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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가서봉(哥舒棒)
정의
조선시대 노부(鹵簿) 행렬에 편성된 의장용 도구.
개설
‘노부’는 왕이 외부로 행차할 때 동원되던 의장(儀仗) 행렬을 말한다. 궁궐 안에서 시행될 때는 ‘의장’이라 불렀다. 왕의 노부는 그 규모에 따라 대가(大駕), 법가(法駕), 소가(小駕)로 구분되었다. 왕 이외에 왕비, 왕세자, 왕세손의 의장도 있었다. 노부 행렬에는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각종 깃발, 부채, 덮개, 병기, 악기 등 다양하고 화려한 의장 용품이 사용되었다. 가서봉은 이러한 의장 용품 가운데 하나로, 노부에 참여한 군사들이 좌우로 나뉘어 들고 가는 몽둥이를 가리킨다.
연원 및 변천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따르면, 가서봉은 웅골타자(熊骨朶子), 표골타자(豹骨朶子)와 함께 중국 수(隋)나라에 기원을 둔 의물(儀物)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왕의 노부에 편성되었다. 대개 20개가 동원되었는데, 서경과 남경으로 순행(巡幸)을 나갔다가 궁궐로 돌아오는 왕을 영접하는 경우에는 10개가 배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대가 노부에 10개, 법가 노부에 6개, 소가 노부에 4개가 사용되었다. 왕의 가마인 어연(御輦) 앞에, 다른 의장과 함께 좌우로 나뉘어 진열되었다. 군사 1명당 1개의 가서봉을 들고 행렬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군사는 홍의(紅衣)에 피모자(皮帽子)를 착용하였다.
세종대에 경창부윤(慶昌府尹)정척(鄭陟)이 새로이 제정한 왕세자의 대가노부에도 가서봉 2개가 포함되어 있다[『세종실록』 30년 3월 24일]. 그러나 성종 연간에 간행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왕비 의장이나 왕세자 의장에는 가서봉이 포함되지 않았다. 한편 1789년(정조 13) 10월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으로 옮길 때는 가서봉 4개를 다른 의장과 함께 대여(大輿) 앞에 배치하였다[『정조실록』 13년 10월 5일].
형태
조선시대에 사용된 가서봉은 그 시기에 따라 형태 및 제작 방법이 약간 달랐다. 조선전기의 제작법은 다음과 같다. 붉게 칠한 장대 위에 쇠꼬챙이를 연결하여 동전(銅錢) 22개를 꿰고, 그 위를 자주색 비단 수건으로 덮어씌운다. 그런 다음 다시 수건의 하단을 자주색 비단 띠로 묶고 그 양쪽 끝을 드리워 만들었다. 그에 비해 조선후기에는 쇠꼬챙이 대신에 직사각형 모양의 널판을 장대 위에 연결한 뒤 비단 수건을 씌워 제작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 행차에 대한 연구-의궤반차도와 거동기록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가이(斝彛)
정의
국가 제사 의례에 사용된 제기(祭器)로 술잔 겸 물 그릇으로 사용된 그릇.
개설
가이는 고대로부터 국가 제례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여섯 종류의 이기(彝器) 중 하나로서, 몸체 표면에 벼 이삭을 새기거나 그려 넣은 술동이를 말한다. ‘가(斝)’는 벼 이삭을 뜻하는 ‘가(稼)’와 통용되며, ‘가이(斝彝)’는 ‘가이(稼彝)’와도 통용된다. 가이는 황금 눈[黃目]으로 장식한 황이(黃彝)와 짝을 이루어 조선시대의 종묘(宗廟), 경모궁(景慕宮), 육상궁(毓祥宮), 저경궁(儲慶宮)에서 올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납일(臘日)에 지내는 오향제(五享祭) 중 가을 제사와 겨울·납일 제사에 사용되었다. 가을 제사에서는 달밤에 거울로 달을 비춰 맺힌 이슬을 모아 만든 맑은 물인 명수(明水)를 담고, 황이에는 검은 기장에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빚은 향기 나는 술인 울창주(鬱鬯酒)를 담았으며, 겨울과 납일의 제사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황이에 명수를 담고, 가이에 울창주를 담았다.
