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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1-44절
1-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것이 나의 절기들이니 너희가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출애굽해서 광야에서 첫해에 기록한 말씀이다. 남자들은 1년에 세번 성전에 와야만 했다. 이스라엘의 주요절기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이다. 유월절, 오순절, 나팔절을 중요한 절기로 지킨다.
이스라엘의 절기를『모에드』라고 한다.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킨 이유는 첫째, 역사적 의미를 전수하기 위함이었다. 출애굽기 12장 24-25절에서 유월절이 끝난 후에 앞으로 절기가 되어 대대로 지켜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둘째, 절기는 공동체로 하나되게 만들어 주었다. 신명기 6장 4절에서『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이스라엘 사람들은 절기에 모일 때 이 말씀을 외쳤다. 신약시대에서도 공동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에베소서 4장 3-4절에서『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셋째, 기쁨의 축제였다. 로마서 14장 7절에서『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구약의 절기는 신약의 모형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모형이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가 오셨으므로 이제는 절기가 성취된 것이다.
오늘날 구약의 절기를 지키려고 한다면, 그리스도가 오심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골로새서 2장 16-17절에서『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5장 8절에서『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라고 말했다. 신약시대는 절기를 지킬 필요는 없지만,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절기가 성도들에게 주는 의미를 잘 깨닫고 있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기를 통해서 인간의 죄악됨을 알려주신다. 그리고 구원에 대해서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 절기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떠난 존재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가를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절기와 관련하여 구약시대는 제사와 안식이었다. 제사는 오늘날 예배를 의미한다. 예배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 교회사람들은 예배를『어떤 장소에서 형식된 의식이나 절차를 통해서 행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내 속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는 생각하지 않는다. 예배에서 엄숙한 분위기와 웅장한 찬양소리 속에서 목사의 설교가 감동적이었으면『오늘 좋은 예배를 드렸고 많은 은혜를 받았다』라고 생각한다.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셨는지 안받으셨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확인할 방법이 없으므로『잘 드렸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건져 내시고, 성막을 주고 율법도 주셨다.
하나님은『율법에 따라서 희생제물을 드려라』라고 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까지 40년 동안을 희생과 예물을 드렸는데, 그런데 아모스 5장 25절에서『하나님은 받지 않았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어떤 형식과 절차를 통해서 예배를 드렸다』라고 생각한다면 과거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드린 희생과 예물을 받지 않았던 것과 같은 결과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받으셨는지 안받으셨는지 마음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가인도 아벨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 예물로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가인의 것은 받지 않았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쫒아내고 큰 권능도 행했는데, 예수님이『모른다』라고 하셨다.
일반적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 장소가 성전이라고 생각한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정한 장소인 성전에서 가서 예배를 드리도록 했다. 성전이 멀리 있을 경우에는 성전을 향해서 엎드려서 기도하도록 했다. 오늘날 교회시대에도 그대로 답습하여『어떤 장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라는 등식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성전이 헐어지기 전이었으므로 특히 더 심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오경을 믿으면서, 그리심산을 성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두신 것이다. 예수님은『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라고 했다. 이 말씀은『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은 것이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제3의 장소를 말씀해야 하지만, 장소가 아니라『너희가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라고 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배드리는 곳을 성전으로 생각했다. 예수님이 사마리야 여인에게『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예배는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고 말씀을 하셨다. 즉 그리심산이 틀렸다는 말씀이다. 즉 구약시대에는 건물인 성전이 예배드리는 곳이라는 것을 설명하신 것이다. 그런데,『너희가 예배드릴 때가 온다』라고 했는데,『너희가 성전이 된다』는 말이다. 그 때가 바로『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 하는 지금이라』는 말씀이다.
