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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12:53] https://youtu.be/pXgHKdMyQyQ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12:58] https://player.vimeo.com/video/68552742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1:08] https://youtu.be/SOlv2mdzbLs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1:09] 오늘은 한반도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나라는 페르시아, 아랍과 교류를 하였다는 주제로 서핑을 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1:15] https://youtu.be/iPLhGBjk9r0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1:54] https://youtu.be/lm6KF1U4DDc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3:38] 『쿠쉬나메』는
8세기 초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후 아랍에 항쟁하는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의 영웅담을 다루고 있는 대서사시이다.
전편과 후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서 신라(Basilla)와 관련된 부분은 후편으로 전편은 후편을 위한 도입부의 성격이다. 1998년 마티니(Matini) 교수의 편찬본을 기준으로 『쿠쉬나메』의 신라관련 부분이 전체 10,129절 중에서 2,011절에서 5,925절 사이를 구성하고 있는 상당한 분량으로, 신라의 지리적 상황, 부속도서, 여자, 군대, 궁정 생활, 결혼 풍습 등에 관한 기록과 묘사가 수록되어 있다. 현재 『쿠쉬나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 초보적인 단계로, 향후 다각적인 측면에서의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한편, 신라와 페르시아를 포함한 서역간의 교류에 대한 연구는 다수 있는데,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선행연구들을 바탕으로 『쿠쉬나메』의 텍스트 분석을 통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울산항을 통한 서역과의 교류를 살펴보았다.구체적으로 ...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3:39] https://www.udi.re.kr/bbs/board.php?bo_table=ulsan_report&wr_id=58&sfl=wr_subject&sst=wr_hit&sod=desc&sop=and&page=5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3:39] 파일: 2014연구논총_통일신라시대울산항.pdf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3:39] 톡게시판 '파일'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3:40] 게시물 위에것은 저장기간이 만료되면 다운을 받을 수 없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3:41] 고 밑에것은 게시판에 파일로 다시 저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저장기간이 없습니다. 톡게시판 파일코너에 ㄱ들ㄹ어기시면 언제든지 보실수 있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3:41] 파일르;ㅣ 저장기간이 만료 되었다고 뜨면 잘못 들어가신 것이니 계속 쭈물닥거려보시면 찾게 될 것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3:44]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패망 이후 중국(당나라)에서의 항쟁의 역사를 『신당서』및 영문 역사서들을 통해 고찰하여, 『쿠쉬나메』의 주인공의 역사적 상징성을 구체화시켜보고자 한다. 둘째, 『쿠쉬나메』에 기록된 바실라(Basila)가 신라임을 역사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8세기 중반 이후 아랍인들의 신라 인식을 고찰하여, 그것과 『쿠쉬나메』에서의 텍스트 간의 비교 · 분석을 통해 바실라(Basila)의 실체를 파악해 보았다. 셋째, 『쿠쉬나메』의 주인공인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의 신라로의 유입 루트를 파악하기 위해, 당시 신라에서 국제항으로서의 울산항(개운포항)의 위상과 역할 및 울산항을 통한 국제교류 양상을 살펴보았다. 『쿠쉬나메』는 7세기 중반 이후의 신라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정치적 관계는 물론 한반도와 이슬람 초기 서아시아와의 새로운 관계정립을 위한 유용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 울산항을 통한 고대 실크로드에 이르는 문화교류, 나아가 울산항을 통한 신라의 대외관계 연구...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3:46] 쿠쉬나메>의 '쿠쉬'는 사람 이름이며, '나메'는 페르시아어로 '책'을 의미하므로, '쿠쉬의 책'이라는 뜻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14] 쿠쉬나메는 쿠쉬의 책이라는 뜻으로 페르시아서사시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14] 1108년~1111년에 쓰여졌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15] 12세기에 외워서 전해 오던 것을 글자로 옮긴 서사시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16] 대부분의 인도나 아랍의 경전이 이런 식으로 처음에는 전문가가 외워서 전수하소 계속 전승시키다가 허떤 학자가 글로 써서 옮기는 식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18] 쿠쉬나메는 중국(어느 나라인지는 알 수 없고 그냥 중국의 왕으로만 나옵니다. 이름은 쿠쉬입니다. )의 왕 쿠쉬가 악인에서 선인으로 바뀌는다는 변모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19] 10129절에 해당하는 방대한 내용 중에서 신라에 관한 내용이 절반이나 담겨 있다고 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21]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가 결혼 그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잃어버린 페르시아 왕국을 되 찾게 되고 영웅이 되며 신라와 영원한 평화를 지속하게 되면서 결말이 지어지는 신화로 되었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22] 그러나 사산조 페르시아는 640년에 멸망하여 부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신화이며 꾸며진 이야기인 것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23] 처음에 신화(서사시)를 만들 당시 페르시아인들 사이에는 신라에 대한 