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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141. [역경의 열매] 임영서 (1-15) 나를 이끈 어머님의 한 마디 “주님 손만 잡아라”
사람들은 나를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업가’라며 치켜세운다. 올해 45세인 내가 국내 500여개의 가맹점을 가진 프랜차이즈 회사 대표에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 외국으로까지 사업 규모가 계속 커가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결코 잘나고 똑똑해서 이 자리까지 온 것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안다. 지독한 가난과 싸우고 극한 고통과 위기를 겪어야 했던 수많은 시간들이 기초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나를 이끈 진정한 힘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내게 늘 힘이 되었고, 나를 지키고 보호했으며 바른 판단과 지혜를 주었던 우리 어머님의 한마디였다. “영서야. 주님 손만 잡아라.”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며 주님을 찾고 간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좋으신 분이시다. 이 선명한 진리를 가슴에 품고 있는 한 어떤 인생도 실패는 없다. 단지 인간의 눈에 초라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잘했다 칭찬받는 삶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성공한 인생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을 가슴으로 만나고 구원의 확신을 얻고, 감사와 감격 속에 살게 되면서 외형적 성공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복을 받게 되었다. 물질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큰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내가 하는 이 사업이, 이 행동이 하나님의 레이더에 잡혀 어떻게 점수가 매겨질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가 사업 판단의 기준이 되었고 ‘하나님이 기뻐하실까’가 가부를 결정하는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유혹에 흔들리고 실수를 연발해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부족한 신앙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먼저 이 ‘역경의 열매’ 연재가 결코 무용담이 되지 않길 기도한다. 어머니의 기도가 자식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또 하나님이 고난 가운데 부르짖는 한 영혼의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시고 역사하는지 답을 얻는 간증이 되길 원한다.
경기도 양평. 지독히 가난한 농부 집안의 4녀1남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불치병을 선고받고 죽음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병을 치유 받으셨다. 너무 기쁘셨던 어머니는 동네 작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이를 영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는 어머니를 모질게 핍박하셨다. 신앙은 고난 속에서 더 성장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어머니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새벽기도와 철야기도, 금식기도까지 하시면서 아버지와 맞섰다. 뒷산 선녀탕 폭포에서 마음껏 부르짖으시던 어머니의 낭랑한 기도소리가 아직도 내 귓가에 남아있다. 내 손을 잡고 교회에 들어서면 바로 시작하시던 기도는 나의 뇌리에 파편처럼 박혀 있다.
“하나님. 저 왔어요. 세상 것 다 버리고 왔어요. 하나님 저랑 만나 주세요.”
어머니는 우리들을 불러 모아 성경의 인물 이야기들을 감질나게 해 주셨다. 내게 시킨 성경필사는 학교 숙제보다 더 엄격하게 검사하셨다. 식사기도를 하지 않으면 바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산골 우리 집에서 초등학교까지는 대략 6㎞ 거리였다. 나는 이 거리를 6년간 뛰어다니며 등하교를 했다. 친구들과 뒷동산에 올라 누워있다 보면 하늘 높이 비행기가 지나가곤 했다.
“난 커서 우리 마을에서 비행기 제일 많이 타는 사람이 될 거다.” “어휴. 영서 저 뻥쟁이. 또 뻥치네.” 내 별명은 친구들 사이에서 ‘뻥쟁이’였다. 그리나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뻥이 아니라 내 꿈이자 비전이었으며 앞으로 그대로 실천될 선약이기도 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 [역경의 열매] 임영서 (1) 나를 이끈 어머님의 한 마디 "주님 손만 잡아라"
* [역경의 열매] 임영서 (2) '86아시안게임 공식 군고고마' 어릴 적부터 상혼 발휘
* [역경의 열매] 임영서 (3) 어머니 별세 후 사고치고 기도원으로 도망을
* [역경의 열매] 임영서 (4) 기도원의 회심 "주님, 제 잃어버린 삶의 조각을…"
* [역경의 열매] 임영서 (5) 단돈 1만8000엔 들고 미지의 땅 일본으로 유학
* [역경의 열매] 임영서 (6) 야쿠자 방해에도 '노점 꽃장사' 7호점까지 대성공
* [역경의 열매] 임영서 (7) 거듭된 사업 실패로 삶 포기 직전 "신앙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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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임영서 (15·끝) "인생 후반 경영도 주님 손만 잡고 가게 하소서"
◇약력= △세종대 경영대학원 졸 △㈜대호가 대표 △맥창업정보시스템 대표 △한국프랜차이즈협회 부회장 △신지식인협회 이사 △양평군 지방공사 이사 △서울 나눔의교회 집사
***[역경의 열매] 임영서 (2) '86아시안게임 공식 군고고마' 어릴 적부터 상혼 발휘
새벽기도를 나가시기 전 어머니는 항상 잠자는 내게 오셔서 머리에 손을 얹고 지혜로운 아들, 예수 잘 믿는 아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셨다. 그럼에도 나는 반에서 공부도 평균 이하로 못했고 지각 잘하며 등록금은 제일 늦게 내는 말썽꾸러기였다. 담임선생님은 유독 내게 "넌 우리 학급의 암과 같은 존재"라고 노골적으로 면박을 주었다.
술 드시고 걸핏하면 주정하며 어머니를 못살게 구는 아버지, 구질구질한 가난, 해도 해도 끝없는 농사일…. 나는 탈출구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시는데 우리 집은 왜 항상 이 모양인지 불만이 끝없이 차올랐다. 교회 가기도 싫었다. 사춘기와 맞물리면서 이유 없는 반항이 시작됐다.
이런 나를 다스리는 어머니의 방법이 참으로 지혜로웠다. 나는 연약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외아들이니 집안일도 많이 도왔고 특히 지게를 잘 졌다. 중학교 때부터 무거운 짐을 지게로 잘도 날랐다. 하루는 무거운 나뭇짐을 지고 지팡이를 의지해 일어나려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지팡이를 달라고 하셨다. 나는 지팡이 없이 서 있는 것이 불편했는데 어머니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으셨다.
"지팡이 빨리 주세요. 힘들어 죽겠어요."
"지게작대기 하나 없는데도 일어나기 힘들지. 그래 우리 인생도 반드시 의지해야 할 지팡이가 필요하단다. 많은 사람이 돈과 명예, 권력을 지팡이로 삼으려 하지만 결국 지나면 모두 거품이란다. 넌 항상 하나님을 지팡이 삼고 일어나거라. 주님의 손만 잡아야 한다."
당시 이 말은 내게 별로 영향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내 가슴속에 겨자씨처럼 심겨져 이후 삶의 위기마다 놀라운 처방전이 되었다. 그 어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내가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해결 방법을 얻을 수 있었다. 피할 길을 만들어내곤 했다.