건물 성전은 그림자요, 예수님은 참 성전이시다. 예수님이 함께 하면 바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성도의 심형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 사역을 마치시고 모든 인간들의 죄를 사하시고 하늘 보좌에 오르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스스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는데, 어떻게 예배를 드리면 되는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진실한 마음을 담아서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오해한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는『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셨다.『그렇게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찾으신다』라는 말이다. 찾는 대상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신령은『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서 성령이 깨닫게 해 주셔서』라고 해석을 해도 된다. 진정은 진리를 표현한 것인데,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에서 그 진리는 진정과 같은 표현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면서 말씀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밝히 드러나서 『내가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게 예배가 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린다』라고 하는데, 무엇인가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역사하셔서 그 말씀의 역사로 말미암아, 육적으로 인한 옛사람이 물에서 죽고(물세례), 혼이 불에 타 죽고(불세례)을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새사람으로 나는 것이다. 새사람인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게 되면 그게 예배라는 것이다. 그게 제사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가 되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하였다. 예배는 옛사람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이 죽었음을 확인하고, 새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이런 개념이 대부분 없다. 교회 안에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섞여 앉아서 어떤 형식과 절차를 통해서 하나님께『참된 마음으로 엄숙하게 예배를 드린다』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3절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절기를 지키는 것은 안식과 연계되어 있었다. 성경에서 안식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4장 8-10절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었다면 그건 가나안 땅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그림자이다. 참 안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다는 말이다. 참 안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것이 바로 참 안식이다. 하나님이 참 안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안식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자는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이다. 곧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데, 이게 바로 셋째 하늘이 되고, 에덴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보증으로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 믿는 자가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영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집을 입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안식이다.
에베소서 2장 6절에서『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고, 새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생명 가운데 일으키심을 받는다. 그 새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움을 받는 것이다.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은 자는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앉히움을 받는 것이다. 골로새서 3장 3절에서도 마찬가지로『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라고 했다. 죽은 것은 옛사람이다. 그리고『새사람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라고 하고 있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만 깨달을 수 있다. 죽어서 부활된다고 믿는 자는 부활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히브리서 4장 10절에서『이런 자들을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옛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새생명 가운데 태어난 자는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이다. 안식에 들어간 자는『자기의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자기의 일』이라는 말은 바로『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라든가『안식을 대체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아직 안식에 들어간 자가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거룩히 지켜야 안식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는데도 아직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는 것이다. 아직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안식에 들어있지 못한 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일을 일주일의 하루로 생각하고 성도들이 모여서 성경 공부하고 예배드린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는 날로 생각한다면, 이런 안식의 의미를 깊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거룩히 지켜야 하는 자는 현재 하나님 나라에 안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거룩히 지킬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안식에 이미 들어간 것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될 것이다. 안식을 거룩히 지키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발견하여야 하는 율법 안에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4-8절『이것이 너희가 그 정한 때에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열닷샛날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이레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너희는 이레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그 정한 때(베모아담 בְּמֹועֲדָֽם, 기본형은 모에드)에 라는 말은 절기(모애드)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 곧 지정된 시기에 라는 뜻이다. 유월절(페사흐 פֶּ֖סַח)은 넘어가다'(pass over), 뛰어넘다(skip over)란 뜻의 '파사흐'에서 유래된 말로, 애굽에 내린 열번째 재앙 곧 장자죽음의 재앙시 죽음이 이스라엘 집은 뛰어 넘어간 사실에서부터 유래된 절기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정월 곧 니산(아빕)월 14일 저녁에 지켜졌다. 정월 또는 니산월은 히브리 민간력으로 7월에 해당하는데, 태양력으로는 3, 4월에 해당한다. 한편 이 유월절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한다.
무교절(함마죠트 הַמַּצֹּ֖ות, 기본형은 맛차)은 우유를 빨다라는 의미의 마차츠'에서 유래된 말인데, 발효되지 않은 빵,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빵이란 뜻이다. 따라서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로, 한 주간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먹는 절기였다. 이처럼7일간 쓴나물과 함께 무교병을 먹는 것은 애굽에서 겪은 종살이의 고통과 출애굽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상기하기 위함이다(출 12:15-20). 한편 본절에는 무교병을 먹는 날 수가 7일로 기록된 반면, 신 16:8은 6일간 먹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본절은 무교병을 먹는 일수에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7일이라고 언급했고, 신 16:8에서는 '성회' 자체에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에 일곱째 날(성회)을 다른 무교병 먹는 날과 구분하여 6일이라고 한 것이다(출 12:18). 한편, 성경 여러 곳에서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구분하지 않고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출12:3-20;13:3-8;눅 22:1), 그 이유는 2개의 절기 의식이 한 주간 안에 동시에 이루어 졌을 뿐만 아니라, 유월절 음식은 그 자체가 무교병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월절이란 말이 모든 무교 축제일에 걸쳐 사용되었고, 동시에 무교절이란 말이 유월절 의식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구분하면, 유월절은 '초태생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로서 아빕 월 14일 저녁 하룻밤만의 의식을 말하고, 무교절은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로서 14일 저녁을 포함하는 일주일 간의 무교병 축제 의식을 말한다.
