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진 * 어느 여교수의 회고록 _ 그런데도 못 다한 말
피천득 선생님 (2/2)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남편은 서울대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남편이 나의 유학을 권했다. 이건 정말 안 된다고 굳게 버텨보려고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남편은 풀브라이트 장학생 시험장에 나를 밀어 넣어놓고는 도망갈까 봐 밖에서 망을 보았다. 서강대였다고 기억하는데, 사실 정말 뜻이 없다면 시험을 안 보면 되는 건데 이 또한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합격하고 말았다. 그렇게 떠난 유학길이었다. 애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에 젖어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인가 선생님이 하와이 대학교 기숙사로 나를 찾아 오셨다. 선생님 품에 안겨서 하염없이 오래오래 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국 본토에 용무가 있어서 왔다가 호놀룰루를 들러 귀국하는 길에 나를 찾으셨던 것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어찌어찌해서 당신이 하와이 대학 기숙사까지 나를 찾아와 안아주고 갔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으셨다. 졸업을 앞두고 이화에 취직시키러 갔던 이야기도 끝까지 안 하셨다. 그렇게나 오랜 세월동안 솔직히 부모보다 더 자주 만나고 지냈는데도, 선생이 10세경에 고아가 되어 어떤 인고의 세월을 살아왔는지에 관한 지극히 사적이고 푸념조의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으셨다.
선생의 내공에는 무서운 데가 있다. 10세경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이 사람 저 사람 손에 맡겨지면서 어떻게 그 험하고도 외로운 세월을 살아냈을까. 1년만 월반을 해도 대단히 영민하다고들 하는데 초등학교 상급 학년을 2년씩이나 뛰어넘고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들어가기 힘들다는 경기중학에 진학했다. 그래도 운이 좋아 이광수, 안창호와 같이 훌륭한 분들의 지도를 받고, 1년씩이나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 생활도 하시고, 상해로 유학을 가서 살아낸 하고 많은 사연들, 말 안 해도 충분히 상상이 된다. 그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승화시켜 마침내 ‘단아함’ 이라는 귀한 선물을 받아 안았다. 선생님은 참 단아한 분이었다.
글은 곧 사람이라고 한다. 선생의 글은 당연히 청아하다. 선생님의 글 중에서도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수필’의 첫 문단을 여기에 싣고자 한다.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한 가지 또 인상적인 대목이 생각난다. 내가 여자로 어렵사리 서울대 교수가 되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주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딱 한 마디만 하셨다. 여자 교수가 드무니까 여기저기서 잡문 청탁이 들어올 텐데 절대로 응하지 말고 오로지 학술 논문만 쓰라고.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교훈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선물이란 내가 많이 갖고 있는 것 가운데서 하나를,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서 받았는데 필요가 없어서, 또 그것도 아니면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모름지기 선물은 내가 몹시 갖고 싶은데도 받을 사람이 너무 귀해서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중한 가르침이어서 마음에 새기고 가능하면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선생의 교훈에 한 가지 더 붙여서 나는 자녀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한다. 누군가에게서 선물을 받으면 반드시 그 선물을 준 사람이 볼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내 선물을 받은 사람이 그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은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절대로 받은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하면 ‘선물’이라는 아름다운 단어가 그 빛을 잃게 된다고.
“금쪽같지?”를 연발하며 정열적으로 강의하시던 영시 수업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선생은 키츠John Keats의 시를, 그 가운데서도 특히 「그리스 항아리에 바치는 송가Ode on a Grecian Urn」를 사랑했다. 항아리에 그려진 남녀는 비록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입맞춤은 못하지만 대신 영원히 젊고 아름답게 남아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항아리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리스 여인에 너무도 일찍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모습을 겹쳐 보았을지도 모른다. 사무치게 그리운 어머니는 아름다운 사진 한 장으로 선생의 책상 위에서 영원히 새파란 청춘으로 선생을 지키고 있었다. 그 옆에는 복건을 쓰고 있는 어리디어린 선생님이 변함없이 서 있었다.
담대한 연인이여, 그대 그녀에 가까이 있으나
결코 그녀에게 입맞춤할 수 없을 것―허나 슬퍼하지는 말라.
그대 뜻은 이루지 못했으나 그녀는 색이 바라지도 않을 터.
그대 영원히 사랑하고, 그녀 또한 영원히 아름다우리.
-키츠, 「그리스 항아리에 바치는 송가」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늙지 않고 영원히 아름다운 어머니 때문에 선생님은 평생 다른 여인은 사랑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눌러도 눌러도 고개를 쳐드는 외로움과 아픔을 선생은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신음소리 같기도 한 어조로 드러내곤 했다. 지금까지도 그 소리가 이따금 내 귓전에서 울린다.
내게는 참으로 이상해서 아직도 가지고 있는 크리스마스카드가 한 장 있다. 봉투에는 280원어치 우표가 붙어 있고, 안에는 ‘전상범 교수 박희진 교수 내외분 피천득’이라고만 쓰여 있다. 소인은 2000년 12월 18일로 찍혀 있다. 그러니까 1910년생인 선생이 90세에 보낸 카드이다. 카드의 그림은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따뜻하게 보듬어 안고 있는 것이다.