중학교에 다니며 신문을 돌렸다. 당시는 새 구독자를 개발하는 것도 신문배달부의 주임무였다. 그런데 신분 한 부 구독시키는데 대한 수당이 한 달 구독료보다 훨씬 많았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학급 친구들에게 신문 구독을 하면 내가 받는 수당 4000원을 모두 주겠다고 한 것이다. 용돈이 궁한 아이들은 집에 가서 졸라 구독신청을 받아왔고 어떤 아이는 부모님 인맥을 동원해 많은 부수를 갖고 달려왔다. 나는 기본 수당을 나눠주고도 특별수당을 받았고 나중에는 지국까지 인수했다가 다시 비싸게 팔았다. 사람들은 어린 내가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겨울방학 때는 친구들과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했다. 단순히 한 곳에서만 파는 것이 아니라 2명 1조로 봉투팀 장작팀 생산팀 판매팀으로 나누었다. 봉투팀은 군고구마를 담을 봉투를 만들었고 장작팀은 산에 가서 군고구마 구울 땔감을 구해왔다. 생산팀은 가장 맛있게 굽는 방법을 연구해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 이 군고구마를 5개의 판매팀이 예쁘게 만든 종이상자에 담아 직접 팔러 다녔다. 당시 86아시안게임 전이었는데 군고구마 상자에 '86아시안게임 공식 군고구마'라고 써붙이고 다니게 했다. 각 팀은 지역별 담당 구역만 돌며 판매를 했는데 아주 잘 팔렸다. 학생들인데다가 아시안게임 공식 군고구마라고 쓴 것을 재미있어했다.
매일 장사를 끝내고 정산하면 친구들에게 일당을 모두 주고 내게 5만원 정도가 남았다. 당시 큰매형이 2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는데 장사의 묘미가 바로 이런 것임을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아버렸다.
내가 만약 혼자 장사를 했다면 이 정도 수입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사업은 사람들을 잘 관리해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것. 이 깨달음은 후일 내가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적용할 첫 번째 힌트였다.
***[역경의 열매] 임영서 (3) 어머니 별세 후 사고치고 기도원으로 도망을
‘지독하게 가난한 내가 일약 부자가 되는 길이 무엇일까?’
고교 시절, 나는 이 문제에 집중했다. 공부도 못하고 집도 가난한 내가 양평에서 농사만 지으며 살기엔 너무나 억울했다. 그런데 1984년 LA올림픽에서 김원기 선수가 레슬링으로 금메달을 따자 국민적 영웅이 되며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목격했다. 나도 기초체력을 연마하며 어떤 운동을 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며칠 만에 ‘허리통증’만 얻고 포기해야 했다.
당시 전영록씨가 주연한 영화 ‘돌아이’를 본 나는 영화배우가 되면 성공할 것 같았다. 주변에서 ‘잘생겼다’는 소리를 가끔 듣곤 했기에 어머니에게 영화배우 오디션을 보러 가겠다고 졸랐다.
들은 척도 안 하시던 어머니는 내가 워낙 간절히 부탁하자 서울 여의도에 있는 기획사에 함께 가자고 하셨다. 그리고 가는 내내 “하나님, 이 아들이 영화배우 한다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기도하셨다. 기획사에서는 내게 소질이 있으니 일단 연기수업을 받으며 때를 기다리자고 했다. 대신 거액의 수업료를 내라고 했다. 어머니는 짧고 나직하게 한마디 하신 뒤 바로 내 손을 잡아 이끄셨다.
“여긴 아니다. 모두 돈만 탐하는 사기꾼들이다. 마음을 접어라.” 어머니가 원망스러웠지만 큰 금액을 마련할 수 없는 것을 뻔히 아는 처지에 더 이상 떼를 쓸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목회자’가 되길 원하셨고 또 기도하셨다. 그러나 난 1%의 가능성도 없는 일이라 단정했다. 내가 그 정도 신앙도 없지만 거룩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낼 자신이 없었다.
비록 못 배우고 세상물정 모르는 촌부였지만 내겐 신앙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지주가 되셨던 어머니는 4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셨다. 평소 지병도 있으셨지만 과로를 견디지 못하셨던 것 같다.
하늘나라로 가시기 5일 전 내 손을 붙잡고 하신 말씀이 유언이 되고 말았다.
“영서야, 너만은 자랑스럽게 키우고 싶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가니 안타깝구나.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 웃는, 여유 있는 사람이 되거라,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아버님은 바로 새어머니라며 여자를 집으로 들였다. 어머니가 힘들게 가꾸어 놓은 땅도 슬금슬금 파셨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아버지에게 대들 순 없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내 신앙생활도 멈췄다. 왜 하나님은 착하고 고생만 하신 어머니를 일찍 데려가시고 어머니를 괴롭히며 살아온 아버지는 새 여자를 들이며 살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교회도 나가지 않았고 내 멋대로 살기 시작했다. 나를 제어할 어머니도 안 계시니 물을 만난 고기였다.
대학 연극영화과에 원서를 냈다 높은 경쟁률 때문에 실패한 나는 막 인기를 끌던 부동산학과에 입학했다. 부동산업계에 뛰어든 나는 당시 부동산이 크게 활황기여서 학교에 다니면서도 짭짤하게 돈을 벌었다. 부동산 투기 쪽은 보통 폭력조직과 손을 잡아야만 했다. 젊은 혈기에 이들과도 어울리면서 불안정한 청춘을 보냈다.
하나님의 품을 등진 나를 주님은 안타깝게 여기셨던 것 같다. 나는 오랜 기간 어머니의 기도를 먹고 자란 신앙인이었다. 이런 나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은 드디어 나를 수술대 위에 올리시고 ‘연단의 메스’를 대셨다.
친누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이 있어 찾아가 엄포를 놓는 중에 싸움으로 번져 상대가 크게 다치고 말았다. 나는 이 정도면 경찰에 잡혀갈 것이란 생각에 곧바로 시외버스를 타고 줄행랑을 쳤다.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청평의 한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다시 한번 나를 불러주셨다. 이 사건은 내게 ‘전화위복’이란 고사성어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게 만들어 주었다.
***[역경의 열매] 임영서 (4) 기도원의 회심 “주님, 제 잃어버린 삶의 조각을…”
사고치고 도망온 기도원은 통성기도와 찬양소리로 정신이 없었다. 조용한 곳을 물색하다 빈방이 있어 들어가 눈을 붙이려는데 아저씨 두 사람이 들어왔다. 예수를 믿는 분이 어려움을 만난 불신자를 데리고 와 열심히 전도하는 눈치였다. 영혼구원을 위해 기도원까지 함께 온 그 열의가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심심했던 나는 아저씨가 전도용으로 가져 온 ‘잃어버린 삶의 조각들’(리 이젤 목사 저)이란 번역 서적을 빌려 읽었다. 지금은 여목사가 된 저자가 18세 때 성폭행을 당해 임신되는 비극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삶이 극적으로 변화된 내용을 담은 간증집이었다.
이젤 목사는 폭력 아버지를 피해간 다른 곳에서 성폭력을 당해 임신한 현실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요?”라고 울며 부르짖는다. 결국 내가 어머니의 죽음에 신앙을 저버린 이유와 비슷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젤 목사는 선한 사마리아인 크로포드 가족을 만나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다. 자신이 출산할 때까지 돌봐준 크로포드 아줌마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애야.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단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너를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른단다.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이젤 목사는 출산한 아이를 입양해 보낸 뒤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고 나중엔 잃었던 딸과도 재회한다. 책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내게 다가오는 깨달음이 있었다. “나보다 더 큰 고난을 당한 저자는 오히려 이것을 극복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난 이게 무엇인가. 어머니가 날 위해 그렇게 기도하셨는데 지금 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회개의 눈물을 쏟았다. 나도 이젤 목사처럼 잃어버린 삶의 조각을 맞춰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어떻게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도망까지 친 처량한 신세가 됐는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다행히 내가 폭력을 행사한 상대와 수습이 되어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기도원에 가도록 만드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 섭리를 찾았다. 어머니가 기도하신 대로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과감하게 어둠의 생활을 청산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하려는데 쉼 없이 유혹이 밀려왔다. 아직 젊었던 나는 마음을 다지려 해도 예전의 습성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비상대책으로 군 입대를 선택했다. 군생활은 바쁘게 살아온 내게 오히려 휴식기였다.