무교병은 효소의 역할을 하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을 가리킨다. 이것은 누룩으로 부풀릴 시간조차도 없었던 첫 무교절의 긴박한 상황을 나타낸다. 아울러 성경에서 누룩은 종종 죄와 거짓 교훈 혹은 옛 생활을 상징하기 때문에(고전 5:5-7),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무교병은 구속받은 거룩한 백성이 먹어야 할 신령한 음식을 상징하기도 한다.
“성회로 모이고” 무교절의 첫날과 마지막 날(제 7일)은 하나님 앞에 성회로 모이는 날이다. 따라서 이 날은 거룩한 안식의 날로 생업에 관계된 모든 육체 노동이 일절 금지되었으며, 거룩한 마음으로 그 절기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면서 기도와 찬양, 묵상 등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했다.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 여기서 '노동'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멜레케트(מְלֶ֥אכֶת기본형은 멜라카)는 '수고스러운 일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노동이란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모든 생계 활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일과 반대되는 자기의 일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노동은 성회로 모이는 모든 절기 기간 중에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출 20:10 등에 나타난 바 '일'(멜라카)은 모든 사소한 일까지 포함하는 말로, 곧 음식을 만든다든가 혹은 그 일을 위하여 불을 지피는 행위 등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일은 특별히 안식일과 속죄일에만 금지되었다.
“화제를 드릴 것이요” 무교절 기간 동안 하나님께 희생 제물 특히 소제, 번제, 속죄제 등의 제사를 화제로 드릴 것에 대한 규례이다(민 28:16-25).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속죄와 하나님 백성이 됨에 대한 감사의 표현인 것이다.
9-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고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십분의 이 에바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로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쓸 것이며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초실절에 관한 규례이다. 이 절기는 보리 수확의 첫 열매를 먼저 하나님께 봉헌하는 절기로, 무교절 기간(니산월 15-21일) 중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실시된 절기이다. 따라서 수확한 곡물의 첫단을 제사장에게 드려 요제로 바치는 동시에 번제와 소제 및 전제를 아울러 드리는 이 초실절 행사를 치르기 전에는 누구도 보리 수확의 열매를 먼저 먹을 수 없었다.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에서 팔레스틴 지역에서 유대인들의 보리 추수는 니산월 곧 현대 태양력으로 3,4월경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수확한 곡물의 첫 단을 하나님께 바치는 이 초실절 행사는 유월절이 지난 첫 안식일 다음날 행해졌다. 한편 이 곡물의 첫단은 부활의 첫열매 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시에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 된다(고전 15:20-23).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그 단은 보리단을 가리킨다. 가나안 지방에서 모든 추수는 4월중순경으로부터 5월 초까지 수확되는 보리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밀은 보리보다 2-3주 후에야 익기 시작했다.
안식일 이튿날에 대해서, 무교절 축제는 엄밀한 의미에서 유대 종교적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 동안 지켜졌다. 초실절은 바로 이 무교절 기간 중에 지켜졌는데, 그 정확한 일자가 언제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다.
“흔들 것이며” 제사장이 하나님께 요제로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요제는 하나님께 드리고 다시 돌려받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상징하는 것이다.
