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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1절-6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기도: 저희들이 온전하고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모두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진리의 빛으로, 생명의 빛으로 저희들에게 비춰주셔서 영적인 면에서 부족하고 미달되고 잘못된 것, 또 신체적인 면에서도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좋지 못한 것을 온전하게 낱낱이 고쳐주옵소서.
원하옵건대 저희들이 잠깐 동안 나그네 생활을 할 동안에 저희들의 몸도 온전히 건강하여 진리의 복음의 말씀에, 하늘나라 천국운동에 의의 병기로 쓰여지고 싶사오니 저희들의 마음을 살펴주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쁘신 대로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이 시간에 함께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 세상이라고 하는 세상은 시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바람이 부는 곳이다. 무슨 바람이냐? 정치바람, 교육의 바람, 과학의 바람, 전쟁의 바람, 치맛바람, 춤바람, 무슨 체육의 바람, 컴퓨터 바람 등 별별 바람이 다 분다.
큰 길은 큰길대로의 바람이 불고, 골목길은 골목길대로의 바람이 분다. 바람이 일률적으로 불지를 않는다. 어떤 골목에서는 다른 골목에서는 일지 않는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고, 또 아무리 큰길이라도 바람이 조용한 곳도 있고, 어떤 골목에서는 시베리아 바람이 한꺼번에 세차게 몰아붙이는 곳도 있다. 강한 바람도 있고, 시원하고 선선한 바람도 있다.
세상에는 별별 바람이 다 있다. 종교계는 종교계대로 부흥 확장의 바람이 분다. 부흥 확장시키기 위해서 제각기 나름대로의 특기자랑, 장기자랑, 신유의 은사바람이나, 방언바람이나, 무슨 축복의 바람이나, 영성바람, 무슨 귀신의 바람, 무슨 기독교 문화 예술의 바람 등 상당히 많이 분다. 각 나라마다, 사회마다, 가정마다, 교회마다, 골목마다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세상바람을 안 타는 사람이 별로 없다.
엊그저께 무슨 바람이 불었느냐? 세상 풍습의 바람(설 명절)이 세차게 불었다. 이 바람에 안 날려간 사람이 별로 없다. 그 분위기를 타는 사람은 바람을 타는 사람이다. 할 일이 있어서 고향에 간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지 않고 의례히 ‘명절이니 가봐야지’ 하는 것은 그 마음속에 그 느낌이 있는 거다. 그걸 말하는 거다. 우리가 지혜를 써야 할 것은 물이 한꺼번에 어느 방향으로 쏟아져 내려갈 때는 거기에 들어서면 안 된다. 들어서게 되면 원치 않아도, 몸부림을 쳐도 쓸려가기 마련이다. 이치를 어기면 안 된다.
바람을 안 타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문제는 왜 바람이 부느냐? 바람이 부는 그 숨어있는 뜻이 무엇이냐? 세상 사람들은 부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에 대한 꿈을 잔뜩 품고 그 바람에 맞춰 살고 있다. 사람들이 그 바람에 맞추지 않으면 도태당하는 것 같아서 모두가 그 바람에 붕붕 떠서 그 바람에 맞춰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어릴 때는 그런 바람을 잘 타는 부모와 선생에게 그런 꿈의 교육을 받고, 청년 때는 자기 스스로가 그 바람을 타려고 노력을 하고, 장년의 때에는 그 꿈이 실현되기를 바라며 그걸 실현시키느라고 자기의 생을 다 투자한다. 노년의 때에 들어가서는 그 꿈이 실현이 안 된 자는 인생의 허탈감에 눈물을 보이고, 꿈이 실현된 자는 그것을 붙잡고 안 놓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붙잡았다고 해도 그것을 가지고 얼마 누리지도 못하고 다 버리고 가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다.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러고 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바람을 타는 인생은 헛 인생을 살고 가는 꼴이다. 성경이 그 말을 하고 있다. 