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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태시인의음악사랑이야기 (77)
■[단편 소설] '팬플룻 찬가'
《윤슬이 머무는 갈대밭에 울려퍼진, '시링크스'의 노래》
강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을숙도의 갈대밭은 서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제히 몸을 눕혔다. 질펀한 낙동강 줄기가 남해바다와 몸을 섞는 곳, 이곳의 갈대들은 매년 가을이면 은빛 자수처럼 눈이 부시게 피어나곤 했다.
경태는 강변 둑길에 서서 그 서글프고도 장엄한 은빛의 일렁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으면 천 일도 더 된, 아니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그날의 기억이 바람을 타고 고스란히 밀려왔다.
"이 갈대 소리, 꼭 누군가 먼 곳에서 부르는 피리 소리 같지 않아?"
그때 그의 곁에는 연희가 있었다. 대학 3학년, 대한민국 장교 후보생(ROTC) 1년 차였던 경태는 빳빳하게 날이 선 단정한 단복 교복을 입고, 머리에는 늠름한 베레모를 쓴 채 가슴에 후보생 배지를 달고 있었다. 스물두 살 청춘의 한가운데, 전설 속 요정 시링크스를 닮은 싱그러운 미소의 연희와 손을 꼭 잡고 하단 선착장에서 통통거리는 작은 배를 타고 을숙도로 들어서던 날이었다.
배에서 내려 마주한 을숙도는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갈대밭의 바다였다. 강바람에 연희의 단발머리가 부드럽게 날렸고, 경태는 제복 입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붉은 노을이 낙동강 물을 발갛게 물들이고, 그 위로 보석 같은 윤슬이 아롱아롱 부서지던 그 풍경 속에서 두 사람은 갈대숲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정답게 걸었다. 그 시절의 을숙도는 경태의 인생에서 가장 환해지던 축복의 공간이었다.
갈대밭을 걷다 보면 강물이 눈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호젓한 주막과 선술집 골목이 나타나곤 했다. 그 골목길을 걷는 동안, 어디선가 잔잔하고 서글픈 포크 송 선율이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웅장하면서도 애잔하게 가슴을 파고들던 그 아름다운 멜로디. 나중에야 경태는 그 곡의 제목이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노래가 흐르던 골목을 지나 솔밭 스타일로 꾸며진 아늑한 주막 안으로 들어서자, 구석에 놓인 낡은 오디오와 턴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장이 정성스레 닦아 올려놓은 레코드판이 찌르르한 바늘 긁히는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돌아가고 있었고, 스피커를 통해 흐르는 음악은 주막 안을 따스한 낭만으로 가득 채웠다.
대학생 신분에 주머니 사정은 늘 가벼웠지만, 그날 경태는 연희를 위해 큰맘을 먹었다. 그간 중학생 과외 아르바이트하며 아끼고 모은 용돈을 털어 당시 청춘들 사이에서 최고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내어주던 와인 한 병과 소박한 안주를 주문한 것이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달콤한 와인 잔을 부딪치며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나직한 밀어(蜜語)를 속삭였다.
"연희야, 내가 멋지게 임관해서 다이아몬드 계급장 달면, 그땐 정말 더 맛있는 것 사줄게."
"경태 씨 단복 입은 모습 보니까, 난 벌써 장교 연인이 된 것 같아."
수줍게 웃는 연희의 손을 꼭 잡으며, 경태는 평생 그녀의 곁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노라 다짐했었다.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미래는 와인 빛깔처럼 달콤하고 영롱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청춘의 사랑은 뜻하지 않은 거대한 벽에 부딪혀 흐르는 강물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가난보다도 가혹했던 시대의 굴레, 바로 '동성동본(同姓同本)'이라는 법적 장벽이었다. 같은 성씨와 본관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축복받지 못하는 사랑 앞에서 양가 어른들의 서슬 푸른 반대가 이어졌고, 결국 연희가 그의 곁을 떠나가던 날이 오고야 말았다.
마지막으로 돌아서던 순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경태를 바라보던 연희의 그 애잔한 눈빛. 법의 장벽 앞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던 그 마지막 입술과 슬픈 눈망울은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지금까지도, 바로 어제 일어난 일처럼 경태의 가슴에 생생하게 박혀 있었다.
