차 광범위한 비프롤레타리아권과 일부 프롤레타리아권에서 등장한 이론적⋅정치적 반동의 표현이 되었으며, 또한 당 내부에서의 이러한 반동의 반영이었다. 특히 영구혁명을 ‘농민(무직크)과의 동맹’이라는 레닌의 노선과 대립적인 것으로 위치 지으려는, 희화화되고 역사적으로도 왜곡된 시도는 1923년에 절정에 달하였다.(영구166)
그것은 또한 ‘영구적’ 격동을 수반하는 세계혁명에 대한^ 관료들과 소소유자들의 적대 의식을, 그리고 안온함과 질서에 대한 프티부르주아지와 관리들의 열망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영구혁명에 대한 악의에 찬 비난은 결국 민족적 사회주의의 최신판인 ‘일국 사회주의’론의 토대를 명확히 밝혀 주었을 뿐이다.(영구166-167)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제 문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쓰레기들의 성문화이자, 편협증의 공식 편람이며 진부한 말들의 집대성이다.(영구168)
모든 문제들을−우익으로부터건 좌익으로부터건, 위로부터건 아래로부터건−트로츠키주의에 억지로 끼워 맞춤으로써, 레닌의 속물적 모방자들은 결국 모든 세계사적 사건들이 1905년의 트로츠키와 영구혁명 전략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좌우되는 문제인 것처럼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왜곡으로 가득 찬 트로츠키주의라는 신화가 현대사의 한 요소가 되었다.(영구168)
당내에서 맑스주의적, 나아가 레닌주의적 사고의 부활은, 스스^로 레닌인 척하는 속물들의 낙서 짓거리에 대한 논리적 처단과 당 기구의 하수인들에 대한 가차 없는 이론적 처형 없이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사실 그러한 책을 저술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책을 쓰는 것은 또한 어렵기도 하다.(…) 이제는 그 작업을 절대로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류의 절반 이상이 관련된 동양 문제에서의 기회주의 노선에 대한 비호가 바로 영구혁명에 반대하는 투쟁에 기초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영구169)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또 성실하게 맑스주의를 학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라제크의 논문은 공식 문헌들보다도 더욱 위험하다.^ (…) 라제크의 저작은 결코 지나가 버린 에피소드적 탈선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불충분한 사고의 산물이긴 하지만, 이론적 신화를 가지고 공식 노선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해악을 끼치고 있다.(영구16-170)
마치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일면적으로 취사선택된 인용문들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완전히 날조된 공식 해석을 이용함으로써, 그는 무작정 반 ‘트로츠키주의’ 투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영구170)
볼셰비즘 전체가 1905년의 경험들에 대한 비판과 소화를 통해 완전히 새롭게 형성되고 성장해 왔으며, 그 경험들은 바로 제1세대 볼셰비키들의 직접적 경험이었던 것이다. 달리 어떤 과정이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세대들이, 아직도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는 중국 혁명의 살아 있는 경험 외에 도대체 어떤 사건으로부터 배울 수 있단 말인가? 훗날 여가 시간에 ‘평온’ 속에서 연구하기 위해 중국 혁명의 문제를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생명력을 잃은 현학자들뿐이다. 그런 것은 결코 볼셰비키적⋅레닌주의적일 수 없다.(영구171)
영구혁명에 대한 라제크의 저작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당내의 새로운 분파(반대파)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발전을 동맹자인 농민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그러한 경향을 조장하는 위험에 빠져 있다.” (…) 1924~25년에 라제크는 영구혁명론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레닌의 슬로건과 역사적 전개과정에 비추어 볼 때−즉 우리나라의 세 번에 걸친 혁명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결코 서로 대립될 수 없으며 오히려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입증해 줄 팸플릿을 쓰려고 몇 번이나 시도하였다. 그 문제를 ‘새롭게’ 철저히 검토하고 난 지금, 라제크는 영구혁명이라는 옛 이론이 당내의 ‘새로운’ 분파를, 농민과의 절교라는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영구172)
레닌은 어디에서도, 심지어 스쳐 지나가면서라도 「평가와 전망」을 분석하거나 인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또, 레닌이 영구혁명에 대해 반박하면서도 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그가 그 저작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영구174)
나의 입장 전체를 검토해 보지도 않고 단편적인 인용문들에 기초하여 10월혁명 이전의 여러 시가에 그가 스쳐 지나가면서 일관성 없이, 때로는 공공연하게 자기모순적으로 단언했던 평가들과는 전혀 다르게, 레닌은 1919년에 영구혁명론에 대해 새로운 평가를 내려야만 했고 또 내릴 수밖에 없었다.(영구175)
내가 스스로를 전술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레닌과 대립시켰던 거의 모든 경우에서, 어쨌든 매우 중요했던 경우는 언제나 그가 옳았다. 나의 과거의 역사적 예측들에 대해서, 그것이 단순히 역사적 회고의 문제로 생각되는 한, 그것을 옹호하려 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나는 속물적 아류들의 영구혁명론에 대한 비판이 인터내셔널 전체 내부에서 이론적 반동을 조장하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중국 혁명의 직접적 사보타주의 수단으로 되어 버릴 때에만, 어쩔 수 없이 이 문제로 되돌아오게 된다.(영구175)
레닌이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그러나 중후하게 혁명의 기본문제들에 대해 나와 볼셰비즘이 일치했다는 점을 인정했던 과거의 선언들을, 라제크는 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여기서 그러한 선언들이, 내가 볼셰비크 분파에 소속되지 않았고 내가 화해론을 주장한 데 대해 레닌이 나를 무자비하게(이것은 완전히 정당했다) 공격했던 바로 그 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레닌의 비판은 영구혁명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의 화해론, 즉 멘셰비키가 좌선회할 수 있으리라는 나의 기대에 국한된 것이었다. 레닌은 ‘화해론자’ 트로츠키에 반대하는 개개의 논박들이라는 응징보다는 화해론 자체에 대한 투쟁에 훨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영구177)