제대 후 신학교에 복학했다. 당장 생활비를 벌어야 해 경기도 산본 개척교회 전도사로 사역했다. 한 달 10만원이 사례비였다. 턱없이 부족해 아파트 건설 현장에 나가 막노동을 하며 부족한 생활비를 보탰다.
신학생에 전도사에 막노동에 정신없이 살았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잡히는 대로 읽었다. 그때 읽은 많은 책이 후일 내 시야를 넓혀주는 큰 버팀목이 되었다. 이 시절에도 사업에 관심이 많아 서울 종로에 ‘500냥 하우스’를 차리는 등 이것저것 손을 댔다. 그런데 어느 날 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든 사건이 생겼다.
오전과 오후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가게 두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모두 손님들로 넘쳐났다. 프랜차이즈 비즈니스에 대해 처음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진 내 자본력으로 남의 노동력을 이용해 사업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프랜차이즈는 가맹점주가 자본과 노동력을 제공하고 나는 가게 운영의 노하우와 경험을 파는 효율적 사업인 것을 알게 됐다. 어머니가 나에게 가르치셨던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 도움이 되는 사업을 하라’는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내 머리에서 ‘바로 이것!’이라며 파란불이 번쩍 켜졌다.
***[역경의 열매] 임영서 (5) 단돈 1만8000엔 들고 미지의 땅 일본으로 유학
기도원에 갔다가 잃었던 신앙을 찾고 신학교에도 들어갔지만 내 관심은 목회자보다 자꾸 사업 쪽으로 기울었다. 사실 목회자의 길은 내가 응답받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뜻이었다. “하나님, 저 사업 쪽으로 한번 나서 볼게요. 이 길 아니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캔터키 프라이드 프랜차이즈에서 힌트를 얻은 나는 일단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어학을 공부하면서 사업경험을 쌓기로 했다. 애써 그간 모은 돈으로 일본행을 준비했다. 현지 학원비에 비행기표를 사고 남은 돈은 모두 혼자 계신 아버지께 드렸다. 가방 하나를 달랑 들고 김포공항을 떠나는 나를 환송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리타 공항에 내려서야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가 아는 단 한 사람도 없는 미지의 땅 일본, 내 주머니엔 1만8000엔이 전부였다.
기숙사에 들어와 라면 한 박스와 냄비, 휴지 등 기본 생필품을 사고 나니 돈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려 거리를 배회했지만 말과 글이 안 통하니 아르바이트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라면도 점점 떨어져 가자 기도가 절로 나왔다.
“하나님, 큰 뜻을 품고 왔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기도 전에 재정이 심각합니다. 일자리를 주세요. 어떤 것도 좋습니다.”
가만히 있는다고 도와 줄 사람은 없었다. 무작정 집을 나서 시내 중심가에 나가보기로 했다. 중간에 한번 갈아타야 하는데 깜빡 잠이 들었던 나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내렸다. 일본은 잘못 내리면 무조건 나와 표를 다시 끊어야 했다.
전혀 모르는 전철역에 내린 나는 전철값이 아까워 동네 구경을 하기로 했다. 역 앞 중고자동차 판매점에 가니 새 차나 거의 다름없는 차들이 싼값에 팔리고 있어 정말 부러웠다. 점심때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 도시락집 앞에 발 길이 절로 멈추어졌다. 예쁜 데다 참 먹음직스러웠다. 배에서 쪼르륵 소리도 나서 사먹고 싶었지만 형편이 안 되었다. 배고픔의 고통은 사람을 참 처량하게 만든다.
“이랏샤이마세, 도조(어서오세요).” 나이든 여주인이 밖으로 나와 내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말뜻을 이해 못하고 멀뚱거리자 영어로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물었다. ‘코리안’이라고 답하자 여주인은 대뜸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한국말로 “젊은이 들어가세”라며 안으로 나를 이끌었다.
나의 사연을 자세히 들은 여주인은 맘껏 먹으라고 무료도시락을 내놓더니 일자리를 알아봐 주겠다면서 횅하니 가게를 나갔다. 이곳에서 수십년간 도시락 가게를 열어온 제주도 출신의 그녀는 바로 가게와 붙은 ‘유리 만드는 공장’에 나를 저녁 청소원으로 취직시켜 주었다. 창업주가 한국 사람이라고 했다. 나를 졸게 하신 것도, 이 역에 내리게 하신 것도, 도시락집 앞에서 서성거린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인도였다. 그 여주인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분명했다. 다음 날부터 유리공장 청소부로 일했다. 마침 지게차도 다룰 줄 알아 유리를 트럭에 싣는 일도 도맡았다. 농사일로 단련된 손으로 뭐든 빠른 속도로 해치우자 사장은 나만 보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임상, 일 잘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처럼 열심히, 일 잘하는 사람 처음 봅니다.”
월급으로 13만엔을 받았다. 유학생들이 음식점에서 매일 5시간씩 일해도 5만엔을 받기 힘든데 모두 나를 부러워했다. 그래도 이 돈은 학비와 기숙사비로 내고 나면 생활비가 모자랐다. 앞으로 일본에서 계속 지내려면 돈이 더 필요한데 돈을 벌려면 결국 장사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공장 일을 하면서도 틈을 내 리어카에서 닭꼬치 장사를 하다 망했다. 일본에 없는 솜사탕 장사도 하느라 기계를 한국에서까지 들어왔으나 이것도 접어야 했다. 노점상은 야쿠자들에게 시달리고 자릿세도 내야 했다. 내가 일본서 세 번째 시도한 것이 바로 꽃 장사였다.
***[역경의 열매] 임영서 (6) 야쿠자 방해에도 ‘노점 꽃장사’ 7호점까지 대성공
일본 번화가에는 여러 노점 장사가 많은데 유독 꽃장사만 없었다. 꽃은 냉장 보관을 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젊은 커플들이 무척 많이 다니는 길목이라 꽃다발이 잘 팔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난 유리공장에서 밤 10시까지 일하고 곧바로 꽃집으로 가서 마무리 청소를 해주면서 꽃꽂이를 배웠다. 장미는 가시를 반드시 정리해야 하고, 백합은 수술을 미리 떼어내야 하는 등 기초적인 것부터 예쁘게 포장하는 법, 부케 만들기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이제는 리어카를 장만하고 자재비 및 꽃값 등에 드는 투자비 25만엔이 필요했다. 내게 그 정도 큰 금액을 투자해 줄 사람은 없었다. 내가 믿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기도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제 길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 25만엔을 투자할 천사를 보내주세요. 도와주세요.”
가끔씩 인사를 하며 알고 지내던 요쿠르트 파는 누나가 있었다. 제주도 분으로 열 살 손 위여서 가끔 일을 도와드리곤 했는데 누나가 내게 투자할 테니 나중에 이자를 쳐서 갚으라고 했다.
신주쿠역 동문 출구에서 시작한 장사는 예상대로 잘됐다. 데이트하러 온 남자들이 역에서 나오면서 꽃을 사가고 퇴근하는 주부와 젊은 여직원들이 퇴근하며 꽃을 사갔다.