번제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과 정상적인 관계 유지를 상징하는 자원제로, 가죽을 제외한 제물의 모든 부분을 제단에 불태워 드리는 제사이다. 소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충성의표로 곡식을 예물삼아 드리는 자원제이다. 소제는 보통 번제, 화목제 등과 함께 드려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이”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드리는 소제의 경우에는 고운가루 에바 십분 일이 드려졌으나(출 29:40), 초실절의 경우에는 그 두 배인 십분 이(2/10)의 고운 가루를 드렸다. 한편 여기서 '에바'는 구약 시대부피를 측정하는 고체량 단위로, 곧 1에바는 23 에 해당된다. 따라서 에바 십분 이(2/10)는 4.6 에 해당되는 부피 단위이다. 표면적으로는 추수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자원제의 것이겠지만, 영적으로 고운 가루는 부숴지고 갈아져서 원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다시 태어난 자의 모습이다. 십분의 이에서 일은 이전의 옛사람의 죽음, 두번째 일은 새사람으로 부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인 것이다. 즉 이전의 것은 죽고 새사람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로마서 6장 7절에서처럼, 죽어야만 모든 죄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고운 가루가 되는 것을 스스로의 결단과 고난과 헌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노력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을 포기하는 것이다.
화제는 제사 드리는 방법 중 가장 오래되고 또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으로서, 곧 제물을 불태워 드리는 제사 벙법을 가리킨다. 전제는 제사의 한 종류가 아니라, 제사 방법에 따른 분류법의 하나로서, 곧 포도주나 독주 등을 제단 위에 쏟아 붓는 제사 방법을 가리킨다. 그리고 전제는 단독으로는 드려질 수 없었고 다른 제사 방법과 더불어 드려졌다. 힌은 구약 시대에 액체의 부피를 측정하는 단위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찌니” 즉 수확한 곡물의 첫 단을 여호와께 먼저 드리기 전에는 그 땅 소산물을 어떤 형태로든지 먹지 말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첫 단의 봉헌은 모든 추수에 대하여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으며,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15-22.『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곡식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처소에서 십분의 이 에바로 만든 떡 두 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양 일곱 마리와 어린 수소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드리되 이것들을 그 소제와 그 전제제물과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로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며 또 숫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며 일 년 된 어린 숫양 두 마리를 화목제물로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 첫 이삭의 떡과 함께 그 두 마리 어린 양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서 요제를 삼을 것이요 이것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이니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며 이 날에 너희는 너희 중에 성회를 공포하고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그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안식후 이틀후였다. 부활절을 초실절이라고 한다. 첫 열매를 거두는 것을 의미한다. 요제는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다. 그래서 지진이 일어나 무덤이 열리고 부활하셨는데, 그 날로부터 49일(칠안식일) 밤부터 그 다음날(50일째) 새 소제(새떡)을 드리라는 것이다. 이게 오순절이다. 오순절은 피가 있는 제사가 아니라 떡을 드리는 날이다. 떡을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다른 제물을 드렸다.
오순절날 제물을 드릴 때 흔들어서 드렸다. 레위기 23장 17절에서『너희의 처소에서 십분의 이 에바로 만든 떡 두 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에베소서에서 이것이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떡 두덩이는 오순절날 성령이 임해서 이방인들도 주께 돌아올 것을 가리킨다. 흔들어서 드리는 것은 부활 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2장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정확하게 임하셨다. 구약성경은 신약의 예표요 그림자다. 오순절날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의 돌판을 받던 날이었다. 그날 하나님은 약손 반지를 주었다고 표현했다. 언약의 돌판이 결혼 약속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성령)이 그날 부어졌다. 성령을 받은 자, 곧 성령세례를 받은 자가 부활된 자라는 것이다. 부활은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영작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혼은 죽고, 영의 몸을 입고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사람의 옷(스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이다.
유월절에 대해서는 레위기 23장 4-8절에서『이것이 너희가 그 정한 때에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열닷샛날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이레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너희는 이레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밤에 출애굽한 날이 음력으로 1월 14일이다. 일주일 후에 홍해를 건너는데, 예수님께서 이 날 십자가에 죽으셨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나타내는 날이다.
