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박물관>
실학자로 알려진 성호 이익의 박물관이다. 안산이 얼마나 학문을 탐색하던 고장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익의 학문적 궤적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성호의 집안과 진주 유씨, 그리고 그 사위 강세황의 인연이 안산의 문화적 뼈대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세황은 바로 김홍도를 키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안산의 정수를 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이런 박물관이 인근에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옆에 식물원이 있어 탐색과 휴식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성지이다.
1. 방문지 대강
명칭 : 성호박물관
위치 : 경기도 안산시
방문일 : 2026.3.21.
입장료 : 없음
2. 둘러보기
그 동안 여러 차례 가서 사진도 찍고 감동하며 둘러보기도 했지만, 글로 옮겨 정리해보기는 처음이다. 이번에 눈에 띈것 삼두회, 콩죽과 된장에 콩나물 밥상을 차려 벗들과 환담을 나누는 시회를 가졌던 이익, 음식과 학문의 만남을 새로 확인한다.
2.1. 성호 이익 소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 팔대조 이계손(李繼孫)이 성종 때 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지내는 등 명문 가문의 후손이다.
증조부 이상의(李尙毅)는 의정부좌찬성, 할아버지 이지안(李志安)은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아버지 이하진(李夏鎭)은 사헌부대사헌에서 사간원대사간으로 환임(還任)되었다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 때 진주목사로 좌천, 다시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
1681년 10월 18일에 아버지 이하진과 후부인 권씨(權氏) 사이에 운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682년 6월에 전부인 이씨(李氏) 사이의 3남 2녀와 후부인 권씨 사이의 2남 1녀를 남긴 채 55세를 일기로 유배지 운산에서 사망하였다.
아버지를 여읜 뒤에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리(瞻星里)로 돌아와, 어머니 권씨 슬하에서 자랐다. 첨성리는 행정적으로 경기도 광주부에 속해 광주 첨성리로 일컬어졌으나, 이른바 비래지(飛來地)로서 광주에서 과천·금천을 거쳐 있는 안산군내에 있어 흔히 안산의 첨성리로 불려졌다.
10세가 되어서도 글을 배울 수 없으리만큼 병약했으나, 더 자라서는 둘째 형 이잠(李潛)에게 글을 배웠다. 25세 되던 1705년 증광시에 응했으나, 녹명(錄名)이 격식에 맞지 않았던 탓으로 회시에 응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다음해 9월에 둘째 형 이잠은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는 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17, 18차의 형신(刑訊) 끝에 47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이익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과거에 응할 뜻을 버리고 평생을 첨성리에 칩거하였다. 바다에 가까운 그 고장에는 성호(星湖)라는 호수가 있어서 이익의 호도 여기에 연유되었고, 그 고장에 있던 이익의 전장(田莊)도 성호장(星湖莊)이라 일컬어졌다.
이익은 여기에서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 사령(使令)과 기승(騎乘)을 이어, 재야의 선비로서 일평생 은둔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셋째 형 이서(李漵)와 사촌형 이진(李溍)과 종유(從遊)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35세 되던 1715년에 어머니 권씨마저 여의어 복상(服喪)을 마치고서는 노비와 집기를 모두 종가(宗家)로 돌려보냈으나, 형제자질에 대한 은애(恩愛)가 지극해 실제로는 일가의 지주가 되었다. 47세 되던 해에 조정에서 이익의 명성을 듣고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가세는 퇴락되었고, 이익 부자의 오랜 질역(疾疫)은 쇠운을 재촉하였다. 64, 65세 때에 이미 뒷잔등의 좌달(痤疸)이 악화되었고, 70세가 넘어서는 일찍이 괴과(魁科)로 급제해 예조정랑·만경현감을 지낸 외아들 이맹휴(李孟休)마저 오랜 병고 끝에 죽었으며, 70세 후반기에 들어서는 반신불수가 되어 기거마저 불편할 지경이었다.