난 아예 유리공장도 그만두고 여기에만 매달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야쿠자들이 누구 허락받고 장사하느냐고 행패를 부렸다. 몽둥이로 맞아 실신까지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건 나는 더 물러날 수 없었다. 그저 깡다구로 행패를 당한 다음날도 리어카를 끌고 꽃을 팔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나를 괴롭히는 야쿠자 조직이 3곳이나 되었다. 나는 가장 힘이 센 듯한 이들에게 통역을 대동해 담판을 지었다. 매달 4만엔을 주는 대신 일체 간섭하지 않고 보호해 주는 조건을 달았다.
새벽4시에 일어난 나는 꽃 경매시장으로 달려가 그날 쓸 꽃을 산 뒤 돌아오면서 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아침을 먹고 어학원에서 공부를 한 뒤 꽃을 만들어 거리로 나가 팔고 돌아오면 12시가 훌쩍 넘었다.
우리나라는 ‘어버이날’이 있지만 일본에는 ‘엄마의 날’이 있고 역시 카네이션을 달아준다. 전날 한국식으로 꽃을 잘 만들어 판매를 시작했는데 꽃바구니까지 46만엔의 큰 매출을 올렸다. 돈을 세면서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나는 한국 유학생을 고용해 내 장사를 맡기고 꽃집 2호점을 열었다. 이어 오피스빌딩이 밀집된 거리에 3호점을 열었는데 모두 장사가 잘됐다. 꽃을 많은 양을 한꺼번에 사니 더 저렴하게 가져올 수 있었고 꽃바구니 만드는 것도 전문가에 맡겼다. 이렇게 7호점까지 낸 나는 이제 유학생이 아닌 사업가로 변해 있었다.
신주쿠 중심가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고급오피스텔 10층으로 이사했다. 어학원 코스를 마친 나는 비주얼아트스쿨에 들어가 인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비자를 연장하려면 학원을 다녀야 했다.
그런데 내가 발로 뛰지 않고 맡겨 놓는 장사는 한계가 있었다. 나 역시 생활에 여유가 생기니 삶이 느슨해지고 기도도 절박해지지 않았다. 더구나 한국을 떠나 외지에서 오랫동안 치열하게 살다보니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있었다. 신경을 안 쓰고 의욕도 떨어지니 꽃가게를 하나 둘 접게 되었고 여기에 허리통증이 재발해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이제 너무 힘들어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나님, 제가 일본에서 많은 부분을 배우고 느끼고 사업까지 했습니다. 이제 한국에 가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세요.”
다 정리하고 한국행 비행기로 오르는 내 마음은 시원섭섭했다. 한국을 떠난 지 정확히 2년4개월 만에 인천공항에 다시 내렸다.
***[역경의 열매] 임영서 (7) 거듭된 사업 실패로 삶 포기 직전 “신앙인이…”
일본에서 돌아온 나는 사업을 하려다 초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부동산컨설팅 회사에 일단 취직했다. 일을 많이 따온 나는 월급이 아주 높았다. 사귀던 여자친구와 결혼도 하고 평범한 가장이 되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프랜차이즈 사업에 대한 열망이 항상 끓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반짝했던 부동산컨설팅이 인기를 잃고 사장이 손을 떼자 내가 직원들을 데리고 한국경영정보연구원이란 창업컨설팅회사를 차렸다. 당시엔 이런 용어를 쓰는 곳이 한 곳도 없었다. 그런데 직원들이 일을 가르쳐 놓으면 다른 곳으로 쏙쏙 빠져나가는 통에 인간적인 배신감이 컸다.
이번에는 회사 이름을 맥창업정보시스템으로 바꾸고 아파트나 빌딩의 엘리베이터에 명언과 함께 회사나 업체 광고를 해주는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수주를 받아도 실제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찮아 이익을 내지 못했다. 그래도 창업전문가로 알려져 방송출연이나 강의가 많아 회사운영자금을 간신히 메꾸곤 했다.
마지막 직격탄을 맞은 것은 10년이나 함께 일해 온 후배의 배신이었다. 그는 내가 오랜 기간 축적해 놓은 회사 자료를 모두 갖고 나가 새 회사를 차렸다. 충격이 컸지만 잊고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했다.
돌이켜 보니 1999년부터 2003년까지 5년간 나는 실패만 거듭하고 있었다. 집안 경제도 최악이었다. 딸아이가 심하게 아파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약값 1200원이 없었다. 누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단박에 거절을 당했다.
평소 내가 가족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내 멋대로 행동하다가 도와달라고 하니 괘씸했을 것이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내가 살아온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농약 한 병을 사들고 양평 고향 뒷산을 찾았다. 나를 찬찬히 돌이켜 보는데 이 정도의 일에 낙심하고 죽음까지 결심하는 내가 한심했다. 신앙인이라고 새벽기도회까지 열심히 다니던 내가 왜 이 지경이 됐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악한 영이 나를 극도의 우울감에 빠지게 하고 생명까지 스스로 끊어 파멸시키려 했던 것이 분명했다. 우리 신앙인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마귀의 올무에 걸리게 된다. 기독교인, 하나님의 사람들을 더 집요하게 공격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시절 뛰놀던 고향 뒷산에서 농약병을 버리고 다시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실패하고 좌절해도 낙심하지 않고 신앙을 잃지 않겠다고 기도했다. 오히려 나처럼 죽으려했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데 힘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우리 가족은 남산 밑 월세 옥탑방에 살았다. 난 이곳을 ‘골고다 언덕’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눈물의 기도를 매일 두 시간씩 드렸다. 그동안 겸손하지 못했고, 섬기지 못했으며, 나누지 않았던 것을 회개했다.
눈물의 기도는 반드시 열매가 있다. 유명 제과업체와 대기업 한 곳이 퇴직자를 위한 창업컨설팅강좌를 맡아 달라고 했다. 내 강의를 들었던 양 회사 간부들이 모두 입사를 제의했다.
“우리 제과 브랜드로 중국진출을 하려 합니다. 입사하면 연봉 1억원에 주택을 제공하고 모든 생활비를 대겠습니다.” “연봉 1억5000만원을 드리겠습니다. 퇴직자를 위한 창업 분야를 전담해 계속 지도해 주시고 도움을 주십시오.”
주위에선 모두 안정을 택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내게 다시 힘을 주셔서 이렇게 일어났는데 기도한 대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면 사업을 하는 것이 순서였다.
갈등하다 제의를 거절했다. 이제 내 사업을 해야 한다는 확고한 자신감이 생겼다. 신림동 순대타운 컨설팅을 맡은 나는 컨설팅료로 자그마한 회사 사무실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님. 이제 새롭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오너로 모시고 모든 일에 무릎부터 꿇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역경의 열매] 임영서 (8) 9호점서 주춤했던 사업… 10호점 대박 후 급성장
내가 죽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죽 관련 컨설팅을 맡아 연구를 깊이 있게 하면서였다. 당시 나는 미래 음식점에 대한 성공 키워드를 ‘레저성’에 맞추고 있었다. 웰빙시대를 맞아 여유와 가치를 느끼며 건강에도 좋은 음식이 선호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런 맥락에서 죽이 가장 부합됐다. 소화가 잘되고 다양한 식자재를 넣으면 영양의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마침 대기업 출신의 한 분이 죽 전문집을 하려는데 도움을 요청해 왔고 함께 방법을 연구하다 프랜차이즈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솟았다.