연원 및 변천
한국과 중국에서는 고래로부터 각종 국가 제례를 거행할 때에 계이(鷄彝), 조이(鳥彝), 가이, 황이, 호이(虎彝), 유이(蜼彝) 등 여섯 종류의 이(彝)를 술과 맑은 물을 담아 두는 제기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각각 그릇 표면에 새겨 넣은 문양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계이는 닭 그림이, 조이는 새 모양이 새겨진 것인데, 그중에서도 봉황이 주로 새겨졌다. 가이는 벼 이삭 모양을 그려 넣었으며, 황이는 황금으로 된 눈 장식을 했고, 호이는 호랑이 그림으로, 유이는 원숭이 그림을 새겨 넣은 그릇이다. 이것들은 제례별로 각각의 수량과 조합을 달리하여 강신(降神) 절차에 사용되는 울창주와 명수를 담았다. 예컨대 오향제를 올리는 규모가 크고 격이 높은 제례일 때, 봄 제사인 사제(祠祭)에서는 계이 1병에 명수를, 조이 1병에 울창주를 담고, 여름 제사인 약제(禴祭)에서는 조이 1병에 명수를, 계이 1병에 울창주를 담았다. 가을 제사인 상제(嘗祭)에서는 가이 1병에 명수를, 황이 1병에 울창주를, 겨울 제사인 증제(蒸祭)에서는 황이 1병에 명수를, 가이 1병에 울창주를 담았다.
이의 운용과 진설(陳設)에 관련된 규정은 중국 고대의 삼례(三禮), 즉 『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와 당대의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 북송대의 『정화오례신의(政和五禮新儀)』와 『예서(禮書)』, 명대의 『대명집례(大明集禮)』 등을 거치면서 단계별로 수정되었고, 조선시대의 국가 제례에는 명대에 최종 확정된 규정이 거의 그대로 수용되었다. 다만, 외형과 제작 규격 등은 각각 독자적인 취사선택과 보완의 과정을 거쳤다.
형태
『조선왕조실록』 의궤, 전례서 등에 나타난 가이의 형태는 크게 2종류이다. 조선전기 문종대에 편찬된 『세종실록』 「오례」 길례서례와 성종대에 간행된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는 몸체에 벼 이삭이 그려지지 않은 가이가, 조선후기 정조대에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와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 등에는 벼 이삭이 그려져 있는 가이가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시기별로 가이의 외형과 제작 규격에 부분적인 변화 및 수정이 가해졌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춘관통고(春官通考)』
각단기(角端旗)
정의
조선시대 노부(鹵簿) 행렬에 편성된, 각단이 그려진 의장용 깃발.
개설
노부는 왕 등의 외부 행차에 동원된 의장(儀仗) 행렬을 가리킨다. 궁궐 안에서 시행될 때는 의장이라고 지칭하였다. 왕의 노부는 규모에 따라 대가(大駕), 법가(法駕), 소가(小駕)로 구분되었다. 왕 이외에 왕비의장, 왕세자의장, 왕세손의장 등도 있었다. 노부 행렬에는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각종 깃발, 부채, 덮개, 병기, 악기 등의 다양하고 화려한 의장용품이 포함되었다. 각단기는 노부에 참여한 군사들이 들고 가는 의장용 깃발로, 각단(角端)이란 상상의 동물이 그려져 있다.
연원 및 변천
각단은 상상 속의 동물로 코 위에 뿔이 있고, 사방 오랑캐의 언어를 알아들으며, 하루 18,000리를 달린다는 말이다. 착한 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방외(方外)의 상세한 일을 밝게 통달하면 글을 받들고 온다고 한다.
조선시대 대가노부(大駕鹵簿)와 법가노부(法駕鹵簿)에 2개, 소가노부(法駕鹵簿)에 1개를 세웠다. 왕의 가마인 어연(御輦) 앞에 다른 의장과 함께 진열되었다. 대가노부의 경우 천하태평기(天下太平旗)를 중앙에 두고 삼각기(三角旗)와 용마기(龍馬旗) 사이에 좌우로 진열되었다. 소가노부의 경우 삼각기와 용마기는 오른쪽에, 각단기는 벽봉기(碧鳳旗)와 함께 왼쪽에 진열되었다. 각단기를 든 군사는 청의(靑衣)에 피모자(皮帽子)를 착용하였다.