해 아래에 새 것이 있느냐, 없느냐? ‘해 아래’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세상을 말한다. 세상에서는 신령하거나 거룩하거나 썩지 않는 것은 없다. 다 썩는다. 새 것이 없다. 물건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게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들어서 세상에 살게 했고, 세상에 사는 동안에 예수님처럼 닮아오라고 예수님을 보냈고,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는 생활의 지침으로 성경을 주어서 세상에 살면서 성경을 기준해서 깨닫고 실습을 해보라고 사건도 주고, 물질도 주고, 건강도 주고, 시간도 주고, 사람도 주고 했는데 인간들은 이것을 모르니 사건 환경을 붙잡고 마찰과 대립과 충돌을 일으키고, 또 제 마음에 안 맞으면 원망불평을 하고 제 마음에 맞으면 그것을 붙잡고 누리느라고 허비 낭비를 한다. 그러니 이래저래 참 사람으로 만들어진, 새사람으로 만들어진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보면 엄청나게 고생을 하며 살았는데도 만들어진 것은 없고 아주 못된 성질로만 깡깡하게 악발이가 돼버렸다. 가난하게 살다가 부자가 되면 그것을 붙잡고 한숨 돌리고 누리느라고 사람 된 구석이 없다.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고, 못 깨달으니 그럴 수밖에 없고, 자기의 마음중심이 전부는 세상으로 나갔으니 사람이 만들어진 구석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악인이 누구냐 하면 앞에서 말한 것에서 힌트를 얻어서 말을 한다면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했으니 세상바람에 불려 다니는 것이 악인이다. 그러느라고 새사람으로 만들어진 것이 없는 게 하나님께서 보시는 악인이다. 일반사회에서는 이런 게 악인인지 선인인지 전혀 모른다.
세상바람에 불려 다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악인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를 보고 세상바람을 이용을 하라는 거다. 돛단배는 배 뒤에서 바람이 불면 그대로 앞으로 나간다. 그런데 배 앞에서 불면 그 바람을 이용해서 돛의 방향을 바꿔서 배가 지그재그로 앞으로 나가게 한다. 이게 바람을 이용하는 거다. 신앙 면에서도 이치를 모르면 누림성이 되고, 이치를 알면 그걸 이용을 해서 목적지로 갈 수가 있다.
세상바람에 불려 다니는 것이 악인인데, 왜 바람에 불려 다니는 거냐? 시:에 나와 있는데, 왜 바람이 불 때 날아가지느냐? 속이 비어서. 알곡이 아니기 때문에. 알곡이면 바람에 날려가지를 않는다. 알곡이 아니기 때문에 바람을 탄다. 그러니까 바람을 타기 전에 이미 알곡으로 되어있지를 않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악인이다. 그리고 바람에 불려 다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다니는 것이 악인이다.
악인이 누구냐? 인간 자기를 만드신 분의 소원 목적을 모르는 것이 악인이다. 악인이 누구냐? 불에 타질 임시적인 세상을 누릴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악인이다. 악인이 누구냐? 환경의 소산물로 사는 자가 악인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룰구원으로 살지 않고 자기 정력낭비, 자기 물질낭비, 자기 시간낭비를 했으면 악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악인은 일반차원에서 보는 악인과는 질적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복 있는 사람은 바람을 타지 않는다. 시대적 종교적 각종 바람을 타지 않는다. 바람이 부는 세상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모든 사건과 환경을 다 이용하고 응용하고 활용을 해서 자타의 이룰구원을 이뤄간다. 그러니까 사람이 진리 자체화, 진리 실상화, 진리 인격화로 만들어 나가는 것에 소원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진리의 사람은 아무 것도 안하는 게 아니라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세상을 이용하고 응용하고 활용하는 게 들어있기 때문에 사람과의 연관성을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살면서 이룰구원으로 사람과 연관성을 짓지 않고 사람을 이용해서 이 세상의 것을 자기의 안일에, 부귀공명에 투자하고 써버리는 것은 악인이 되는 거다.