동경이 있엇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24] 실크로드를 따라 약 9천키로미터를 횡단하면 6개월 정도 걸리는데 기원전 그러니까 한나라 때부터 유럽이나 그리스 로마 이집트 아라비아 등과 무역이 성행하였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25] 물론 뱃길도 있었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26] 뱃길은 인도를 돌아서 아시아로 오는데 근해를 따라서 오기 때문에 중간 기착지가 여러 곳이 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26] 가는 곳마다 무역 교역품을 사고 주고 여행을 하였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27] 이런 해상무역은 아라비아 상인들에게는 천직이었으며 평생을 배에서 살게되는 것입ㄴ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28] 이런 아라비아 상인들의 특징과 페르시아의 발달된 의학, 건축, 기타 향료 등 많은 우월적 지식이있었기 때문에 동양으로의 여행은 아주 매력적인 것이었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29] 그들에세 6개월 1년 아니 10년 이라는 세월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의 일부였으니까요.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31] 640년경 사산조페르시아의 마지막 황제 야즈데기르 3세는 아들을 중국으로 피신시켜 제국의 탈환을 계획하였는데 하지만 중국도 안전하지 못하게 되자 다시 신라로 망명하게 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32] 그곳릉 책에 바실라 라고 하였지만 바는 우리말의 와! 같은 말로 매우 빼어난 실라 라는 뜻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32] 그들의 리상향의 국가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32] 홍길동의 율도국 같은 나라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33] 아마도 이부분부터 창작이 본격적으로 된 듯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34] 페르시아왕자 아브틴은 당시 신라왕 타이후르를 찾아가 몸을 맡깁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34] 아브틴은 신라 왕과 함께 격구놀이를 즐기기도하면서 신뢰를 쌓아갑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35] 실제로 격구는 서양의 폴로 경기와 같은 것으로 이 때 이슬람인에 의해서 전해졌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36] 그리스 로마의 축국도 아메리카를 건너가서 마야인들에게 전해져 똑같은 놀이를 하는 것을 봤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36] 그렇다면 지구는 비핼기 차가 없어도 하나 같은 문화를 공유하기도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37] 암브틴은 중국이 쳐들어 왔을 때 크게 용맹을 덜쳐 신라를 도우게 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38] 그래서 파파랑 이라는 공주를 얻어 결혼하게 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38] 꿈같은 세월을 보내게 되던 아브틴은 고국을 잊지 못하여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39] 임신한 파라랑을 데리고 뱃길로 귀국을 하게 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40] 아마도 그들이 처음 왔을 때는 중국에 먼저 왔고 중국에서 울산항으로 오게 된 것을 추정해보묜 이들은 배를 잘 이용하는 사람들이아닐까 생각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41] 뱃길은 바다 경험이 만ㄶ은 신라인이 안내했다고 하비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41] 아마도 일개 군대 수준의 병력을 이끌고 돌아 갔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42] 여기까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설정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42] 고국으로 돌아가자 정적 자하트에세 아브틴이 암살당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42] 하지만 뱃속에 아이가 자라서 복수한다는 내용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43] 그후 나라응 찾은 파라랑 공주와 아들 페레이둔은 외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고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44] 그 편지를 보고 신라에서는 다시 선물과 사절단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끝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44]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앞에서 다 언급하였다시피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45] 뱃길로 시간이 많이 걸릴 뿐이지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45] 그 때는 초고속 시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46] 신라가 동서무역의 끝자락이라면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46] 서쪽 끝은 아마도 유럽을 끝자락인 로마가 될 것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46] 약 2천년전에는 아메리카를 서구인들이 항해하지 못했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47] 아시아인 만이 아메리카에 갈 수 있었지요.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51] 결국 이책은 나라를 빼앗긴 페르시아가 신화작 내용을 통해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52]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페르시아가 신라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52] 분명하고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52] 신라와 교류하였으며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52] 매우 우호적이었다는 것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53] 아랍권 학자글의 책에서 도 신라를 언급하는데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55] 마끄띠시라는 학자는 966년 창세와 역사 라는 책에서 중국의 동쪽에 신라가 있는데 공기가 맑고 땅이 비옥하며 물이 좋다. 