그 동안에 가산도 탕진되어 만년에는 한 명의 고노(雇奴) 외에는 송곳을 세울 만한 전지도 없으리만큼 영락하였다. 83세 되던 1763년(영조 39) 조정에서는 우로예전(優老例典)에 따라 이익에게 첨지중추부사로서 승자(陞資)의 은전을 베풀었으나, 그 해 12월 17일 오랜 병고 끝에 죽었다.
유해는 선영이 있는 첨성리(현재 경기도 안산시 성포동)에 안장되었다.
문인 안정복(安鼎福)은 이익의 인품에 대해 “강의독실(剛毅篤實) 이것은 선생의 뜻이요, 정대광명(正大光明) 이것은 선생의 덕이요, 선생의 학은 정심굉박(精深宏博)하고, 그 기상은 화풍경운(化風景雲)이요, 그 금회(襟懷)는 추월빙호(秋月氷壺)이다.”라고 술회하였다.
이익의 학문은 일문에 이어져서 준재가 많이 배출되어, 아들 이맹휴는 『예론설경(禮論說經)』·『춘관지(春官志)』·『접왜고(接倭考)』 등을 남기고, 손자 이구환(李九煥)은 조업(祖業)을 계승하였다.
그 위에 종자(從子) 이병휴(李秉休)는 예학으로, 종손(從孫) 이중환(李重煥)은 인문지리로 이름을 남기고, 이가환(李家煥)은 정조의 은총을 받아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천주교를 신앙해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 때에 옥사하였다.
문인으로 두드러진 자로는 윤동규(尹東奎)·신후담(愼後聃)·안정복·권철신(權哲身) 등이 있어, 당대의 학해(學海)를 이루어 그 흐름을 정약용(丁若鏞)에게까지 미쳤다.
증조부 이상의는 일찍이 이수광(李睟光)과 더불어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다녀온 일이 있고, 이익의 딸이 이수광의 후손과 결혼한 것으로 보아 이익·이수광의 양가는 세교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익이 첨성리에 칩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이하진이 1678년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에 청제(淸帝)의 궤사은(饋賜銀)으로 사 가지고 온 수천 권의 서적 때문이었다.
이익은 선현의 언행을 샅샅이 기억하고 일찍부터 시나 문을 잘 외었다. 『맹자』·『대학』·『소학』·『논어』·『중용』·『근사록』 등을 읽고, 다시 『심경(心經)』·『역경』·『서경』·『시경』을 거쳐 정주(程朱)와 이황(李滉)의 학문을 탐독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익의 학문은 이렇듯 철저한 유교적 기반 위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여러 경서(經書)에 대한 질서(疾書)를 지어내고, 주자(朱子)의 『근사록』 처럼 이황의 언행록인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찬저(撰著)하기도 하였다.
이익의 학문의 체(體)는 어디까지나 경학에 두어졌음에도 사회현실에 비추어 보다 더 긴요하고 절실한 것은 경세치용의 학으로 간주하였다.
이익은 당시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서학의 수용으로 세계관·역사의식을 확대, 심화시켜갔고, 보다 더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방식을 체득할 수가 있었다. 이익의 여러 ‘이단(異端)’에 대한 자세를 볼 때 윤리면에는 너그러웠지만, 신앙 자체는 거부적인 견해를 취하였다.
그 점에서는 새로 전래, 유포되던 천주교에 대해서도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익은 정통적인 유학자에서 벗어남이 없었다.
이익은 이교배척, 폐전론(廢錢論)·억말책(抑末策)의 제의, 남녀관 등에서 정통유학자로서의 한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사민평등의 인간관·신분관·직업관에서 근대적인 사회에로 한 걸음 다가섰음을 엿볼 수 있다.
저서로는 『성호사설』·『곽우록(藿憂錄)』·『성호선생문집』·『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사칠신편(四七新編)』·『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과 『사서삼경』·『근사록』·『심경』 등의 질서, 『이자수어』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4. 관람 후
바로 옆의 식물원이 주차장을 중심에 두고 이어져 있다. 이곳도 무료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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