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함께읽기로 선정 된 첫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딜쿠샤를 방문하고 역사박물관 전시를 관람할 계획이다.
<호박 목걸이> 딜쿠샤 안주인 메리 린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
저자 메리 린리 테일러는 1889년 영국 첼트넘에서 명문가의 딸로 호기심이 많고 탐험가적인 기질을 타고 난 것 같다.
연극배우로 활약하면서 아시아 각지를 여행하던 중 일본에서 만난 미국 남성과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1917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코리아' 라는 나라에 도착해서 '딜쿠샤'(힌두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 기쁨)란 근대 건축물을 짓고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1942년까지 서울에서 살았고, 외국인 사회에서 유명인사로 활약했다.
테일러의 남편 로버트 테일러는 한국에서 광산업을 하던 사업가로 미국인 통신원 자격으로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해 세계에 처음 알리게 되고,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1948년 유해를 양화진 외국인묘역에 장례를 치렀다.
"호박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는 건 한국 사람들하고 똑같네요. 이 보석을 가리키는 한국 말 '호박'은 '호랑이의 영혼'이라는 뜻도 있거든요." 23p
일본인들은 예절을 대단히 중시하며, 그 덕분에 생활의 번거로움을 단순하게 해결하기도 한다. 집에 손님이 찾아 왔을 때 안주인이 욕실에서 나와서 거실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냥 벗은채로 지나간다. 그럴 경우 방문객은 그 여인을 쳐다보지 않는다. 예절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안주인이 기모노를 차려입고 다시 나오면 그때서야 처음으로 만난 것처럼 서로 인사를 나눈다.55p
우리집은 무척 활기찬 곳으로 모험과 아름다움이 가득했다.모험은 아버지의 영역이고, 아름다움은 어머니의 영역이었다.74p
모두 상상력과 창의력을 모아 준비했기 때문에 그때까지 참석했던 어떤 파티보다도 즐거웠다../
그중에서도 서울 유니온클럽(경성구락부)에서 열린 모임이 가장 재미있었다.. /
우리가 모임 장소로 사용하던 곳은 조선 왕실의 도서관으로 쓰이던 건물(중명전)로, 궁궐에 화재가 난 후 고종 황제가 2년 동안 편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곳에서 황제는 한국의 재정과 외교에 관한 모든 권리를 일본에게 이양하는 조약을 강제로 체결해야만 했고, 이 조약은 일본이 한국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151p
만약 일본이 이 장례식을 통해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거라고 기대헀다면, 크나큰 착각을 한 것이다. 자기 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조상들이 있는 저세상으로 가는 모습을 말없이 침통하게 지켜보는 한국인들의 가슴속에는 증오와 절망이 가득헀을 것이다. 만세운동이 실패하고 수천 명이 살해당했을 뿐 아니라, 이제는 마지막 남은 자유의 상징과 같던 황제마저 죽었기 때문이다.
235p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조선시대 권율 장군의 집터이며, 이 은행나무도 권율 장군이 손수 심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현재 수령이 약 420년으로 추정된다. 나무가 있는 행촌동은 1914년에 일제가 은행동과 신촌동을 합쳐서 만든 동 이름이다. 272p 각주
건물의 서쪽동은 양쪽으로 여닫는 아치형 문을 두어 거실과 차단했다. 이 문 역시, 복도와 화장실 벽에 사용된 담황색과 푸른색 타일과 함께 철거된 궁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282p
-궁궐의 타일과 문이 외국인의 집을 짓는데까지 사용되었다니..
소망은 우리 삶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품었던 모든 소망은 이루어진 것 같고,
내 호박 목걸이의 구슬들은 그 소망들 하나하나를 상징하는 것 같다. 289p
-안락함을 포기하고 도전과 모험으로 일생을 산 그녀의 긍정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저주라니, 당친않은 소리. 잊어버려요. 우리 실수였소. 피뢰침을 설치하지 않은 실수. 메리 잊지 말아요. 축복도 저주만큼 강력하다는 걸. 우리 집은 축복을 받았지 않소."300p
-벼락 맞아 페허가 된 집을 재건해야 하는 상황에서 브르스가 한 말이다.
저자 못지않게 긍정의 아이콘이고 현실적이다. 종교에 대한 신념과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 엿보인다.
그 당시 그들이 바라 본 한국사람들은 아파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불이나면 불의 신령이 노할까 봐 두려워 불을 끌 생각은 하지 않고 지붕에 올라가서 불의 신령이 자기 집 쪽으로 오지 못하게 옷을 흔들고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내가 처음 서울에 도착했을 때 역으로 마중 나와준 그들을 첫 대면헀다. 그때 그들은 보석상 유리 진열장 너머에 있는 호박 구슬들에 불과헀다. 그러나 이제는 소중한 나의 호박들이 되었고, 그중에는 보석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호박들도 많았다. 내가 그동안 이 호박 구슬들을, 이미 내 삶의 배경이 되어버린 나의 경험이라는 호박 구슬들과 함께 나의 인생이라는 실에 꿰어왔음을 느꼈다. 334p
-인생의 실을 잘 꿰고 사시는 샘들을 볼때마다 나를 돌아보고 닮아가려고 노력한다.
