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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세계에서 비교적 자살률이 높은 지역은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다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이다. 일본도 자살이 많은 나라이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작가인 가와바다 야스나리를 비롯한 일본 역사상 10대 문호 중 4명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ㆍ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도 자살이 심각한 이슈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자살 바이러스가 우리 사회 곳곳에 번져가고 있으며, 자살이 교통사고ㆍ음주ㆍ흡연 등과 같이 주요한 사망원인이 되고 있다. 2016년 우리나라 자살자 수는 2만1764명, 하루 평균 42.2명, 인구 10만 명당 31명,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평균 2.5배 이상으로 회원국 가운데 제 1위이다.
* 자살의 원인
* 죽기를 소원했던 믿음의 사람들
* 자살의 범죄성 여부
* 성경에 등장하는 자살자들
1. 자살의 원인
ⅰ.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적어도 한 번쯤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태어나서 어느 정도 자아가 형성되고 사춘기를 겪을 때는 사소한 일로 고민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성인이 되면 조금 더 심각하고 복잡한 문제로 자살을 생각하기도 한다. 고대로부터 ‘인간만이 자살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했다. 그것은, 자살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극도의 분노ㆍ슬픔ㆍ번뇌ㆍ고민ㆍ두려움 등의 감정 작용을 인간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ⅱ. 이따금 보도되는 해안가에서 벌어지는 고래의 집단적 죽음을 자살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검증된 바는 아직 없다. ‘침팬지의 어머니’로 불리는 영국의 제인 구달 박사는 침팬지의 자살 사건을 학계에 보고한 바 있다. 어미 침팬지가 숨지자 아들 침팬지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어미의 시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한 달간 식음을 전폐한 끝에 숨을 거뒀다. 아들 침팬지에게 어미는, 곧 공동체이자 삶의 전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가지고 침팬지의 자살 운운하는 것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침팬지는 자살하기 위해 굶은 것이 아니라 굶다보니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ⅲ. 우리나라의 자살 원인은 ‘비관’과 ‘병고’가 70% 정도를 차지, ‘실존적 문제(존재의 의미)’로 인한 자살자가 많은 유럽 국가들과 대조를 이룬다. 한편 일본의 자살 원인은 ‘건강문제’가 절반 정도였고, 이어 경제 불황에 따른 기업 도산ㆍ실업 등과 관련한 ‘부채’와 ‘생활고’, 그리고 ‘가정문제’ 순으로 나타났다.
ⅳ. 자살은 살인의 가장 나쁜 형태라고 말한다. 사회와 나라가 조장하고 방관하는 ‘살인’이 자살이라는 뜻이다. 자살 연구로 유명한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뜌르깽은 1897년 ‘자살론’에서 자살의 세 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이 그것이다.
(1) 이기적 자살
① 개인적인 이유, 곧 심리적 혹은 현실적인 상실감으로 인함
ⅰ. 사회적응 실패, 질병 또는 건강 상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복잡하고 괴로운 가정적ㆍ경제적 문제, 권력ㆍ명예ㆍ돈ㆍ직업ㆍ자존심ㆍ아름다움의 상실, 소외, 자신의 능력 등에 대한 절망감과 죄책감, 출구 없는 삶, 희망 없는 미래, 우울증ㆍ알코올중독증ㆍ정신분열증ㆍ강박증ㆍ불안장애 등의 정신질환, 그리고 실존의 문제(존재의 의미) 등이 자살의 동기가 된다. 예술가나 작가 중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한 사람들이 많다.
ⅲ. 영국 최고의 모더니스트 작가 버지니아 울프.
“지금 난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끔찍한 시기를 견디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회복하지 못할 것 같아요. 환청이 들리고 일에 집중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제껏 내 모든 행복은 당신이 준 것이고, 더 이상 당신의 삶을 망칠 수 없습니다”라는 쪽지를 남편에게 남겨 놓고 산책을 나가서, 돌멩이를 주워 외투 주머니에 가득 넣고 아우스 강으로 뛰어들었다.
ⅳ. 노벨문학상 작가인 미국의 헤밍웨이
그는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치매기에 대한 공포와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1961년 6월 권총 자살했으며, 1928년에는 그의 아버지가 똑같은 방식으로 자살했고, 그의 형ㆍ누이에 이어 1996년에는 손녀이자 유명한 배우였던 마고 헤밍웨이가 자기 할아버지 기일(忌日)에 자살함으로써 한 가족에서 5명이 자살하였다.
ⅴ. 일본의 작가인 가와바다 야스나리.