내가 각주에서 1917년 초의 당의 ‘재무장’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것은 레닌이 과거의 당의 노선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레닌이 귀국해서−비록 지체되기는 하였으나 다행히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그것으로서 충분했다−스탈린, 카메네프, 르이코프, 몰로토프 등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당시까지도 집착하고 있었던 ‘민주주의 독재’라는 낡은 슬로건을 거부하도록 당을 지도했다는 의미에서였다.(영구178-179)
나의 저서 「1905년」(문제의 1922년 서문을 포함)과 「10월혁명」이 레닌이 살아 있는 동안 양대 혁명에 관한 기본적인 역사 교과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라제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 당시 그 책들은 외국어로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로도 수도 없이 중판을 계속해 왔다. 그 누구도 나에게 내 저서들이 두 개의 노선을 대립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영구179)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영구혁명론은, 나의 초기 저작, 특히 「평가와 전망」(1906)에 제시된 것만으로도 오늘날의 스탈린주의적⋅부하린주의적인 퇴행적 지혜는 물론 라제크의 최근 저작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맑스주의 정신으로 충만되어 있으며, 결과적으로 레닌과 불셰비키 당의 역사적 노선에 훨씬 더 근접해 있다.(영구180)
1917년 혁명에서 나는 레닌과 함께, 오늘날 반동의 물결에 의해 고양되고 있고 영구혁명에 대한 박해를 유일한 무기로 삼고 있는, ‘고참 볼셰비키들’ 민주주의적 기회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영구182)
나의 화해론은 일종의 사회혁명적 숙명론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계급투쟁의 논리에 의해 결국에는 두 분파가 동일한 혁명적 노선을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당시 레닌의 정책, 즉 진실로 혁명적인 당의 핵심 분자들을 결속시키고 단련시키기 위해서 이데올로기적 비타협성을 고수하고 필요하다면 분열도 불사하는 그의 정책이 갖는 위대한 역사적 의의가 나에게는 여전히 불명료했었다.(영구182)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통합을 지향하려 함으로써, 나는 비자발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멘셰비즘 내의 중도파적 경향들을 이상화하였다. 수차례에 걸쳐 반복된 나의 에피소드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멘셰비키와 공통의 과제에 도달했던 적은 없었으며, 또 그럴 수도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화해론적 노선 때문에 나는 볼셰비즘과 훨씬 첨예한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레닌이 멘셰비키와는 대조적으로 화해론을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또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화해론을 기반으로 한 어떤 분파도 만들어질 수 없었다는 것은 명백하다.(영구183)
천박한 화해론을 위하여 정치노선을 유명무실화시키거나 약화시키는 것은 용납될 수 없고 파멸적이다. 그리고 중도파가 헤매면서도 좌익을 향해 지그재그를 하고 있을 때 중도주의를 미화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물론, 중도주의라는 망령을 소탕한답시고 진정으로 혁명적인 사상을 공유하고 있는 동지들과의 의견 차이를 과장하거나 부풀리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이것들이 바로 나의 진정한 잘못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교훈이다.(영구183)
로자 룩셈부르크조차도 처음에는 볼셰비크 정부의 농업 정책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없었다. 레닌이 그의 농업법의 초안을 작성하고 있을 때, 나는 연필을 들고 그와 함께 책상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의견 교환은 12번도 채 안 되는 간단한 언급들로 모두 끝났다. 그 언급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이 조치는 모순적인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절대적으로 불가피하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그리고 세계혁명의 진전에 따라서, 모순은 해결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단지 시간이 필요하다.(영구184)
나와 볼셰비즘을 분리시켰던 것은 영구혁명론이 아니라 화해론이었다는 것이 레닌의 생각이었다. 이미 본 바와 같이 ‘가장 뛰어난’ 볼셰비크가 되기 위해서 나는 멘셰비즘과의 화해 불가능성을 깨닫기만 하면 되었다.(영구185)
1916년에 라제크는 ‘영구혁명’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동의는 ‘영구혁명’에 대한 부하린의 해석에 대해서였다. 부하린의 영구혁명론에 대한 해석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혁명은−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역할뿐만 아니라, 또 심지어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의 역사적 역할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 그 자체도−이미 완수되었으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순수하게 사회주의적인 기치를 내걸고 권력 장악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라제크는 그 당시 나의 입장도 역시 명백하게 부하린적 방식으로 해석하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와 부하린 모두와의 연대를 동시에 선언할 수는 도저히 없었을 것이다. 이는 또한 레닌이 자기와 협력하고 있던 부하린과 라제크에 대해 그들이 트로츠키인 양 거짓 행세하고 있다고 논박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영구186)
제2장 영구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비약’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지도 하의 국가의 재구성이다
1906년에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동력에 관한 카우츠키의 논문에 레닌 자신의 서문을 덧붙여 출판하였다. 그것을 전혀 모르고 나도 옥중에서 카우츠키의 논문을 번역하였으며, 나의 서문을 붙여서 그것을 나의 저서 「당의 옹호에 대하여」에 포함시켰다. 레닌과 나는 모두 카우츠키의 분석에 대하여 완전한 동의를 표시하였다. 우리의 혁명은 부르주아적인가 사회주의적인가라는 플레하노프의 질문에 대하여, 카우츠키는 더 이상 부르주아적이지 않지만 아직 사회주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즉 양자간의 과도기적 형태를 대표한다고 대답하였다.(영구189)