세종대에 대리청정을 하는 왕세자의 대가의장에는 2개, 소가의장에는 1개가 포함되어 있으나[『세종실록』 30년 3월 24일], 성종대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왕세자의장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1789년(정조 13) 10월 사도세자묘인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으로 옮길 때 동원된 노부 행렬에 각단기 1개가 다른 의장과 함께 신여(神轝) 앞에 진열되었다[『정조실록』 13년 10월 5일].
형태
사각형의 흰색 명주 바탕에 각단과 운기(雲氣)를 그리고, 청색·적색·황색·백색으로 채색한다. 깃발의 가장자리에는 불꽃 모양의 술을 달았다. 인조대 이후에는 화염각의 색이 홍색으로 통일되었다.『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의 「품목질(稟目秩)」을 보면, 당시 각단기 2개를 제작하는 데 바탕감 백주(白紬) 5폭 20자, 화염각용 홍주(紅紬) 8자 5치, 깃감 흑주(黑紬) 3자 5치, 끈감 홍주 길이 1자 너비 5푼, 바느질용 홍향사(紅鄕絲) 1돈 5푼, 흑향사(黑鄕絲) 5푼, 저사(紵絲) 1돈, 마사(麻絲) 5돈, 황단(黃丹) 1돈, 진분(眞粉) 4냥, 석자황(石紫黃) 5돈, 하엽 5돈, 삼록(三碌) 5돈, 청화(靑花) 1돈, 동황(同黃) 5돈, 반주홍(磻朱紅) 1돈, 송연(松烟) 5돈, 참먹 2정, 편연지(片臙脂) 2편, 아교 5돈, 부레 2냥, 생모시 1돈, 백반 5돈, 주홍 1냥, 쇠심줄 1냥, 백향사(白鄕絲) 2돈이 필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 행차에 대한 연구-의궤반차도와 거동기록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간(干)
정의
전투를 할 때 손에 쥐고 몸을 방어하는 데 사용하는 방어구.
개설
원래는 칼, 창, 화살 따위를 막는 데 쓰이는 방어구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군례에 참여하는 군사들이 의장용으로 소지하기도 하였다. 영조대에는 축소 제작되어, 장사를 지낼 때 죽은 사람과 함께 매장하는 부장품의 일종인 명기(明器)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1758년(영조 34) 편찬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는 명기로 사용된 간을 소개하고 있다. 명기는 부장품으로 매장하는 기물(器物)을 말한다. 명기용 간은 유자나무의 일종인 가목(椵木)을 깎아서 만들었다. 길이는 3촌이고 너비는 1촌 5푼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세종실록』「오례」에 실려 있는 장방패(長防牌)와 비슷하다. 전면에는 다섯 가지 색깔로 짐승의 머리를 그렸다. 부장품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방어용 병기보다 훨씬 축소된 크기로 제작되었다.
형태
『세종실록』「오례」에는 장방패와 원방패(圓防牌), 두 가지 종류의 간이 소개되어 있다. 장방패는 직사각형 모양에 가까우며 길이는 5척 6촌이고 너비는 2척 2촌이다. 원방패는 지름 3척의 원반 모양으로, 테두리는 철 띠를 둘러 보강하였다. 두 방패 모두 나무로 제작하였으며 안쪽에는 흰 베를 두르고 표면은 소가죽으로 쌌다. 그리고 그 위에는 짐승의 머리를 그렸는데, 중군(中軍)은 적색, 좌군(左軍)은 청색, 우군(右軍)은 백색으로 채색하였다. 방패 전면의 짐승 그림은 아군의 사기를 높이거나 적을 위협하기 위한 용도로 그렸다. 1474년(성종 5) 편찬된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장방패는 주로 보병이 소지하였다. 무겁고 길기 때문에 대개 지면에 고정하여 적의 화살을 막거나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사용하였으므로 입방패(立防牌)라 불리기도 하였다[『세종실록』 3년 6월 9일]. 원방패는 보병과 기병 모두 사용하였는데, 장방패에 비해 방호력은 떨어지지만 소지하기가 간편한 장점이 있었다. 마상(馬上)의 기병을 놀라게 하는 데도 이용되었다[『세종실록』 3년 6월 9일].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국방군사연구소 편, 『한국무기발달사』, 국방군사연구소, 1994.
갑(甲)
정의
조선시대 노부(鹵簿) 행렬에 참여한 군사들이 착용한 각종 갑옷.