이별 후, 경태는 번뇌로 가득 찬 마음을 달랠 길 없어 틈만 나면 을숙도 갈대밭을 홀로 찾았다. 연희의 흔적이 숨 쉬는 그곳에서 갈대들이 바람에 떠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속 내밀한 붉은 심장 너머로 아린 통증이 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갈대밭 초입의 작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신비로운 악기 소리가 경태의 발길을 붙잡았다. 맑고 깨끗하면서도 심장을 쥐어짜듯 깊은 애잔함을 품은 소리, 바로 팬플루트였다. 카페 안에서는 루마니아의 세계적인 거장 게오르그 잠피르가 연주하는 명곡, '외로운 양치기(The Lonely Shepherd)'가 흐르고 있었다. 텅 빈 들판에 홀로 선 양치기의 고독을 담은 듯한 그 구슬픈 울림은 그대로 경태의 가슴을 때렸다. 카페 주인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목신 팬이 떠나간 요정 시링크스를 그리워하며 강가의 갈대를 꺾어 만든 피리가 바로 이 팬플루트랍니다. 슬픔을 덜기 위해 태어난 악기지요."
갈대. 그리고 동성동본이라는 운명에 가로막혀 떠나간 여인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가슴을 후벼 파는 '외로운 양치기'의 선율. 그 순간 팬플루트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연희와 자신을 이어주는 영혼의 매개체로 경태의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도 이 악기를 통해 그녀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이 가슴속 만개의 파도 같은 번뇌를 잠재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길로 경태는 팬플루트를 구하고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구조가 단순해서 배우기 쉬운 원시적인 악기라고 쉽게 말했고, 실제로 함께 시작한 동기들은 진도가 팍팍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경태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험난한 길이었다.
원하는 음을 정확하게 내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조금만 숨이 흐트러져도 거친 허공의 바람 소리만 픽픽 새어 나왔고, 올바른 소리를 내기 위해 밤새 입술을 대고 불다 보니 아랫입술이 터지고 짓물러 부르트기 일쑤였다. 밤이 깊어 사방이 고요해지면 방 안에서 홀로 악기를 붙잡고 고뇌했다. '왜 남들은 다 쉽다는데 나만 이렇게 진전이 안 나오는 걸까.' 가슴이 답답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도 많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의 연주는 스스로 보기에도 서툴고 투박했다.
그럼에도 경태가 팬플루트를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부르튼 입술 너머로 불어넣는 그의 숨결은 그대로 그 시절 ROTC 단복을 입고 을숙도를 거닐던 갈대바람이 되었고, 연희의 마지막 눈빛이 되었다.
악기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곧 떠나간 여인의 뺨을 어루만지는 일이었고, 거칠게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는 가슴속에 묻어둔 눈물이었다.
비록 흘러간 과거의 기억이지만, 경태는 이 애잔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통해 그 시절의 가장 좋았던 추억들을 다시금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과거에 머무는 슬픔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고, 팍팍하고 힘든 세상살이 속에서 마음이 꺾이고 지칠 때마다, 경태는 이 악기를 입에 물었다. 구슬픈 선율을 한 호흡 한 호흡 불어내고 나면, 신기하게도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짐들이 바람과 함께 흩어지고, 험한 세상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단단한 힘이 샘솟았다. 팬플루트는 그에게 지나간 사랑의 증거이자, 현재를 버티게 해주는 삶의 지팡이였다.
바람이 유독 선선하게 불어오던 어느 가을날 해질녘, 경태는 마침내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던 큰 용기를 내었다. 그는 반주기와 앰프가 묵직하게 들어찬 버스킹 장비 가방을 어깨에 단단히 메고 을숙도 갈대밭 공원으로 나섰다. 주위로는 주말을 맞아 다정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연인들과 산책을 나온 가족들이 가득했다. 노을빛이 강물 위로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경태는 알맞은 자리를 잡고 어깨에 멨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간단한 버스킹 장비를 꺼내어 세팅하고 반주기를 켰다. 이윽고 반주기에서 흘러나오는 풍성하고 서정적인 오케스트라 선율이 가을 공기를 따스하게 채웠다.
굳은살이 박인 두 손으로 경건하게 팬플루트를 모아 잡은 경태는, 반주의 흐름에 호흡을 맞추며 오랜 세월 동안 홀로 방안에서 다듬고 또 다듬었던 그 곡, '숨어 우는 바람 소리'의 첫 음을 반주 위에 얹았다.
"파르르……."