한편, 내가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부정했던 것은 단지 혁명의 추동력과 전망이라는 의미에서였으며 결코 당면한 역사적 과제의 의미에서는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당시 일정에 올라 있던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혼동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혁명의 계급 변증법이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이끌 것이며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없이는 민주주의적 과제조차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하였다.(영구190-191)
같은 논문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점 강력하게 성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곧 독재를 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동계급이 정확히 언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생산력 발전의 수준이 아니라 계급투쟁에서의 제 관계들, 국제적 상황, 그리고 끝으로 전통, 주도성, 노동자들의 투쟁 각오 등과 같은 많은 주관적 요인들에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노동계급이, 선진국에서보다 경제적 후진국에서 먼저 권력을 장악할 수도 있다. …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한 나라의 기술 발전과 자원에 상당 정도 의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이 단순화된 ‘경제적’ 유물론의 편견이다. 이러한 관점은 맑스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꾼들이 그들의 통치 능력을 완전히 과시하기 전에,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하는−혁명이 승리하려면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조건들을 창출하게 될 것이다.”(영구191)
이들 문장들은 천박한 ‘맑스주의’에 대한 논쟁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러한 천박한 맑스주의는 1905~6년에 유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레닌이 귀국하기 전에 개최된 1917년 3월 볼셰비키 당 협의회의 분위기를 지배하였으며, 4월에 열린 당 협의회 석상에서의 르이코프의 연설에서 극히 아둔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코민테른 제6차대회에서는 이러한 사이비 맑스주의, 즉 스콜라주의에 오염된 속물적 ‘상식’이 쿠시넨 및 기타 많은 사람들의 연설의 ‘과학적’ 기초를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10월혁명의 10년 후였던 것이다!(영구191)
「우리의 혁명」: “우리나라의 자유주의자 부르주아지는 혁명의 절정에 달하기도 전부터 반혁명 세력으로 나서고 있다. 중요한 순간들에서마다 우리의 지식인 민주주의자들은 단지 스스로의 무능함만을 폭로하고 있다. 농민 전체는 반란에서 기본적 세력으로 등장했다.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세력만이 농민을 혁명의 요구에 응하도록 할 수 있다. 혁명에 있어서 노동계급의 전위적 위치, 그들과 혁명적 농촌 사이에 수립된 직접적 연계, 자신의 영향력 하에 군대를 끌어모을 수 있게 하는 흡인력−이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게 만든다. 혁명의 완전한 승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의미한. 이는 이번에는 혁명의 한층 더 연속적인 성격을 의미한다.”(영구192)
결국, 여기서 프롤레타이아 독재의 전망은 명백하게−라제크가 적고 있는 바와는 전혀 모순되게도−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생겨난다. 바로 이것이 그 혁명을 영구적(연속적)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러나, 라제크가 주장하는 것처럼 민주주의 혁명이 완성된 이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런 식의 것이라면 러시아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후진국에서는 농민의 과제가 선행 단계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면 수적으로 취약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획득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농업 혁명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권력이나 방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르주아 혁명의 기초 위에서 가능하며, 심지어 필연적이기도 하다.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 전화한다는 전망을 열어주는 것이다.(영구192)
「평가와 전망」: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가 힘없는 볼모로서가 아니라 지도 세력으로서 정부에 들어간다는 바로 그 사실이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의 경계선을^ 붕괴시킨다. 즉, 그것은 집산주의를 곧바로 일정에 끌어올린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전진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디에서 멈추느냐 하는 것은 세력관계에 달려 있는 것이지 프롤레타리아 당의 당초의 의도에 달려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 노동계급은 자신의 민주주의적 강령의 한계를 돌파하지 않고서는, 독재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유지할 수 없다. (…)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끝까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투쟁에서 하나의 무기는 특히 농촌에서의 선동과 조직화일 것이며, 또 다른 무기는 집산주의 정책일 것이다. 집산주의는 권력을 장악한 당 자체의 입장에서 도출되는 필연적 진로가 될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지를 통해 그러한 입장을 보전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할 것이다.”(영구193)
「1905년」: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했다고 해서 혁명이 더 이상 부르주아적이지 않게 되는가? 그렇게 되기도 하고 아니게 되기도 한다. 이것은 형식적 규정이 아니라 이후의 사태의 추이에 달려 있다. 만일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들이 해방시켰던 농민을 포함한 부르주아적 계급의 제휴에 의해 전복된다면, 혁명은 제한된 부르주아적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 혁명의 일국적 틀을 돌파하기 위해 모든 정치적 지배 수단들을 동원할 수 있다면, 러시아 혁명은 세계적인 사회주의적 대격변의 서곡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어느 단계에 도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당연히 조건부의 대답만이 가능하다. 단 한 가지 사실만은 절대적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정당하다. 즉, 러시아 혁명을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특징짓는 것만으로는 혁명의 내적 발전의 유형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들의 전술들을 국가 권력에 대한 법률상 공인된 유일한 주장자로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지도에 순응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영구193-194)