신라인은 금실롸 수 놓은 천을으로 집을 단장하고 식사 때는 금그릇을 사용한다. 고 기록하였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56] 또 아랍의 지리학자 이드리시(1091~1166)는 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 이라는 저서에서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57] 신라를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해 다시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고 기술하였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57] 사진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58] 쿠시나메 책에 그려진 신라 왕과 라브틴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58] 사진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59] 사진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59]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4:59]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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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
(漆谷 松林寺 五層塼塔 舍利莊嚴具)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의 보물
종목 보물 제325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수량 일괄
시대 통일신라
소유 국유
주소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21,
국립대구박물관 (황금동,국립대구박물관)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漆谷 松林寺 五層塼塔 舍利莊嚴具)는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보물 제189호)을 1959년에 수리하기 위해 해체하면서 탑 안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25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송림사는 진흥왕 5년(544) 명관(明觀)이 중국에서 가져온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절로, 여기에는 우리 나라에 몇 개밖에 남아 있지 않은 벽돌로 만든 송림사 오층전탑(보물 제189호)이 있다. 1959년 이 탑을 수리하기...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00] 송림사는 진흥왕 5년(544) 명관(明觀)이 중국에서 가져온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절로, 여기에는 우리 나라에 몇 개밖에 남아 있지 않은 벽돌로 만든 송림사 오층전탑(보물 제189호)이 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00] 금동제 사리외함과 녹색 유리로 만든 목이 긴 사리병, 옥과 진주가 붙어있는 유리잔들이 채색된 거북 모양의 석함 안에 있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01] 특히 2층에서 발견된 거북 함 속의 금동 사리기와 유리 사리병은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유물로 사료로서 그 가치가 크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02] 이 유리잔은 이탈리아에서 유리 공예가 발달하였으므로 로만그라스라고 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02] 중국에서 들어 왔다고 하였지만 아마도 직거래도 있었을 것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03] 황남대총에서 나온 신라보검은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03] 카자흐스탄의 스키타이 유물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03] 이건 흉노와 교역한 무ㅡㄹ품인데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03] 신라자체가 흉노였을 가능성이 매우큽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04] 석설형 매장제도는 북방하고도 유목민들의 문화이거든요.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05] 결론하면 한반도 남부의 고대사는 영남과 호남이 산맥으로 막혀있어 교류가 힘들었는데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06] 중국 쪽에서 영산강 쪽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 배를 타고 상륙하는 이주민이 있었다고 보여지고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07] 이쪽 세력은 일본까지 지배하는 매우 강성한 세력이었으므로 멀리 인도나 중국 남부 태국 등지에서 배로 오는 이주민은 울산으로 갔다고 보여지네요.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08] 오랜 세월 동안 구전으로 뱃길이 알려져 왔으므로 아라비아나 신라 사람들도 바닷길을 훤히 알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09] 문제는 신라가 대륙에 있어야하는데 어째서 지금 한반도 남부에 지금의 경주에 있냐는 것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10] 그건 이주민 외부인이 막 섞여서 서로 왕자리를 차지하게되어 역사를 혼합하게 되는 과정을 겪었다고 보여집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11]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신라사는 한반도에서 쓰여지면서 일부는 한반도를 기술하고 일부는 대륙을 기술하는 등 혼란스럽게 쓰여졌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12] 특히 신라는 감숙성 난주에 수도가 있었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15] 경주는 역사상 모두 다섯군데 있었던 것으로 사서(史書)에는 기록되어 있다.(우리나라 제외)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경주(慶州)는 처음 정주(定州)였다. 정주(定州)는 감숙성(甘肅省) 무위현(武威縣) 서북이다. 두 번째 경주는 순화현(淳化縣)이다. 이 곳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 위쪽, 세 번째 경주는 산서성(山西省) 기현(祁縣) 동쪽, 네 번째 경주는 섬서성(陝西省) 경양현(涇陽縣) 북쪽, 다섯 번째 경주는 사천성(四川省) 기주부 인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 경주편에 의하면, 경주는 별호로 낙랑(樂浪)이라 하며, 낙랑은 순화(淳化)에 정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爲慶州府別號樂浪也 淳化所定』
(1, 3, 4, 5는 별로 중요하지않다.)