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지 3년 반 만에 자살했다(소설 ‘설국(雪國)’). 그는 73세의 나이에 입에 가스관을 물고 자살했다. 그는 아무런 유서도 남기지 않았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어떤 낌새도 없었다. 그는 글을 쓰다말고 훌쩍 집을 떠났다. 쓰다만 원고지엔 ‘또’자가 쓰여 있었고, 만년필 뚜껑이 열린 채였다. 일본문학에서는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등 굵직굵직한 작가들이 모두 자살로 마감했다.
ⅵ. 우리나라 이장희.
그가 청산가리를 먹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그의 아버지가 발견, 숟가락으로 아들의 입을 벌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그는 악착같이 입을 다물고 죽음을 택했다. 이들의 자살 이유는 대개 실존의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추정된다.
ⅶ.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천재 극작가 김우진.
1926.8.4, 새벽 4시 동이 틀 무렵, 그들은 29세의 짧은 생애를 현해탄의 시린 물빛 위에 접었다. 그들의 투신자살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김우진은 호남 대지주의 아들로 우리나라 근대 공연예술의 터를 닦았다. 윤심덕은 1923년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돌아왔으며, 동양 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몸맵시로 언제나 대중의 관심 속에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도쿄 유학시절 사랑을 맹세했지만, 윤심덕이 장안의 갑부 이영문과 스캔들을 내자 김우진은 그녀에게 절연을 선언했다. 김우진은 처자가 있는 몸이었다. 윤심덕은 상심에 젖어 1년여를 만주에서 떠돌다 1925년 심기일전하여 ‘토월회’의 연극무대에 섰으나 그녀의 재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어찌어찌 두 사람이 도쿄에서 재회했을 때 윤심덕은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는지 그녀는 아비노비치의 곡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직접 가사를 붙였다. 그리고 ‘사(死)의 찬미’를 노래한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더냐…”
ⅷ. 셰익스피어의 작품(14건)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13건) 속에 등장하는 자살은 주로 명예를 다치고 감당하지 못한 때문이다.
② 죽이고 싶은 사람 대신 자신을 죽임.
ⅰ. 메닌저의 자살이론에 의하면 누군가에 배신당하거나,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등 그러할 수 없는 일을 당하고 보면 죽이고 싶은 원망이 생기고, 그 원망을 성취할 수 없을 때 죽임을 당하고 싶은 원망으로 급반전, 자신을 가혹하게 파괴하려 든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죽이고 싶은 원망과 죽임 당하고 싶은 원망이 공존하는 것을 엠비버런스(상반감정공존)라 한다.
ⅱ. 예컨대 전교조와의 마찰로 인한 예산 보성초등학교 서승목 교장의 자살, 우리나라 대표적 기업인 중 한 사람인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의 투신 자살, 뇌물수수 혐의를 받고 수사를 받고 있던 안상영 부산시장의 옥중 자살, 노무현 전대통령의 TV회견에서 인사 청탁의 부정한 인물로 공격받았던 남상국 대우건설 전(前)사장의 한강 투신 자살, 뇌물수수 혐의를 받고 수사를 받고 있던 박태영 전남도지사의 한강 투신 자살, 영화배우 최진실의 자살, 노무현 전대통령의 투신 자살,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투신 자살 등은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다. 아마도 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위상의 명예 실추라든가 기타 상실감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했을 것이다. 혹은 자신에 대해 가해진 불가항력적인 일을 죽음으로 항거하거나 앙갚음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했을 수도 있다. 곧, “내가 죽을 테니 너희도 고통을 당해봐라”는 식의 타인에 대한 복수심이나 적개심의 표현일 수 있다.
ⅲ. 자신을 철저하게 자기파괴를 하고 싶을수록 높은 곳에서 투신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파리의 에펠탑, 한강다리와 같은 명소를 자살 장소로 선호하는 것은 자신의 어찌할 수 없었던 말 못할 사정을 만인에게 알리거나 인생허무를 고하고 싶은 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2) 이타적 자살
이타적 자살은 개인적인 원인을 떠나 집단이나 사회로부터 자살에 대한 동기나 관념을 부여받는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의무감에서 사회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는 것이다. 예컨대 마사다에서 항전하던 967명의 유대인의 자살, 일본군 자살특공대 가미카제, 순교자로 불리는 팔레스타인 자살특공대, 저항적인 분신자살, 사이비종교 집단의 집단자살 등이 이에 속한다.
