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자 기” 10년 넘는 시간을 함께하는 이웃이 올 설에도 “배 를 선물했다. 나는 매년 받아 먹기만 할 뿐 인데 이웃은 추석과 설날이면, “사과 줄까? 배 줄까 하며 묻는데 나는 당당하게 “배 요 하고 대답한다. 나의 대답이 끝나면 혼자 들기도 벅찬 “배 상자를 집 앞에 내려 놓고 가는데, 배나 사과는 직접 농사 지은 것도 아니고 사람 좋은 이웃은 친척이나 친구 고마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려고 농수산물 시장까지 가서 수십 상자를 사 오는 것이다.
남에게 베푸는 것이 꼭 돈이 많아서가 아니고 고마움과 정이 베풀게 한다는 것 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사람이다. 황금색 공단
보자기에 싸여진 상자를 식탁 위에 얹어놓고 하던 일을 마친 후에 배 상자를 열려고 보자기를 풀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보자기의
감촉이 추억 속으로 나를 끌고 갔다. 불과 30여 년 전만해도 보자기는 가정의 필수품이고 없어서는 안될 귀한 물건 이였고 예쁜 무늬의 보자기는 머리에 두르기도 하고 목에 둘러 모양을 뽑냈고 추위도 막아 줬다.
좀더 추억 앞으로 가면 책가방이 없던 시절에는 보자기가 책가방을 대신했으니 지금 내 눈앞에 눈치를 보고 있는 황금색 공단
보자기가 그 때 아니면 2~30년 전에만 태여 났더라면 선물용 배 상자 포장 역할 은 하지 않았을 것 같아 안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쁜 보자기가 늙고 구멍이 나면 손 바느질로 이어 붙여서 이불보따리 싸 놓는 용도로 쓰여 지고 어떤 할머니는 설탕자루와 보자기로 속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해서 나도 의아해 했으니 지금 젊은 사람들은 보자기의 일생에 대하여 생각을 하지 않을 것 이고,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궁상 떤다고 구박 당하고 말 것이다. 우리 딸만해도 그럴 것이 간간히 들어오는 선물이 내용물 보다 보자기가 예쁘고 좋아서 세탁하고 다림질 까지 해서 장롱 밑에 잘 뒀는데, 지난번 이사 때 딸이 물어 보지도 않고 버렸기에 며칠을 속상해 했다.
그렇다고 내가 물건 수집하는 병이 있는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보자기는 아깝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다. 국민학교를 늦은 나이 인 10살에 입학하고도 몸이 약해서 학교 가는 날 보다 결석 하는 날이 많았는데, 보자기에 책과 필통을 싸서 허리에 두르면 왠지
힘이 났었다. 깡통 필통 속에 연필들이 걸을 때 마다 소리를 냈는데 나는 그 소리가 너무 좋아서 일부러 깡총 거리며 걸었다. 여자애들은 책보를 허리에 두르고 남자애들은 어깨에 둘렀는데, 그때의 보자기는 꽃 무늬도 없는 히끄 무래한 면 종류 였는데, 그 때가 아마 3학년 때로 기억나는데, 아버지가 “우단 신발하고 우단 보자기를 사다 주셨다.
우단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두르니 온몸이 따뜻하고 폼이 나 보였다 두 손을 뒤로 해 책보 속에 넣으니 공주가 된 것 같았다.
친구들이 나의 우단 신발과 우단 책 보자기에 부러움을 갖은 것은 물론 이였다. 황금색 보자기가 수 십 년의 추억여행을 한 후 상자를 열어보니 내 머리통 만한 배가 9개 들어 있었다. 9개의 “배를 위하여 공단 보자기를 필두로 ,망치로 때려도 부서지지 않을 법한 종이 상자에, 배 한 개마다 깔고 앉은 방석, 폭신한 깔개, 폭신한 덮게, 빳빳한 종이 이불, 폭신한 이불, 얇은 이불 호청,,, 이렇게 폼 잡고
들어 있었다. “배 9개를 위하여 많은 물질과 인력이 소비 되였다는 생각을 하니 죄 없는 “배 가 원망 스럽기 까지 하였다.
얼마 전에 뭐 은행에서 설날 선물이라고 보내 왔기에, 나 처럼 가난한 사람에게 높고 높은 은행에서 무슨 선물을 보냈을까 하며 열어 봤더니, 치약 8개하고 세수비누 4개가 들어있었다. 그 것도 해외여행 몃 번을 다녀와도 부끄럽지 않을 가방에 종이 상자에 넣어져 있었는데, 내가 이것을 보낸 은행이라면 은행 로고가 찍힌 봉지에 넣어, 은행을 이용해 줘서 감사하다는 편지 글 하나 첨부해서 보내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그랬더라면 같은 물건을 받았어도 기분이 좋았을 것 같다. 선물용 배 상자를 싸서 온 “황금색 공단 보자기가 넉넉치 않았던 시절로 추억열차를 타게 만들어 주었던 기분 좋은 날 이였다. 지난번에 모아 놓았던 보자기는 딸에게 유기 되였지만, 이번 것부터 라도 딸이 찾지 못할 곳에 간직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