「1905년」: “혁명을 발생시킨 당면 과제에 관한 한 부르주아 혁명인 우리의 혁명은 공업 인구의 극도의 계급 분화의 결과, 어떠한 부르주아 계급도 자신의 사회적 비중과 정치적 경험을 인민 대중의 혁명적 에너지와 결합함으로써 그들의 선두에 나설 만한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다. 피억압 노동자와 농민들은−스스로의 힘밖에는 기댈 곳이 없으므로−가차 없는 투쟁과 냉혹한 패배로 단련되면서, 승리를 위한 필수적인 정치적 조직적 조건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창출해 내야만 한다. 이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영구194)
「평가와 전망」: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혁명의 토대를 확대하는 길밖에는 없다. (대부분의 근로대중은) 특히 농촌에서는, 혁명의 전위인 도시 프롤레타리아트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야 비로소 혁명에 가담하거나 정치적으로 조직될 것이다. 그 때는 혁명적 선동과 조직화가 국가 기관의 도움을 받으면서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입법권 자체가 대중을 혁명화시키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 농민−심지어 계급으로서의 농민층 전체−의 가장 기본적인 혁명적 이해관계의 운명은 혁명의 운명,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 앞에 해방 계급으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단지 민주주의적 평등, 자유로운 자치정부, 부유한 계급들로 모든 조세 부담의 전가, 상비군의 무장 인민으로의 해체, 그리고 교회의 강제 부과금의 폐지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농민에 의해 수행되는 토지 관계의 모든 혁명적 변화(수용)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변화를 농업에서의 보다 진전된 국가 정책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한 조건 하에서 러시아 농민은 혁명 초기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어떤 경우에든지 프롤레타리아트 정권(‘노동자 민주주의’)의 유지에 관심을 쏟게 될 것이다.(…) 그러나 농민이 프롤레타리아트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가정에 대해서는 모든 역사적 경험들이 반증하고 있다. 역사적 경험은 농민이 독자적인 정치적 역할을 결코 수행할 수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영구194-195)
이 모든 것들은 1929년도 1924년도 아닌 1905년에 쓰여졌다. 이것을 ‘농민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야 할까? 농업 문제의 ‘비약’이 어디에 있는가?(영구195)
영구혁명은 결코 프롤레타리아트의 고립된 비약이 아니라, 오히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 하에 국가 전체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1905년 이래 영구혁명의 전망을 묘사하고 설명해 온 내용이다.(영구197)
제3장 ‘민주독재’의 세 가지 요소: 계급, 임무 및 정치역학
영구혁명의 관점과 레닌주의적 관점의 차이점은 정치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과 농민의 지지를 받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슬로건의 대립으로 표현된다. 논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느냐의 여부나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 필요한가 아닌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협력의 정치역학에 관한 것이다.(영구199)
모든 부르주아 혁명은 도시와 농촌의 피억압 대중의 협력에 기초를 두었다. 바로 이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혁명에 국민적 성격, 즉 전체 인민을 포괄하^는 성격을 부여했던 것이다. 우리들 사이의 이론적 정치적 논쟁은 노동자와 농민의 협력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협력의 강령, 당의 형태 및 정치적 수단들에 관한 것이었다. 과거의 혁명들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은 자유주의자 부르주아지 혹은 그들 내부의 프티부르주아 민주주의 진영의 지도 하에 ‘협력’하였다. 코민테른은 중국의 노동자와 농민을 처음에는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자 장개석, 그리고 나중에는 ‘민주주의자’ 왕정위의 정치적 지도에 종속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서 ‘낡은’ 혁명들의 경험을 반복하였다.(영구199-200)
레닌은 자유주의자 부르주아지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한 동맹은 이제까지의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것은 도시와 농촌의 피억압 대중의 협력에 있어서의 방법에 관한 하나의 새로운 실험이었다. 그럼으로써 협력의 정치적 형태라는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었다. 라제크는 이 점을 간단하게 간과해 버렸다. 바로 이 점이, 그가 우리를 영구혁명의 정식뿐만 아니라 레닌의 ‘민주주의 독재’로부터도 이탈케 하여 공허한 역사적 추상 속으로 이끌어가는 가는 이유이다.(영구200)
농민이 독자적인 당을 만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이 당이 독재정부에서 다수일까 아니면 소수일까? 혁명 정부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들의 구체적인 비중은 얼마나 될까? 이러한 질문들 가운데 선험적 답변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경험이 보여줄 것이다!” 민주주의 독재라는 정식에 관한 한, 노동 동맹의 정치역학 문제는 반쯤은 미해결 상태이며,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는−그렇다고 라제크의 불모의 추상으로 변형될 수는 없지만−미래의 극히 다양한^ 정치적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고 있는 대수적 공식으로 남아 있었다.(영구200-201)
레닌은 주관적 요인들−목표, 의식적 방법, 당−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였으며 그것을 우리 모두에게 가르쳤다. 레닌이 자신의 슬로건에 대한 주석에서, 역사상 최초의 독립적인 노농동맹이 취할 수 있는 정치적 형태의 문제에 대해 개략적 가설적 판단을 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레닌의 접근은 시기마다 많은 편차를 보이고 있다. 레닌의 사상은 교조적으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고찰되어야만 한다.(영구201)