개설
노부는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동원되던 의장(儀仗) 행렬을 말한다. 궁궐 안에서 시행될 때는 ‘의장’이라 불렀다. 왕의 노부는 그 규모에 따라 대가(大駕)·법가(法駕)·소가(小駕)로 구분되었으며, 왕 이외에 왕비·왕세자·왕세손 등의 의장도 있었다. 노부 행렬에는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각종 깃발·부채·덮개·병기·악기 등 다양하고 화려한 의장 용품이 사용되었다. ‘갑’은 이러한 노부에 참여한 다양한 병종의 군사들이 착용한 각종 갑옷을 가리킨다.
연원 및 변천
갑옷의 표면에 비늘 모양의 미늘[札]을 부착해 방호재로 사용하는 갑옷을 총칭하여 찰갑(札甲)이라고 한다. 찰갑은 미늘의 재료에 따라 다시 세분되는데, 철로 만든 철갑(鐵甲), 가죽으로 만드는 피갑(皮甲), 종이로 만드는 지갑(紙甲)이 있다. 수은갑은 철제 미늘을 사용하였으므로 철갑에 속한다. 궐내에서 행해지는 정지급성절망궐행례의(正至及聖節望闕行禮儀)에 참여하는 내금위(內禁衛) 군사들이 주로 착용하였다.
조선시대에 철엽아갑(鐵葉兒甲)이라고 부른 갑옷은 찰갑과 철갑의 속성을 모두 가진 수은갑과 유엽갑 같은 갑옷을 가리킨다. 수은갑과 같은 철갑은 웬만한 화살이 관통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호력이 뛰어나며, 제작 비용도 저렴하였지만 무거운 데다가 철로 제작된 미늘과 미늘을 이어주는 가죽끈이 쉽게 닳아 못쓰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조선전기 이후에는 찰갑의 한 종류로 가죽으로 제작된 미늘을 사용하는 피갑의 비중이 점차 높아졌다. 그러나 미늘 제작에 소모되는 가죽의 값이 날로 비싸져 조달이 여의치 않게 되자, 농우(農牛)를 도살하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폐단도 함께 발생하였다. 따라서 스스로 마련하는 피갑에는 소가죽과 말가죽의 사용을 엄금하거나 소 도둑질을 엄금하는 등의 조치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쇄자갑은 원래 서역에서 비롯되어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도입 시기는 확인할 수 없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시대부터 제작되었으며. 세종대 숙위군사(宿衛軍士)가 착용하는 쇄자갑의 품이 몹시 좁고 파손이 심하여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가 매우 민망하니 급히 수선하라는 기록이 있다[『세종실록』 13년 3월 7일]. 행행(行幸)이나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 호위하는 군사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쇄자갑의 도련과 소매에 홍염피(紅染皮)를 둘러 장식하기도 한다.
형태
『세종실록』 「오례」에는 총 6종의 갑옷을 설명하고 있는데 차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은갑(水銀甲)은 철제 미늘[札]을 이어 만든 갑옷의 일종으로, 철제 미늘의 표면을 수은으로 도금하였기 때문에 수은갑이라고 한다. 속칭은 은갑(銀甲), 백철갑(白鐵甲), 명갑(明甲)이다. 수은갑의 전체 형태는 위아래가 붙어 있는 두루마기형으로, 앞이 트여 있어 옷깃을 몇 개의 옷고름으로 묶는 구조이다. 수은갑의 철제 미늘은 표면에 상하 좌우로 각각 몇 개의 구멍을 뚫고, 이를 가죽끈을 사용하여 종횡으로 묶어 연결한다.
유엽갑(柳葉甲)도 철제 미늘을 이어 만든 갑옷의 일종이다. 철제 미늘의 표면에 검은색 옻칠[黑漆]을 하였는데, 이 미늘의 모양이 버드나무 잎과 비슷했으므로 유엽갑이라고 하였다. 유엽갑의 철제 미늘은 표면에 상하 좌우로 각각 몇 개의 구멍을 뚫고, 이를 그을린 사슴가죽끈을 사용하여 종횡으로 묶어 연결한다. 전체적인 구조와 형태는 수은갑과 동일하다.
피갑(皮甲)은 가죽으로 만든 미늘을 이어 만든 갑옷으로, 전체적인 구조와 형태는 수은갑과 동일하다. 피갑의 가죽 미늘은 표면에 상하 좌우로 각각 몇 개의 구멍을 뚫고, 이를 그을린 사슴가죽끈을 사용하여 종횡으로 묶어 연결한다. 그리고 이 가죽 미늘의 표면에는 검은색 옻칠을 한다.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禮)』에는 미늘의 재료로 돼지가죽이 사용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사슴, 노루, 돼지, 소, 말 등 다양한 짐승의 가죽이 쓰였다.