신랑은 말총으로 만든 검은 관모를 썼는데, 모자 뒤쪽 중심에 날개 같은 것이 양쪽으로 뻗치게 달려 있었다.
그것은 옛날에 벼슬아치들이 쓰던 모자였다.
"저것은 날개가 아닙니다, 부인." 원씨가 내 말을 바로잡아주었다. "임금님 말을 경청하는 귀를 나타내는 것이랍니다.
벼슬이 높을수록 귀의 크기도 더 컸지요. 그리고 임금님의 관모에는 귀가 위를 향해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하늘로부터 지혜를 얻어야 하는 분이니까요."399p
-읽고보니 어딘가에서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다양하게 관심이 많은 저자를 통해 또 새롭게 알게된다.
갈마 별장에서 쫒겨나 화진포로
그즈음 일본은 소련이 한국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 황급히 원산항 앞 섬들을 요새화했다.426p
-찾아보니 원산은 현재 북한지역으로 갈마공항이 있다. 그리고 화진포는 김일성 별장과 이승만 별장이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다.
기회가 되면 함 가 보고 싶다.
화진포에서 만난 제주도 해녀들
배에 탄 남자들은 어느 동굴 앞에 배를 대더니 돛을 차양 삼아 햇빛을 가리고 동굴 앞에서 모닥불을 지폈다. 해녀들이 배 위로 올라갔는데, 놀랍게도 알몸이었다. 그들은 배 위에서 옷을 주워 입고 내려오더니 해변으로 걸어왔다.
남자와 여자들 모두 한국 사람에게서 보기 드문 구불구불한 곱슬머리였다. 게다가 남자들이 음식을 만들고 여자들은 구경만 하는 것도 특이헀다. 429p
-사실일지 궁금하다. 잠수복이 들어오기 전에는 알몸으로 잠수를 했을까?
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친척을 받아줄 수 있을 만큼 큰 집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그 사람은 친척들을 받아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 .이를테면 누구든 성공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얻은 수익을 친척들과 나누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친척들은 자기가 그를 이용하고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433p
-도시로 상경하면 친척집에서 머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이 그 당시 외국인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나 보다.
"감사합니다. 테일러 씨와 부인. 여러 해 동안 저는 이 각대가 결코 이 나라 밖으로 나가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 각대를 지켜왔습니다. 이것은 이 나라의 보물이며 이 나라에 속한 물건이니까요. 내가 이 각대를 비밀로 간직해온 또 한 가지 이유는 서울에 있는 이왕가 박물관이 아닌 엉뚱한 박물관으로 보내질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평범한 각대가 아닙니다.
여기서 김 주사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이것은 우리나라 독립의 상징물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조공을 바칠 때 청나라 황제가 고종 황제께 선물한 것입니다. 그 조공을 끝으로 우리는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지요."
. . .
1919년 고종 황제께서 승하하신 뒤 이 각대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런데 어는 날 보부상이 우리 사무실에 이것을 가지고 나타난 것입니다. 나는 이 각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했지요."439
-테일러 부부는 오랫동안 집안일을 봐 주던 김 주사의 환갑잔치 선물로 각대를 선물했다. 그 각대는 현재 어디있는지, 김 주사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기록에 남아있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그들이 뒤쳐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이하게도 핵심을 따져보면 우리가 더 고집스런 경우가 많아요. 우리 서구 문화는 아직 얼마 되지 않았고, 민주주의가 도입된 지도 200년이 채 지나지 않았죠. 반면에 그들은 4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어요. 새로운 사상이 철저히 퍼지려면 그것에 동화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들은 우리에 비해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무척 어려워하죠. 하지만 그렇게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한국 사람들은 우리와 비슷하게 느끼고, 똑같은 감정들을 지니고 있어요."444p
-그 당시 서양에 비하면 모든 것이 남루하다고 느꼈을텐데도 저자는 열린 마음을 갖고 인간을 바라봤던 것 같다.
외국인에 비친 우리의 모습에 알지 못했던 부분들을 알게 되었고,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힘든 시기를 살았던 우리민족들을 마주할때면 안타깝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하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공익을 해치는 사람들은 여전하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고 김 주사처럼 가치를 알고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들을 보면 든든하고 감사했다.
저자가 마주하는 한국사람들이 다양한 계층이 아닌 것이 아쉽기도 하고, 항공편이 자유로운 현재도 쉽지 않은 거리인 영국에 아들을 맡겨놓은 것도, 한국에서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며 탐험한 것도, 위험을 무릅쓴 다양한 경로의 외국행도, 그 가운데 미국에서 미술학교에 들어 간 것도, 번개맞은 딜쿠샤에 다시 돌아와 생활하고 남편의 유해를 한국에 가져와 안장시킨 것도 모두가 놀랍다.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기보다는 개척하고 탐험하며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감명깊었다. 한편으로는 나라 빼앗긴 땅에 와서 그들이 가진 자본력으로 많은 것을 누리는 모습을 본 그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생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