민주주의 혁명 시기에 농민들이 자신들의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 수 있다면 가장 진정하고 직접적 의미에서의 민주주의 독재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소수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정부 참여 문제는 중요하긴 하지만 부차적인 의미만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농민들은 그 중간적 위치와 사회 구성의 이질성 때문에 독자적인 정책이나 정당을 가질 수 없으며^ 혁명기에는 부르주아지의 정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면, 사정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농민의 정치적 속성에 대한 바로 이러한 평가만이 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즉각적으로 성장해 나온다는 전망을 열어 준다. 당연히 여기에는 농민에 대한 ‘부정’, ‘무시’, ‘과소평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전체 사회 생활에 대한 농업 문제의 결정적 중요성, 그리고 농민 혁명의 심오한 깊이와 거대한 추진력에 대한 고려가 없이는,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얘기할 수 없다. 그러나, 농업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조건들을 창출하였다는 사실은 농민이 자신들의 힘과 지도하에 자신의 역사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었다.(영구203-204)
부르주아 국가들, 심지어는 후진국들의 현재 상황에서 그들이 이미 자본주의적 공업의 시대로 돌입하였고, 또 철도와 전신에 의해 통일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한−이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과 인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농민들이 지도적 역할 혹은 독자적인 역할만이라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과거의 부르주아 혁명기에서보다도 적다. 영구혁명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이러한 개념을 내가 변함없이 꾸준하게 강조해 왔다는 사실이, 내가 농민을 과소평가한다는 전혀 부적절하고 아무런 근거 없는 비난의 구실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던 것이다.(영구204)
농민 정당의 문제에 대한 레닌의 견해는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1905년에서 1917년 사이에 러시아 혁명에 대한 레닌의 견해의 변천 과정에 대한 폭넓은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다.(영구204)
당연히 레닌은 자신의 가설적 공식을 현실보다 우위에 놓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적 정당을 위한 투쟁이 그의 생활의 주요 내용을 이루었다. 그러나 흉측한 속물들은, 농민 정당을 추구함으로써, 결국 중국 노동자들을 국민당에 종속시켰고 인도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의 당’이라는 미명 하에 공산주의를 교살하였으며 농민 인터내셔널, 반제동맹 등과 같은 위험스러운 허구를 만들어냈다.(영구205)
현재 유행하고 있는 공식 사상들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레닌에 존재하는 모순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려하지 않고 있다. 그 모순들의 일부는 외적이고 외양상의 것이고 일부는 사실이지만, 어쨌든 모두가 문제 그 자체에서 유래하고 있다. 굳은 기개가 아니라 보다 심오한 무지에 의해 과거의 반동 교수들과 구별되는 특수한 종류의 ‘적색’ 교수들이 우리들 가운데 생겨나니까 레닌의 모든 모순들, 즉 그의 사상의 역동성은 학자적으로 다듬어지고 제거되었다. 표준 인용문들은 여러 실들에 따로따로 꿰 있어서 ‘현시기’의 필요에 딸, 이 꾸러미 혹은 저 꾸러미가 유통되게 된다.(영구205)
사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정당에 대해 독자적인 입장을 갖는 ‘반자본주의적’ 농민 정당을 만들어 내기 위해 반세기 동안 거대한 실험실을 운영해 온 셈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17년에 대다수 농민 대중의 당을 실제로 구성했던 사회혁명당의 실험에 의해 매우 광대한 전망이 획득되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이 당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농민들을 자유주의자 부르주아지에게 팔아 넘겼을 뿐이었다. 사회혁명당은 협상국(영국, 프랑스) 측 제국주의자들과 제휴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무력 투쟁을 감행하였다.(영구206)
이러한 참으로 고전적인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농민에 기반^한 프티부르주아 정당들은 부차적인 문제들만이 일정에 올라 있는 단조로운 역사적 시기 동안은 독립적인 정책의 외관을 유지할 수도 있지만, 사회의 혁명적 위기가 근본적인 소유의 문제를 제기하게 되면 프티부르주아 ‘농민’ 정당은 자동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는 부르주아지 수중의 무기로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영구206-207)
만일 나와 레닌 사이의 과거의 의견 차이가 시대적 배경으로부터 무분별하게 분리된 단편적 인용문들 수준에서가 아니라 올바른 역사적 시각 속에서 분석된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즉 그 논쟁은, 적어도 나에게는, 민주주의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 필요한가 아닌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협력이 어떠한 당 정치강령적 형태와 국가형태를 취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은 이후의 혁명의 진전을 위해 어떠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영구207)
「1905년」: “부르주아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듯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과 도시 프티부르주아지의 지지를 받아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농촌을 지도하고, 농민을 혁명으로 끌어들이며, 그들로 하여금 프롤레타리아트의 계획의 성공에 관심을 갖게 한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도자로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가 아니라 ‘농민의 지지를 받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영구207)