우리나라의 이경해(56) 전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회장은 2003.9.10일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 개막일에 농업개방 반대 시위를 하던 도중, 현지에서 자살했다. 그의 자살은 세계화ㆍ개방화의 파고(波高) 앞에서 붕괴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 농업의 절박성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그를 순교자로 부르기도 한다.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극(大衆劇) ‘쥬신구라(忠臣藏)’는 비명에 간 영주(領主) 아사노를 위해 47명의 낭인무사들이 천신만고 끝에 원수를 갚고 일제히 할복자살함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들은 자신의 죽음이 대의를 위한 희생이요 의리요 명예로 생각한다.
팔루자 출신 14세 소년 라흐만은 지역 내 한 무장단체의 자살특공대에 지원했다. 다음은 그가 남긴 글이다.
“이 세상에 남은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 있습니다. 폭탄을 트럭에 넘치도록 실어 적의 심장부로 돌진해야 합니다. 지난해 4월 시위 도중 아버지가 미군의 총에, 올해 4월 어머니와 형제들도 미군의 헬기에, 모두 알라 곁으로 갔습니다. 하고 싶은 건 하나도 없습니다. 높이 자란 야자나무에 열린 대추야자를 따먹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유리창 파편 무성한 학교에 가기도 싫습니다. 내가 갈 곳은 단 한 곳입니다. 아버지ㆍ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이 기다리는 알라의 천국입니다. 내가 가는 길에 조국의 해방이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는 길에 이교도 미군이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도착한 곳이 알라가 약속한 천국이길 바랍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이 세상을 떠나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아니, 이 세상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행복입니다. 어서 빨리 제 차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트럭이든 승용차든 모든 폭탄을 실어 내가 가야 할 길을, 하나뿐인 그 길을 가렵니다.”(중앙ㆍ2004.7.27)
(3) 아노미(anomy, 사회적 무질서)적 자살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라든가, 사회의 기존 가치관이나 규범이 일시에 붕괴됨으로 정신적 혼란 상태에 빠졌을 때 일어나는 자살이다. 예컨대 최근 중국인의 자살률이 세계 평균의 2배에 이르고, 특히 15-34세 사이의 청ㆍ장년층의 최대 사망원인도 자살이라고 한다. 이것은, 중국 경제의 급성장으로 인한 가치관의 전도와 정신적 혼란상태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설명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이 혼재하고 있다. 개개인의 나약함에다 사회적 무질서에서 유발된 스트레스가 더해진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살벌하고 냉정한 경쟁체제’, ‘성취와 희열 대신 실패와 좌절을 안겨 주는 교육과정’, ‘강자와 일류만이 중심이 되는 사회’, ‘한번 약자가 되면 계속 약자일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 ‘학벌 위주의 고용체계’, ‘주변 사람들과의 정서적 유대의 단절’ 등으로 인한 고독ㆍ소외ㆍ삶의 무의미함의 무게가 너무도 크다.
자살 충동은 그저 죽겠다는 단순한 충동이 아니다. 그것은 살고 싶다는 삶의 욕망이 빚어내는 강한 갈등 상황이다. 집단자살은 나약한 사람들끼리 고민을 나누다가 택하는 방법이다. 혼자서는 죽을 수 있는 용기가 없고 집단 최면상태의 힘을 빌려 자살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 것이다.
이 외에도 자살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되고 있다. 프로이트는 1920년 펴낸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에서 자기파괴 본능인 죽음의 본능이 우울증이라는 질병을 통해 자살로 나타난다고 한다. ‘베르테르 효과’(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당시 젊은이들의 자살이 급증함)라고 불리는 자살의 ‘모방설’도 있다. 생물학적인 견해로는 자살유전인자가 후대에 전달된다고도 하고, 유해한 가정환경이 한 집안에서 자살의 반복을 초래한다고도 한다.
한편 심리학자인 토머스 조이너는 그의 책 ‘왜 사람은 자살하는가’(2005.1)에서 사회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면서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일수록 자살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무감각’이란 사람이 죽어가는 장면 앞에서도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심리상태를 가리킨다. 예컨대 총을 맞아보았거나 동료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한 군인이나 경찰은 자신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군인과 경찰은 보통 사람보다 자살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의사들 역시 환자의 고통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죽음을 연상하게 되므로 자살 비율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2. 죽기를 소원했던 믿음의 사람들
(모세)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11:15)
(욥)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욥3:11-13)
(예리미야)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렘20:14-15,18)
(엘리야)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19:4)
ⅰ.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도 한 때 하나님께 죽기를 간청하는 기도를 드렸다. 사람들은 가끔 죽기를 원한다. 노인들의 경우 흔히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셨으면 좋겠어요. 왜 나를 쉽게 죽지 않게 하시는 걸까요?”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 치고 실제로 자살한 사람은 없다.