“얻어 놓은 가게 월세를 제가 낼 테니 6개월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가 최고의 메뉴를 개발하겠습니다.”
그분이 기다리겠다고 대답하는 통에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그동안의 컨설팅 노하우를 모두 동원해 프랜차이즈 ‘죽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눈물의 기도를 매일 매일 포함시켰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죽이야기는 일본과 한국에서 5년간 모질게 광야생활을 거치며 탄생된 특별한 작품이었다. 나는 죽이야기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요 브랜드라고 자신 있게 말하곤 한다.
이렇게 야심차게 시작했건만 타사 브랜드의 죽은 계속 승승장구하는데 나는 9호점까지 내고 성장이 주춤했다. 더구나 우리 가게 중에서 소위 ‘대박’을 내는 곳이 없었다. 원인을 분석해보니 초기 회사 경비를 줄이느라 인테리어와 안내 전단지까지 모든 것을 전문가에게 맡기기 않고 내가 다 알아서 한 탓이었다. 창업 전문가라고 강의 다니고 큰소리친 것이 부끄러웠다.
“하나님 죽이야기를 계속 해야 합니까? 접어야 합니까.”
이 무렵 아는 분이 적은 돈으로 치킨집을 연다기에 극구 말리고 내가 봐줄 테니 죽집을 하라고 권유했다. 나는 경쟁 업체가 장사하는 곳으로 가서 정면승부를 걸어보자고 했다. 그러나 그분이 투자할 돈은 2500만원이어서 제대로 된 가게를 얻기 힘들었다. 마침 적당한 장소는 찾았는데 인테리어까지 하면 최소 8000만원은 있어야 했다. 애가 타서 함께 기도를 했는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가게를 하려는 주인이 우연히 학교 은사를 만났는데 대화를 하다가 죽집에 5000만원을 투자해 주겠다고 한 것이다. 철저한 성격의 그 은사는 나를 만나 사업 설명을 들은 후 내린 결정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번 10호 가게에 주님이 함께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도와주세요.”
나는 프랜차이즈 사장이었지만 점주보다 더 신경을 쓰며 가게 오픈에 매달렸다. 야심차게 오픈한 가게에 손님이 줄을 이을 것으로 잔뜩 기대했으나 처음 1주일은 기대 이하였다. 하루 10만원 정도의 매상으론 가게 유지도 힘들었다.
나는 이제 이 사업을 그만둬야 하는 것인지, 내 말을 믿고 죽집을 시작한 주인에게 손해를 배상해 주어야 하는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심혈을 기울인 가게라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가 주님께 매달렸다. 어떻게든 가게를 홍보해주고 싶은 마음에 ‘죽이야기’라고 쓴 피켓을 들고 속옷차람으로 가게 앞을 왔다갔다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사장님, 오늘 매상 25만원 됐어요. 드셔본 분들이 다시 찾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어요.”
나는 고객 서비스에 최선을 다할 것을 언제나 주문했고 손님 한분 한분이 VIP로 느껴질 만큼 섬기라고 했다. 하루 매출 25만원이라는 즐거운 비명이 들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50만원, 70만원이 되더니 불과 석 달 만에 매상 100만원을 돌파했다. ‘죽이야기’도 드디어 대박 가게를 갖게 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임영서 (9) 암·당뇨·아토피에 좋은 특화된 죽을 개발하자!
나는 창업컨설팅 전문가라고 자부했지만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세상적으로 익힌 판단과 기준은 그 어느 것도 성공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음식점을 하는 사람들에겐 운영에 따른 지혜와 상황에 대처하는 순발력은 꼭 필요하다. 그런데 이 지혜는 열심히 기도하면 주님이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면 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죽 프랜차이즈에 뛰어들어 보니 관련 모회사가 30여개나 되어 경쟁이 아주 극심했다. 이 서바이벌 환경에서 특화된 죽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현재는 영양죽과 맛죽 일색이지만 심장에 좋은 죽, 암 환자에게 좋은 죽, 당뇨에 좋은 죽, 아토피에 좋은 죽 등 특화된 죽 개발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나는 가맹점 계약을 맺어 수입이 생기면 이를 모두 연구개발비에 투자했다. 그리고 아이디어를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했다. 특화된 죽은 의사와 한의사 등 전문가의 의견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하나님은 항상 적절하고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셨다. 이 결과로 죽업체에서는 보기 드물게 ‘면역력 증강을 위한 암 식이’를 공동으로 개발하고 약선죽 시리즈를 내놓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결과라고 감사하며 영광을 하나님께 올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연구하고 비싼 재료를 들여 힘들게 죽을 만들었지만 결국 비싸게 팔 수 없었다. 더구나 판매량도 미진해 오히려 손해였다. 그러나 웰빙시대를 사는 우리에겐 이 제품들이 충분한 평가와 각광을 받을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여전히 개발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가맹점 수가 300개를 돌파하자 이제야 내가 어깨를 펴고 쉼 호흡을 크게 할 수 있었다. 고객들에게도 맛과 서비스에서 호평을 받아 이른바 죽집 프랜차이즈 메이저 그룹에 속할 수 있었다.
우리 인간이 참으로 어리석은 것은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께 눈물 뿌려 기도하고 간구해 응답받은 것을 어느 순간 너무나 빠르게 까먹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사업이 자리를 잡고 직원들을 점점 늘여가던 무렵이었다. 가까운 어른이 돌아가셔서 양평 고향에 문상을 갔다가 우연히 노름판에 끼게 되었다. 승부욕이 강한 편인 나는 원래 노름은 안했다. 그런데 이날은 발동이 걸려 100만원 정도를 땄다. 첫날은 모두 돌려주었는데 아주 재미가 있었다. 둘째날도 판에 끼어 또 돈을 따고 술도 한두잔 마시게 됐다.
늘 주님의 손만 잡고 살아가라는 어머니의 기도와 당부를 받은 나였다. 신학교에서 공부했고 일본과 한국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내가 이제 사업이 안정됐다고 긴장의 끈을 풀어버린 것이다. 한번 터진 봇물은 겉잡을 수 없었다.
서울 컨설턴트들의 모임에서 동료들이 술 안마시는 나를 ‘샌님’이라고 놀려댔다. 나는 이날 호기롭게 ‘내가 못 마시는 것이 아니라 안 마시는 것’이라며 오늘은 그 증거를 보이겠다고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불쌍한 영혼에게 두 번 다시 노름과 술을 입에 대지 않도록 강한 처방을 내리셨다. 내가 거의 의식이 없을 정도로 취한 상태에서 주변 사람과 시비가 붙게 되었고 상대에게 한 대 얻어맞은 나는 쓰러지면서 계단에 머리를 부딪쳐 버린 것이다. 뇌출혈을 일으킨 나는 며칠 동안 의식을 잃고 있다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병원에 온 아내와 딸에게 내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신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잊고 행동한 것에 절절히 후회를 했다. 퇴원하는 길에 신학교 은사셨던 송덕준 목사님을 우연히 만났다. 이 분을 통한 하나님의 보너스가 있었다.
***[역경의 열매] 임영서 (10) 공장 매입금 18억… 모든 것 내려놓자 주님이 선뜻
우연히 만난 송덕준 목사님은 제자인 내가 프랜차이즈 사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백화점 왕으로 불리는 존 워너메이커의 일대기 ‘성경이 만든 사람’이란 책을 보내주셨다. 난 이 책을 읽고 큰 감동과 은혜를 받았다. 바른 성경적 사업관과 가치관, 물질관을 그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하나님은 실족해 쓰러졌던 나를 바로 세우시고 사업지침서를 목사님을 통해 보내주신 것이 분명했다. 나는 두 번 다시 주님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바른 크리스천 기업인이 될 것을 기도했다.