레위기 23장 15-16절에서『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곡식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이렇게 봄 절기가 지나고 넉달이 지나서 레위기 23장 23절에서 나팔절을 말하는데, 하나님이 애굽에서『출애굽하는 날을 첫달로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그 때부터 유대인의 달력이 시작되었다. 음력 1월이 유월절이 있는 달이 되었다. 음력으로 7월이 바로 양력으로 9월 1일이었다. 유대인들이 정장차림으로 회당을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9월29일 저녁부터 10월 1일 날이 샐 때 까지가 나팔절이다. 이 날 나팔을 불라고 하셨다. 유월절과 오순절이 신약에서 성취되었는데, 나팔절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성경에서 이 날을 또 새해로 삼으라는 것이다. 출애굽한 음력 1월 14일 그 달을 첫달로 삼으라고 했다. 종교력인 첫달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민력(민간인 달력)인 나팔절을 기준으로 달력이 제작되어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9-10절에서『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에 관한 내용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17절에서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파루시안 παρουσίαν 임재)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카타베세타이καταβήσεται)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4장 15절에서 강림으로 번역된 파루시안(παρουσίαν 임재)과 4장 16절의 강림인 카타베세타이(재림)는 다른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시에는 그리스도 이전의 믿음의 선진들이 먼저 일어나고, 다음에 성도들도 예수님의 대림으로 인해서 영의 몸으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성도에게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재림해 들어오신 것이다. 그래서 성전이 되고 하나님 나라가 된다. 그래서 파루시안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도에게 들어오시는 것이 카타베세타이이고, 그래서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고, 그 속에 임재(파루시안)하시는 것이다.
현재적으로 살고 있는 성도들은 이전의 혼이 죽고, 영의 몸으로 변화되어, 호 로고스를 영접(파루시안(παρουσίαν 임재)하게 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에서『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영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변화라는 것은 육적 몸인 혼이 갑자기 영의 몸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혼은 죽고, 영의 몸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육의 몸(혼)이 죽고 성령의 능력으로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7월절기인 나팔절부터 10일후에는 욤키프러인 대속죄일이 된다. 7월 15일부터 8일간은 초막절이다. 이 모든 것은 나팔을 부는 절기에 해당한다. 마태복음 24장 30-31절에서『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예수님이 유월절날 죽으시고, 초실절에 부활하시고,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셨다. 출애굽한 백성에게서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를 칠하고, 오순절날 시내산에서 두 돌판을 받았으며, 초막절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켰던 절기였다. 초막절은 하나님 자신의 절기다.
나팔절로 부터 초막절 앞까지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나팔절에서 나팔은 하나님의 나팔소리다. 출애굽기 19장 16-19절에서『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서 있는데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직접 강림하셨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주님이 재림하실 때도 이와 같은 것이다. 강림하실 때, 하늘이 온통 불이 되었다. 신명기 5장 23-24절에서『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수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신명기는 광야 40년째의 이야기다. 요한계시록 1장 7절에서『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볼지어다(이두 Ἰδοὺ)』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관심을 이끈다. 네펠론(νεφελῶν)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에르케타이(ἔρχεται )는 미래시제가 아니라 현재 중수디포태 시제로서 오시게 한다 라는 표현이다. 중수디포태는 수동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의미는 능동이다. 자신을 위해 타인에 의해 보내짐을 받는 능동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의 심령 속에 호 로고스가 임재하시므로 천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도의 심령 속에 임재하는 것이다. 에르케타이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적인 용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오고 있는 것이다.
“구름들(네펠론:여성복수 νεφελῶν)과 함께(메타μετὰ)”라는 말에서 함께라는 말은 “연합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메타) 계시다 함이라.』임마누엘(6005)에서 6005는 5973과 접미대명사가 삽입된 410에서 유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사야가 말한 메시야의 예표적 이름이다.
구름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단수로 사용되면, 물리적인 구름이다. 이것을 여호와의 영광(임재)과 심판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복수로 사용되는 것은 성도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말씀들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천사와 함께 온다는 표현을 했다. 성도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자는 유대인들이다. 찌른 자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격했다.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 역사는 그림자이다. 실체는 성도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해준다. 성도의 옛사람(옛성전)을 다 부숴버리고 새로운 성전을 세우는 것이다. 생명으로 거듭난 자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과 연계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땅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의미다. 스가랴 12장 10절에서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스가랴 12장부터 14절까지는 이스라엘에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개와 애통함을 나타낸다.