레닌(1909): “이곳에서 볼셰비크들 스스로가 선택한 정식은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즉, ‘자신의 뒤를 따르는 농민들을 지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이다.” “이들 정식들 모두의 기본 개념이 동일하다는 것이 명확하지 않은가? 이 개념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를 분명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는 것, 즉 농민의 지지를 받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정식’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의 범위 내에 전적으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 명확하지 않은가?”(영구208)
여기에서 레닌은 ‘대수적’ 정식 위에서 독립적인 농민 정당이나 특히 혁명 정부 내에서의 농민 정당의 지배적 역할과 같은 관념을 배제하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을 지도하고 그들에게 지지를 받으며, 결국 혁명 권력은 프롤레타리아당의 수중에 집중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영구혁명론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영구208)
레닌은 항상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적 역할에서부터 출발하여 모든 방식으로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적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발전시켰던−또 이것을 우리 모두에게 가르쳤던−반면에, 나는 변함없이 이러한 협력으로부터 출발하여, 이들 간의 제휴에서뿐만 아니라 제휴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 필요한 정부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가 필요함을 역설했던 것이다. 이것 외에는 문제가 될 만한 차이는 전혀 없다.(영구209)
나는 민주주의 독재에 대한 레닌주의의 내용을 완전히 수용하였으며 단지 정치역학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규정할 것은 요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프티부르주아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볼모에 불과한 그러한 종류의 제휴를 배제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영구210)
레닌: “만일 프롤레타리아트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군주제를 타도하도록 농촌의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을 견인해 낸다면, 그것은 ‘국민 부르주아 혁명’^의 완성일 것이며 또한 이것이 바로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내용이리라는 것을 트로츠키는 고려하지 못하였다.”(영구210-211)
실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적이고 대담한 정책만이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군주제를 타도하도록 농촌의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을 견인해 낼 수 있다’는 취지로 내 논설의 구절을 직접 인용하고 있으며, ‘트로츠키는…이것이 바로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내용일 것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못하였다’고 덧붙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레닌은, 트로츠키가 사실상 볼셰비키 정식의 실제 내용 모두(노동자와 농민의 협력 및 이 협력의 민주주의적 과제)를 받아들이고 있으나 다만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독재이자 국민 혁명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내지는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이렇듯 일견 매우 ‘첨예한’ 논쟁적 논설에서의 쟁점은 혁명의 다음 단계의 강령이나 그것을 추진하는 계급세력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히 이들 세력들 간의 정치적 상관관계, 독재의 정치적 당적 성격의 문제라는 결론이 얻어진다.(영구211)
나와 레닌과의 논쟁은 본질적으로 혁명 과정에서 농민의 독자성의 가능성(그리고 독자성의 정도), 특히 독자적인 농민 정당의 가능성을 둘러싼 것이었다. 이러한 논쟁 과정 속에서 나는 레닌이 농민의 독자^적 역할을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레닌은 나를 농민층의 혁명적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영구211-212)
라제크: “1905년의 옛 볼셰비크 이론이 근본적으로 옳다는 것이 어디에서 증명되었는가?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와 농민(페트로그라드 쉬대의 병사들)의 공동 행동이 제정을 타도(1917년에−트로츠키)했다는 사실에서였다. 결국, 1905년 정식은 계급들 간의 상호관계의 근본 원칙을 예측해 주지만 구체적인 정치적 기관을 예견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영구214)
“근본적인 것은 실현되었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 힘을 합쳐 제정을 타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인 것’은, 승리하였거나 반쯤 승리한 모든 혁명 속에서는 예외 없이 실현되었다. 황제들, 봉건 영주들, 사제들은 언제 어디서나 프롤레타리아 혹은 그 전신, 즉 하층 사회계급과 농민에 의해 타도되었다. 이미 16세기의 독일에서,^ 심지어는 그 이전에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 중국에서도 ‘군벌들’을 타도했던 것은 역시 노동자와 농민이었다. 이것은 민주주의 독재와 무슨 관계를 맺고 있는가? 과거의 혁명들에서는 그러한 독재가 결코 생겨나지 않았으며, 그것은 중국 혁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왜? 혁명이라는 고된 과업을 담당했던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등 위에 부르주아지가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제크는 감히 ‘정치적 기관’을 사상해 버린 결과, 혁명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 즉 누가 혁명을 지도하고 권력을 장악하는가라는 문제를 망각해 버렸다. 그러나 혁명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다. 혁명은 제 계급이 맨손으로가 아니라 ‘정치적 기관들’(예컨대 정당)의 매개를 통해 수행하는 하나의 정치 투쟁이다.(영구214-215)
1926년에 라제크는 장개석의 광동 정부가 농민과 노동자의 정부라고 믿었다. 1927년에도 그는 이러한 공식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광동 정부는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투쟁을 실컷 이용하고 나서는 그들을 피바다에 빠져 죽게 한 부르주아 정부임이 증명되었다.(영구216)