쇄자갑(鏁子甲)은 철사(鐵絲)로 작은 고리인 소환(小環)을 만들고 이를 꿰어서 만든 갑옷이다. 속칭은 쇄아갑(鏁兒甲), 쇄자갑(鎖子甲), 환갑주(環甲冑)이다. 전체 형태는 위아래가 붙어 있는 두루마기형으로, 수은갑과 유사하다. 쇄자갑은 철환(鐵丸)과 철환이 잇달아 연결되어 있는 구조로, 상대의 무기가 하나의 철환에 닿으면 연결된 여러 개의 철환들이 작용하여 창이나 화살의 예리한 부분을 더 이상 관통하지 못하도록 막아 준다.
경번갑(鏡幡甲)은 철로 만든 미늘[鐵札]과 철환(鐵環)을 사이사이에 섞고 이를 연결하여 만든 갑옷이다. 전체 형태는 위아래가 붙어 있는 두루마기형으로, 수은갑과 유사하다. 경번갑의 구조는 철제 미늘이 달린 수은갑, 유엽갑 등의 철갑과 철환으로만 연결된 쇄자갑의 혼합 형태이다. 주로 가슴과 등 부분에는 철제 미늘을 엮고 팔과 다리 부분에는 철환을 엮는다.
지갑(紙甲)은 여러 겹으로 접은 종이로 만든 미늘을 이어 만든 갑옷이다. 전체적인 구조와 형태는 수은갑과 동일하다. 지갑의 종이 미늘은 표면에 상하 좌우로 각각 몇 개의 구멍을 뚫고, 이를 사슴가죽 끈을 사용하여 종횡으로 묶어 연결한다. 그리고 이 종이 미늘의 표면에는 검은색 옻칠을 한다. 지갑 제작에 사용되는 종이는 과거 시험에 낙방한 시험지를 회수한 뒤 군기감(軍器監)으로 보내 조달하기도 하였다.
1474년(성종 5) 편찬된『국조오례서례』「병기도설(兵器圖說)」에도 거의 비슷한 내용을 기재하였으나, 2개의 갑옷을 추가로 설명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두정갑(頭釘甲)은 쇠나 가죽으로 만든 미늘을 갑옷의 안쪽에 대고 쇠못으로 박아서 만든 갑옷이다. 옷감의 색깔과 장식을 달리하여 두 가지 종류로 제작하였다. 하나는 갑옷의 옷감을 청색 무명으로 만들고, 안쪽에 철제 미늘을 조각조각 엮어서 붙인 다음 그 위에 철두정(鐵頭釘)을 별처럼 촘촘하게 박은 것이다. 이것은 짧은 소매에 대략 무릎까지 오는 길이로 갑옷 전체가 두루마기처럼 한 벌로 된 형태이다. 앞이 트여 있는 구조로 양쪽에 6쌍의 끈이 달려 있어 정중앙에서 여미도록 되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갑옷의 옷감을 홍색 비단으로 만들고, 안쪽에 연기에 그을린 사슴가죽을 댄 다음 그 위에 황동두정(黃銅頭釘)을 박은 것이다. 쇠못을 박은 두정갑과 비교해 볼 때, 외양도 훨씬 화려했으며 옷의 전체 형태나 여밈 방식도 다르다. 이런 형태의 두정갑을 구별하여 황동두정갑(黃銅頭釘甲)이라고 불렀다.
두두미갑(頭頭味甲)은 비단으로 된 옷 안쪽에는 그을린 사슴가죽을 대고, 바깥쪽에는 백은색(白銀色)과 황동색(黃銅色) 두정(頭釘)을 교차하면서 박아 제작한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갑신(甲身), 허리 이하 대퇴부를 보호하기 위한 갑군(甲裙), 사타구니를 보호하기 위한 골미(鶻尾)로 구분할 수 있다. 갑옷 가장자리의 상당 부분에는 선을 가늘게 두르고 그곳에 털을 붙인다. 옷감의 색깔과 장식을 달리하여 두 가지 종류로 제작하였다. 하나는 갑옷의 옷감을 청색 비단으로 만들고 오색조대(五色組帶)를 두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갑옷의 옷감을 홍색 비단으로 만들고 홍광조대(紅廣組帶)를 두르는 것이다. 태종대 두두미갑을 제작한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14년 11월 4일].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박가영, 「조선시대의 갑주」,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계이(鷄彛)
정의
국가 제사 의례에 사용된 제기(祭器)로 술잔 겸 물 그릇으로 사용된 그릇.