진리의 사람은 부지런하고 명철하고 지혜롭고 과학적이고 활발하고 모든 사고방식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고방식으로 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볼 때 잔병을 앓을 수가 없다. 부지런하기 때문에 삶이 활기가 있다. 세상을 즐겁게 산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남 보기에 고생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늘 찬송이다. 기쁘다. 어떻게 보면 감격으로 살고 있다. 그러니 병이 오려야 올 수가 없는 거다.
그런데 힘들다고 푹 주저앉고, ‘이놈의 세상’ 하면서 팔자타령을 하는 것은 알고 보면 전부는 자기가 못나서, 못 깨달아서 그런 거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면 이미 지나간 것은 몰랐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고, 이제는 깨달았으면 앞으로는 세상의 바람을 타지 않고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각오와 결심이 나와야 한다. 이걸 믿음생활이라고 한다. 가정에서나 사회적으로 진리사상을 가지고 사는 것을 믿음생활이라고 한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개념을 보통 보면 교회에 빠지지 않고 잘 나가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생각을 한다. 우리는 믿음생활을 잘 해야 한다.
세상바람을 타지 않으려면 자기 속에 알곡이 맺혀야 한다. 진리로 무장이 돼야 한다. 이러면 신앙정신으로 보면 자기의 마음이 세상바람에 날려가는 상태를 자기가 느낄 수 있는 거다. 그럴 때는 등산을 할 때 밧줄을 고리로 해서 움직이지 않는 곳에 걸고 그 밧줄을 잡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듯이 자기 마음을 진리에 박고 그 진리를 잡고 나가야 한다. 안 그러면 예수를 믿어도 스스로 고생을 만든다. 이러면 아무리 ‘진리 진리’ 해도 자기가 못나서 구원으로 연관을 시키지 못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을 산에 올라가서 불공을 드리듯이 하는 사고방식은 집어치워야 한다. 생활 속에서 고치고, 진리 자체화 되고, 세상을 이용을 하고 정복을 하며 나가는 것이 예수를 믿는 거다.
5절: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의인은 상을 받고 악인은 심판을 받는다. 누구든지 상을 받고 싶지 심판을 받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상을 주고 심판을 하는 이것은 인간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다. 그렇게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악인으로 되어있으면서 상을 받고 싶어 한다고 해서 상이 받아지는 거냐? 인간표현으로 말을 한다면 자기가 하나님을 떠나서 도망을 가면 어디로 가겠느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을 하시는 것인데, 이 심판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하면 상을 주고, 저렇게 하면 벌을 받는다’ 하는 것이 성경에 이미 명시되어 있다.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놓고 말씀하시기를 뭐는 먹고 뭐는 먹지 말아라? ‘생명과 영생과는 먹고 선악과는 따먹지 말아라. 먹으면 정령 죽는다.’ 그런데 인간은 그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영이 죽었다. 죽은 죽어가고 있고.
그러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영이 죽었는데 그냥 내버려 뒀느냐? 모세오경을 주었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또 증거를 했고, 성경을 주셨고, 신실한 종들로 증거케 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고 영이 죽은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이런 방편 저런 방편을 쓰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데 먼저는 ‘믿는 자냐, 안 믿는 자냐’ 하는 것을 구별하는, ‘천국 갈 자냐, 지옥 갈 자냐’ 하는 것을 구별하는 ‘존재적 심판’이 있다. 이것을 ‘공심판’이라고 한다. 이 심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가려내는 심판이다. 이 심판에서 가려내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다. ‘너희들이 알 수 있도록 내가 이렇게 이렇게 다 했다. 그런데 왜 안 믿었느냐? 하고 들어가는 심판이다.
그 다음에 믿는 자들이 받는 심판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 믿으면서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만들어졌느냐’ 하는 면의 심판이다. 이것을 ‘사심판’이라고 한다. 우리들에게 육신을 준 것은 인간이 활동성을 가지고 움직일 때 무엇이 주격이 돼서 움직이느냐에 따라 주님을 닮거나 닮지 않거나 하는 것이니, 믿는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과 몸을 주님의 의사를 잡고 움직여서 주님을 닮게 하려고 육신을 준 것이다.