풍성한 반주 음악을 배경 삼아, 광활한 갈대숲 사이로 경태의 깊은 숨결이 녹아든 팬플루트 선율이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아무리 뛰어난 연주라도 반주 없이는 어설프기 마련이지만, 든든한 반주 기기의 음향이 밑바탕을 받쳐주니 대나무 관의 울림이 한층 더 웅장하고 깊게 퍼져나갔다. 한 음 한 음에 연희를 향한 평생의 그리움과 모진 세상을 헤쳐 온 한 사내의 묵직한 영혼의 울림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가을바람을 타고 번지는 구슬프고도 아름다운 대나무의 목소리에, 공원을 거닐던 사람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추기 시작했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던 젊은 연인들도, 벤치에 앉아 쉬던 이들도 어느새 경태의 주위로 동그랗게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노을 지는 을숙도 갈대밭을 가득 채우는 그 애잔한 바람의 찬가에 깊이 몰입했다. 곡이 절정에 다다라 마지막 음이 가을 하늘 속으로 아스라이 흩어질 때까지, 공원에는 오직 팬플루트의 깊은 울림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경태가 천천히 악기를 입술에서 떼자, 잠시 서늘한 고요가 감돌았다. 그리고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여 있던 사람들의 손에서 뜨거운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젊은 연인들은 감동 어린 눈빛으로 경태를 바라보며 아낌없이 손뼉을 쳐댔고, 여기저기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경태가 감격에 젖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던 그때, 관객석 뒤편에서 누군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앵콜! 한 곡 더 불어주세요!"
그 외침을 신호탄 삼아 사방에서 "앵콜! 앵콜!" 하는 연호와 환호성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홀로 외롭게 연습하며 고뇌했던 그 수많은 밤들이 관객들의 환호 소리에 씻은 듯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경태는 깊은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반주기를 조작하여 다음 곡을 준비한 뒤 관객들을 향해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선택한 앵콜 곡은 패티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이었다.
반주기에서 애절한 전주가 흘러나오고, 경태가 다시 한번 입술을 대자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애절한 선율이 을숙도의 붉은 노을 속으로 번져 나갔다. 가사는 없었지만 대나무 관을 타고 흐르는 음색은 가을날 홀로 남겨진 사내의 지극한 그리움을 그대로 토해내고 있었다.
젊은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더 꼭 맞잡았고, 몇몇 이들은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가을 갈대밭을 온통 감동으로 물들인 앵콜 연주가 끝나자, 공원이 떠나갈 듯한 함성과 함께 첫 번째보다 훨씬 더 뜨겁고 장엄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경태는 벅차오르는 행복감에 다시 한번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아, 끝까지 이 악기를 잡기를 정말, 정말 잘했구나…….'
앵콜 곡의 여운이 가을 밤하늘로 잔잔하게 흩어지는 그 순간, 경태는 문득 깨달았다. 눈앞에 모여 있는 수많은 낯선 이들의 얼굴이, 저마다 품고 있는 크고 작은 슬픔과 번뇌를 내려놓은 채 하나같이 환한 윤슬처럼 빛나고 있다는 것을. 그의 마음속 번뇌의 파도가 잔잔히 가라앉는, 그만의 완벽한 '만파식적'이 을숙도 들판 위에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건네는 따뜻한 눈빛과 격려의 인사를 뒤로하고, 경태는 차분하게 장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켜두었던 반주기와 앰프의 전원을 끄고, 선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다시 묵직한 가방 안으로 챙겨 넣었다. 소중한 팬플루트 역시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 케이스에 넣은 뒤 가방 한편에 안전하게 수납했다. 지퍼를 채우고 다시 가방을 어깨에 메자, 오늘 밤 그가 만들어낸 음악의 무게만큼 묵직한 온기가 등 뒤로 전해졌다.
가방을 메고 천천히 갈대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어 나오는 경태의 얼굴에는 깊은 평온함이 감돌았다. 남들은 다 쉽다고 하는 악기가 왜 나에게만 이토록 어렵고 더디기만 했을까 원망하던 마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그 오랜 고독과 험난했던 레슨의 시간들이 쌓였기에, 반주기 선율 위에 이토록 깊은 사람들의 영혼을 울릴 수 있었던 것이리라 생각하니 고난마저 감사하게 느껴졌다.
강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경태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연희가 남긴 보석 같은 추억과 이별의 애잔함은 이 작은 대나무 관 속에 천 년의 바람 소리로 다시 태어나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삶이 팍팍하고 힘겨워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그는 언제든 이 버스킹 가방을 메고 은빛 갈대밭을 찾아와 대나무 관에 숨을 불어넣을 것이다.
경태는 밤하늘에 뜬 둥근 달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오늘 밤도 난 그 소리만 먹고, 오직 이 따사로운 기억 하나로 가벼웁게 살리라."
정성을 다해 불어넣은 그의 정직한 숨결이 맑은 새벽이슬이 되어 밤하늘로 아롱아롱 퍼져 나갔다. 떠나간 이를 향한 찬가이자, 남겨진 자신의 삶을 따사롭게 보듬는 치유의 노래가 을숙도의 은빛 갈대숲으로, 그리고 그가 당당하게 걸어갈 앞날을 향해 길고 깊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문화칼럼니스트ㆍ소설가 최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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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플룻 찬가/최진태
https://youtube.com/watch?v=XQpITgPS8cc&si=Xy9_L3Sb7r_H3l15

첫댓글 소설이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