개설
계이는 고대로부터 국가 제례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6종의 이기(彝器) 중 하나로서, 몸체 표면에 닭 모양을 새기거나 그려 넣은 술동이를 말한다. 계이는 새, 그 중에서도 봉황 모양을 새겨 넣은 조이(鳥彝)와 짝을 이루어 조선시대의 종묘(宗廟), 경모궁(景慕宮), 육상궁(毓祥宮), 저경궁(儲慶宮)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납일(臘日)에 올리는 오향제(五享祭) 중 봄 제사와 여름 제사에 사용되었다. 봄 제사에서는 계이에 달밤에 거울로 달을 비춰 맺힌 이슬을 모아 만든 맑은 물인 명수(明水)를 담고, 검은 기장에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빚은 향기 나는 술인 울창주(鬱鬯酒)를 조이에 담았으며, 여름 제사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조이에 명수를 담고, 계이에 울창주를 담았다.
연원 및 변천
한국과 중국에서는 고래로부터 각종 국가 제사를 거행할 때에 계이, 조이, 가이(斝彝), 황이(黃彝), 호이(虎彝), 유이(蜼彝) 등 6종의 이(彝)를 강신(降神) 절차에 사용되는 울창주와 명수를 담아 두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각각 그릇 표면에 새겨 넣은 문양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가이는 벼 이삭 모양을 그려 넣었으며, 황이는 황금 눈[黃目]으로 장식을 했고, 호이는 호랑이 그림으로, 유이는 원숭이 그림을 새겨 넣은 그릇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제례에서 오향제를 올리는 규모가 크고 격이 높은 제례, 즉 대사(大祀) 및 중사(中祀) 중에서도 보다 중요하고 격이 높은 일부 제례에서만 사용되었다. 두 종류씩 짝을 이루어 계절별로 역할을 바꾸면서 활용되었다.
오향제 중에서도 봄 제사인 사제(祠祭)에서는 계이에 명수를 담고 조이에 울창주를 담았으며, 여름 제사인 약제(禴祭)에서는 이와 반대로 조이에 명수를, 계이에 울창주를 담았다. 또한 가을 제사인 상제(嘗祭)에서는 가이에 명수를, 황이에 울창주를 담았으며, 겨울 제사인 증제(蒸祭)와 납일의 제사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황이에 명수를, 가이에 울창주를 담았다.
형태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전례서 등에 수록된 계이의 그림은 전기와 후기에 큰 변화 없이 동일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오행사상에 의하면 닭은 동방의 동물로서 인(仁)을 상징하며, 봄은 동방과 상응하므로, 봄 제사에서 명수를 담는 데 사용하는 이기로는 봄, 동방, 인을 상징하는 닭을 새겨 넣은 계이를 제작하여 활용한 것이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춘관통고(春官通考)』
고자기(鼓字旗)
정의
조선의 의장물 중 하나로 ‘고(鼓)’ 자를 써 넣어 왕의 군 지휘권을 표현한 기.
개설
군에 대한 명령권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데, 고자기는 이러한 군왕의 군령권을 드러내는 의장기 중 하나였다. 본래 고대 중국과 한반도에서 북[鼓]은 군의 진군을 명령하는 도구였고, 반대로 퇴각을 의미할 경우는 징[金]을 사용하였다. 고자기는 이러한 북의 기능을 기로 표현하여 왕의 군령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장기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의 의장은 고려시대의 의장을 참조하고, 여기에 중국 역대 제도 및 명나라의 의장제를 참고하여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려 의종대의 의장을 기록한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고자기의 존재가 보이지 않고, 중국의 전적에서도 고자기의 존재가 보이지 않아 정확한 유래를 확인하기 어렵다.