이때부터 술좌석에 아예 끼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마지못해 가더라도 절대 술값을 내지 않았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술값 내고 사업이 잘되고 싶진 않았다.
뇌출혈 사건은 내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란 질문을 매사에 갖도록 만들어준 일등공신이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내게 가장 아쉬운 것은 공장시설이었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업체들에 납품해 주어야 하는데 다양한 메뉴가 많으니 좋은 시설의 공장은 필수조건이었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아주 좋은 조건에 공장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즉시 달려갔다. 평소 내가 운전하면서 ‘저 공장 정도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 공장이었다.
나는 하나님이 이 시설을 주실 것이란 흥분 속에 바로 기도에 들어갔고 마음이 편안해져 큰 액수가 부담이 됐지만 모험을 하기로 했다. 일단 계약을 하고 공장을 담보로 대출받아 잔금을 치를 생각을 했다. 내가 가진 현금을 모두 털어 계약을 했지만 잔액 마련은 쉽지 않았다. 은행이 공장을 감정하고 대출을 해주기엔 시간이 맞지 않았다.
진퇴양난이었다. 자칫하면 계약금만 날리게 될 판이었다. 건물주는 우리에게 너무 싸게 계약했다며 돈을 더 달라고 하면서 담보확인을 위해 온 실무자를 못 들어가게 하는 등 잔금 마련을 방해했다.
잔금기한이 2주 앞으로 다가왔지만 남은 18억원의 마련 방법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애가 탄 나는 새벽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나중엔 ‘하나님이 저를 흥하게 하시든 망하게 하시든 알아서 하시라’고 떼쓰는 기도까지 했다. 그러다 중도금 기한 3일 전 새벽에 회개기도가 터졌다.
“주님 두 손을 듭니다. 저의 인간적인 생각과 아집을 모두 접습니다. 주님께 내려놓습니다. 그동안 잘못한 것 용서해 주시고 결과야 어찌 되었든 주님의 뜻으로 받겠습니다. 이제 제가 두 손을 들겠습니다.”
이날 오전 내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생산성본부에서 CEO과정을 함께했던 모 은행 지점장이 강남점으로 자리를 옮겼다면서 내게 한마디 툭 던졌다.
“임 사장, 돈 쓸 일 있으면 내게 전화해요.”
나는 바로 달려갔다. 과정을 설명한 뒤 공식 대출 절차를 초스피드로 진행시켜 다음날로 15억원을 빌릴 수 있었다. 내 개인 부동산을 담보로 3억원을 더 받아 하루 전날 잔금을 다 치렀다. 극한 위기에서 피할 길을 주신 하나님이셨다. 필사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좋으신 하나님을 나는 마음껏 찬양했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 공장은 공사 후 멋지게 완공돼 전국 500여 가맹점에 신선하고 맛있는 재료를 공급하는 본산이 되었다.
경험이 풍부한 어부도 풍랑 앞에는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잠잠하라’고 하신 그 한마디에 파도도 숨을 죽였다. 나는 사업을 하면서 내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어깨에 힘을 주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정말 백사장의 모래 한 알만도 못한 존재임을 느낀다.
하나님 앞에서 잘난 척 까불어서는 안 된다. 사랑의 주님 앞에 늘 겸손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음성을 듣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 공장부지 사건을 통해 얻은 또 하나의 신앙적 깨달음이었다.
***[역경의 열매] 임영서 (11) 어머니와 ‘천안함’ 친구에 얽힌 닭갈비 이야기
나는 ‘죽이야기’ 브랜드 외에 닭갈비 브랜드도 갖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사업을 하게 된 특별한 사연이 있다. 어떻게 보면 슬프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다.
중학교 2학년 때 통학거리가 멀어 양평읍내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어머니가 1주일에 한 번씩 반찬과 쌀을 가지고 오셨다. 그런데 자취방 앞에 유명한 닭갈비집이 있었다. 서울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와 문전성시였다.
한창 식욕이 왕성하던 그때 나는 저녁마다 방까지 풍겨오는 닭갈비 냄새에 아주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장에 나가 쪽파를 팔아 힘들게 마련한 학비를 건네주시고 가셨다.
그날 저녁 나는 이 돈을 들고 닭갈비집으로 가서 실컷 사먹고 말았다. 어머니에게 혼나는 것보다 닭갈비가 더 나를 유혹했던 것이다. 다음주 토요일 반찬을 갖고 온 어머니에게 이실직고했다.
“야, 이놈아. 학비를 어떻게 마련했는데 그걸로 고기를 사먹냐. 철이 없어도 그렇게 없냐. 이놈아.”
화가 난 어머니는 내 등짝을 마구 때리셨고 잘못한 나는 그대로 맞고 서 있었다. 나를 때리신 어머니는 맘이 편치 않으셨는지 자취방에서 주무시고 다음날 아침 가시겠다고 하셨다. 아침에 나는 어머니의 낭랑한 기도소리에 잠이 깼다. 자는 내 이불 위에 손을 얹은 어머니는 울먹이며 기도를 쏟아내고 계셨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제가 학비로 고기 사먹은 아들을 때렸습니다. 얼마나 고기가 먹고 싶었으면 그랬을까요. 부모가 되어 닭갈비도 못 사주면서 때린 죄를 용서해주시고 이 일로 영서가 상처받지 않게 해주세요. 우리 아들은 돈이 없어 자식을 때리는 부모 되지 않게 해주시고 꼭 부자 되게 해주셔서 나 같은 죄를 짓지 않게 해주세요.”
어머니의 굵은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벌떡 일어나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고 싶었지만 자는 체했다. 그 대신 나중에 꼭 닭갈비집을 차려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고인이 된 친구 이창기와 얽힌 사연도 있다. 고교 3년을 같이 지낸 절친인 그와 나는 죽이 잘 맞아 뭐든지 함께 하며 깊은 우정을 나눴다. 졸업 후 전문대에 들어간 나와 달리 친구는 삼수도 실패하고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송별회를 닭갈비집에서 했는데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해군에서 근무 잘하고 나중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맛있는 닭갈비집을 차리고 싶어. 그때 우리 가게 오면 공짜 닭갈비 얼마든지 줄게.”
우리는 호기롭게 웃었고 이후에도 그와 나는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0년 3월 26일, 나는 내 눈을 의심하는 뉴스를 접해야 했다. 천안함이 폭침됐고 사망자 명단 가운데 친구 ‘고 이창기 원사’의 명단이 있었던 것이다. 해군에 계속 남아 직업군인이 됐던 친구가 천안함에 탔다가 사망한 것이다.
충격이 컸다. 친구를 좀 더 자주 만나고 하나님을 깊이 있게 전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러면서 친구가 닭갈비집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던 것이 떠올라 그 꿈을 나라도 이뤄주고 싶었다. 또 어머니와의 사연도 작용해 이 분야 프랜차이즈 개발에 본격 나서게 되었다.