23-2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어떤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나팔절에 관한 규례이다. 이 날은 신년절이라고도 하는데. 안식의 날로 특별히 전국 각지에서 나팔을 불어 기념하였으며, 중앙 성소에서는 새해를 축하하는 제사를 드렸다. 한편 23장 23절으로부터 23장 마지막 부분까지는 히브리 종교력으로 제 7월에 성회로 모여야 할 각종 절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히브리 월력상 종교력 7월은 민간력 1월에 해당하는데 이 7월에는 나팔절(제 1일), 속죄일(제10일), 초막절(제 15일) 등의 중요한 절기들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 기간과 관련되어 있는 7이란 숫자가 갖는 독특한 성경적 의미 때문일 것이다.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7월(티쉬리월) 1일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유대 종교력에 의한 계산으로 민간력으로는 새해 첫 날 곧 1일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팔절은 안식의 달인 일곱번째 달을 맞아 봉헌하 기 위한 절기로, 일반 월삭보다 더 큰 규모의 희생제사를 거행했다.
이 날 나팔 소리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하루 종일 반복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새로운 날이 도래했다는 것을 알리고 또한 기쁨으로 새 날을 맞을 것을 선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나팔 소리는 신약 시대의 복음 전파를 상징하기도 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시 울려 퍼지는 그 나팔 소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마24:31;고전 15:52;살전 4:16).
“어떤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찌니라” 노동은 자기의 일을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4장 10절에서『이런 자들을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안식에 들어간 자는『자기의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자기의 일』이라는 말은 바로『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라든가『안식을 대체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아직 안식에 들어간 자가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거룩히 지켜야 안식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화제에 대해서는 레위기 1장 9절에서 언급되었다.『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또한 에베소서 5장 2절에서『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은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형제를 사랑한다』는 의미는 잃어버린 양(영)을 찾는 일이다.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에 온 영들을 구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께는 향기가 되는 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은 인간의 죄를 대속한다는 의미 이전에 하나님을 떠난 영들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신 것이다.
26-33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이 날에 누구든지 어떤 일이라도 하는 자는 내가 그의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는 너희가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아흐렛날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속죄일은『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것이다. 나팔절부터 10일간은 고통과 환란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10일간이 끝나면 속죄절이 되고, 속죄절 5일 후에 초막절이 시작된다. 나팔절은 추수가 끝났다는 의미다. 오순절부터 넉달동안 추수가 완전히 끝나서 나팔을 분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말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잘 기억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절기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린양으로 죽으시고, 초실절에 부활하셨으며,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다. 그리고 나팔절에 재림하시는 것이다.
레위기에 다섯가지의 제사가 나오는데, 레위기 4장 20절에서『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다섯가지의 제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끝에는 반드시『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속죄의『속』이라는 말은 영어로 redeem(도로 사는 것)인데,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에서 『곧』이라는 말은 속량과 죄 사함이 동의어의 개념이 아니라,『이어서』라는 개념이다. 속량이 있어야, 죄사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속량은 레위기 4장 20절의『속』을 인용한 것이다. 속량은 대속, 구속이라는 말로도 사용된다. 구입(Purchase)한 후에 해방(delieve)된다는 말이다. 죄를 씻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죄인을 사서 해방되는 것이 먼저다. 이것의 개념이 바로 욤키프러다.
창세기 6장 4절에서『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욤키프러의 명사형이 역청이다.『칠하라(덮으라)』는 말이 카파르다. 구약시대 성소 마당에 놋 제단이 있었다. 어린양에게 안수를 하면서 모든 죄를 전가시킨다. 이것도 redeem이라는 단어다. 그래서 죽은 어린양과 죄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게 회개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속죄가 된다. 그 다음에 물두멍 대야에서 손과 발을 씻어준다. 씻은 다음에 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소 안에는 덮개가 있는데, 이 덮개가 바로 이 단어다. 지성소에는 1년에 한번(음력 7월 10일) 들어가는데,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고, 그 위에 속죄소라고도 하고 시은소라고도 하는 덮개(히브리어로 코페르트:은혜로 덮었다는 뜻)가 있다.