주목할 것은 두 번째 경주가 순화현(淳化縣)이라는 것이다. 이곳은 고려태조 왕건이 경순왕 김부에게 내려준 봉지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식읍 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丞食邑八千戶)'가 그 봉호이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15] 경주는 역사상 모두 다섯군데 있었던 것으로 사서(史書)에는 기록되어 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15]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경주(慶州)는 처음 정주(定州)였다. 정주(定州)는 감숙성(甘肅省) 무위현(武威縣) 서북이다. 두 번째 경주는 순화현(淳化縣)이다. 이 곳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 위쪽, 세 번째 경주는 산서성(山西省) 기현(祁縣) 동쪽, 네 번째 경주는 섬서성(陝西省) 경양현(涇陽縣) 북쪽, 다섯 번째 경주는 사천성(四川省) 기주부 인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 경주편에 의하면, 경주는 별호로 낙랑(樂浪)이라 하며, 낙랑은 순화(淳化)에 정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爲慶州府別號樂浪也 淳化所定』
(1, 3, 4, 5는 별로 중요하지않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16] 경주는 별호로 낙랑(樂浪)이라 하며, 낙랑은 순화(淳化)에 정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기록이 중요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16] 주목할 것은 두 번째 경주가 순화현(淳化縣)이라는 것이다. 이곳은 고려태조 왕건이 경순왕 김부에게 내려준 봉지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식읍 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丞食邑八千戶)'가 그 봉호이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17] 경주의 위치는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바로 위쪽에 있는 순화현(淳化縣)에 있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17] 낙랑왕 이라는 말도 역사를 공부해보면 낙랑이 요동에 있었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18] 경순왕이 낙낭공부와 경혼하고 낙랑땅을 하사 받았으며 그곳이 경주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18] 그리고 경주(慶州)란 이름도 신라가 망했기 때문에 생긴이름이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19] 즉, 신라의 수도가 아니라 경순왕이 태조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왕건으로부터 동맹(同盟)의 답례로 태조의 딸 낙랑공주와 혼인하고 식읍으로 받은 땅에 경주(慶州)라는 이름을 왕건이 내려주었던 것이다.
원래 수도는 계림, 또는 금성인데 지금 한반도 경주에는 계림도 있고 금성도 있고, 낭산, 명활산, 황룡사, 포석정 등이 마치 영화셋장 처럼 한 곳에 뭉뚱거려져 있으니 말이 되겠는가?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19] 기미(己未)에 신라왕이 글을 올리기를 , “본국이 오랫동안 위란(危亂)을 겪어 나라의 운수가 이미 다하였으니 다시 기업(基業)을 보전할 희망이 없습니다. 원컨대 , 신하의 예(禮)로써 뵈옵고자 합니다” 하니 ,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에 신유(辛酉)에 뭇 신하들이 아뢰기를 ,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땅에는 임금이 둘이 없사오니 ,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으면 백성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원하옵건대 , 신라왕의 청을 들어주옵소서” 하였다. 임신(任申)에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서 재신(宰臣)과 백관을 모으고 이르기를 , “짐(朕)이 신라와 서로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을 맺어 두 나라가 각기 사직(社稷)을 보전하여 영원히 잘 지내기를 바랐었는데 이제 신라왕이 굳이 신하로 일컫기를 청하며 , 경(卿)등도 역시 옳다고 하므로 짐이 마음으로는 부끄럽게 여기나 의리로써 굳이 거절하기가 어렵다” 하고 , 이에 김부(金傅)의 뜰 아래서 뵈옵는 예(禮)를 받으니 뭇 신하들이 칭하(...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19] 고려사절요 태조 을미18년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22] 신라관련지명(중국고금지명대사전)
금성은 금성군(金城郡)으로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옛 난주(蘭州)와 서영(西寧)의 두 주(州)를뜻한다.
