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수업89 언어의 확장과 세계의 확장 #아난존자와언어 #언어의힘
언어는 우리의 세계를 형성하며, 언어의 확장은 경험의 확장이며, 이는 해탈로 나아가는 길이다.
3:6 반열반에 드시려는 승자이신 부처님께
두 손 모아 합장하고 간청하오니
부디 눈먼 중생을 무명 속에 두지 마시고
무량한 겁 동안 이 세상에 머물러 주소서.
#아난존자와언어
시간은 돈입니다. 그리고 말은 계약입니다. 그 말들이 모인 나의 언어는 곧 나의 세계입니다. 불교 교단에서 아난존자는 칭찬 받기도 비난 받기도 하는 이중적 평가 대상입니다. 일단 칭찬 받아 마땅한 점은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오랜 시간 헌신적으로 배웠고 이를 명료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붓다를 시봉하며 거의 모든 가르침을 직접 배웠고 심지어 본인이 부재한 자리에서의 설법은 따로 들은 이들에게 과외를 받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런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후대의 불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천재적인 암기력이 있었기에 그 모든 가르침을 가장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재능으로 인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가르침의 원본이 보존된 것입니다.
반대로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두 가지 면에서. 첫째는 가르침을 많이 들었지만 부처님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라한이 되지 못했다는 점을 비난 받습니다. 사실 이를 통해 성문 전체를 낮게 평가하는 후대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성문 즉, 많은 가르침을 들은 상징이 아난 존자입니다. 하지만 적게 듣고 수행에 몰두했던 다른 수행자들보다 아라한이 늦게 되었으니 듣고 배우는 것보다 실천 수행인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둘째는 붓다가 열반을 선언하셨을 때 청주 즉, 세상에 더 머물러 주시기를 요청하지 못했다는 점을 비난 받습니다. 이는 첫번째 아라한이 되지 못한 것과 맞물립니다. 무학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열반 선언을 듣고 안심이 흔들렸고, 이는 번뇌에 사로잡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붓다의 바로 옆에서 상주하는 제자가 열반 선언 시 청주를 요청하는 것이 의무인데, 이 타이밍을 놓쳐서 붓다가 빠르게 열반으로 나아갔다는 주징이죠.
아난 존자는 이처럼 '언어'의 상징입니다. 붓다의 성스러운 언어를 가장 많이 들었고, 이를 명료하게 후대에 전달하는 근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언어의 한계에 갇혀 해탈을 이루지 못했고, 이로 인해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로 손에 꼽히는 청주의 언어를 놓쳤다는 것입니다. 언어의 달인이지만, 언어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존재로 평가 받는 것이 아난 존자입니다. 평가를 바꾸고 싶거나, 평가에 사족이 되는 의견을 덧붙일 생각은 없습니다. 그보다는 언어라는 계약 그리고 언어와 주관적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언어의힘
말습관이 중요한 이유는 언어의 계약성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말을 너무 함부로 합니다. 그 말이 불러올 계약의 결과물이 두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함부로 나쁜 말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함부로 약속을 합니다. 약속이라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약속을 남발합니다. 하지만 의미를 몰랐다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이 무효가 되지 않듯이, 함부로 남발한 말들은 나 그리고 내 지인들을 속박하는 결과로 작용하게 됩니다. '말빚'을 지지 않기 위해 말조심해야 합니다.
반대로 반드시 말이라는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안에 사로잡혀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다면? 저절로 계약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계약서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연 맺은 상대방과 상호간에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계약서를 보여주지도 않은 것이고, 도장을 찍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반드시 이어져야 하는 인연도 끊어지게 됩니다. 청주를 부탁하듯이 해야 하는 말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해야 합니다. 말 도장을 찍지 않으면 계약이 되지 않으니.
언약을 맺으면 이를 이행하기 위해 시간이라는 돈을 투자해야 합니다. 이것이 말빚을 갚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험되는 언어들이 내 주관적 세상을 이룹니다. 세상은 언어를 통해 확장됩니다. 말에 대한 이해력과 표현력이 부족한 경우, 그 사람의 세계는 매우 좁은 것입니다. 모른다는 것은 깜깜한 무명이요, 그곳은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이기에 경험되지 않으니까요. 언어를 확장한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언어를 간접 경험인 독서로 배우고, 이를 자기화 하여 글쓰기로 표현하는 과정이 정신의 세계를 확장합니다.
육체를 가둔다고 정신을 속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정신이 갇혀 있는 이들은 육체가 자유롭더라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육체가 놓인 공간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밝혀진 정신의 세계이니까요. 경험을 바꾸고 싶다면 언약에 신경써야 합니다. 경험을 확장하고 싶다면 언어의 확장을 위해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내 빈약한 언어가 내 정신을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붓다가 해탈을 위한 기본으로 항상 성문을 강조하셨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언어를 확장하여 해탈로 나아가라는 것이죠. 그거 아세요? 아난 존자는 결국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
내 빈약한 언어가 내 정신을 가두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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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말이 가지는 의미를 압니다. 그래서 왠만하면 빈소리라도 해낼 자신이 없을 땐 하지 않는 편입니다.
하지만 말만 ,또는 글만 그럴듯 하게 쓰는 사람을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말과 글과 행동이 하나로 갈 때, 더 의미가 있다 그리 생각합니다.
독서도 열심히 하고 글도 쓰고 하겠습니다. 잘쓰지는 못하더라도 정직하게 얘기해 낼 수있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습니다.
저는 남이 부탁한것을 잘 거절하지 못해 덜커덕 약속을 하는편인것 같습니다. 또한 말하기보단 듣는것을 많이 하다보니 부탁하는것보단 들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약속의 중요성을 되새겨 하지못할 약속은 정중히 거절하는 태도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정중히 요청하여 약속을 받아내어 주고받고 밸런스를 잘 맞추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제게 참 필요한 법문 감사드립니다.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