모든 죄인들의 죄를 덮는 날이 바로 욤키프러였다. 그래서 1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시은소 위에 피를 뿌려, 그 피가 덮어지는 것이다. 신약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주님이 죄인들을 피값으로 사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휘장이 찟어짐) 부활하셔서, 대제사장으로서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갔으므로, 하나님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를 사탄으로부터 피값으로 죄인을 사는 것이다.
『속』이라는 말은 덮혀지는 것(카파르)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부터 덮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속량이 없는 죄 사함은 없다. 하나님이 사는 자는 죄인이 회개하여 돌이키는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죽게해서 사는 것이다. 놀라운 은혜다. 회개하는 자에게만 자기 아들의 죽음의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이 된다.
오늘날 『예수믿으세요, 예수믿으면 구원받습니다』라든가,『예수 영접하면 구원받습니다』라고 단순히 말한다면 곤란한 것이다. 회개는 자신이 어둠(악)에 빠져 있던 자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괴로움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둠에서 건져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회개하는 자를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믿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에게 그렇게 된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 믿음을 선물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지도 않았는데, 인간이 믿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위약일 뿐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속량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다. 욥기 19장 25절에서『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오늘날도 욥처럼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치도록 하락하셨다. 그래서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는 자를 구속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 주시는 것이다.
여기에서『대속』이라는 말은『가알』이라는 말이다. 룻기에서 룻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은 남편의 땅을 대신 지불하여 사줄 수 있어야 한다. 사주는 것은 책임을 져주는 것이다. 이게 사랑이고, redeemer라는 단어다. redeemer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세가지가 있다.『코페르, 파다, 가알』이다. 포로나 노예를 대가를 주고 사서 자유롭게 해 준다는 말이다.
히브리 백성이 바로의 압제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해방시켜준 것을 출애굽기 6장 6절에서『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신명기 7장 8절에서도『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속량이 해방이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는『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4장 5절에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인간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사탄의 종들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사탄의 종노릇하고 있어서, 죄악 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런데 죄를 깨닫지만, 자신이 악 가운데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회개한 자가 아니다. 죄의 문제보다도 하나님은 악을 제거하라고 하신다. 이 악이 옛사람이다. 악이 바로 탐심이라는 것이다. 회개는 탐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회개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반성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날마다 악에 대해서 죽는 자가 바로 회개하는 자가 된다. 오랫동안 교회 생활 잘하고, 날마다 죄를 반성해도, 명쾌하지 않은 이유는 악에서 벗어나는 회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마다 죄를 짓고 또 회개하고 또 죄를 짓는다. 그러면서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악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회개한 적이 없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여전히 탐심이 마음을 휘어잡는다. 회개해야만 속하여지고, 죄사함을 얻는다.
33-44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이레 동안에 너희는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열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번제와 소제와 희생제물과 전제를 각각 그 날에 드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제물 외에 또 너희의 모든 자원제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모세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초막절은 히브리어로 숙곳이라고 불린다. 속죄일 이후 5일이 지나서 시작되는데, 초막절은 일주일 동안 진행되며, 초막을 짓고, 그 안에 살면서 광야에서 떠 돌던 그들의 역사와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초막절을 지키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자손 대대로 알게 하려 하셨다. 하나님 나라로부터 이 세상에 와서 나그네로서 떠도는 인생인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불러 주신다는 것을 담고 있는 것이다. 초막은 장막으로도 불린다. 장막은 바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장막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은 절기를 통해서 역사하셨다.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다, 무교절에 예수님이 장사지낸바 되고, 초실절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며, 오순절에 성령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셨다. 앞으로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이 남아 있는 것이다. 나팔절이후 부터는 이 땅에 오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오신다는 것이다. 나팔절부터 초막절사이에 주님을 만나는 그 때까지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때까지가 구원에 대한 이야기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재림하셔서 심판자로서 사탄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진 성도는 천년왕국의 왕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리며,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한다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