또한 금성현(金城縣)은 감숙성(甘肅省) 고란현(皐蘭縣) 西南이라고, 중국지명대사전 543쪽에 기록되어 있다.
계림(鷄林)은 옛 신라의 이름이며,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 9년에 시림(始林)이라 했으며, 감숙성(甘肅省) 성현(成縣) 西南으로 되어있다.
경주(慶州)는 수나라 때 다시 찾아 홍화군(弘化郡)이라 했다. 당나라 때에는 안화군(安化郡)이라 했다가 다시 순화군(順化郡)이라 했다. 그후 다시 찾아 경주(慶州)라 했으나, 송나라는 경주안화군(慶州安化郡)이라 했다. 그후 승격시켜 경양부(慶陽府)라 했는데, 그곳은 감숙성 경양현(慶陽縣)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24]
(위) 鷄林地 전경
(아래)닭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는 鷄山(鷄峯山)을 배경으로 찍음
8月05日:新羅의 鷄林地
이곳 甘肅省 成縣은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成縣에 있는‘杜甫祠堂’을 찾이갔다. 杜甫祠堂을 지키던 官吏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뽕나무가 많이 있었고 누에를 쳐서 비단을 만든 곳으로 有名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農地의 개간으로 뽕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또한 이곳에는 鷄山(鷄峯山)이라고 하는 산이 있는데 닭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으며, 이곳이 곧 新羅의 鷄林地 임을 證明하고 있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24] 사진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28] 처음에 신아는 진나라 유민이 마한의 동쪽으로 피난와서 마한 왕이 말씨도 비슷하고 해서 동쪽 땅을 떼어 주어 살게했는데 진한이라고 이름하여 살게 된 것이 신라라고 중국사서 의 동이전 신라편에 기곡하고 있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31] 그러니 신라는 대륙에서 망할 때 까지 있었는데 고려가 건국하고 망했을 때 대대적으로 귀족들이 한반도로 이주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32] 그러니 신라의 입국설은 한반도 경주 지역의 신화를 많이 건국설에 반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32] 짬뽕이 된 것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37] 제가 생각하는 신라의 강역은 한반도의 서쪽은 옛 조선 단국의 후신인 마한이 있었고 그 마한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고 맀었고 신라는 감숙성에 진나라가 있는 옆에 조그맣게 있었을 것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38] 나중에 마한(단국 최후의)이 망하면서 신라에 편입 되었을 것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39] 한반도의 서해 쪽은 바다건너 백제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다고 보여집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40] 백제는 요서를 점령하였으므로 요동에서 신라와 고구려 백제가 국경을 맞대고 있었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41] 하지만 요즘처럼 철창사가 있는 국경도 아니고 그냥 초원이나 산을 경계로 하였다고 보여지며 어느 지역백성이 누구에게 군역이나 노역 세금을 바치는가에 의해서 왕권이 유지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44] 그래서 한반도 지금의 경주는 엄밀히 말하자면 국적을 알 수 없는 흉노의 세력이며 고구려의 후예이며 고조선의 후손들입니다. 그저 세금바칠 주체도 없고 필요도 없는 먼 변방이었습니다.
고려가 건국할 때까지 경주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47]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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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50] 사진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51] 파일: 2014연구논총_통일신라시대울산항.pdf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52] 파일을 잘라서 올릴려고 했는데 잘 안됨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52] 오늘 강의 마칩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5:52] 안능쉬야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6:37]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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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6:41] 사진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6:53] 이 이야기는 한마디로 7세기 이후에는중원에 당나나라와 그 옆에 신라라는 나라가 가장 대표적인 국가인데 신라가 더 살기 좋고 당나라는 정복심이 많은 나라라고 인식되고 있음 . 즉 신라는 당나라와 함께 대륙을 2분한 나라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7:05]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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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7:07] 신라가 감숙성에 있었다면 이곳에는 양이 엄청나게 많이 사육되고 이있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7:07] 사진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7:08] 사진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7:08] 이 대사에도 엄청난 비밀이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7:09] 하서인이 신라에 온 것은 하서(감숙성)근처에 신라가 있었기 때문이지 한반도 경주가 뭐 이웃집이라고 그깟 요술을 부리기 위해 이 먼곳까지 왔을 까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7:10] 사진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7:45] 끝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7:46] 함께 첨부한 PDF파일을 꼭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