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가고 아침이 되자 차라투스트라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띠를 두르고는 그의 동굴 밖으로 나왔다. “좋다! 내가 이렇게 깨어 있는데도, 저들은, 보다 지체 높은 인간들은 아직도 잠에 빠져 있으니. 저들은 나의 제대로 된 길동무가 못 된다! 내가 여기 내 산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저들은 아니다.” 솟아오르는 해를 맞이하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향해 말했다. “좋다! 참으로 내 맘에 든다. 그래야 한다. 내가 잠에서 깨어 일어나니 나의 짐승들도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구나. 너희는 나의 제대로 된 짐승들이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 제대로 된 인간이 없구나!” 그때였다. 갑자기 무수히 많은 새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어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보라, 그에게 더욱 기이한 일이 일어났으니. 그러는 동안 저도 모르게 어떤 무성하고 따뜻한 머리 갈기 속으로 손을 넣고 만 것이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그의 앞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사자의 부드럽고 긴 포효였다. “조짐이 나타나고 있구나. 나, 내 아이들이 가까이 와 있구나. 내 아이들이.”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고 있는 동안 차라투스트라는 이 한 마디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차라투스트라의 동굴 안에 있던 보다 지체 높은 인간들도 잠에서 깨어났고, 밖으로 나와 차라투스트라에게 다가가 아침인사를 할 생각에 나란히 섰다. 그러나 저들이 동굴 문에 이르고, 저들의 발소리가 저들을 앞질러 시끄럽게 울리자 놀란 사자가 갑자기 차라투스트라를 뒤로하고는 동굴을 향하여 사납게 포효하면서 돌진했다. 보다 지체 높은 인간들은 그 포효를 듣자 일제히, 그리고 한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동굴 속으로 한순간에 사라졌다. “무슨 소리였지? 방금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그렇다. 여기 바로 그 돌이 있구나. 어제 아침 나 그 위에 앉아 잇었지. 그때 저 예언자가 내게 다가왔고, 나 여기에서 처음으로 그 부르짖음을, 내가 방금 들은 커다란, 저 절박한 부르짖음을 들었지. 어제 아침 저 늙은 예언자가 내게 예언했던 것, 그것은 그대들이 처해 있는 곤경에 관한 것이었지. 그가 나를 그대들이 처해 있는 곤경으로 꾀어내어 시험해보려 했던 것이지. ‘오, 차라투스트라여, 나 그대를 그대의 마지막 죄과로 꾀어내기 위해 왔노라.’ 그는 말했지. 나의 마지막 죄과라고? 무엇이 나의 마지막 죄과로서 내게 아직 남아 있다는 말인가?”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민의 정이다! 보다 지체 높은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이다! 좋다! 그것도 이제 끝이 났으니! 나의 고뇌와 나의 연민의 정, 그것이 다 뭐란 말이냐! 나 행복에 뜻을 두고 있기라도 한가? 나 내게 주어진 과업에 뜻을 두고 있거늘! 좋다! 나의 때가 온 것이다.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의 시작이다. 자, 솟아올라라, 솟아올라라, 너, 위대한 정오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그의 동굴을 떠났다. 컴컴한 산 뒤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처럼 불타는 모습으로 늠름하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끝
※ 대칭성의 밤이 기고, 비대칭성의 아침이 되었다. 밤사이 대칭성의 몽중에서 지제 높은 자들을 향한 구원의 복음을 쏟아낸 차라는 아침이 되자 꿈에서 깨듯이 지체 높은 인간들이 길동무가 아님을 자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짐승들, 새떼, 사자가 갈을 같이 갈 아이들이라고 한다. 잠에서 깨어 차라에게 인사하러 나온 보다 지체 높은 인간들이 사자의 포효에 놀라서 동굴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자, 그간에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하여 다시 점검하기 시작한다. 그간의 일들이 그들의 곤경으로 꾀어내어 자신을 시험해보려고 했던 것임을 기억하고 예언자의 “마지막 죄과”에 대하여 내면에서 답을 찾는다.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죄과임을 발견하고 그것도 끝을 낸다. 고뇌, 연민의 정을 가지고 타인을 구원함은 행복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먼저 나의 과업, 나의 구원이 먼저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구원의 정점인 위대한 정오를 향하여 그의 동굴을 떠난다.
치고 빠지고, 아주 영리한 차라투스트라의 구도행보이다. 예수와 보살이 행한, 한알님을 발견하는 기쁜소식을 중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전해주는 행복도 중요하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기독교, 불교를 보면 중생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예수와 보살이 온갖 고난 속에서 전한 구원의 진리가 전혀 스며들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실적 비판에서 출발한 차라의 구도행이기에 그러하다. 구원은 철저히 자신의 문제이므로 성인이 대신 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오는 깨달음이 절정에 이른 때이다. 주역괘로는 ‘중천건’에 해당 할 것이다. 자정이 ‘지뢰복’이라면, 정오는 ‘천풍구’에 해당되나, 차라가 의미하는 정오는 ‘중천건’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차라투스트라> 강독 세미나를 하면서 내내 궁금했다. 차라의 마지막 메시지는 무엇일까? 답은 “연민의 정을 끝내자” 이다. 차라투스트라가 1-3부 동안 괴로워해왔던 문제였다. 예수도 결국 ‘연민의 정’ 때문에 구원에 실패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으면 중생들, 제자들에 묶이어 영리해질 수 없다. 그래서 매번 차라는 연민의 정에 머물지 않기 위해 스스로 떠남을 선택한다. 4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지체 높은 인간들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고 ‘몽중 보행자의 노래’에서 구원을 강조하면서 집착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바로 다음날 아침이 되자 떠남을 선택한다. 도는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다. 위버멘쉬도 그러하다. 차라도 여전히 도인(위버멘쉬)의 여정길에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보다 지체 높은 인간들’을 만났다고 한들 그들을 내가 구원해줄 수는 없다. 차라는 차라의 길을 가는 도인일 뿐이다. 그러면 아무런 집착도 없고 괴로움도 없다. 유학에서는 이를 ‘爲己之學’이라고 한다. 모든 공부는 나를 위한 공부일 뿐이다. 爲人之學, 다른 이를 위한 공부는 허세다. 불교로는 我相이다. <금강경>에서 “아상”을 반복해서 경계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구도행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차라의 마지막 메시지는 정말 임팩트하다. 바로 유학과 불교의 수행론의 핵심을 담아내고 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金剛經 第五分>
子曰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論語, 憲問編>
임제선사는 <임제록>에서 다음고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逢佛殺佛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고, 공자를 만나면 공자를 죽이고 차라투스트라를 만나면 차라투스트라를 죽이라는 말이다. 즉 道人(위버멘쉬)은 부처라는 무덤, 예수라는 무덤, 공자라는 무덤에 머무는 자가 아니다. 끊임없이 길 위에 서는 자이다. 예수, 부처, 공자라는 죽은 자의 무덤에 머무는 것을 차라투스트라는 ‘연민의 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본원적 고향(한알)을 향해 길을 가는 자를 ‘위버멘쉬’라고 정의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마지막 메시지에서 위버멘쉬의 길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