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자코메티(스위스, 1901~1966년)의 청동 조각상 '걷는 사람I'이 예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에 팔렸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무려 자그마치 1억 430만달러에 팔리면서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이 세운 기록을 경신했다.
예술작품을 돈으로 환산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긴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기에 그만한 가격에 팔렸는지 궁금할 법도 하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정신적 위기 상황에서 좌절에 빠진 인간의 불안을 섬세한 통찰력으로 표현해낸 20세기 조형미술의 대가다.
자코메티의 조각작품들은 볼륨감을 상실한 작대기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부피감은 전혀 없이 골격만 앙상한 인체가 자코메티 작품을 관통하는 특징들이다.
"거리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무게가 없다. 어떤 경우든 죽은 사람보다도, 의식이 없는 사람보다도 가볍다. 내가 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것, 그 가벼움이다."
2차세계대전을 겪은 그는 전쟁의 상처로 신음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인간의 가벼움에 절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철사가닥같은 가늘고 긴 인체를 표현하여 극한상황에 놓인 인간의 고독한 실존을 형상화하였다.
즉, "존재와 허무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국한에 이르도록 표현함으로써 전통적인 인체미학을 전복하고 해체"시켜버린 것이다.
'걷는 사람I' 또한 앙상한 인체조각으로 인간의 한없는 외로움과 나약함을 드러낸 작품이다.
자코메티가 지적한대로 우리 인간들은 물질적인 겉치레로 둘러싸여있지만, 사실 속은 고독한 실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의 실체는 자코메티가 말한 것처럼 철사 한가닥으로 표현될 수 있을만한 가벼움이 아닐까 싶다.
앙상한 작대기 같은 인체 모습은 바로 현대인의 내면을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겉에 뒤덮인 허위와 위선을 덜어내고 덜어냄으로써 내면 속의 고독과 불안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걷는 사람I'........
'걷는 사람I'을 보는 순간, 마치 나 자신이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를 완전히 간파당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사진에서 보듯이 작은 충격에도 가볍게 부서질 듯한 '걷는 사람I'은 결국 나약한 인간의 내면을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었다.
재밌는 것은 현대인의 고독을 형상화한 '걷는 사람I'이 세계 최고가의 예술품에 등극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자코메티가 전하는 메시지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유효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절대고독 속의 인간 존재 - 알베르토 자코메티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20살이 되었을때 파리에 자리를 잡고 그의 화가이자 조각가의 꿈을 실현하기로 마음 먹는다. 자코메티는 그림도 그렸지만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조각들이며 그는 화가보다는 조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3차원을 일그러뜨리고 일렁이며 꿈틀꿈틀대는 거친 선속에서 입체파 그림의 색채가 배어나온다. 자코메티의 조각들은 사람의 모양을 사물에 은유하는 시적 표현을 닮아있다. 쇼펜하우어는 은유와 우의의 표현은 시에는 적합하지만 조형예술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코메티는 은유의 표현을 조각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아마도 쇼펜하우어는 피카소를 몰랐기 때문에 현대예술의 진행방향을 짐작하지 못했던 것같다. 조형예술에 은유적 표현이 너무나 짙으면 난해하지만 그 표현은 간소한 모양에 깊이 있는 표현이 응축된다. 현대예술은 은유적 표현과 우의적 표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현대예술의 시대를 활짝 연 사람은 바로 파블로 피카소다. 피카소 이후로 예술가들은 현실의 사람과 사물을 마치 시처럼 은유적 표현으로 간소화시키고 상징화시킨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현대철학은 문학을 비롯한 미술과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니체를 비롯해서 장 폴 사르트르같은 실존주의 철학이 문학과 미술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중세인들은 종교적인 신에게 자신의 존재를 모두 내어주었다. 중세인들은 종교가 그들의 존재의식과 고독감을 해결해주므로 그들은 자신의 존재의식과 그들의 불안한 마음에 대해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철학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고 지성을 통해 권위적인 존재감없는 억압하는 신의 관념에서 벗어난 현대인들은 무한한 존재의식과 불안한 마음에 대해 직접 맞서게 되었다. 현대인들은 자유를 얻었으며 함께 불안도 얻게 되었다. 니체와 사르트르를 비롯한 현대철학자들은 현대인들에게 자유를 전수함과 동시에 불안도 전수해주었다. 현대인들은 그 어느 시대를 살았던 인류, 그들의 조상들보다도 훨씬 더 개인적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그 존재감을 잊을 대중매체들도 가득하므로 자신의 존재감을 자각하기도 쉬울뿐더러 자신의 존재감을 망각하기도 쉬운 세상이 되었다.