ⅱ. 유교에서도 몸에 난 머리카락 한 올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신체관을 가르친다.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이 포위되었을 때 충신 장유가 이식에게 “성(城)이 불행하게 되었을 때 칼로 찔러 자살하는 것은 도리를 어기는 일이니 어떻게 해야 잘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이에 “자살해서는 안 된다. 내가 내 목을 찌르지 않더라도 적이 죽여주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3. 자살의 범죄성 여부
(1) 자살은 질병이다.
ⅰ. 영화배우 이은주 양의 장례를 집전했던 목사님은 “은주 자매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라 질병과 싸우다 간 것입니다”라고 설교했다. 이처럼 자살을 주로 ‘우울증’이라는 질병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평상시 교훈에서도 “자살은 죄”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세상법적으로도 도적질 등은 죄로 규정하지만, 자살은 죄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ⅱ. 자살의 주원인인 우울증은 생물학적(생화학적) 요인, 유전적 요인, 심리적 요인, 사회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병한다. 특히 두뇌의 신경전달물질(세로토닌 노레핀프린 아세틸콜린, 도파민, 엔돌핀 등)의 불균형이 우울증(단극성 정신장애)과 조울증(양극성 정신장애 : 우울하거나 들뜨는 기분이 지속)을 일으킨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2) 자살은 죄악이다.
ⅰ. 우리는 자살에 질병적인 측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자살을 윤리 문제가 아닌 질병으로 보고 질병치료에 초점을 맞춘다면 신자들의 자살을 예방하는 데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자살은 죄가 아니다”라는 인식은 고통당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쉽게 자살을 선택하게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ⅱ. 13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살은 타살보다 죄가 무겁다고 말했다. 단테의 ‘신곡’에서 자살자가 지옥에서 받는 고통은 타살자보다 가혹하다고 한다. 자살은 왜 죄인가?
*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침해이다.
* 자살은 인생의 존귀함을 모욕한다.
* 자살은 하나님의 기회를 부정한다.
* 자살은 절망이라는 이름의 불신앙이다.
* 자살은 사회적인 죄악이다.
①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침해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36:9)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법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1-22)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ⅰ. 자살은 생명에 대한 정면 거부이다.
자살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권리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권리에 대한 오해이다. 인간 생명에 대한 권리는 살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죽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ⅱ. 성경은, 생명의 근원적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생명은 인간의 선택이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갑절로 주님의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생명은 주신 분께서 때가 되면 거두어 가실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갈 때까지 가야 한다. 그것이 생명 받은 자의 도리이다.
ⅲ. 두 사람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했으나, 베드로는 회개하여 제자의 반열에 들었고, 유다는 스스로 죽어 배신자로 기록되었다.
② 자살은 인생의 존귀함을 모욕한다.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사49:5)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29-30)
a. 하나님은 참새의 생명까지도 주목하신다.
새 한 마리일지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은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음을 나타낸다. 하물며 인간의 생명이겠는가?
b. 인생이 존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하나님께서 인생을 존귀하게 여기신다.
ⅰ.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하셨고 또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만큼 인생을 존귀하게 여기신다. 그 사실만으로도 인생은 어떠한 비참한 상태에서도 존재해야 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진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ⅱ.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하늘 보좌를 비우고서라도 내려오셔서 찾으시는 존재이다. 비록 티끌 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찾아주시는 순간 우리는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엄청난 사실에 대한 자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인생의 의미와 내용이 달라진다.
ⅲ. 시편 기자는 비천한 인생을 크게 생각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144:3-4)라며 놀라움을 고백한다.
ⓑ 인생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ⅰ.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하심이니라”(롬14:8-9)고 말씀한다. 인생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죽음밖에 다른 길이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일지라도 인생의 삶의 가치와 의미는 숭고하다.
ⅱ. ‘죽음의 수용소’ 저자 빅터 프랭클린은 2차 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살아났다. 그는 생사의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인생이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 기대하지 말고, 내가 인생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라”고 말했다.
ⓒ 인간의 생명 자체는 놀라운 선물이다.