우리가 속에 진리를 가지고 이 진리를 다른 사람과 활동적으로 연관을 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면 사는 것도 재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사를 해도 안 믿는 사람은 돈에 목적을 두고 먹고 입는 것에 욕심을 내며 장사를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방편은 같은 방편일지라도 ‘저 자를 어떻게 하면 주님께로 밀착을 시키느냐’ 하는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거다. 이게 전도자다. 전도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전쟁을 하려면 공중을 날아서 때리는 것도 있고, 땅속을 파고 들어가서 때리는 것도 있고, 벽을 뚫고 들어가는 것도 있다. 구약성경에서 전쟁을 하는 것을 보면 평지에서 전쟁을 하는 게 있는가 하면, 먹고 잔치하고 있을 때 하수도 구멍으로 기어 들어가서 정복을 하는 것도 있다. 정복을 하려면 수단 방법이나 격식이 필요가 없다. 전도하는 것도 격식에 맞춰서 하기는 참 힘들다. 그게 안 된다. 상대방이 내 격식에 맞춰주느냐?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어떤 상황인가를 유심히 보고 적절한 기회에 쳐들어가야 한다. 전도를 할 때 시와 장소와 환경에 따라서 다각적인 방법으로 지혜롭게 해 나가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존재적 공심판은 면제가 되지만 개체적 자체적 심판이 있다. 이걸 사심판이라고 한다. 이건 ‘신앙 실력적인 면에서 얼마나 실력이 있는가’ 하는 그 면의 심판이다. ‘네가 진리이치 생명이치의 말씀으로 얼마나 만들어졌느냐, 못 만들어졌느냐? 진리의 운동에 얼마나 동참하고 협조하고 수종들고 은혜를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 하는 심판이다. 그러니까 첫 번째는 ‘믿는 자냐, 안 믿는 자냐’ 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심판하는 공심판이 있고, 두 번째로는 예수 믿는 사람에게만 해당이 되는 ‘성질적 성격적으로 분량적으로 얼마나 네가 예수님을 닮았느냐’ 하는 사심판이 있다.
하나님을 기준해서 인간을 본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영이 죽은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인간 자기가 하나님이 돼버린 거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이렇게 돼버린다. 이런 사람은 질적인 면에서 자체적으로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적인 것으로 살기 때문에 죄인이고 악인이다. 질이 그렇게 놓여져 있는 거다.
이건 행동을 나쁘게 하면 죄인이고, 선하게 하면 의인이고 그런 차원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그 자체가 질적으로 죄인이고 악인이 돼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인간들끼리 어떻게 하던 하는 것마다 전부가 하나님 앞에 죄이고 악이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사람을 죽이면 더 큰 죄이고, 거짓말을 하면 작은 죄냐? 아니면 그거나 저거나 하나님 앞에 따질 필요가 없이 악이고 죄냐? 어떻게 느껴지느냐? 이런 차원에서는 인간이 보기에 아무리 선하고 좋아도 하나님 앞에는 선한 것은 없다. 질이 아예 그렇게 놓여져 있다. 하나님 앞에서 알아줄 게 없다.
선악과 따먹은 후로 인간의 영은 죽었고, 육신마저 죽어가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는 네가 하는 게 아무리 훌륭하고, 남이 선한 일이라고 알아줘도 하나님 앞에서는 전부는 죽어가는 것밖에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영생으로 가게 하려는 것인데 인간 자기가 자기의 자유로 죽는 길로 갔으니 이게 악하고 죄라. 그게 왜 악한 거냐? 자기 스스로 선악과를 따먹은 데서 하는 것들이니까.
이건 근원적 근본적인 악을 말하는 거고, 신앙 실력적인 면에서의 죄가 있으니 교회 인도자가 교인들을 영생의 길, 생명의 길, 좁은 길, 진리의 길로 인도하지 않고 넓은 길, 세상 길, 사망 길, 멸망이 길로 인도하는 것은 악한 종이라. 이게 왜 악한 거냐? 생명의 길로 인도를 하지 않고 넓은 길로 끌고 가니까 악하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하나님 앞에 살아나는 것이 없다. 있을 수가 없다.