이 카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외국에 나가 있지 않을 때는 카드 교환을 하지 않고 늘 찾아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글씨가 워낙 단정한데(영어는 더 그렇다) 이 카드와 봉투의 글씨는 덜 예쁘고, 우편 번호는 숫제 쓰다 말았다. 연세(90세)가 연세인 만큼 약간 흐트러진 듯하다.
나는 이 카드를 보낸 이유를 단정적으로 외로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나는 내 주위를 정리하고 있다. 정리라기보다는 주로 버리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 카드만은 참회하는 의미에서 차마 버리지 못한다. 아무 말도 쓰여 있지 않은 이 카드가 소리 없는 굉음을 내며 내 가슴을 마구 때리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아 있는 일이 또 있다. 결혼하고 나서 셋집을 전전하다 우연찮게 원효로에 작은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둘째를 낳은 무렵이었다. 집을 마련해서 기뻤던 것도 잠시, 이사하고 보니까 동네가 아이들 키우기에 적절치 않아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도 와보시고는 안 되겠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홍대 근처로 집을 보러 가자고 하면서 당신이 몸소 길을 나섰다. 그때는 도로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비가 오면 땅이 질퍽거려 신이 벗겨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심지어는 장화를 신고 다니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이런 길을 선생님이 그 연세에 나선 것이었다. 이 일을 그야말로 꿈엔들 잊을 수 있을 것인가.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선생님의 실천하는 사랑이 아직도 고이 간직되어 있다. 인생은 한 마디로 감격이라는 말이 열 번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의 일이다. 신식인 시아버님이 첫애를 낳았을 때도 그랬듯이 항렬에 구애받지 말고 우리 마음대로 이름을 지으라고 했다. 첫애는 딸이었기 때문에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을 비롯해서 여러 개를 후보로 놓고 고르고 있었는데 결국은 친정어머니가 작명소에서 지어온 것으로 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 이름이래야 아기가 건강하고 좋다니까.
둘째는 아들인데 향기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경훈敬薰’이라고 지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친정어머니의 검열에 걸렸다. 이 이름을 들고 작명소에 갔는데 이번에는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소리를 듣고 왔다. 이 이름으로 부르면 교통사고도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경준敬俊’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그냥 ‘경훈’이라고 부르며 지내고 있는데 하루는 선생님이 “여보, 집에서라도 ‘경준’이라고 부르구려”해서 깜짝 놀랐다. ‘경준’이라고 부르던가, 아니면 성당에 나가던가 해야지 어떻게 그런 소리를 듣고도 무심할 수가 있느냐고 꾸짖었다. 진정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분이었다. 그리하여 ‘경훈’이가 ‘경준’으로 둔갑하는 데는 단 일초도 걸리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집에서는 ‘경준’이로 부르고 있다.
…
또 당신이 많이 망설이다가 드디어 영세를 받기 전에 이따금 “여보, 혹시 죽고 보니까 천당과 지옥이 있으면 어떡할라우?” 하기도 하고, 경치 좋은 곳에 가면 “여보, 천국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라나?” 했다. 이런 때는 순수한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천진난만함이 배어나와 우리도 덩달아 해맑은 미소를 짓게 되었다. 어느덧 선생님이 떠난 지 7년이 지났다. 이제사 조금씩 정신이 들면서 보내드릴 준비가 되는 것 같다.
사람답게 살려면 외로움을 스스로 감당해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끔찍이 사랑해야 한다. 인생은 확실히 험하고 외롭지만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중에서도 몇 사람은 끔찍이 사랑하며, 힘은 들어도 절제하며 살면, 이 고달픈 인생도 단아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선생은 말해주는 것 같다.
나는 누가 어머니가 안 계시다고 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한없이 약해지고 만다. 어머니를 잃었을 때의 나이에 상관없이. 반농담이지만 남편이 열일곱 살에 어머니와 생이별했다는 말에 가슴 한 구석이 무너져 내렸던 기억이 있다. 선생은 그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에 양친을 모두 잃었다. 이는 가슴 한 귀퉁이의 문제가 아니다. 상상조차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세기가량 이토록 아름답게 살고 떠난 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준다고 하겠다.
첫댓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어찌어찌해서 당신이 하와이 대학 기숙사까지 나를 찾아와 안아주고 갔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으셨다. 졸업을 앞두고 이화에 취직시키러 갔던 이야기도 끝까지 안 하셨다. 그렇게나 오랜 세월동안 솔직히 부모보다 더 자주 만나고 지냈는데도, 선생이 10세경에 고아가 되어 어떤 인고의 세월을 살아왔는지에 관한 지극히 사적이고 푸념조의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으셨다.
선물이란 내가 많이 갖고 있는 것 가운데서 하나를,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서 받았는데 필요가 없어서, 또 그것도 아니면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모름지기 선물은 내가 몹시 갖고 싶은데도 받을 사람이 너무 귀해서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중한 가르침이어서 마음에 새기고
사람답게 살려면 외로움을 스스로 감당해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끔찍이 사랑해야 한다. 인생은 확실히 험하고 외롭지만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중에서도 몇 사람은 끔찍이 사랑하며, 힘은 들어도 절제하며 살면, 이 고달픈 인생도 단아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선생은 말해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