자코메티의 그림에서 그러한 현대인의 존재의식과 고독감이 잘 나타난다. 엷은 색채들과 단순함, 구부러진 매력적인 선들속에서 현대인의 마음이 잘 나타난다. 나는 현대인들이 겪는 이러한 감정들을 결코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고 현대인들은 자유롭다. 다만 그 자유를 통제할 수 있는 그 자유를 즐길 수 있는 능력을 현대인은 기르고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 자코메티의 그림들도 자코메티의 조각들도 실존주의를 나타내고 있다. 실존주의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철학자들에게서 작가들에게서 시인들에게서 화가들에게서 조각가들에게서 영화감독들에게서 실존주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실존주의 예술은 존재를 묘사한다. 존재하는 실존하는 한 인간을 묘사한다. 현대철학과 현대예술은 실존주의라는 매듭으로 묶어지기 때문에 현대철학과 현대예술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실존주의는 종교적 신에 대한 성찰의 소멸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상황과 경제발전에 이은 짧지만 기나긴 인류의 현대사와 함께 해왔다. 몇십년간 인류는 전쟁과 죽음의 위협속에서 살아왔다. 실존주의는 그러한 역사적 환경속에서 탄생되었다. 니체로부터 사르트르,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실존주의가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부정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분명히 실존주의는 어떠한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지만 실존주의에서 절대자는 종교적 관점에서의 신의 관념과는 다르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절대자와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 실존주의에서 개인은 인간이 지닌 존엄성을 유지하며 인간의 가치를 보호해야 한다. 확실히 이러한 실존주의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관념은 전쟁 이후에 탄생되었다. 실존주의에 대해 간단한 몇마디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실존주의는 단어처럼 그 자체로 종교만큼 어려운 관념이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는 사르트르의 책 제목처럼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될지도 모르겠다. 존재하는 사람과 존재하지 않는 무와의 싸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며 어울린다. 둘은 대립된다. 삶과 죽음으로서. 실존주의에서 종교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존재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로부터 보호받던 어린아이가 스스로 독립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음에 비유할 수 있다. 중세로부터 신이라는 아버지로부터 보호받던 어린아이 인간은 이제 현대시대로 오면서 신으로부터 독립했다. 인간은 부모없이 홀로 독립해서 살아가야 한다. 현대인은 자유를 얻어냈으며 동시에 그 스스로 불안한 존재감과 투쟁해야 하는 무게를 지니게 되었다. 자코메티는 현대인이 지닌 이 실존주의의 감정을 그림과 조각으로서 표현한다.
실존주의에서 나 자신을 통제하는 것은 신도 아니고 운명도 아니다. 바로 개인 그 스스로이다. 사르트르는 "존재는 본질을 먼저 인정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그 스스로 의식하기전에 우리들이 벌써 존재하고 있음을 뜻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들은 벌써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벌써 존재하고 나서 우리자신의 현실적 존재의 의미에 대해 탐구한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세계의 파도를 만난다. 그 뒤에 그 자신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사르트르는 예술가가 사물을 창조하고 묘사할때 예술가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다만 인간이 존재함 그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무신론자였고 그의 실존주의 사상은 종교적 가치와도 상반된다. 실존주의의 주요 사상은 행동과 행위 현재이다. 현재에 행하고 있는 행동 이외에 모든 것은 무일 뿐이다. 다만 행동이 그를 말한다. 현재의 존재와 행동 그 이외에는 하찮고 무의미할 뿐이다. 인간이 생각을 행동으로 이루려는 시도와 노력을 제외한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과 행동만이 존재한다. 그것이 존재이며 개인적인 삶이다.
자코메티의 기다란 다리와 기다란 몸을 가진 조각속의 사람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자코메티의 예술작품에는 현대의 두 사상, 실존주의와 초현실주의가 함께 얽혀있다. 존재하는 인간과 그 스스로 신의 눈높이에 마주 닿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마음은 조각속의 기다란 다리와 기다란 육체가 보여주고 있다. 피카소, 사무엘 베케트(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르트르 같은 사람들은 서로 철학과 예술에 대해 토론하며 그들의 지성을 나누었다. 훌륭한 예술은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음을, 훌륭한 문학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글 이상의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며 훌륭한 미술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그림 이상의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글과 그림은 단순히 훌륭하다의 감정을 넘어서 인간과 마주보고 서서 서로 호흡하기 때문이다.
"행동을 제외하고 어떠한 현실도 있지 않다"는 실존주의 철학은 "창조하지 않고 어떠한 예술도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하기 때문에 예술가는 존재한다."라는 말로 연결된다. -by 보헤미안
----------------------------
-알베르토 쟈코메티 어록 중에서-
"모험, 큰 모험이라는 것은, 매일, 같은 얼굴에서, 미지의 그 어떤것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세계여행보다도 훨씬 값지다."
"꽃보다 더 쉽게 부서질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화가들이다."
"예술과 과학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실패와 성공은 부차적인 문제다.
비로소 18세기가 되어서야, Chardin과 함께, 교회나 왕의 뜻을 반영하는 예술이 아닌
예술가 자신이 자신의 비젼을 담은 예술이 빛을 발하게 된다.
인간이 마침내 인간 자신에게로 돌아가도다!"
"나는 아름다운 그림이나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기 위해 창조하지 않는다. 예술은 단지 보는 수단의 하나일 뿐이다.”
-쟝 폴 사르트르 글 중에서 -
" ...이것은 완전히 풀려 펼쳐진 상태이다. 가득 차 있음, 이것은 어떠한 경향을 띤 비어있음이다. 현실은 섬광을 발한다..."
"...쟈코메티의 예술은 마법사의 예술과 흡사하다 : 우리는 그에게 속기도 하고 공범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탐욕과 경솔, 관례적으로 하게 되는 감각의 오류, 그리고 지각의 모순은 그의 초상화들을 살아 숨쉬게 한다. 그는 판단과정을 거쳐가며 작업한다. 다시말해 그가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생각하는 우리가 어떻게 보게 될 것인가 이다.
단순히 그림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그의 목적이 아니다. 쟈코메티는 그림 그 자체가 갖고 있는 평면적 모습에 환영을 입혀 우리로하여금 마치 현실의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는 듯한 느낌과 태도를 불러 일으키고픈 것이다."
- 쟝 쥬네의 글 중에서 -
“,,,걷고있는 사람, 실처럼 가느다랗다, 구부러진 그의 발, 그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정 땅위를 걷는다. 그러니까 지구위를 말이다...”
“...나는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것이나 사람을 단 한번이라도 경멸의 눈으로 바라 본적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과 사람은 그 각각의 소중한 고동, 그 자체로 그에게 비추어졌을 것이다...”
첫댓글 아쉽지만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좋은 자료들이 대개 복사금지에 걸려 있습니다. 따로 찾아서 작품을 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