이 악함은 앞에서 말한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된 악함의 상태와는 다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사는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이 악한 자들아, 외식자들아’ 하고 책망을 하고 저주를 한 것이 이 차원에서 책망과 저주를 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악한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질적으로 천국과 전혀 상관이 없이 가는 악한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인데, 색깔로 말을 한다면 전혀 안 믿는 사람은 바탕 자체가 검은 색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제일 밑에는 하얀색이 깔려있는데 죄를 지어서 검은 색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닦아내야 한다. 그런데 닦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그 위에 여러 가지 색을 칠하고 있더라. 그래서 악하다는 거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을 보고 다 지옥에 간다고 하면 안 된다.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했으니까 모든 인간은 영원 궁극적인 세계에 다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지을 터가 있는 것인데 게으름을 피우느라고 집을 안 짓고 내버려 두고 있다면 그게 악한 거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보면 논이던 밭이던 그곳에 곡식을 심지 않고 그대로 두면 세금이 나오느냐? 기본적인 세금도 나오지만 거기에 농사를 안 지으면 벌금이 나온다. 우리가 신앙 면에서도 이런 걸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책임추궁이 들어온다 그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집을 지을 수 있는 기초를 예수님께서 닦아놓았기 때문에 그 위에 믿음의 집을 지을 수가 있는 것이니, 설계대로 집을 지어서 올라가면 되는 건데 집을 안 짓고 딴 짓을 한다면 이건 악한 거다.
악한 상태가 여러 가지가 있으니 악하다는 것을 단순히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차원에 두지 말고 악한 생태를 여러 가지 측면으로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사단 마귀의 역사를 느끼게 되고, 자기의 신앙의 차원이 어떤 상태인지도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은 어떤 상태로 되어있는지를 알아서 더 좋은 상태로 깨닫게 인도를 할 수도 있는 거다.
악하다고 할 때 발길질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악하다는 것이 있고, 주먹으로 치는 사람들 가운데서 악하다고 하는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머리로 사람을 악하게 하는 것도 있다. 말로 사람을 악하게 하는 것도 있다. 악한 유형이 많다. 우리는 이걸 다 심사해야 한다. 특히 가정교육에서 어느 부모인들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노골적으로 주먹질을 하거나 몽둥이질을 한다면 식구들이 배겨나지를 못한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커서 독종이 돼버리는 일이 있으니 그렇게 악한 것도 있다. 또 말로 사람을 달달 볶아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옳은 것은 주지 않고 자꾸 달달 볶으니 사람이 배겨나지를 못한다. 그런 면으로 악한 것도 있다.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자식을 사랑한다면서 먹이고 입히고는 하는데 자식에게 옳은 것을 안 준다면 그 자식은 악해진다. 빗나가 버린다. 그러니 나이가 들어가서도 잡히지를 않는다. 나무는 어릴 때 잘 잡아줘야 한다. 제 멋대로 놔두면 자란 후에는 잡기기 힘들다. 그런 것처럼 자식을 어릴 때 잡아주지 않으면 기존의 성격이 그 아이에게 둥치가 되어서 남의 말을 듣지를 않는다. 이러면 사회생활을 하는데 힘들다. 자기주장만 내세우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사정을 모른다. 옳은 것으로 주장을 한다면 그 사람은 힘이 있는 거지만 그렇지도 않으면서 그런다면 힘들다.
환경을 가지고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수단 방법도 있고, 입으로 쪼아서 못 견디게 해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 있고, 목사님들의 세계에서는 성경구절을 들고 말을 하는데 그 말속에 채찍이 들어있어서 말로 사람을 두들겨 패는 게 있다. ‘일 못한다. 충성봉사 하라’ 하며 말로 돈을 짜내고 이런 게 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을 악하게 만들어 놓는다. 그런데 이런 걸 악한 줄로 아느냐? 결과가 어떻게 형성이 되어서 나오는 줄을 아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