만일 농민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은 부르주아지를 따른 것이 된다. 나는 이 문제가 ‘2계급, 즉 노동자⋅농민의 당’이라는 분파주의적 스탈린주의적 관념에 대한 나의 비판을 통해 명확하게 되었다고 믿고 있다.(영구216)
제4장 영구혁명론은 실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리의 혁명」(1906): “연속 혁명의 개념−즉 절대주의와 봉건제의 청산을, 격화되는 사회적 갈등, 점차 새롭게 일어나는 대중의 봉기, 지배계급들의 경제적⋅정치적 특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끊임없는 공격 등에 이어지는 사회주의 혁명과 결합시키는 개념−이 사회주의자 기관에서 정식화되었을, 우리의 ‘진보적’ 긱관지들은 일제히 분노를 터뜨렸다.”(영구220)
무엇보다도 우선, 나는 이 구절에 포함되어 있는 연속 혁명의 정의에 대하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다. 즉, 그것은 중세의 청산을 수많은 첨예한 사회적 충돌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과 결합시키고 있다. 그러면 어디에 비약이 있는가? 어디에서 민주주의 단계를 무시하고 있는가? 또한 1917년에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영구220)
나의^ 논설은,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주의적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처한 입지의 논리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일정한 단계에서 순수하게 사회주의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였다. 이것이 바로 최소강령과, 프롤레타리아독재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최대강령 사이의 연속성이 가로놓여 있는 지점이다. 이것은 ‘단번’도 ‘비약’도 아니며−나는 당시 나에 대한 프티부르주아지 진영의 비판자들에게도 설명하였다−하나의 역사적 시기 전체이다. 또한 레닌의 「노바야 지즌」은 이러한 전망에 완전히 동조하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혁명)발전의 실제 경로에 의해 입증되었고 1917년에는 올바르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확증되었다는 사실이다.(영구222)
「우리의 전술」(1906): “프롤레타리아트는 농촌 및 정치활동의 중심인 도시에서의 봉기에 기초하여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시작할 수 있었던 대의를 승리가 결정될 때까지 지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농민이라는 기본세력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그들을 지도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반동에 대해 최후의 승리의 일격을 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의 승리를 어떻게 지킬 수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농민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가?(영구223)
「우리의 전술」: “거역할 수 없는 혁명의 발전에 기초하여 계획된 우리의 전술들은 당연히 혁명 운동의 필연적인 혹은 가능한, 심지어는 단지 있을 법할 뿐인 단계나 국면들조차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환상적인 비약처럼 보이는가?(영구223)
「최초의 소비예트의 교훈」(1906): “역사는 자신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새로운 소비에트는 50일 동안(1905년 10월에서 12월까지)의 사건들을 다시 한 번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대신에 그것은 이번의 경험으로부터 행동 강령을 빌어올 수 있을 것이다. 이 강령은 완전히 명확하다. 즉, 군대, 농민, 그리고 도시 프티부르주아지의 최하층 평민과의 혁명적 협력, 전제 정치의 철폐, 전제 정치의 물질적 조직의 파괴(이는 부분적으로는 재조직하고 또 한편에서는 군대를 즉각 해체하고 관료적 경찰기구를 파괴함으로써 이루어진다), 1일 8시간 노동제, 인민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 소비에트의 혁명적 도시 자치기관으로의 전화, 지방에서의 농업 혁명의 담당기관으로서 농민대표 소비에트(^농민 위원회)의 창출, 제헌의회 선거의 조직, 그리고 명확한 행동 강령에 기초한 인민의 대표자가 되기 위한 선거 투쟁이다.” 이것이 농업 혁명을 건너뛰거나 농업 문제 전체를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보이는가? 내가 혁명적 민주주의적 과제들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가?(영구223-224)
1916년의 논설에서 나는 멘셰비크적 사고의 공허함을 폭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즉, ‘만일 자유주의자 부르주아지가 지도하게 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누가 지도하게 될 것인가? 결국 당신네 멘셰비크들은 결코 농민의 독자적인 정치적 역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라제크는 나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트로츠키는 농민의 역할에 대해 멘셰비키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멘세비크들은 농민과의 의심스럽고 신뢰할 수 없는 동맹을 위해 자유주의자 부르주아지를^ ‘배척’한다는 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멘셰비키의 ‘방법’이었다. 반면에 나의 방법은 자유주의자 부르주아지를 일소하고 혁명적 농민에 대한 지도력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 나는 레닌과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영구224-225)
또한 내가 멘셰비키와의 투쟁 과정에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결코 농민들에게 지도적 역할을 부여하려 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라제크가 넌지시 암시하려 하는 바와 같이 멘셰비키의 방법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다만 양자택일적 대안을 보다 명확하게 제시한 것이다. −즉 자유주의자 금권정치의 독재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영구225)
런던대회 연설(1907): “우리나라에 거대한 혁명적 농민 대중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멘셰비크 동지들은, 농민들이 아무리 혁명적일지라도 그들은 독자적인 역할은 물론이고 지도적인 정치적 역할은 더더군다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만큼 잘 알고 있다. 농민들이 혁명에 이바지하는 거대한 세력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농민 정당이 부르주아 혁명의 선두에 서서 그들을 억눌러 왔던 낡은 속박으로부터 국민적 생산력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맑스주의자로서는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근대 사회에서는 도시가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도시만이 부르주아 혁명 과정에서 헤게모니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영구227)