사실 내가 죽 사업도 바쁜데 새 브랜드를 하나 또 만드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친구 창기를 생각하면 이것은 꼭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필용이 닭갈비이야기’다. 필용이는 내가 어렸을 때 집에서 쓰던 이름이다. 이 분야가 경쟁이 심해 가맹점 수는 많지 않지만 앞으로 해외 지점 개발에 적극 나서서 현지 직원들이 선교사의 몫을 감당할 수 있도록 지원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 꿈이 이뤄지도록 기도의 군불을 열심히 지피고 있다.
***[역경의 열매] 임영서 (12) 복음 실은 ‘죽이야기’ 중국을 넘어 세계로 비상
한국에서 ‘죽이야기’가 자리를 잡으면서 해외에서도 우리 프랜차이즈를 해보고 싶다는 연락이 자주 왔다. 나는 13억 인구의 중국시장에 맨 처음 눈을 돌렸다. 그러나 중국은 일반적으로 ‘프랜차이즈의 무덤’으로 불렸다. 중국에 진출해 재미를 본 요식업이 거의 없었다. 가격경쟁력에서 모두 무너졌다.
어머니는 내게 항상 융통성 있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다.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사고하라는 것이다. 나는 중국에서는 한국의 죽이야기 운영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최대한 중국인들의 문화에 맞도록 변형을 시도했다.
매장을 넓게 해 죽만 팔지 않고 비빔밥 덮밥 볶음밥 김밥 떡볶이 돈가스 등 40여종의 한국 음식을 함께 팔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죽이 40%를 차지하고 나머지 음식이 60%를 차지했다. 현지화에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중국 매장은 현재 20여개나 된다. 한국과 달리 허가를 먼저 받아야 하는 죽이야기 매장은 내년까지 100여곳이 문을 열기 위해 지금 대기하고 있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현지에서 한국보다 죽을 넣는 쇼핑백을 싸게 제작해 준다는 말을 믿고 100만개를 발주했다. 그런데 가격 단가를 줄이려 쇼핑백을 제작하면서 식품용이 아닌 공업용 본드를 사용한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뜨거운 죽그릇이 들어가면 열을 받아 본드 냄새가 강하게 났다. 알고 보니 중간에 이 일을 소개한 조선족이 돈을 가로채 생긴 결과였다. 나는 100만개나 되는 쇼핑백을 모두 폐기했다.
중국에서는 인테리어 공사를 하면 한국에서 1주일이면 충분한 공사를 2주, 3주를 넘기기 일쑤였다. 주방일과 홀일을 엄격히 구분해 서로 도와준다는 개념이 전혀 없었다. 직원을 많이 고용해야 했다. 나는 중국에서 점포가 오픈될 때마다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다. 비행기가 완전히 이륙해 안정적인 비행을 할 때까지 온 정성을 쏟았다.
손해도 보고 좌충우돌하며 시작된 해외 매장이 이제 중국을 중심으로 홍콩 미국 일본 싱가포르까지 진출해 있다. 앞으로 어느 나라까지 더 갈지 모르지만 죽이야기의 세계 정복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 죽에 복음을 담아 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도 바로 내 몫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중국에서의 발전적인 성장과 함께 한국에서는 믿었던 직원이 횡령을 하고 배신을 하는 사고가 이어졌다. 횡령이 처음 밝혀졌을 때 바로 고소를 하자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나는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내가 고소하면 당신은 범법자가 되고 가족과 자녀들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을 것이요. 당신도 전과가 생기면 재기도 힘들 것입니다. 정말 이제 새롭게 다시 열심히 일해 봅시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고 충성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그가 다시 횡령을 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나는 정말 인간이 싫었다. 그리고 내가 대학 시절부터 함께 알아온 유능한 선배를 회사 중역으로 스카우트했는데 이 역시 비리가 밝혀졌을 때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죽을 것 같았다. 돈을 떠나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나를 너무나 힘들게 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렸고 누가복음 16장 13절 말씀을 주셨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나는 회개했다. 그동안 내가 하나님보다 사업과 수익에 마음을 뺏기고 있었음을 스스로 발견했던 것이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음을 이 일을 통해 깨닫게 됐다. 나는 하나님보다 물질에 연연했던 것을 반성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간절히 간구했다. “하나님. 이제 남은 삶은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삶을 살겠습니다.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세요.”
***[역경의 열매] 임영서 (13) ‘죽이야기’ 18년의 노하우 “영적 힘·도움을 구하라”
창업 컨설턴트란 이름으로 활동한 지 벌써 18년이 지났다. 직영하는 ‘죽이야기’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창업에 대한 노하우를 나누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음식점을 경영할 때 요리학원을 다니고 음식을 잘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낸 음식점이 음식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 낸 음식점보다 실패율이 월등히 높다는 사실이다. 이유를 분석해 보니 자신의 음식에 자부심을 갖는 업주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집하고 그렇지 못한 업주는 늘 노심초사하며 고객들의 반응과 의견을 청취해 이를 반영했던 것이다.
주변에 음식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내가 전문가니 ‘장사 잘되는 법’에 대해 조언을 해 달라고들 한다. 이때마다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이제 음식점 위치가 좋고 싸고 맛있게 하며 열심히 뛰면 된다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음식점도 이젠 장사가 아니라 경영마인드를 가져야 합니다. 결국 경영자의 자질과 마인드가 성패를 가릅니다.”
나는 경영주가 근시안적 사고를 버리고 마케팅기법과 장기적 안목을 갖고 접근하라고 한다. 그것은 무조건 겸손(친절)하고, 끊임없이 배우려 하며, 정보 습득력이 뛰어나야 하는 것들이다. 결국 발 빠르게 대처하는 스피드 있는 업주가 성공한다. 어제의 정보가 오늘은 쓰레기가 된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또 한 가지 미국은 음식점을 찾을 때 스마트폰 검색을 통해 갈 곳을 미리 정하는 경우가 45%라는 통계가 나왔다.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인터넷 및 스마트폰 보급률이 높으니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결국 모바일과 온라인을 선점하는 가게가 선택받는 폭이 넓어진다.
지금은 인터넷이 지구를 점령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업주들에게 “이리 저리 맛집을 순례하는 ‘발품’을 팔지 마시고 ‘손가락 품’을 파세요”라고 권면한다. 모마일에서 음식점 평과 깨알자랑을 진솔하게 올리는 노력이 고객들에게 더 어필하기 때문이다.
이젠 전단지와 현수막 대신 그 비용으로 모바일에 파고들 것을 권한다. 이 분야에 문외한이라고 고개를 저어선 안 된다. 이것은 내 음식점을 시대에 뒤떨어지게 운영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팁을 더 첨가하면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이야기를 말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했다. 여기서 이야기는 결국 콘텐츠다. 음식점이 성공하려면 자신만의 ‘이야기’ 즉 콘텐츠를 가져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자꾸 퍼져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 음식점은 ○○하다’는 이야기가 최소 몇 가지는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장점 중에 하나가 정리정돈을 잘한다는 것이었다. 물건을 적재적소에 잘 넣어 쓰기 쉽게 하고 보기 좋게 잘 정리하는 것도 기술이다. 당연히 청소도 깨끗하게 잘 해야 한다. 위생과 직결되는 음식점은 청소가 잘 되어 있고 깨끗한 느낌만 주어도 고객들에게 ‘음식도 깔끔하게 만들 것’이란 신뢰감을 준다. 경영이 머리 아프고 힘들면 정리정돈과 청소라도 잘 하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가장 중요한 음식점 운영자의 선택이 남았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이다. 믿음은 상황 상황에 대한 유연함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우리에게 선물로 준다. 지금은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이 위기를 넘겨 잘되게 해 주실 것이라는 신앙은 엄청난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래서 나의 주제가는 복음성가 ‘일어나 걸으라’이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영적으로 힘과 도움을 받는 주인과 그런 것 없이 오직 내 힘으로만 뛰는 업주 중에 누가 유리하게 가게를 운영할 수 있을까? 오늘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에게 내가 질문을 드리고 싶은 부분이다.