ⅰ. 불가(佛家)에서는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들판에 콩알을 넓게 깔아놓고 하늘에서 바늘 하나가 떨어져 그중 콩 한 알에 꽂히는 확률”이라고 말한다. 사실 생물학적으로도 인간은 놀라운 확률 가운데 출생한다. 정자와 난자의 만나 수정하기까지 1억 분의 1과 1백만 분의 1의 만남이다. 이를 곱하면 10의 23제곱 분의 1의 확률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위대한 탄생을 하며, 그 인생은 말할 수 없이 소중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ⅱ. 물론 인생의 존귀함을 이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인간은 기막힌 확률에 의해 태어나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출생하는 보다 존귀한 존재임을 말씀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고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며,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산 소중한 존재이며, 그리고 영생의 생명을 선물 받은 존재이므로 그것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③ 자살은 하나님의 기회를 부정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욥5:11)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ⅰ.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인생의 고통은 우리가 ‘살고 있음’(생명)에 대해 지불해야 할 대가로 볼 수 있다. 고통을 잊으려고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하지 못하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극도의 재난을 연속적으로 당하면서도 원망에 빠지거나 생명을 포기하는 데까지 가지 않고 끝까지 인내했다. 그 결과 욥은 정금 같은 믿음과 성숙한 인격으로 올라섰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 가서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복을 받았다. 어느 한 기독교기업 건물 옥상에 “아직 기도할 수 있는데 무엇을 걱정하십니까”라고 쓴 문구가 설치되어 있다.
ⅱ. 자살은 하나님께서 내게 일하실 기회를 나 스스로 잘라버리는 것이다.
자살은 고통을 통한 자신의 믿음 성장과 인격 성장의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삶은 죽음으로 완성된다”고 했다. 성경은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116:15)라고 말씀한다. 인생은 제 명대로 살고 그 전 과정을 완주하고 죽음을 맞이할 때 그것을 통해 삶이 완성된다.
ⅲ. 성경에 자살한 사람의 기록이 4명 나온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으면 죽었지 달리 생각하거나 달리 살기는 싫다는 결단에는 자기 자신 이외에는 모두를 거부하는 독존(獨尊)의식이 깔려 있다. 하나님과 남아 있는 자들과 세상을 향해 치고 있는 두꺼운 자존의 벽인 자살은 생명을 빼앗는 악령의 역사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가운데 자살한 사람은 없다. 그들은 견디고 참았으며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렸다.
④ 자살은 절망이라는 이름의 불신앙이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히11:35-39)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ⅰ.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이유와 상황 아래서 자살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살할 때의 마음의 상태를 실제로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오죽했으면 자살을 했을까” 하고 짐작할 뿐이다.
ⅱ.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직면할 수 있는 최악의 상태 중 하나가 죽고 싶지만 죽도록 허락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죽지 못해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우리는 그의 말에 공감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자살은 희망을 포기하고 절망에 복종하는 불신앙이라는 사실이다.
ⅲ. 무인도에 떨어진 로빈슨 크루소는 “왜 조물주는 피창조물을 이렇게 무참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버리는 것일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조차 뼈아프게 원망할 만큼 구원의 손길조차 닿지 않는 진흙탕 속으로 처넣어 버리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의 눈앞에는 희망이라 이름 붙일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겨우 목숨은 부지했지만, 그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 생각을 고쳐먹는다. “나는 처참한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다른 동료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죽고, 나는 죽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것과 없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가?” 크루소에게 희망을 안겨준 것은 그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생각을 바꾼 것뿐이었다. “여기에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ⅳ. 우리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고,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해도, 우리는 여기에 있다. 어찌 되었거나 여기에 있다. 만약 우리가 여기에 없다면, 절망도 없을 것이다. 살아 있기에 절망이 있고, 그래서 희망도 있다. 성경은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약5:13)라고 말씀한다.
⑤ 자살은 사회적인 죄악이다.
ⅰ. 개인의 죽음은 단지 그 개체의 소멸로만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로서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와 책임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개인의 자살은 자신의 책임에 대한 포기로 자신의 가족들에게 가장 큰 상처와 고통을 줄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서 그와 여러 가지 모양으로 관계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게 된다.
ⅱ. 그러므로 자살은 탈출구가 아니다. 어떠한 문제도 죽음으로써 해결되는 일은 없다. 오히려 더 많은 짐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떠넘길 뿐이다. 자살은 어떤 경우라도 미화되거나 방조할 수 없다.
4. 성경에 등장하는 자살자들
(1) 사울과 그의 군사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삼상31:4-5)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다. 블레셋 군대에게 쫓기어 길보아산에 이르렀을 때 스스로 칼을 빼어 세워두고 그 위에 엎드려 죽었다(삼상31:1-6).
(2) 아히도벨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삼하17:23)
아히도벨은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을 도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고향으로 돌아가 목메어 죽었다.
(3) 시므리
“시므리가 성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위소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놓고 그 가운데 죽었으니”(왕상16:18)
시므리는 북이스라엘의 엘라 왕의 군대 장관이었으나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왕이 된지 7일 만에 반격을 당하고 왕궁이 함락되자 왕궁에 불을 놓고 스스로 타 죽었다(왕상16:18).
(d) 가룟 유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5)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고 예수께서 재판받는 것을 보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