형태
조선의 의장물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는 『세종실록』「오례」 및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참조해 보면, 고자기는 붉은 바탕의 사각기 안에 ‘고(鼓)’ 자를 써 넣었다. 고자기는 왕의 의장(儀仗) 및 노부(鹵簿)로 활용될 때 항상 영자기(令字旗) 및 금자기(金字旗)와 함께 사용되었는데, >영(令) 자를 써넣은 영자기는 군령권 전체를 드러내는 기였고, 금(金) 자를 써넣은 금자기는 고자기와 반대되는 퇴각명령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자기 등의 깃발은 군의 지휘권을 상징하는 장치로만 사용되었고, 실제 군의 지휘 기능은 다른 장치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자기는 의장 규모와 상관없이 항상 1기만 사용되었다. 또 대한제국 의장기 중에도 금고기가 있는데 모양은 삼각형의 형태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기는 비단 군대나 의장뿐만이 아니라 일반 민의 생활에서도 흔하게 사용되던 것이었다. 특히 마을공동체에서 공동으로 노동이나 놀이를 할 때 이러한 기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다만, 고자기 등은 왕의 군령권을 표현하는 것이니만큼, 일반인들의 생활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구망(句芒)
정의
오행(五行) 중 목(木)을 다스리고, 봄과 동쪽을 주관하는 신령.
개설
구망은 오행 중 목(木)을 관리하는 신령이기 때문에 ‘목정(木正)으로 별칭되는데, 이때 목정의 ‘정(正)’은 우두머리[官長]를 의미한다. ‘구룡(句龍)’으로도 칭해졌으며, 수목 및 만물의 생육도 함께 주관하였다. 조선시대에 국가 제례 중 중사(中祀)로서 강우를 기원하면서 올리는 제례인 우사(雩祀)의 여섯 신령, 즉 구망·축융(祝融)·욕수(蕨收)·현명(玄冥)·후토(后土)·후직(后稷)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내용
구망의 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전한다. 즉 구망은 오방신 중 서쪽을 맡은 백제(白帝) 소호씨(少昊氏)의 후예로서, 인간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한 인면조신(人面鳥身)이었고, 두 마리의 용을 타고 다니는 신묘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목(木)과 봄을 다스리는 상제(上帝)인 태호(太昊) 복희씨(伏羲氏)를 보좌하여 공덕을 쌓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봄과 목의 신령으로 승격되고 제향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소호씨는 오제(五帝)의 첫 번째 군주인 황제(黃帝)의 아들로서 동이족(東夷族)의 시조라고도 전해진다.
다른 설에 의하면 오제의 세 번째 군주인 제곡(帝嚳)을 보좌하는 오행관(五行官)의 하나로서 목과 봄·동쪽을 다스렸고, 그로 인해 목정으로 칭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제곡을 보좌한 오행관은 구망 외에도, 화(火)와 여름·남쪽을 다스리는 관리인 화정(火正) 축융, 금(金)과 가을·서쪽을 다스리는 관리인 금정(金正) 욕수, 수(水)와 겨울·북쪽을 다스리는 관리인 수정(水正) 현명, 토(土)와 중앙을 다스리는 관리인 토정(土正) 후토 등이었다.
조선초기에 국가 제례 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이들 오정(五正)은 오곡(五穀)의 신인 후직과 함께 강우를 기원하며 올리는 우사(雩祀) 제례의 봉행 대상이 되었다. 관련 의례로는 ‘우사의(雩祀儀)’, ‘친향우사단기우의(親享雩社壇祈雨儀)’, ‘우사단기우의(雩祀壇祈雨儀)’ 등이 있다.
우사의 여섯 신령 중 오행을 주관하는 다섯 신령은 제곡을 보좌하는 오정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설에 의하면 구망은 목과 봄을 다스리는 태호 복희씨를, 축융은 화와 여름을 다스리는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를, 후토는 토와 중앙을 다스리는 황제를, 욕수는 금과 가을을 다스리는 백제 소호씨를, 현명은 수와 겨울을 다스리는 전욱(顓頊)을 각각 보좌한 것으로도 생각되었다. 복희씨, 신농씨, 황제, 소호씨, 전욱은 오행과 오방(五方)을 다스리는 천상의 상제이고, 이들을 보좌하는 오정은 오행과 오방을 다스리는 천상의 상공(上公)으로 지칭되면서, 다섯 상제는 천자의 제향 대상이 되고, 다섯 상공은 제후의 제향 대상이 되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는데, 이에 따라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은 다섯 상공을 국가 제례에 포함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예기(禮記)』