***[역경의 열매] 임영서 (14) 기독 실업인의 최고 덕목은 ‘상혼’보다 ‘믿음’
한때 나는 목회자의 길이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신학교에 갔었다. 그래서 진로를 바꿔 일본으로 유학 갈 때 바른 선택인지 갈등이 많았다. 그런데 결국 내가 목회자가 되는 것은 어머니의 소망이었고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응답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을 기억했다.
요즘 청년취업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일자리 문제, 결혼 적령기 문제 등이 대두되는데 나는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이 청년들 자신이 진짜 자기 모습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각양각색으로 만드셨다. 아무리 쌍둥이라도 서로 다른 부분이 있고 지구촌 모든 인간 중에 같은 사람은 없다. 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숨기고 아닌 척 해 보아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경 속의 위대한 인물들도 다 달랐다. 그 다른 면들을 하나님은 쓰셨다. 나는 누구에게나 다가가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성향이자 그동안 사업하며 훈련된 모습이다. 군고구마 장사와 꽃 장사 등 다양한 경험을 거쳐 이제 다국적 프랜차이즈를 하면서 얻어진 부분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이 인간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반드시 쓰시려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그 길을 바르게 걷는 삶은 참으로 행복하고 축복된 삶이다. 내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보잘것없고 초라해도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고 산다면 이는 성공한 삶이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만 하면 무조건 잘 될 것이라 믿는 것이다. 입술로만 고백하고 행동은 없는 크리스천들이 많다. 하나님은 이들의 손을 무한정 들어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면 손과 발을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뛰어야 한다. 부지런해야 한다. 부모의 신앙으로 자녀들이 무조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
나는 사업을 통해 성공의 범위를 점점 넓혀 나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선교하는 영향력 있는 평신도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돈을 따라가는 사업가가 되지 않기로 다짐했다. 오랜 경험으로 사업을 하다 보니 ‘돈 돈 돈’을 외칠수록 돈을 못 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급하면 돈은 붙지 않는다. 또 돈이 결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 지나친 돈에 대한 집착은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 나는 야심차게 많은 비용을 들여 3개의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준비했었다. 이것을 내 놓으면 대박을 칠 것이란 생각을 하고 은밀하고 철저하게 분석해 비장의 카드로 삼았다. 그것은 ‘미스터 빈대떡’ ‘노발대발’ ‘육회달인’이라는 브랜드였다. 나는 이 브랜드를 들고 2011년 미국 버지니아 메리어트호텔에서 열린 모임에서 300여명의 해외 프랜차이즈 바이어들을 만났었다. 그들에게 우리 회사를 소개하고 ‘죽이야기’를 포함한 새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행사를 잘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갑자기 내가 만든 3가지 신생 브랜드가 모두 ‘술안주용’이라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즉시 내가 하는 이 사업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란 생각과 연결됐다.
세계선교 비전을 가지고 사업을 하겠다는 내가 이 정도 생각밖에 못한 것이 참 부끄러웠다. 나는 다음 날 아침 바로 국제전화를 걸어 직원에게 알렸다.
“오늘 이 시간부터 준비한 세 브랜드는 모두 철수합니다. 자료를 모두 버리세요. 재검토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단단히 약속을 드렸다. 아무리 돈이 되더라도 술과 관련된 프랜차이즈는 하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역경의 열매] 임영서 (15·끝) “인생 후반 경영도 주님 손만 잡고 가게 하소서”
나는 인생도 축구와 같다고 생각한다. 열매를 맺기 위해 달려가는 전반전이 있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후반전이 있다.
난 이제 막 인생 후반전을 시작했다. 그동안 사업을 하면서 쌓아온 노하우들이 이제 결실을 맺도록 최선의 노력으로 경주하려고 한다. 먼저 ‘죽이야기’ 등 우리 브랜드가 3년 이내 ‘773’을 완성하도록 기도하며 뛰고 있다. 773이란 가맹점 700개를 달성하고 이 가게들이 하루 평균 70만원 이상 매출을 올리며 본사 수익도 하루 3억원을 달성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2019년까지 해외에 브랜드 가게를 더 많이 수출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 이미지를 고수하려고 한다.
또 앞으로 닥쳐올 식량 위기를 대비한 사업도 준비 중이다. 유기농법을 통해 쌀과 고구마 등 농산물을 키워 안심 먹거리를 제공하는 사업을 하고 싶다.
고향인 양평에는 성령과 함께하는 ‘자연 속 힐링센터’를 세우고 싶다. 죽을 찾는 고객들 중에는 유독 질병을 가진 환자가 많다. 소화력이 약해져 죽을 선호하게 된 것인데 암과 당뇨, 심장병 등 난치성 환자와 우울증 등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 이분들이 자연에서 치유 받고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고 싶다. 그래서 머릿속에 계속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의류사업, 비행기 기내식 사업 아이디어도 점점 구체화하고 있는 중이다. 사업이 커지고 이로 인해 일자리가 창출되어 많은 사람이 즐겁게 일할 수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분명하다.
내가 구상하고 있는 사업들이 구체화되면 최소 1000명의 직원이 필요하고 이로 인해 4000여명의 가족이 공동체에 묶이게 될 것이다. 또 우리와 관련된 여러 기업도 상호 보완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주고받게 될 것이기에 기대가 된다. 여기에다 나 혼자의 성공에 머물지 않고 나를 능가하는 사업가 12명을 키워 한국과 세계를 주름잡게 만들고 싶다.
나는 경영자로서 문제를 만나면 그 강도가 세게 느껴진다. 상처도 받고 괴로워할 때도 많다. 터무니없는 요구와 협박도 있고 왜 이리 힘든 일을 선택했는지 후회한 적도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 속에서 바울의 고백을 발견하고 마음속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것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란 외침이었다. 바울의 말은 기업 사장으로서 너무나 실감나게 다가왔다. 매일 죽음을 무릎 쓰고 살아간다는 절실함 속에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며칠 전 어머니 산소를 찾았다. ‘주님 손만 잡아라’고 인생의 정답을 깨우쳐 주신 어머니에게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머니 이렇게 주님 손 붙잡고 여기까지 잘 왔어요. 저 잘 성장했지요. 기쁘시죠. 저도 제 아이들에게 ‘주님 손만 잡고 가라’고 교육을 단단히 시키겠습니다.”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감사의 조건들이 많이 떠오른다. 아내 안성희 집사는 나로 인해 많은 고생을 했지만 불평 없이 내조하며 잘 따라와 주어 감사하다. 부족한 나를 믿어 준 가맹점 점주들께도 감사드린다. 나의 멘토가 되어 준 많은 분도 있고 조건 없이 우리 회사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많은 이에게도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지금 이 시간에도 역사하신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생사화복을 지켜보시고 주관하신다.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우리 인간이 이런 하나님의 숨결을 느낀다면 인생이 좀 더 진지해지고 충실해지지 않을 수 없다. 부족한 글을 끝까지 읽어준 독자들께도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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