“만일 멘셰비크 동지들이 혁명의 승리를 신뢰한다면, 혹은 그러한 승리의 가능성을 인정할 뿐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혁명 권력에 대한 역사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수 없다. 프티부르주아적 도시 민주주의 세력이 프랑스 대혁명에서 혁명적 국민의 선봉에 섰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도시의 유일한 혁명적 민주주의 세력인 프롤레타리아트는−(혁명의) 승리의 전망이 도대체 조금이라도 있다면−농민 대중의 지지를 획득해 내고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영구228)
“프롤레타리아트에 직접 의존하며 또한 그들을 통해 혁명적 농민에게 의존하는 정부가 곧 바로 사회주의적 독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서는 프로레타리아 정부 앞에 놓인 이후의 전망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자코뱅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도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위^한 길을 닦기 위해 몰락할 운명일 수도 있다.”(영구228-229)
“만일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사회적 적대 관계가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농민의 선봉에 서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면, 또한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이 승리를 쟁취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혁명을 위해 필연적으로 마련된 승리는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혁명은 자연히 자유주의자 부르주아지와 구 권력의 타협으로 귀결되고 말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능성은 결코 부정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혁명의 패배의 경로상에 놓여 있으며 또한 혁명의 내적 취약성에 의해 결정된다. 본질적으로 멘셰비키의 모든 분석−특히 프롤레타리아트 및 그들과 농민 사이의 가능한 관계에 대한 그들의 평가−은 그들을 혁명적 비관론의 길로 냉혹하게 인도한다.”(영구229)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이 길로부터 빠져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기초한 혁명적 낙관론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이것으로부터 카데츠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도출된다. 그들에게 카데츠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상징이며,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혁명 권력에 대한 자연스런 청구권자이다.”(영구229)
“당신들의 정식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인민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계통적인 투쟁을 수행하는 것으로 되지 못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단 하나의 지도 이념, 즉 자신들 주위에 모든 근로자들과 짓밟힌 자들을 단결시키고 그들의 선구자이자 지도자가 된다는 이념에 따라 자신의 전술적 조치들을 결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영구230)
1905년과 1906년의 나의 모든 논설, 연설, 활동들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이 연설은 로자 룩셈부르크나 티스코는 말할 것도 없고(…) 볼셰비키에 의해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영구230)
레닌은 농민과 자유주의자 부르주아지에 대한 태도를 둘러싼 “문제의 기본적 사항들에 대한 우리들 사이의 의견 일치”를 입증하였다. 이러한 의견 일치는 라제크가 터무니없이 주장하는 것처럼 나의 목적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영구231)
레닌이 영구혁명을, 무식하고 양심 없는 속물들이 흔히 하는 식으로, 농민에 대한 무시나 농업 혁명의 비약과 동일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레닌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우리의 혁명은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가, 유럽보다 먼저 우리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까 없을까? 그리고 이것은 사회주의에 대해 어떠한 전망을 열어 주는가? −나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농민과 자유주의자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라는 기본적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들 사이에 완전한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고 있다.”(영구231)
“부르주아 혁명은 즉시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이것은 명백히 전환적 성장론이지 비약론은 아니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모험주의적 전술이 아니라 현실적 전술이다.(영구232)
1917년 혁명: 뉴욕에서 집필했던 많은 논설들에서, 나는 2월혁명을 영구혁명론의 관점에서 평가하였다. 이 모든 논설들은 지금까지도 재간행되고 있다. 나의 전술적 결론은 당시 레닌이 제네바에서 내렸던 결론들과 완전히 일치하였으며, 우리의 견해는 카메네프, 스탈린, 그리고 그밖의 속물들의 결론과는 화해될 수 없을 정도로 모순되는 것이었다. 내가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나에게 영구혁명이라는 나의 ‘오류들’을 포기했느냐고 질문하지 않았다. 또한 그렇게 질문할 사람도 없었다. 스탈린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면서 이리저리로 슬며시 숨어 다니면서, 레닌이 도착하기 전까지 자신이 옹호해 왔던 정책들을 당이 가능한 한 빨리 잊어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카메네프는 레닌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비난하였으며, 나와 만났을 때 ‘이제는 당신이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있소’라고 선언하였다. 10월혁명 전야에 나는 볼셰비키 중앙기관지에 영구혁명의 전망에 대해 썼다. 나에 대해 반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닌과 나의 연대는 완전하고 무조건적임이 판명되었다.(영구233)
역사는 일직선으로 전진하지 않는다. 역사는 일시적으로 스탈린이 안내하는 막다른 골목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영구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